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산
김 동 근
동재기나루는 노량진 갯가에서 9호선전철 동작역의 강변에 이르기 까지를 이르는데 흔히 노들(鷺乭)이나 노량진(鷺梁津)이라 함은 한강 포변(浦邊)의 해오라기와 징검돌과 양버드나무의 운치를 말한다. 동작(銅雀)은 흑석동 강변 일대에 많았던 잡석(雜石)들이 검고 혹은 구릿빛이어서 그렇게 부르고 차량이나 문명이 없던 옛날의 노들나루는 해오라기와 징검돌과 능수버들의 풍치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강변 언덕의 갈대와 백사장에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그물을 놓는 어부들에 까지 어우러져서 얼마나 아름다운 풍정이었을까. 1916년 한강교가 생기기 이전에는 아랫녘의 삼남(三南)에서 사람들이 괴나리 봇짐을 등에 지고 대간(大幹)의 대로를 따라 올라와 허위단심 남태령을 넘어 동재기나루에서 거룻배를 이용해 도성(都城)에로 드나들었다. 그러므로 동재기 나루에는 조운(漕運)을 기다리는 거룻배가 20여척이 언제고 대기를 하였다고 했다.
1934년경 이른 봄의 어느날이다. 30이 조금 덜 되는 사내 둘이 강을 건너와 배에서 내려 노량진 나룻터 언덕의 주막집에 들렀다. 강나루가 내려다보이는 주점이니 노량진동의 산비탈마을쯤이 되었을 게다. 개다리소반에 막걸리 주전자를 가운데 놓고 토마루에 마주앉은 사내들은 마을의 어디 쯤에 살던 만담가 신불출과 작곡가인 문호월이었다. 강건너에 아는 이의 병문안을 갔다가 오는 길인가본데 술잔을 주고받으며 내려다보이는 강물과 백사장과 또 바람이 없는데 실가지를 흔들며 몸부림치는 수양버들과 무성한 갈대 숲들의 정취가 서럽도록 그네의 감정을 자극하였을 게다. 때마침 왜인들이 만주사변에 이어 중국의 본토로 쳐들어가 기고만장을 하면서 전비(戰費)마련의 구실로 우리나라를 유린하고 압박을 함에 그네 예술인들도 잔뜩 위축이 돼 있을 때이다. 술기와 춘양(春陽)에 휘주근히 젖어드는 감정으로 신불출이 시심을 가다듬어 담뱃갑에 노들강변 제하의 노랫가사를 적어내려갔다.
노들강변
노들강변 봄버들 휘 - 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 매어나볼가
에헤야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물만 흘러흘러서 가노라
2 - 3절 략
---신불출 작사 문호월 작곡 박부용 노래 노들강변---
신불출이 담배 갑에 적은 노랫가사를 내밀었고 작곡가 문호월이 받아가지고 집에 돌아와 작곡을 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주청(酒廳)을 옮겨다니며 노래를 부르던 기생 박부용이 OK레코드사에서 노들강변의 노래를 취입하였던 것이다. 가요예술이 환영을 받지 못하던 시절인데 그렇게 탄생한 노들강변이 크게 성공을 하였다. 어려웠던 시절에 우리 국민이 서러워서 또 흥겨운 일이 있어도 흥얼거리는 노래가 경기민요인 노들강변이다. 노래의 구절마다 경쾌하고 한편 슬픔의 애조를 띠었으며 그 노들강변이 허탈하고 무기력하던 시절에 우리민족의 공허한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다고 하겠다. 2와 3절은 강변의 백사장을 빌어 노류장화 여인의 사랑과 슬픈 이별을 노래하였고 삶의 희로애락과 정한과 살같이 빠른 세월의 인간사를 강물에 떠내려 보내는 의미를 담았다. 노래를 작사한 신불출은 1907년 개성에 낳아 어렵던 시절에 많은 사람들을 울고 웃기다가 예술가들의 단체인 카프동맹에 가입을 하고 한국전쟁때 월북해 북에서 활동을 하던 1962년에 북으로부터 숙청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같은 나이이던 작곡가 문호월이도 40을 조금 넘기고 타계를 하였으며 그리고 1901년 경남 창원에 낳은 가희(歌姬) 박부용은 이후에 행적을 모른다고 했다. 그렇게 어둡던 시절에 모진 격랑을 헤치고 질곡을 감내하던 이들이 하나 둘 다투어 세상을 뜨므로 사람들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 하였고 그렇게 그네가 남긴 노들강변이 지금에도 널리 불리어지고, 노래비만이 문호월이 낳은 경북 김천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바람가고, 구름이 가고 세상을 둘러보면 천지가 가는 것들이다. 차가고, 사람가고 강물도 저렇게 끊이지를 않고 흘러가고 있다. 세상의 사물은 본래 존재의 본능이 있어서 보존을 하려고 모두가 고개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안간힘을 쓰기는 하지만 세상에 오래 머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물이 자꾸 생성이 되어서 세상에 잠시 머물기는 해도 그게 역시 소멸을 준비하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 바람과 구름이 그리고 강물이 저렇게 다시 오기는 하지만 옛날에 가버린 것들이 아니어서 그게 서럽다. 어려웠던 시절에도 봄이오고, 봄빛이 내리고 그렇게 찬란하던 봄날에 파묻혀서 덧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가 모두 가버렸다. 강물과 해오라기와 능수버들과 징검돌을 바라보고 울적한 기분을 노래로 풀어내던 옛날 동재기나룻터의 풍정을 이제는 어디에고 찾아볼 수가 없다. 지금 한강에는 30여개의 탄탄한 다리가 놓여지고 강의 양안에 운치있던 자연들은 인위(人爲)에 의해 깎기고 자르고 다듬어져서 말끔한 모습의 도로와 다리와 놀이터로 변해 있다. 현대인은 고도로 발달된 도시와 교통과 문명의 이기인 기계들을 창조하였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이기의 문명과 기계에 갇힌채 삭막한 기계의 안에서 정겨웠던 옛날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분주히 세상을 건너고 있을 뿐이다.
동수가 낳아서 자란 충청도 산골은 몹시 가난했다. 왜정 때 왜인(倭人)들은 전쟁을 핑계로 모든 걸 빼앗아가고 우리의 젊은 남녀는 징용과 정신대의 이름으로 모두 데려갔으며 노유(老幼)만이 남아서 좌절을 했다. 이후에 해방은 되었으나 우리의 사회는 무질서했으며 미개(未開)하던 생활때문에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한국전쟁이 쓸고가서 우리는 곤궁속에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가난하기는 하지만 동수는 부모님의 사랑으로 지방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에 나아가 대학에를 다닐 수가 있었다. 여러 형제의 맏이고 식구가 많기는 하나 부모님은 동수의 장래를 위해서 없는 살림이지만 대학에 다닐 수있도록 뒷받침을 했던 것이다.
1960년 경인데 동수가 대학에 2학년이 되었다. 가난한 살림에 학교생활이 오죽 하겠는가. 그래서 동수는 생각다 못하여 학교를 포기하고 먼저 군무(軍務)를 해결하기로 했다. 빨리 취직을 하여 가난한 가정을 일으켜야 한다는 마음에서이다. 당시에 취직을 하려면 군무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공군에 입대시험을 치르고 훈련을 마쳤다. 그리고 배치를 받은 부대가 인천방면이고 서울에서 가까운 곳이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밤이면 동수는 사무실에서 학교 때 배우던 학습교재를 복습하며 학구에 전념했다. 제대하고 있을 취직시험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휴일이면 외출을 하려는데 갈 곳이 없다. 파란 제복을 입고 나가라는데 주머니가 비었다. 남들은 인천의 해변으로 그리고 소사읍에 있는 복숭아밭에 놀러가서 연인(戀人)들과 즐기는데 동수는 가정이 빈곤하여 도무지 여유가 없다.
그러한 어려움에도 동수는 군생활이 싫지가 않고 굳게 참아낼 수가 있었다. 우리의 삶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은 어디에고 있는 것, 자신의 어려움은 사랑하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위함이니 기꺼이 참아야한다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좋은 옷 입고 미식(美食)을 즐기는 이들이 부럽지가 않았다.
어느 토요일인데 일찍 일과를 끝냈다. 남들은 즐거운 토요일이어서 한 껏 멋을 내고 뿔뿔히 영외(營外)로 나간다. 동수도 파란 제복을 매만지고 밖으로 나왔지만 갈 곳이 없다. 주머니에 겨우 차비만이 있을 뿐이다. 동수는 시내버스를 타고 무작정 당시에 영등포구 흑석동에로 갔다. 그곳의 비계마을에 친척이 살고 있어서 평소에 주소를 챙겨놓았던 것이다. 작은 동네인 비계마을의 산비탈 중간쯤에 있는 집은 한옥인데 서울이어서 깨끗하고 호젓했다. 당고모부가 조그만 기업체를 운영하는데 넉넉한 생활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처음에 파란 제복의 동수를 보고 40을 넘기신 6촌 당고모께서 누구인가 하다가 알아보고는 반기신다.
"어머 - 동수구나. 웬일이래 -"
"네 - 저기 부천 쪽에 있는 부대에 근무를 하는데 외출이라 나왔습니다. 고모님 - "
"잘 왔어 - 아주 딴사람이 되었구나. 어서 들어가자 -"
당고모님이 안내하는대로 동수가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때 건넌방 문앞에 서있던 여학생이 동수에게 다가와 인사를 한다.
"오빠 - 저 정숙이예요."
"그래 - 얘기는 들었는데, 정숙이가 아주 - 예쁘네 -"
여고(女高) 3학년이고 나이는 18세란다.
정숙이와 얘기 중에 고모님께서 점심 상을 차리고, 같이 식사를 했다.
"어쩌나 - 동수 조카가 쉬어야하는데 방도 그렇고 -"
"네 - 제가 부대로 가면 되지요."
이때 고모에게 정숙이 한마디 한다.
"엄마는 - 아 내방에서 오빠가 쉬면 되는거지 무슨 걱정이야' 나는 엄마방을 같이 쓰고 -"
"너는 공부도 해야하고 잠자리도 그렇고 -"
"내 걱정은 마셔요. 아 손님으로 와서 바로 가는 게 어딨어 - 안돼요 - 오빠!"
정숙이 성질을 발끈 낸다. 사춘기를 지나는 정숙이 외모가 반듯한 동수에 크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동수가 정숙의 방에 자리를 잡았고, 정숙이 드나들며 동수의 시중을 든다. 조금은 미안하지만 고모댁으로 외출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빠 - 내일은 즐거운 일요일이야. 요 앞이 한강인데 저에게 한강 구경을 시켜줘야해요."
"한강이라고 - 정숙이 이곳을 잘 아니까 나를 데려가 줘야하지 않나."
"어쩌든 저와 강가에 나가는 거예요."
그 말을 남기고 정숙이 안방으로 건너갔으며 동수는 일찍 자리를 펴고 누웠다.
일요일 아침에 정숙이와 한강가에 산책을 나왔다. 비계 비탈을 내려와서 차로(車路)를 건너자 도로변애 작은 구능이 있다. 정숙이 안내하는대로 참나무와 오리나무와 아카시아와 단풍나무가 우거진 숲의 자드락길을 헤치고 대머리산 이름의 작은 언덕을 올라갔다. 산 위에는 마당 너비의 황토 흙이 드러난 빈 땅이있다. 그래서 대머리산으로 부르는가 보다. 내려다보이는 산 아래에 한강물이 구비쳐 흐르고 저 건너에 남산이 그리고 서을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폭의 풍경화(風景畵)를 보는 것같다.
기러기 2마리가 정답게 강물을 거슬러 날아간다.
"오빠 - 제대하면 무어 하실거예요."
너른 강물을 바라보던 정숙이 고개를 돌려 동수를 쳐다보고 묻는다.
"모르지. 닥치는대로 - 건설 노동자이든 회사원이든 아무 일이나 할 거야. 무어든 즐기면서 -"
정숙이 동수를 부러운 듯이 쳐다본다.
"노량진 방면의 강가로 300m 가면 용왕봉저정 이름의 정자가 있어요. 사도세자가 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어서 수원에 묻혔잖아요. 1776. 4월에 세자의 아들이고 효자이던 정조가 즉위를 하고 아버지묘소인 수원의 융능을 오가는데요, 배다리를 건너 노량진을 지나면서 쉬어 가던 정자이지요. 정자의 풍치가 좋아서 동무들과 자주 놀러 가는데요. 그리고 강물 가에 '수사자 위령비'가 세워져있는데요, 을축년 대홍수인 1925. 7. 15일경의 태풍애 3일 동안 650mm 폭우가 쏟아져서 강변의 둑이 터지고 서울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었대요. 이때 홍수에 쓸려서 400여명의 인명피해가 나고 12.000여 가호의 집들이 물에 잠겼다고 하네요. 그래서 물에 떠내려 간 사람을 추모하는 위령비기 세워져 있습니다."
"그렇군.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는가. 아름다운 한강에 그런 물난리가 있었군."
동수가 정숙의 얘기에 흥미를 가지고 귀를 기울인다.
"여기에서 노량진 의 중간지점에 작은 언덕이있고 그 위에 효사정(孝思亭) 이름의 정자가 고즈넉하게 세워져있어요. 정자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강의 풍치가 그림같이 아름다운데요. 세종조에 한성판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 노한대감이 강북에 묻혀있는 모친의 묘소를 바라보며 정자에서 어머님을 그리워했다는데요. 효사정이 명소(名所)여서 유객(遊客)들이 많이 찾지요.
"정숙은 우리의 역사에 대해 많이 알고있네. 특히 한강변의 유적과 거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말이야."
"네 - 제가 시간이 나면 친구들과 우리동네인 강변에를 많이 찾으니까요. 그리고 저기 보세요. 오빠 -"
동수의 말에 정숙이 대답을 하며 강 건너를 가리킨다. 건너의 물가에 모래언덕이 길게 이어졌다.
강의 주위에 대해 역사의 얘기를 정숙이 재미있게 이어간다.
"강건너 동네가 용산구 한남동이고요, 저기 강가의 모래언덕을 새남터(沙南基) 혹은 새나무터라고 하지요. 남쪽의 너른 모래언덕이고 강의 물살에 밀려온 새나무인 싸리와 갈대와 띠풀들의 씨앗이 그곳에서 싹이 터 자라 새나무밭이라고도 하지요. 조선시대에 그곳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또 국사범(國事犯)을 처형하는 장소였다는데요. --
---조선대 1453년 단종의 즉위년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7대 왕인 세조로 등위를 하였다. 이에 충신 특히 성삼문과 사육신들이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이 나서 새남터에 호송이 되어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지고 그리고 그네의 시신이 그곳에 아무렇게나 버려진다. 이후에 생육신이던 김시습들이 충신들의 주검들을 수습해 거룻배편으로 강을 건너고 노량진에 있는 지금의 사육신 묘지에 가매장을 하였다. 또한 조선 8대 예종대에 병조판서를 지낸 남이장군이 1468. 10월에 간신이던 유자광의 모함에 수난을 겪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장소도 새남터이다. 그리고 1801년 병인박해에 중국인 신부 주문모와 이후에 여러 천주교 신부들이 수난을 당한 장소도 저기 새남터이다. 지금 새남터에 성당이 세워지고 저곳에서 희생된 신부와 다른 장소에서 순절한 종교인들에 15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그분들의 뜻을 기리고 있다 ---
"그렇군. 역사에 나오는 사육신들 수난의 장소가 새남터였어. 그리고 남이장군과 종교인들이 고난을 당한 장소도 저기라고 - 정말 몰랐었네."
"네 - 그래요. 한강은 유유히 흐르는 것 같지만 강가의 여기저기에 역사의 가슴 아픈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요."
그렇게 정숙이 역사얘기를 하고 동수가 재밋게 귀를 기울였다.
"오빠에게 많이 배우려고 했는데 제가 오빠께 역사공부를 해드렸네요."
"정숙이 이곳에 있어서 잘 알잖아. 고마워 - 동생아 -"
그렇게 남녀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오빠 - 저의 집에 오실때 마음대로 이지만 앞으로는 제가 드리는 말씀에 잘 따르셔야해요."
"무슨 뜻이야."
"저의 집 말고 다른 곳으로 외출나가시면 이 동생이 가만히 안있을 거예요. 제가 부대 앞에 가서 기다릴 거구요. 호호오-"
"잘됐네. 나도 마땅히 외출 때에 갈곳이 없는데 - 하지만 고모댁에 너무 폐를 드리면 되겠어."
"그런 염려는 놓으셔요. 오빠가 저의집에 오시면 저의 집이 빛나고 특히 저는 마냥 행복해지고요, 호 --"
그렇게 둘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왔다.
동수는 고향에서 가사와 학교생활에 매달리다가 서울이란 너른 세상에서 시야를 넓히고 또 동생이긴 하지만 여학생과 얘기하며 좋은 추억을 가지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후에 동수는 부대에서 외출을 하면 가끔 고모댁에 찾아서 놀다가 오곤 하였다. 정숙이 동수의 부대를 찾아서 만날 때도 가끔은 있었다. 외출 시에 고모님네 식구들이 모두 환영하고 특히 정숙이 몹시 반겼으며 여동생인 정숙이와 한강변인 대머리산과 효사정에 그리고 봉저정과 반포 앞의 강변로를 거닐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고모집에서 정숙은 분에 넘치게 동수의 주변을 챙겨주고 같이 강변을 즐길 때는 너무나 좋아했다. 때로는 정숙이 동수에게 좋아하는 표정을 보일 때가 있지만 동수가 바르게 처신을 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저녁인데 동수는 정숙이와 효사정에를 올랐다. 동수는 사복차림이고 정숙은 스웨터에 긴 치마를 입었다. 하얀 달밤인데 정숙의 모습이 선녀와 같다. 강물 위의 하늘에 물오리가 날아가고 저 건너 서울의 야경(夜景)이 찬란하게 펼쳐져있다. 동수가 강건너를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정숙이 시무룩하다.
"오빠! 무얼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보세요."
"응 - 그냥 달밤이 너무 좋아서 -"
고개를 돌려 묻는 정숙을 쳐다보고 동수가 대답했다.
"사랑때문에 슬퍼하는 젊은 이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랑하는데 상대가 외면을 하고 -"
"정숙이 무슨 말이야. 이렇게 좋은 달밤인데 -"
동수의 대답을 듣고 시무룩한 표정이던 정숙이 갑자기 동수의 가슴에 얼굴을 쳐박고 흐느끼기 시작을 한다. 동수가 놀라며 당황해한다. 젊은 여자를 가슴에 안은 총각인 동수의 가슴은 터질 것만같다. 정숙이 왜이러나, 동수는 어떡해야하나. 그냥 망연히 정숙의 등을 끌어안고 서있을 수밖에 -
한참을 흐느껴 울던 정숙이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든다. 동수가 손바닥으로 정숙의 눈물을 훔쳐준다.
"왜 그래 - 왜 - 정숙이. 무슨 안좋은 일이 있어."
"아녜요. 그냥 오빠가 저는 쳐다보지 않고 강물만 바라보는 게 공연히 슬픈 생각이 들었어요."
정숙이 동수의 품에서 몸을 빼며 모를 듯한 말을 한다.
"무슨 말이야. 그런 말이 어디있어. 사람은 부단히 자신의 감정을 억제를 하며 살아가는 거야."
동수가 정숙에게 한참을 학생의 신분을 자각하라, 어른들에 실망이 가지 않도록 공부하고 행동에 조심을 하라고 설득의 말을 했다. 그날은 그렇게 둘이서 얘기를 하다가 우울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슴이 터질듯 부푼 소녀 정숙이 동수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사랑을 하고 싶으나 6촌오빠라는 벽에 막혀 안타깝기만 했다. 그동안 동수는 마음을 억제하도록 자꾸만 설득을 했고 정숙이 자신도 마음을 추스르려고 노력을 한 것이다. 근친 간의 결혼은 하지못하게 되어있다. 근친은 우생학(優生學)적으로 동일 유전자가 많아서 건강에 약간의 문제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민법상의 결혼금지는 직계로 8촌이고 처가는 6촌이라고 했다. 일본은 4촌까지 혼인을 금지하고 어느 민족은 남매간에 혼인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중국의 고대 한나라 궁녀 왕소군은 흉노의 호안야와 살다가 그가 죽자 아들인 복주루와 부부되고, 수나라 양제는 선부(先父)인 문제가 죽으면서 아버지의 후취인 진부인과 살았다고한다. 당나라 태종의 후처인 측전무후도 당태종의 아들인 고종과 동거했으며 당의 현종은 며느리이던 양귀비와 사랑을 했다. 북방의 유목민은 형사취수(兄死娶嫂)라고 하여 형이 죽으면 형수와 살았고 심지어는 아들이 없으면 며느리와 부부되어 살았다니 사정은 다르지만 동수가 정숙이와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결혼을 생각해 볼 수가 있다고 하겠다.
근친혼을 금지한 법의 이전에 이성과 도리를 헤아리는 우리 사회에서 인습과 규칙이 있으므로 감정에 의한 사랑행위는 억제를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숙과 동수는 서로 마음만의 사랑을 하며 6촌 남매 사이로 지내려고 노력을 하였다.
가난때문에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군에 입대한 동수는 요행으로 서울의 근교에서 군생활을 하게되었다. 그리고 가난한 주머니 사정이지만 흑석동의 고모댁에를 다니며 생각지 못하던 미식(美食)을 즐기고 동생인 정숙이와 사랑은 아니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남들은 가난때문에 그리고 서울에 연고자가 없어서 서울구경을 하지 못하던 시절이다. 그런데 동수는 그렇게 서울생활을 하고 그리고 서울사람이 되어서 아름다운 한강을 즐기며 생활을 했다. 거기에 한강의 주변에 널린 역사의 흔적들을 더듬어 볼 수가 있고 그렇게 좋은 추억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동수는 군무(軍務)를 마치자 내친김에 서울지구에서 시행하는 경찰공무원시험을 거쳐 경찰계에 입문(入門)을 하였고 경찰학교를 나오자 서울 노량진경찰서에 지원을 하여 정보과에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연고지인 흑석동에 하숙집을 정했던 것이다. 추억이 깃든 흑석동에 자리를 잡으니 감개가 무량했다. 고모댁에서 식구들이 반겨 주고 정숙이가 매우 기뻐했다. 그런데 그동안 흑석동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우리 국민은 왜정에 유린당하고 한국전쟁의 수난을 겪었다. 그리고 50년대의 보릿고개를 허위단심 넘으면서 정치의 안정을 찾아가자 가난과 이념의 어지러움에서 헤어나는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진 것이다. 한국전이 지나며 서울의 인구가 150만이라 하고 1960년대에 벌서 250만명으로 불어났다. 동수가 흑석동에 자리를 잡을 때인 70년대에는 서울의 인구가 500여 만명을 헤아린다고 했다. 가난한 시골의 젊은이들이 공장의 직공으로 아니면 남의 집에 식모로 그리고 버스차장과 공사장에 노동품을 팔려고 서울로 또 서울에로 무작정 몰려들면서 서울의 인구는 포화상태에 이른 것이다.
평화로운 흑석동 마을이 많이 변하였다. 시골에서 서울로 몰려든 가난한 사람들이 갈곳이 없다. 그렇지만 먹고 자야하니 아무데고 거처를 만들고 살아야 했다. 달마산에 오르는 산비탈과 비계마을이 온통 판잣집이고 2차선의 차로(車路)변에도 판잣집이 줄을 이었다. 판잣집 골목에 복덕방 간판도 무질서하였고 부동산 소개소에 방을 얻으려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그곳 뿐만이 아니고 사당동과 봉천과 신림동도 온통 무질서한 판자촌으로 변했다.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이 먹고살아야 한다. 배고픈 이들은 판잣집에서 가내수공업을 하고 구멍가게를 차렸으며 생각다 못해 막걸리를 가져다가 팔아서 생계를 꾸리고 살아야 했다. 흑석동에 왜정때 만들었던 연못을 메우고 시장이 생겨났는데 그곳이 주점가(酒店街)가 되어있다. 많은 술집에는 접객부(接客婦)를 고용하여 영업을 하고있었다.
그렇게 서울로 몰려든 배고픈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아우성이었다. 거리는 무질서하고 그래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시장과 거리에는 크고작은 사건과 사고가 많이 발생했다. 소매치기나 절도사건도 빈번했으며 배고픈 이들이 일하고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우선 먹고 마셔야 했다. 그래서 주점가와 음식점에는 언제고 술취한 이들의 싸움으로 소란하고 그리고 흥청거렸다. 마시고 취하면 크고작은 사건이 넘치게 마련이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어서 경찰관서는 언제고 사건의 피의자들로 가득하여 기존의 경찰력으로 사건처리의 수요(需要)가 모자라 파출소에 방범대원을 많이 고용하였다. 그래도 미처 정리되지 못한 사건의 피의자들을 한밤에 범죄인호송차에 실어서 경찰서에 데려다가 처리를 하였던 것이다. 그 많은 사건을 형사입건할 수가없어서 '행정법규위반적발보고서'라는 간이 입건처리서를 작성하여 즉결심판에 넘기던 시절이었다.
어느 휴일인데 아침에 동수는 정숙과 대머리산에를 올랐다. 산은 옛날의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산이 아니었다. 산의 중허리에 작은 도로가 생기고 도로의 양편에 판잣집이 줄지어 서있다. 구능의 비탈이 온통 판잣집이다. 산비탈에 무성하던 나무들이 모두 베어져있어 흉한 모습으로 변하였다. 아 - 아름답고 지난 날의 그립던 추억의 산이 이렇게 변하다니 몹시 아쉽다.
"아니 놀랬어. 이렇게 흉하게 산이 변하다니 -"
오솔길을 따라 오르며 동수가 말했다.
"모르셨어요.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갈곳이 없어 저렇게 판자로 거처(居處)를 만들고 기거를 하고있어요."
정숙이 아쉬운듯이 대답했다. 역시 이곳에도 판자 안에서 수공업을 하고 심지어는 막걸리를 받아다가 파는 이들도 있다고한다.
"그렇군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그때그때의 시세(時勢)에따라 모습이 변하는거야 -"
산 위에 대머리도 없어졌다. 잔디와 갈대가 무성하고 띠풀이 덮여서 옛날의 대머리는 흔적이 없다. 한강과 멀리 남산을 둘러보았다. 강과 서울의 모습은 옛날과 다름이 없는데 버드나무와 무성한 갈대가 옛모습이 아니고 강가의 언덕이 잘리고 깎이어 왜인지 삭막한 마음이 들었다. 저기가 새나무터이고 저기가 효사정이 그리고 이쪽은 동재기나루가 아닌가.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이고 지난날 정숙의 얘기를 들으며 느끼던 마음들이 어디로 갔는가, 몹시 쓸쓸하기만 하다.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강변의 풍치는 여전하지만 주위에 많은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다. 강나루와 언덕이 옛날의 노들강변이 아니고 인위(人爲)에 의해 깎이고 잘리고 다듬어졌다. 인구의 서울집중으로 서울의 모습이 많이 달라져있다. 동수의 생각과 모습도 옛날의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무상하다고 했는가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