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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문학 계간평/ 수필
생명과 생태 그리고 공존의 시학
넓다고 좋은 강은 아니다. 좁아도 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면, 좋은 강이리라. 깊다고 좋은 바다가 아니다. 낮아도 바닥이 보일 만큼 깨끗하다면 충분히 좋은 바다이리라.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최근에 이르러 생태계와 경제활동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큰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지역적인 환경파괴 및 오염에서부터 전 지구적 차원의 환경파괴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경제활동이 지구생태계가 지탱할 수 있는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는 우려와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는 인간의 경제활동이 생태계와 생태학적 원리를 고려하지 않은 채,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근시안적 시장원리에 의존한 결과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뒤늦게나마 10년 전부터 <산림문학>이 나오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평자는 ‘생명’과 ‘생태’ 문제가 절실한 이 시기에 계간 <산림문학>이 생명를 염원하는 생태수필을 지향하고 있는 데 대해 박수를 보낸다.
생태계는 인간의 경제활동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와 물질을 제공하며, 인간 경제활동에서 발생한 에너지와 물질 폐기물을 처리해 준다. 또한 생태계는 인간 경제활동의 모태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의 활동에 되먹임 작용을 한다. 우리 문학인이 생태와 생명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인류 사회는 궁극적으로 평화와 생태를 지향해야 한다는 알트의 주장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차제에 <산림문학>이 숲사랑, 생명존중, 녹색환경보전, 정서녹화를 주창하면서 생태수필을 싣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계간평의 관점은 “생태와 생명”이다.
II. 클릭
- 박용구, 옥형길, 조철형, 최승학
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시에서 뿐 아니라 소설이나 희곡, 수필 등에서 생태문제를 중심 테마로 삼는 작품이 늘어나면서 이들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환경문학> 또는 <생태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그런데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듯 보이는 이 개념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그리고 생태문학의 기본적 특징이 무엇이고 그 범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분명한 합의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평자는 <환경문학>과 <생태문학>이 섞여 쓰여지고 있는 현실에서 앞으로는 양자의 개념이 분명하게 구분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불타고 있는 아마존 숲을 보면서’ 숲사랑, 생명존중 녹색환경보전이라는 <산림문학>의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편집인과 편집진의 노력에 감사를 드리면서 현미경을 들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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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구의 <송무백열>이라는 작품에 제일 먼저 시선을 놓아 보았다. 이 수필은 숲속의 수많은 생명들이 더불어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실을 과학적인 조명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수필이 주제나 제재 중심의 문학이고 보니, 전체적으로 주제는 일관성을 보여야 하고, 종속 제재나 종속 주제는 전체 글의 주제를 구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이런 자연의 지혜롭고 신비로운 현상을 생물간의 경쟁과 알레로파시 상호작용 속에서 밝혀내고 있다. 이런 원리도 칠보산 자연휴양림 등정 체험을 통해서 구축했기에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산길 주변 잘 자란 소나무 숲속의 그늘 아래 이제 막 움이 터서 올라오고 있는 잣나무 여린 묘들을 보면서, 작가는 집 서재에 있는 ‘송무백열’의 의미를 되새긴다. 소나무와 잣나무의 생태적인 특성을 통해서 숲은 스스로의 힘으로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 체험을 통해, 잘 그려내었다. 이 대목에서 박용구의 문학적 역량이 힘껏 발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많은 생물종들이 함께 더불어 살고 있는 숲속에는 서로 억제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종이 있는가 하면 서로 도움을 주는 종이 있으며 별 관계가 없는 종들도 있다. 또 어떤 종들은 같은 종 내에서도 알레로파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어떤 술에 가면 많은 수의 어린 묘가 카페트처럼 발아하여 무수하게 올라오지만 얼마 지나보면 치수의 대부분이 고사하고 만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같은 수종의 어미나무에서 자기 어린 묘를 죽이는 알레로파시 물질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질은 나무 생장이 왕성할수록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생육이 좋은 나무 아래서는 대부분의 어린 묘가 고사하지만 나이가 들어 활력이 ㅂ줄어들면 그 물질양이 적어지면서 어린 묘의 생장도 좋아지게 된다.
<송무백열> 중에서 -
중요한 것은 관념화된 ‘더불어 함께’라는 지혜를 어떻게 실감과 유리된 정서로 구체화하는가다. 이 작품의 발단은 숲을 찾아나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개부에 가서 작가는 주제의식의 배경이 되는 소나무 숲속에서 잣나무 어린 묘를 발견한다. 이 발견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은 주제를 암시해 두겠다는 작가의 의도로써 적절한 작업이라 하겠다. 이 장면을 보고, 집 서재에 결려 있는 ‘송무백열’을 소환한 것은 이 수필의 압권이다. 칠보산 등정을 하지 않았다면, 아니 소나무숲의 어린 잣나무 묘를 보지 못했다면 서한 시기 육기가 쓴 탄서부의 ‘송무백열’이 작품 속에 인용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탄서부의 인용으로 평화와 공존를 염원하는 작가의 마음이 드러났고, ‘더불어 함께’라는 주제의식도 잘 형상화되었다. 주제적 양식이라는 수필의 성격은 물론, 자생적인 산림의 특성을 잘 그려내었다.
옥형길의 <노인의 우심>은 문학적 성취가 아주 빛나는 수필이다. 공감이 가지 않는 인식능력만으로 장면에서 장면으로, 정경에서 정경으로, 옮아간다면, 아마 독자는 싫증이 나서 지쳐버릴 것이다. 이 말은 수필의 내용을 이루는 글감이 적어도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흥미나 감동은 수필의 육체요, '미'는 그 혼이기 때문에 수필은 가치 있는 체험이 내용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수필의 강점은 가치 있는 내용과 상관화 작업에 있다. 물론 관찰- 고찰- 통찰- 성찰이라는 사찰의 세계에서 인식의 힘이 빛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발단부에서 작가는 ‘플라타나스의 자람을 보면서 속이 확 터진 시원시원한 사람을 대하는 것 같다고 느끼고, 전개부쯤에 와서 작가는 플라타나스의 잎이 무성한 가로를 보고, 그 노인의 생각이 난다고 하면서, 상관화를 통해 사건의 전개를 예고하며, 글의 긴장감을 높이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노인의 우심을 통해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그 후로 노인은 또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걸어왔다. 왜 아직도 나뭇잎이 피어나지 않느냐고 걱정이었다. 날이 갈수록 노인의 성화는 거의 발작적이었다. 마침내 노인은 나무가 가지를 잘려 죽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듯했다. 실의에 빠진 자탄의 마음까지 내보였다. 자신이 스스로 생명을 잃고 고목나무 등걸이 되어버린 착각에 바진 것이었다. 노인은 날마다 처연한 마음으로 몸통만 남은 창밖의 가루수를 바라보며 새 싹이 터져 나오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노인의 우심> 중에서 -
나무 그림자가 무서워서 잠을 잘 수 없다는 할아버지의 민원을 중심축으로 해서 그려나가는 이 수필은 위기와 반전을 거치면서 문학성도 견인하고, 생명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주제의식도 멋지게 표달해 내었다. 예술성은 평범함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데서 나온다. 감동은 자기만의 독특한 체험에서 나온다. 산림녹지과장으로서의 '경험'을 넘어선 '체험'은 생경함과 신선함을 주면서 감동을 주기 때문에 이 수필은 문학적 성취가 빛나는 것이다. 몸통만 남은 가로수를 바라보며 새싹만 나기를 기다리는 노인을 통해, 드러난 작가의 생태학적 세계관은 이 수필의 가치를 드높인다. 이분은 독자에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그냥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위기와 반전의 서사구조 모형을 도입하여 서사적으로 전개하는데, 이 점이 작가의 역량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결말의 마지막, “노인의 전화는 더 이상 없었다.”라는 문장은 상상적으로 처리된 주제의 함축된 의미화로써 매우 인상적인 결말 처리라 하겠다.
조철형의 <눈도장을 찍는다> 역시 생태 관련된 글이다. 이 작품의 테마는 회양목이다. 그러나 작가는 상생하는 자연의 조화를 피력하기 위해 ‘영산홍’을 발단부에 끌어들였다. 공존이나 생태라는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주요 제재는 ‘회양목’이다. 그러나 이 수필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작가는 회양목의 특성을 어머니의 사랑에 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적 쾌락이라는 문학성의 가치가 구체성의 기반 위해서 치환의 원리로 전달되고 있어서 감동을 준다. 무엇보다도 수필적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부터 신선하다. 첫 직장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새긴 회양목 도장을 선물했다는 것을 지배적 정황으로 설정한 것도 훌륭하지만, 어머니의 회양목 사랑을 상징으로 나타내면서 여유 있게 어머니의 사랑을 더듬어가는 모습은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대단하다는 걸 보여준다. 어머니의 사랑을 담고 있는 ‘회양목’에 대한 의미 부여와 가치 발견은 그의 범상치 않은 인식 능력에 힘입어 강한 감동을 자아낸다. 최고의 압권은 ‘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눈도장’으로 치환해서 상상화한 점이다.
어머니께서 물주며 가꾸시고 회양목이 화단을 보살핀다. 화초들이 꽃 피면 초가집이지만 꽃대궐이다. 잡초 씨들이 날아와 화단에 자라면 잡초가 아니라 화초가 된다. 내버려두면 화초인들 잡초가 되는데 거름을 주고 물을 주니 잡초도 화초가 된다. 그러니 개나 닭들이 범하여 배설물을 누지 않는다.
- <눈도장을 찍다> 중에서 -
결말부에 가서 어머니가 이름을 새겨 준 도장을 ‘어머니의 얼’로, ‘나의 분신’으로, 그리고 ‘가보 1호’로 설정한 것을 능가할 사모곡이 어디 있겠는가. 절제된 감정으로 그리고 사물을 보는 따스한 눈빛으로 회양목에 얽힌 사연을 어머니의 사랑과 결부시켜 풀어낸 것은 주제 구체화의 한 방법으로 아주 좋았다. 이런 감각화되고 구체화된 언어들이 춤을 추며 벌이는 인식의 축제는 오륙십 대를 넘긴 중년을 유년의 시절로 데려가는 데 안성맞춤이다. 환기적 요소가 강한 ‘꽃대궐’, ‘벌들의 행차’, ‘초가집’, ‘첫 직장’ 등의 어휘 활용과 정의 문학을 표방하는 수필의 특성을 힘껏 발휘하는 그의 수필은 모정의 회양목 앞에서 눈을 맞추며 어머니를 생각하는 생명적인 심상을 가져와 이 작품의 가치를 드높인다 하겠다. 이 수필의 백미는 시점이 과거 회상에서 현재로 유턴되면서 ‘모정의 회양목’이란 주제의식이 의미화되는 데 있다. 작가는 제재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그 체험을 사모곡으로 녹여내었다. 객관적 상관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 이어 정서이입, 그리고 의미화 수순을 밟는 창작 과정에 있어서 그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다.
최승학의 <가랑잎>은 매우 서정적인 수필이다. 낙엽과 가랑잎의 이름을 구분하고 ‘가랑잎’에 초점을 두어 자신의 느낌을 문학적으로 표현해서, 주제를 구체화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였다. 가랑잎에 대한 관찰- 고찰- 통찰- 성찰이 비교적 세심하게 전개되어 가랑잎이 주는 철학적 의미는 평범하지만 철학적 투시력과 감각적 묘사력에 힘입어 독자를 인문학적 사유로 안내한다. 인간이 운명처럼 지니고 살아가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작가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이 수필이 주는 하나의 메시지는 '윤회사상'이다. 작가의 가치관이 '불교사상'을 지향하는 만큼 '가랑잎'의 생명 싸이클이 전생과 탄생의 인과관계 속에서 설득적으로 잘 그려져 있다. 자연적 질서와 운행이 인간의 생존 이치와 합당한가를 이야기하는 최승학의 수필은 잔잔한 사유의 삶을 곱게 물들이고 있기에 감동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조응과 교감의 세계를 속삭이듯 펼쳐내고 있는 이 수필은 한마디로 사물을 대하는 인간적 온기로 충만하다고 하겠다.
가랑잎의 탄생이다. 나무는 몸속에 있는 수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물기를 잘 발산하는 일을 떼어버린다. 춥고 고독한 겨울나기를 위한 방법이라니 지혜롭다는 느낌이 놀라울 뿐이다. 떨어진 가랑잎은 쌓이고 또 쌓인다. 가끔 바람에 떠밀려 이곳으로 저곳으로 몰려다니기도 하지만 마침내 숨죽이고 쌓인다. 적당한 물기를 머금고, 알맞은 온도를 유지하며 미생물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가랑잎은 나뭇잎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분해된다. 흙과 한 몸이 되는 것이다. 흙은 또 다시 푸나무의 뿌리를 통하여 세상에 나간다. 가랑잎은 윤회의 바퀴에 실려 돌다가 가랑잎으로 다시 태어난다.
가랑잎은 불멸이다.
<가랑잎> 중에서 -
수필가가 해야 될 일 중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삶터와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 진실을 삶에 반영하여 스스로의 정화 수단으로 삼으며, 창출된 미적 가치를 승화하는 것이 문학의 존재 가치를 확대하는 길이다. 작가의 이러한 면모는 가랑잎의 삶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평범한 현상 속에서 삶의 질서를 발견하려는 작가의 의식이 투영된 이 수필이 주는 매력은 ‘가을 볕을 많이 받은 가랑잎은 더욱 얇아진다. 살짝 건들기만 해도 ’까르르‘하고 소녀의 웃음을 흉내내는 것 같은 소리를 들려준다’와 같은 서정 기법에 있다. 가랑잎에 대한 세밀한 천착은 주제의식을 윤회로 이끌어내었고, 딱 한마디 ‘가랑잎은 불멸이다’라는 말로 의미화한 것은 이 수필의 쾌미라 하겠다. 특히 주제덕목을 ‘윤회’라는 관념어로 나타내지 않고 ‘윤회의 바퀴’로 구체화한 대목에서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빛난다. 짜임새 있는 발단-전개-결말의 논리 구조는 문학성을 견인하는 데 기여했다. 수필의 구조를 익힌 것은 좋은 수필을 쓸 수 있었던 지름길이라 본다. 관념어인 ‘불멸’을 가랑잎과 보격을 이루게 해서 물화한 것도 좋았다.
III. 로그아웃
<산림문학>이 ‘숲사랑, 생명존중, 녹색환경보전, 정서녹화’를 지향하면서 ‘생태’에 관심을 놓고, 수필의 테마를 ‘산림’로 설정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란츠 알트가 생태학과 경제학간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을 단순한 이론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상황 속에서 접목시키고 있는 차원에서 이제 수필가들이 생태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처사다. 위에 다뤄진 작품들이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 환경의 관점이 아닌 모든 생명체와 인간이 동일한 가치선 상에 있다는 생태 자연의 관점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수필가의 의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가을호에는 좋은 작품들이 많아서 네 분 작품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농사를 통해서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임호 어르신의 삶을 그린 홍만희의 <부추 농사 짓는 부처>는 ‘부추’와 ‘부처’의 이화작용을 상관화하는 전략이 돋보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까치밥과 참새들의 아침식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습관이 된 백인수의 <꽃길>, 신진탁의 <홍도에 가면 홍안이 된다> 등의 작품은 분량 관계로 아쉽게도 일독을 권하는 것으로 정리해야겠다. 써놓고 보니, 박용구 씨는 여름호에서 조명을 받은 분이었다. 수필은 생태문학의 가능성을 확보함으로써 그 위상을 높일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에서 인식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빠져나간 신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산림문학의 주제 지향성을 계기로 해서 생태문학의 카테고리 속에서 수필가의 관심이 생명을 향하는 것은 작가적 사명을 다하는 일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사랑으로 변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학이 문학다워야 한다는 것은 언어예술로서의 문학 정체성을 작가가 확고히 인식해야 한다는 의미다. 어쨌든 생태와 생명에 대한 의식이 절실한 이때, 우리 수필가들이 본질적 문제에 눈을 떴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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