이번에 텔런트 김혁님께서 영화 '슈퍼스타감사용' 에서 맡으실 역할인 양승관이란 선수는 과연 어떤 선수일까?? 궁금증이 계신분을 위해서 양승관선수으 자료가 조금 있어서 알려드립니다.
1982년 인천 프로야구의 원조인 '삼미 슈퍼스타즈'는 '슈퍼스타즈'란 팀명과는 달리 스타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선수단 구성이 열악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중 양승관이란 이름의 외야수는 스타란 이름을 붙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인천지역에서만큼은 누가뭐래도 슈퍼스타였다.
인천 숭의 초등학교시절 야구를 시작해 동인천중,인천고를 나와 인하대를 졸업한 그는 그야말로 인천의 토종 야구스타이다. 특히 동생들인 양후승,양주승 또한 맏형의 유니폼 입은 모습에 반해 숭의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을 정도로 완전한 야구집안이기도하다. 학창시절 형제 3명이 야구선수여서 집안에는 온통 야구장비뿐이었고, 옥상에 그물을 설치해 돌아가면서 티배팅을 하는 통에 이웃으로부터 항의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학창시절부터 야구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특히 창단맴버였던 인하대시절엔 77년 추계대학연맹전타격상(0.452), 78년 추계대학연맹전 타격상겸 최다홈런상, 제5회 부산시장기 전국대학대회 타격상을 차지했을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다.
인하대를 졸업한 후 아마추어 포항제철 팀에 잠시 몸을 담았다가 82년 프로야구가 탄생하면서 많은 인천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고향팀인 인천 삼미 슈퍼스타즈에 창단맴버로 입단하였다.
82년 삼미의 창단 첫해 인천팬들의 바램과는 달리 삼미의 전력은 최약체 전력을 벋어 나지 못했다. 삼미의 초대 감독이었던 박현식 감독도 삼미 선수들의 명단을보고 팀을 맡지 않으려 했을 정도였다. 역시 팀은 연패를 밥먹듯 했고 도깨비팀이라 불리며 꼴찌의 대명사로 악명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선수들 가운데서 유독 빛을 발하는 선수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양승관이었다.
폭발적인 장타력과 정교함, 무엇보다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한 외야수비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이렇다 할 방망이가 없는 팀타선에서 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포수 금광옥과 함께 지킨 크린업트리오가
있었기에 그나마 팀승률 1할을 넘길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외야수비에서 더울 빛을 발했다. 국내 프로야구 선수 중 최고의 어깨를 자랑하며 삼미의 외야를 책임진 것이다. 홈플레이트에서 공을 던지면 그공이 외야 홈런팬스를 직접 넘어갈 정도의 강견이었다. 그와 필적할 만한 선수는 MBC의 신언호 정도였다.
그의 어깨가 얼마나 강했는지에 대한 일화는 지금도 야구장을 찾는 올드팬 아저씨들에게 들을 수 있다. 인천공설운동장에서 해태와 붙을 때 당시 최고의 빠른 발을 자랑하며 도루왕을 석권했던 해태 김일권이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때렸는데 우익수를 보던 양승관이 그 공을 원 바운드로 잡자마자 1루로 총알같이 뿌려 달려오던 김일권을 아웃 시켜버린 것이다. 잘맞은 안타가 양승관의 어깨 때문에 우익수 앞 땅볼이 되어 버렸으니 김일권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당시 김일권은 너무 화가나 자신이 쓰고 있던 헬멧을 바닥에 내팽개쳐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한 그의 외야수비는 '외야수비의 교과서'라고까지 불리 워 졌다. 결국 82년 시즌이 끝난 뒤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외야수부문 수상자가 되어 꼴찌팀의 유일한 자랑거리가 되었다. 올스타전에도 뽑혔고 특히나 인천의 어린이 팬들에게 그의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프로 2년째가 되는 83년은 그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인천야구의 대부 김진영감독의 부임과 장명부와 김진우,임호균의 입단으로 팀은 프로야구팀 다운 면모를 갖추고 삼미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투수 쪽에 장명부가 있었다면 타격에선 양승관이 있었다. 타율 0.302, 9홈런을 기록하며 팀에서 처음으로 3할타자에 올라서는 맹활약을 펼친 것이다.
비록 팀은 초반 선두로 치고 나가다 팀내 불상사와 뒷심부족으로 전,후기 우승을 놓치긴 했지만 당시 삼미의 열풍은 대단했다. 당시 삼미로 팀을 옮겨와 타격코치겸 선수로 뛰던 전 MBC감독 백인천은 양승관의 자질에 홀딱 반해 열성적으로 지도해 타격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특히 후반기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백인천은 이전 MBC감독시절부터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 내야수와 투수를 내주고 양승관을 대려 오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둘사이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린다.
84년 그의 출발은 좋았다. 인천에서 벌어진 삼성과의 개막전에서 시즌 첫 만루홈런을 터뜨리며 팬들을 흥분시켰다. 하지만 그 게임에서 아깝게 연장 10회 9:8로 지고 말았다.이게임은 이번 시즌 삼미의 불운과 양승관의 불운을
예감케 하는 것이었다. 시즌에 들어서 상승일로의 타격감을 자랑하던 도중 프로야구 진기명기에 오래도록 남을 만한 멋진 수비를 펼치다 그만 쇄골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고 만 것이다. 결국 그해엔 36게임밖에 출전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
1985년에도 부상 탓에 7월에야 제대로 게임을 치를 수 있었다. 팀은 청보 핀토스로 간판이 바뀌어 있었다. 62일만에 청보 유니폼을 입고 게임에 출전하자마자 역전 결승 2점 홈런을 터뜨리며 집념의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그의 복귀는 팀에 큰 힘이 되었다. 전기리그를 꼴찌(6위)로 마감한 삼미는 청보로 옷을 갈아입고 분발해 후기리그 4위를 기록했다.
86년엔 야구 해설을 하던 허구연이 청보의 감독으로 왔다. 허구연의 청보호는 시즌 개막과 함께 7연패의 깊은 수렁 속에 빠져 버렸다. 여기서 위기의 청보호를 구하고 초보 감독 허구연에게 첫승을 안겨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한 장본인이 바로 양승관이다. 4월6일 빙그레전에서 8회초까지 8:3으로 리드당하다 8회말 3점을 만회한 후 9회말 양승관이 끝내기 3점홈런을 한희민으로부터 뽑아 9:8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것이다.
타율은 비록 낮았지만 93경기에 출전하며 중요할 때 한방씩 쳐주는 역할을 했다. 쉽게 말해 영양가가 있었다.
87년은 팀의 주장자리까지 맡으며 의욕적으로 출발하였으나 결과는 최악이었다. 연속적으로 찾아온 부상 때문이었다. 전기리그 막판 부상과 신경성 위염으로 은퇴까지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9월초 팀에 다시 합류했다. 하지만 9월27일 삼성전에서 홈으로 슬라이딩을 하다 무릎인대가 늘어나 전치 4주의 부상을 입고 말았다. 당시 양승관의 인터뷰-"겨우 회복해 경기를 할만 하니까 또 다친 걸 보니 올해는 억세게 운이 나쁜 해인가 보다. 일찌감치 개인훈련에 들어가 내년을 기약하겠다" 하지만 마음처럼 대지 않았다. 12월 마산 훈련서 타구에 또다시 부상부위를 맞아 다치는 불운이 이어졌다.
하지만 불운은 멈추지 않았다. 세차례의 부상끝에 33게임밖에 출장치 못했던 양승관은 구단과의 연봉협상과정에서 마찰을 빚었다. 연봉협상이 결렬되자 구단이 그를 자유계약으로 방출시켜 결국 유니폼을 벋게 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팀내에서 양승관과 함께 인천의 얼굴로 불리던 김진우마저 교통사고로 팀을 떠나게 되어 인천팬들 또한 두번씩이나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야구를 떠나서는 살 수 없었다. 다음해인 88년 6월 태평양 돌핀스로 바뀐 팀에 연습선수로 들어가 7월부터 2군에서 재기를 위한 땀방울을 흘렸다. "마지막 기회를 살려 다시 그라운드에 돌아가겠다!"
하지만 89년 그가 출전한 게임수는 고작 17경기에 타율은 1할이었다. 결국 90년 새롭게 간판을 단 LG로 떠나게 된다. 신생팀 LG의 신임 감독이었던 백인천이 그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LG에서 일년간의 선수생활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역시 LG에서 코치를 시작해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91년 LG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94년 인천팀으로 돌아와 태평양을 거쳐 99년 현대까지 인천에서 코치생활을 했고 2001년부터 2002년까지 새로운 인천팀인 SK의 코치로 활동했다. 2003년엔 고향 인천을 떠나 영원한 사부 백인천이 감독으로 있는 롯데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