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돌목에서 벌어진 장엄한 승리 원인에 대하여
조선 해군이 가지고 있는 전함은 판옥선이고, 주력 무기는 대포다. 판옥선은 갑판 아래에서
격군이 노를 젓고 군사들은 갑판에서 전투하는 대형 군함이다. 일본군 주력 함선 아타케부네
보다 높았다.
일본군의 주력 무기는 조총이었다. 이동이 편하지만, 사거리가 짧았다. 조선군은 사거리
900보짜리 천자총통, 800보짜리 지자총통 따위 대포로 화살이나 탄환 수백 발을 동시에 발사해
원거리에 있는 적선을 파괴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일본 해군은 적선에 근접해 조총을 퍼부은 후
배에 올라타 칼로 싸우는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을 구사했다.
명량해전이 벌어진 장소는 울돌목이다. 울돌목은 조류가 강물처럼 거세고 가장 좁은 곳은 폭이
280m밖에 되지 않았다. 일본 아타케부네는 진입이 불가능했다. 판옥선보다 훨씬 작고 승선
병력도 적은 중형선 세키부네(關船)만 통과할 수 있었다. ‘적선 200여 척이 바로 진을 친 곳으로
향하고 있었지만’(이순신, 『난중일기』, 9월 16일), 실제로는 울돌목을 통과해 조선 함대 13척과
대결할 수 있는 배는 많아야 한 번에 6척에 불과했다. (정완희 등, 「칠천량해전과명량해전의 유형
전투력 분석」, 「군사, 91, 국방부편찬연구소, 2014) 그러니 앞에 나온 ‘세키부네 5~6척당 판옥선
1척’이라는 일본 전술은 울돌목에서는 맞을 수가 없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조선 해군은 "철환을 쏘고 화살 쏘기를 비바람같이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거제현령 안위의 배에 일본 군함 2척이 개미처럼 달라붙어 등선백병전을 개시했다. 이순신은
그 백병전에 개입하지 않고 ‘빗발치듯어지럽게 화살을 쏴댔다.’ 바다에 떨어져 죽은 일본 장수
마다시(馬多時)를 건져 올려 ‘마디마디 잘라(村斬-촌참)’ 내걸자 적들의 사기가 꺾였다.
그리하여 적선 2척을 남김없이 무찌르고 다른 적선 31 척도 깨부수었다. 남은 적들은 퇴각했다.
(이순신, 『난중일기』, 9월 16일)
대형 화기술과 원거리 전술로 일본 해군을 철저하게 응징하고 격퇴한 전투가 명량해전이었다.
장엄했던 그날, 일본군 등선백병전에 말려든 조선 해군은 한 척 밖에 없었다. 가용 자원을
최대한 확보하고, 그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전쟁터를 찾아 그 자원을 한꺼번에 사용한 전투였다.
- ‘열두 척’과 ‘죽을힘’과 ‘의병과 죽창’에 대하여
이게 죽을힘을 다해 싸운 배 열두 척의 실체다. 정신력의 승리가 아니라, 객관적인 승리였다.
분산돼 있던 전력을 결집시키고, 그 전력에 합당한 전술을 써서 필요한 힘을 완전히 사용했다.
이순신은 전투 종료와 함께 함대를 이끌고 군산 앞바다 고군산열도까지 도주했다.
작전상 후퇴라고도 한다. 영광 법성포 앞바다에서는 일본군에 약탈당하는 법성포를
목격하고도 지나쳤다. (이순신 군중일기 5월 19일) 가을 자원을 소진해 목표를 달성하고,
불필요한 전투를 회고한 것이다. 백성에게 죽창을 들라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의병을
일으키라고 하지도 않았다. 전쟁터를 떠나라는 요구를 백성이 오히려 거부했다.
이순신은 그들에게 도우러 올 것처럼 먼 바다에 피란을 줄지어 배치하도록 하고 스스로는
맨 앞에서 싸웠다. (이분. 「이층무공행록』」
이듬해 11월 19일 노랑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유해는 남해 관음포로 운구됐다.
관음포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이락사(李落祠)가 있다. 이락사 편액에는 이렇게 걱정되다.
‘大星隕海(대성운해)’. 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다.
여기까지가 이순신의 전쟁을 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였다.
- 박종인 저, ‘땅의 역사’ 3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