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린 시인
손에 강 같은 평화/장경린
사람 손가락이 열 개인 까닭에 그게 언제였더라 /장경린 나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나를 스쳐 지나가는 단골 약국의 친근한 약병들 검은 열차들 작은 집과 다리와 먼 山 나를 스쳐 지나가는 젊은 풍속과 늙은 불안감들 욕망들 시와 담배 연기로 지워버린 가랑비 웅덩이에 고인 빗물 그게 언제였더라 갈매기들이 해안 초소에서 튀어나오던 저녁 해물탕 꽃게 다리를 빨아먹던 저녁 작은 하늘에서 큰눈이 쏟아지던 날 자신의 일기에 밑줄을 그으며 낯설고 기뻐서 술병을 따던 저녁 블랙 먼데이 / 장경린
십진법이 생겼다고 한다
이 손이 소처럼 뭉툭했다면
번잡한 삶 얼마나 단순하고 평화로웠겠는가
새의 날개 같았다면
가볍게 떨리는 마음으로도
얼마나 멀리 날아갈 수 있었을까
내 손은 나날이 내게서 멀어져 간다
낡은 도자기처럼 은은하게 잔금이 깔리고
푸르렀던 힘줄도
스웨터에서 풀려 나온 실처럼 느슨해져
세상을 움켜쥐기보다
누구나 손잡기 쉽게 되었다
이 손 강 같았으면
남원 어느 샛강처럼
둔덕을 끼고 느리게 돌아가는 강 같았으면
신발 벗어들고 생을 건너다
흰 발등 내려다보며 아득해진 마음이여
그 마음 쓰다듬는 얕은 강이여
내 손 그런 강 같았으면
절정에서 맛본 탐욕의 기쁨을
공포와 교체했다
주가가 폭락한 블랙 먼데이
마음이 여려서 마모가 심한 자동차 앞바퀴를
교활하게 늘 거리를 두고 따라다니기만 하는 뒷바퀴와 교체했다
보톡스를 맞은 애인의 사라져버린 주름살과
보톡스를 맞고도 시치미를 떼는 애인을 교체했다
활짝 핀 생의 정점에서
제 목을 꺾어들고 뚝뚝 떨어지는 능소화여
월스트리트 펀드매니저와 소말리아 아이의
바싹 마른 입술을 일대일로 교체했다
원관념은 사라지고
중국제 보조관념만 즐비한 인사동
어제의 당신이 사라지고 내일의 당신도 사라졌다
저 꽃은 너무 아름다워서
뿌리를 약하게 할 거야
목젖이 부었다 집을 비워주어야 하는데
집이 나가지 않는다 목젖을 비워주어야 하는데
대통령이 나가지 않는다 관절염을 비워주어야 하는데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열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채식에서 육식으로 식성을 교체했다 그 후로
창가의 선인장 가시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동네 개들은 꼬리를 내렸다 나도 꼬리를 내렸다
오늘도 나는
나를 임의의 나로 교체했다
내가 나만 쫓아다니며 꼬리치지 못하도록
퀵 서비스/ 장경린
봄이 오면 제비들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씀바귀가 자라면 입맛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비 내리는 밤이면
빗소리에 발정 난 고양이 울음소리
덤으로 얹어 드리겠습니다 아기들은
산모의 자궁까지 직접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자신이 타인처럼 느껴진다면
언제든지 상품권으로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꽁치를 구우면 꽁치 타는 냄새를
노을이 물들면
망둥어 뛰는 소리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정경유착이 용이하도록 국회와 증권회사는
여의도에 몰아 놓겠습니다
돌아가신 이들의 혼백은
가나다순으로 잘 정돈해 두겠습니다
가을이 오면 제비들을 데리러 오겠습니다
쌀쌀해지면 코감기를 빌려 드리겠습니다
-현대문학, 2001년 5월호-
재개발지역 7/장경린
아이 업은 아낙이 재래시장 뒤 언덕길을 오르고 있다. 흰 상복이 눈부시다. 양손에 들고 있는 검은 비닐봉지 터질 듯 하다. 삐쩍 마른 명태 서넛이 봉지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다. 눈알이 빠져나가 푹 꺼진 눈구멍들 불현듯 크게 벌어진다. 저게 뭐지? 포대기 밖으로 말미잘처럼 팔다리를 휘저으며 아이가 떼를 쓰고 있다. '하나뿐인 지구' 행사 현수막이 찢어져 펄럭이며 허공에서 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다. 어미가 팔꿈치로 쥐어박자 끝내 울음보를 터뜨리는 아이. 순간 툭 터지는 검은 봉지. 빙판 길에 쏟아져 입을 쩍 쩍 벌리며 나뒹구는 명태들.
대한늬우스 3/장경린
북한 주민 일가족이
목숨 걸고
여러 나라의 국경을 넘고 넘어
꿈에 그리던
利子의 품에 안겼다
자본주의의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찔끔찔끔 눈을 감는
왜소한 아이
저 두 눈에 눈물 맺히는 일 없기를
곰 인형을 안고 있는
저 가슴이
利子의 횡포와 유혹에
놀아나지 않기를
@김대중정부에 들어선가 <이자제한법>이라고 하는 것이 폐지가 되어 사채업자들은 합법적으로 고리의 사채를 경제적무능력자들에게까지 풀어놓고 그 이자에 이자를 따먹게 되었는데, 여기에 대한 비판을 가한 시인의 시라는 점에서 위 시의 眞價가 있다고 봤다.
동시 상영/장경린
폐암으로 투병중인 노모를 간병하던
어느 날이었다 어수선한 복도
한 떼의 환자들이 모여서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 것일까
이목구비가 잘 빠지고 화사해서 바람이 든 것일까
갈비탕으로 저녁을 때우고 돌아오는 길에
그들과 또 마주쳤다
감독의 지시가 떨어지자 그들은
환자처럼 표정을 무겁게 갈아앉히고
주연의 주위를 오락가락 배회하고 있었다
깊은 우물처럼 노모의 눈은
하루가 다르게 어두어지고 있었다
물이 바싹 말라버린 우물 속 영화관에서는
두 편의 영화가 동시 상영되고 있었다
뭉턱뭉턱 머리칼이 빠져버린 한 편은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며칠 째 상영이 중단된 상태
다른 한 편은
간이 침대에 앉아 스포츠서울을 말아 쥐고
감독의 지시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달래야/장경린
매화는 다시 매화가 되려 하고
수련은 다시 수련이 되려 하고
북한산도 다시 북한산이 되려 하는데
걸쭉하게 몸 버린 한강도
다시 한강이 되려 하는데
쓰러진 강아지풀도
강아지풀로 일어나려 하는데
나는 뭐가 돼야 쓰겠소
응?
사자 도망간다 사자 잡아라--장경린
나는 보았다 利子에 비틀거리는 청년들 성당 입구에서
기타 반주에 맞춰 흘러간 가요를 애절하게
利子하는 장님들 해남 대흥사 뒤뜰에 노랗게 핀
이름 모를 작은 꽃들 현금자동지급기 앞에 늘어서서
현금을 찾고 있는 利子들 불란서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불문학 교수가 된 시인들 설악산 대청봉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던 보이스카웃 대원들 나는 보았다 거리에서
사무실에서 TV에서 울창한 숲과 탁 트인 바다에서
백화점에서 종로에서 영등포에서 나는 보았다
利子위에서 현란한 춤을 추며 노래부르는 가수들
검은 옷을 걸치고 근엄하게 검은 의자에 앉아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 利子를 빨며 곤히 잠든 아이들
파고다공원 뒤에서 利子를 꼬시기 위해 어슬렁거리는 동성연애자들
석양으로 물든 利子에 점점이 떠 있는 작은 섬들
利子를 깨서 상대방의 머리를 내려치던 주먹들
利子를 잉태한 어머니들 백사장에 누워 작열하는 利子에
몸을 태우고 있는 비키니들 나는 보았다
利子가 利子와 뒤엉켜 몸부림치는 광경을 나는 보았다
利子가 利子들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利子를 잡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利子의 무리를
[많아서 힘들면 여기쯤에서 쉬었다가 읽으세요. ^^*]
: 다음 정류장이 어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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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성복을 입은 한 신사가 의자에 앉아
: 동아일보를 읽고 있다 경찰총장의 뇌물수수 사건 기사를 읽다가
: 황급히 말아쥐고 시청 앞에서 내린다
: 붉은 루즈를 짙게 바른 여자가
: 그 빈 의자에 앉는다 핸드백으로 드러난 허벅지를 가리고
: 눈을 창밖으로 튼 채 꼼짝하지 않고 있다
: 광화문에서 내린다
: 허리가 꼬부라진 백발의 노인이 다가서자
: 붉은 루즈 다음에 앉았던 대학생이 공손히 일어난다
: 백발의 노인이 그 빈 의자에 앉는다
: 그는 계속해서 주위 사람에게 무엇인가 묻는다
: 다음 정류장이 어디냐, 지금 몇 시나 됐냐, 나이가 몇 살이냐,
: 박정희 각하 이후에 나라가 망해간다, 다음 정류장이 어디냐, 지금 몇 시냐
: 버스가 한강철교를 건너
: 사육신 묘 정류장에 이르자 노인이 내린다
: 사람들 틈을 비집고 튀어나온 뚱뚱한 아줌마가
: 그 빈 의자를 차지한다 미안해요 관절염이 심해서 미안해요
: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주위를 향해
: 그녀는 연신 주억거린다 운 좋게 利子에 자리잡고 앉은
: 利子들이 묵묵히 장승처럼
: 창밖의 노량진을 내다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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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亂中日記8
:
:
: 오로토산, 에탄올, 염산피리독신과 함께 녹아
: 나는 하늘색 약병 속에 담겨 있다
: 휘발성이 강한 내가 어디로 날아갈지 나는 모른다
: 반창고, 압박붕대와 함께 나는 기다리고 있다
:
: 통증은 언제나 시작될까? 어제는 베란다를 얼쩡거리는 나비를 보았다.
: 전혀 아파 보이지 않은 생물이었어. 아무도 아파 보이지 않는데. 모두
: 가 시르시름 앓고 있다는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비디오나 볼까?
: 조용히 어린이 놀이터에 앉아 있을까? 내가 다가서면 세상은 상처를 만
: 들고 아픈척해. 금붕어를 길러볼까? 증권 투자? 단전 호흡? 뭐 좀 신선
: 한 상처는 없을까? 버릇처럼 살아가는 버릇들. 복싱을 배워볼까? 고구
: 마에 쥐약을 발라놓고 생쥐들이나 기다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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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의 35ml는 벌써 날아가버렸다
:
: [부작용] 나는불쾌감,졸음,현기증을유발시킬수도있음
: [주의사항] 나를어린이손이닿지않는건냉한곳에보관요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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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르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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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를 술집에 팔아넘긴 2는 어디에 있는가
: 2를 고문 살해한 2는(그는고문사실을부인한다) 어디에 있는가
: 탤런트 2의 미소는 어쩌면 저렇게 순수하면서도
: 탐욕스러운 것일까 2에 대한 절망감을 노래하던 시인이
: 어느 날 갑자기 3의 예찬론자가 된 계기는
: 무엇인가 지난 가을 광릉에서 마지막으로 발견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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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툼하다) 어디에 있는가 안타를 치고 나가 도루를 시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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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한다) 과연 올해의 도루왕이 될 가능성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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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색 선전이 아니었을까 당신이 버린 9는 죽은 강을 따라
: 죽은 바다에 가 닿는가 돌이켜보건대 나는
: 어디에 뿌리를 내렸어야 했는가 우리는 0에서 태어나
: 0으로 환원되기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 1에서 태어나
: 다른 1로 변해가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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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느끼고 있는 0의 어깨
: 디지털 신호처럼 끊임없이 껌뻑이는 작은 입술
: 무슨 애환이 서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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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골과 찌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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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사 현상으로 누렇게 부은 하늘이
: 흙빛으로 내려앉은 퇴근길 건축 공사장에서
: 놀던 아이들은 양손에 개미를 잡고 목이 떨어져나가도록
: 싸움을 붙이고 있었다 문단에서 소설가 4의 작품이
: 3의 것을 모방한 것은 예술혼의 실종이라고
: 비난했으나 자신은 3을 모방하지 않았으며 동시대인이 지닌
: 정서는 유사할 수도 있다고 4는 주장했다 4에
: 걸터앉아 벽돌로 부러진 구두 뒤축에 작은 못을 박아대고
: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됐어요
: 뭐 도와드릴 일이라두 일 없대두요 제길헐 4의 통증이
: 심해 보광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돌아온 저녁 나를 보고도
: 개들은 본 척 만 척 뛰어놀고 금주의 인기 가요에서는
: 정상을 차지한 6의 머리 위로 색종이들이
: 화사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트로피를 안고 울먹이며
: 앙코르송을 부르는 6의 정강이를 가로질러 자막으로 무겁게 깔리는
: 지학순 주교의 사망 소식 쌍안경을 들고
: 옥상에 올라 밤늦도록 별을 관측했다
: 4의 주위를 선회하는 3과 6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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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골과 찌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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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수에도 영양분이 있다
: 강수연이 출연하는 영화에도
: 6.25에도
: 어머니의 건망증에도 영양분이 있다
: 지우개가 지워버린 문장에도
: 너의 유치한 명령에도 나는 인정한다 영양분이 있다
: 부산에도 있고
: 영등포에도 있다
: 바다는 얼마나 자신만만한 영양분인가
: 어둠의 영양분은 얼마나 깊고 무거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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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골과 찌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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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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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밤마다 TV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 뉴스의 강우량이 오늘은 충분했
: 다. 사기살인물가불안적자협상결렬의 비가 내렸고. 한국이 일본을 꺾고
: 월드컵 본선에 진출. 슛이 터질 때마다 금잔화처럼 기쁨을 흔들며
: 나는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에 나타난
: 사슴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 두통약 사리돈이 제공한 일일 연속극
: 들국화와 함께 피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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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 벌 한 마리가 방안으로 날아들었다
: 유리창 주위를 붕붕거리며
: 몸을 던져 부딪혀가며 투명한 유리창과 싸우는 벌
: 꿀을 찾아나섰던 것일까
: 나는 꽃이다 그러나
: 내게는 꿀이 없다
: 꿀은 벌의 뇌 속에 달콤하게 맺혀 있을 뿐
: 뇌 속을 분주히 날아다니며
: 벌은 달콤한 삶을 맛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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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
: KBS '동물의 왕국'에서 본 제비갈매기가
: 나의 폭소를 터트렸다 놈은 둥지를 틀지 않고
: 들판에 그냥 알을 낳는 녀석인데 알이
: 있었던 정확한 위치만 기억하고
: 철저히 그 위치에 집착해서 실험삼아 알을
: 6에서 7로 조금만 움직여놓아도 알이
: 없어진 6에 내려앉아 열심히 알을
: 품는 척한다 자기가 낳은 귀중한 생명이
: 바로 옆 7에서 나뒹굴고 있는 것을
: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
첫댓글 회장님 덕분에 알토란같은시 감상했습니다 감사함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가 생활이고 삶이 시가되는, 생각속 마음속 삶의 대사가 생명의 근성으로 살아 옵니다. 참다운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