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四 章 절세무적 금응대협
음무극은 담담히 말했다.
『소제가 양심신공비급을 탐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진 않겠소. 그런데 그 비급은 천패장에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지요.』
전옥린이 냉랭하게 물었다.
『당신은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오?』
음무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초는 감히 단언할 수 없지요. 하지만 불초는 이미 비급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포기했소이다. 전대협께서 그것을 찾아서 아무쪼록 구양박에게 주시구려. 불초는 그 일로 당신과 다투지 않겠소이다.』
전옥린은 냉소했다.
『당신은 정말 그 비급을 포기할 생각이오?』
음무극은 되물었다.
『전대협이 나서는 데야 소제가 어찌 감히 그것을 넘볼 수 있겠소?』
전옥린은 간단히 말했다.
『좋소. 내 그 조건도 응낙하리다.』
음무극은 기뻐서 물었다.
『전대협, 당신은 혹시 그 비급을 손에 넣었는지요?』
전옥린이 대답했다.
『손에 넣었는지의 여부는 나의 소관이외다. 어찌되었든 간에 나는 당신에게 응낙을 했소. 그러면 된 게 아니겠소?』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음맹주, 당신은 언제 구양박을 이곳으로 모셔 오시겠소?』
음무극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답했다.
『소제는 곧 사람을 보내 그를 청하도록 하지요. 가능하다면 한시진 안으로 구양박과 함께 오도록 노력하겠소이다.』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 가보시지요.』
음무극은 몸을 일으키더니 포권했다.
『전대협, 그럼 이만 작별을 고하겠소이다.』
전옥린은 말했다.
『멀리 나가지 않겠소이다. 철노, 나를 대신해서 손님을 전송해 주시오.』
송철잠은 대답했다.
『음맹주, 가시지요.』
음무극은 정전군을 옆구리에 끼고 송철잠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전옥린은 음무극이 방을 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잠자코 그곳에 앉아있었는데 마음 속은 말할 수 없이 착잡했다.
그가 이번에 금응보에서 멀리 떠나 아들과 누이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바로 의원을 찾아 그들의 체내에 잠복한 독을 해소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는 생명을 다 쏟아서라도 이 일을 해내겠다고 맹세했으며 만약에 아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그 역시 죽겠다고까지 결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전모백을 치료시킬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 마당에 그는 오히려 더욱 괴로움을 느껴야 했다. 그가 마음을 터놓고 사귄, 유일한 친구 관중견은 그를 위해 먼 길을 달려와서 금응보에서 목숨을 잃었다. 전옥린으로서는 진정한 친구를 그렇게 잃은 것이었다.
이제 그가 다시 마음이 통하는 사람 하나를 사귀게 되려는 마당에 아들을 위해 바로 그 사람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운명일까? 그는 남삼객 적군보다 강호의 배분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후배였으며 스스로의 무공 역시 적군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이른 새벽에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 남삼객은 흉금을 터놓고 그를 친구로 대접해 주었으며 그가 나이 젊고 무공이 뒤떨어지는 후배라고해서 얕보는 티를 내지고 않았다.
그는 남삼객의 소탈한 태도에 감동했으며 이제 진정한 친구를 한사람 얻게 되었다고 기뻐했던 것이다.
옛사람들은 마차 문을 열고 금방 사귄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래 사귄 친구와 같을 때가 있고,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사귄 친구라 해도 의기가 투합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는 남삼객과 한번 만나서 수십 년 사귄 친구같은 정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입장에 몰렸으니 마음이 타는 듯이 고통스러웠다. 전옥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망연한 표정으로 남삼객과의 싸움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얼마나 비참한 싸움일까?
결과가 어떻게 되든 두 사람의 결전은 강호의 전설이 되어서 영원히 후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하지만 그 누가 싸움에 임하는 그의 비통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사람들은 그가 천하제일검의 영예를 쟁탈하기 위해 남삼객에게 도전했다가 결국 상대의 검 아래 목숨을 잃었다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혹은 분수를 모르고 야심이 너무 컸으니 죽어 마땅하다고 욕을 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남삼객이 먼저 싸울 것을 제의해서 대적이 될 만한 인재의 싹을 자른 것이라고 강변할지도 모를 일이다.
전해지는 소문이야 어떻든, 사람들은 그들 두 사람이 한때 흉금을 털어놓은 친구였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겨우 한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서로 이같은 친구를 다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옥린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생각했으며 송철잠이 언제 방안으로 들어왔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송철잠은 십여 년 동안 곁에 있으면서 전옥린이 얼굴에 그토록 비장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띄우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는 방안으로 들어서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주, 왜 그러시지요?』
전옥린은 골똘한 생각에서 깨어났다.
『아! 철노, 돌아왔구려.』
송철잠은 관심어린 어조로 다시 물었다.
『보주, 무슨 생각을 그토록 골똘히 하고 계십니까?』
전옥린은 다만 쓸쓸히 웃었다.
『철노, 당신은 혹 내가 죽기를 두려워해서 근심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시오. 나는 다만……』
그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송철잠에게 더 설명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설령 혀가 닳도록 설명한다 하더라도 송철잠은 역시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송철잠은 근심스러운 듯 이마를 찌푸렸다.
『보주, 도대체 무슨 일로 그토록 괴로워하십니까? 만약 보주께서 남삼객을 당해내지 못하신다면 이 노복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방법을 강구해서……』
전옥린은 무거운 어조로 꾸짖었다.
『당신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송철잠은 어리둥절해졌다.
그가 전옥린을 따른지 십여 년이 넘는 동안 전옥린은 언제나 그에게 예의를 다해왔으며 일찍이 한번도 이렇게 큰소리로 꾸짖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잠시 어리둥절해져서 말을 하지 못했다.
전옥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철노, 나의 심사가 별로 편치 못해서 그랬으니 양해해 주시오.』
송철잠은 손을 비볐다.
『보주께 어떤 말 못할 사정이 계신지 노복에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노복은 이미 지나치게 오래 산 목숨밖에 가진 것이 없지만 끓는 물속이나 타는 불속이라 하더라도 보주의 명이라면 눈썹 한번 찡그리지 않고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소이다.』
전옥린은 부드럽게 말했다.
『철노, 나는 당신이 충의를 다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지금 나의 심정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오.』
송철잠은 말했다.
『보주께서 부득이 남삼객과 손을 쓰게 될 경우 어쩌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복은 그만……』
전옥린이 말했다.
『나는 이미 죽고 사는 일이나 이기고 지는 것을 생각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철노, 내 당신에게 말을 한 적이 없지만, 남삼객과 나는 친구란 말이오.』
송철잠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주께서 아침에 노복에게 성밖에서 남삼객을 만나보셨다고 말씀하셨지요.』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남삼객을 한번 보았지만 오랜 친구처럼 사귀었소. 그는 방법을 강구해서 모백을 가르쳐 보겠다고 했소. 그런데 내가 부득이 그와 싸우게 되었으니 어찌 괴롭지 않겠소?』
송철잠은 그 말을 받았다.
『보주, 노복은 남삼객이 보주의 곤란한 처리를 이해하시고 어쩌면 손을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전옥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오.』
송철잠은 어리둥절해졌다.
『노복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두 분께서 진정한 친구라면 어찌하여……』
전옥린은 설명했다.
『강호 사람들은 스스로의 명예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소이다. 설사 남삼객이 우리 두 사람의 우정을 위해서 나와 손을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로서는 결코 그런 온정에 기댈 수 없는 입장이라오.』
그는 쓸쓸히 웃었다.
『만약에 내가 공개적으로 도전했는데 그가 뒤로 물러선다면 그가 수십 년간 쌓아온 강호제일검으로서의 위명이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인데, 사람의 도리로서라도 어찌 내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소?』
그래도 송철잠은 알듯말듯했다.
『그래서…… 흐음, 그래서 곤란한 거로군요.』
전옥린이 결심이 섰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곤란할 것은 없소! 내가 그와 손을 쓰면 되는 일이외다.』
송철잠이 말했다.
『그러나 보주, 남삼객의 무공은 절세적이라는데 그렇게 되면 보주께서……』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오. 이 점을 나 역시 인정하는 바이오. 그것은 음무극도 알고 있소. 그렇더라도 내가 남삼객과 손을 쓰게 되었을 때에는 반드시 전력을 달해서 싸움에 임해야 한단 말이오.』
송철잠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옥린은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만약 전력을 다하지 않고 일부러 피살당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과 남삼객에 대한 일종의 모욕이 된다는 이치라오.』
송철잠은 다소곳이 말했다.
『보주, 이건 교묘한 함정입니다.』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미 이것이 음무극이 생각해낸 함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그렇더라도 나로서는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소.』
송철잠은 한참 생각해보더니 쓸쓸히 웃었다.
『설사 노복이라 하더라도 틀림없이 응낙했을 겁니다.』
전옥린은 말했다.
『음무극은 바로 나의 약점을 잡은 것이오. 그는 내가 모백을 위해서 반드시 그의 조건을 수락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오. 그나마 그가 삼매 역시 중독되었다는 것을 몰랐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가 더 많은 조건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나로서는 응낙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오.』
송철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하옥지가 방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전옥린은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삼매, 어째서 이곳으로 왔느냐? 좀 더 누워있지 않고?』
하옥지는 말했다.
『큰 오빠는 마치 내가 큰 병이라도 앓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저는 무공을 펼칠 수 없을 뿐이지 걸어 다닐 수 있고 심지어 춤도 출 수 있답니다.』
전옥린은 물었다.
『모백은 뭘 하고 있느냐?』
『그는 잠이 들었어요.』
그녀는 침대가로 가서 사뿐 앉으면서 말했다.
『모백은 양심신공비급을 얻게 되자 마치 보물을 얻은 것처럼 온종일 손에 든 채 놓지 않아요. 조금전에는 이미 그 책의 내용을 모조리 외웠다고 하더군요.』
전옥린은 물었다.
『그 아이가 혹시 양심신공심법을 배우려고 하지 않던가?』
하옥지가 대답했다.
『어찌 배우려고 할 뿐이겠어요? 그는 이미 익힌 것을 시범을 보여주기까지 한걸요. 모백은 양심신공이 매우 재미있다고 했어요. 잠시 연마하자 놀랍게도 체내의 진기가 서로 교차하여 돌아가게 되고 두 갈래 나누어 흐르도록 할 수 있었대요. 그래서 더 연마를 해봤는데 너무 서둘렀기 때문인지 조금전에는 머리가 어지러워진다고 해서 제가 자라고 한 거예요.』
전옥린은 말했다.
『서둘러서 연마하지 말아야 해. 진기가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지 주화입마되면 큰일이거든.』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린 듯 말했다.
『삼매, 수고스럽겠지만 나중에 양심신공비급을 한 권 베껴 놓도록 하지.』
하옥지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건 어디다 쓰려고요?』
전옥린이 대답했다.
『그 진본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생각이야.』
하옥지가 다시 물었다.
『혹시 오대문파에게 건네주시려는 것이 아닌가요?』
전옥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하옥지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렇다면 누굴 주시려구요?』
전옥린은 그 말을 가로채듯 말했다.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 결정한 일이니 더 물어볼 것 없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나중에 악귀신의 구양박이 와서 두 사람을 위해 독을 제거하게 될 것이니 그리 알고 있어라.』
하옥지는 황연히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아! 큰오빠는 양심신공비급을 주는 조건으로 그 악귀신의에게……』
송철잠이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뿐만이 아니랍니다. 소저……』
전옥린은 급히 그의 말을 막았다.
『철노.』
하옥지는 송철잠을 바라보더니 다시 전옥린을 향해 물었다.
『큰오빠, 저에게 숨기는 일이 뭐예요?』
전옥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 것 아니다. 삼매, 빨리 가서 비급을 한 벌 더 베끼도록 해라. 나는 음무극에게 구양박이 치료를 하고나면 비급을 넘겨주겠다고 응낙했다.』
하옥지는 눈치가 빨랐다.
『큰오빠, 비급 이외에 당신은 또 어떤 조건을 응낙하셨나요?』
전옥린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별 것 아니라니까 그러네.』
하옥지는 발을 동동 굴렸다.
『큰오빠, 부탁이니 저에게 감추지 마세요. 저는 음무극이 비열한 악당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가 결코 그토록 쉽게 자비심을 일으켰을 리가 없어요.』
전옥린이 그 말을 가로챘다.
『삼매, 너는 양심신공비급이 그토록 가치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옥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양심신공비급은 물론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물이지요. 그러나……』
전옥린은 그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다면 되었다. 삼매, 너는 빨리 가서 책을 베끼는 일을 해 줘. 그동안 나는 한 차례 운기행공을 해야겠다.』
하옥지는 더 물어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전옥린에게 머리를 숙여 예를 한 후 사뿐사뿐 방을 걸어나갔다.
전옥린은 그녀가 떠나간 후 무거운 어조로 송철잠에게 주의를 주었다.
『철노, 나와 남삼객이 결전한다는 일을 아무쪼록 옥지에게 말하지 마시오. 괜스레 그녀를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송철잠은 입술을 꿈틀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지요, 보주.』
전옥린은 그를 바라보며 손을 내저었다.
『철노, 당신도 가보시오. 음무극 일행이 오면 나에게 즉시 알려 주시구려.』
송철잠은 몸을 돌려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전옥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등이 더욱더 구부러진 것 같았다. 송철잠이 삽시간에 더 늙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심중의 고민이 그의 어깨를 그렇게 짓누른 것이었다. 전옥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또 한번 운명의 무정함을 느꼈다.
십년 전, 그가 강호에 처음 발을 디디게 되었을 때 의기는 드높았고 성품은 호탕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홀로 강호를 주름잡다시피 했었다. 그의 손에 한 자루 검만 있으면 천하의 사악한 무리들을 쓸어 없애고 강호의 어두운 곳을 밝게 바꿀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많은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는 결코 한 자루 보검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했고 또 스스로가 어이없이 약한 존재라는 것과, 소위 정도의 높이가 한자라면 마도의 높이가 일장이나 된다는 사실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십년 전,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깊이 인생의 허무함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금응보에 은거하고 오직 무공을 닦고 아들을 양육하는 데만 정성을 쏟았다.
그리고 십년이 지난 지금, 그는 다시 이같은 운명의 희롱을 받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다시 강호에 나서게 되어 이와같은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무정산의 마두들이 지닌 야욕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고 그와 남삼객이 결전한 후 강호정세가 어떤 결과로 변화될 것인가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를 저지할 능력이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이 안배하는 대로 가야할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것이 운명의 교묘한 안배가 아니라면 그가 어찌 이와같이 항거할 수 없는 허무감을 느끼게 되겠는가?
그는 음무극이 그 휘하 형제들을 일제히 데리고 온다 하더라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그들을 일제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럴 경우 그의 아들이 눈앞에서 속절없이 죽어가는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차라리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더라도 아들과 누이를 구하기로 작정했다. 전옥린은 한참동안 생각했다. 생각의 수레바퀴는 굽이굽이 돌았으나 결국은 다시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길 이외에 다른 방법을 도저히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는 이대로 운명의 안배에 굴복하여 질질 끌려가는 결과를 달갑게 받아들일 수 없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설마하니 정말 이 곤경에서 벗어날 길이 없단 말인가?'
그의 얼굴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애써 생각을 집중하느라고 운기행공 하겠다던 생각마저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착잡한 생각은 거센 파도처럼 거듭 몰려와 그의 가슴을 세차게 후려쳤으며 그의 심령은 갈수록 더욱더 고통스러워졌다.
그는 탁자를 치며 스스로에게 분노를 터트렸다.
'설마하니 내가 눈을 멀거니 뜨고 끌려다니면서 그들 원하는 대로 조종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이런 처지를 타개할 한 가지 방법도 생각해 낼 능력이 없단 말인가?'
그는 계속해서 이것저것 방법을 생각했다.
'만약 내가 음무극의 생명을 담보로 그들을 위협한다면 무정산 수뇌부 사람들도 나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까?'
이같은 엉뚱한 생각이 뇌리에 떠오르게 되어 다시 한동안 깊이 생각했지만 결국 그는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무정산의 사마(邪魔)들이 그런 정도의 위협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인성이 있었다면 결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마두나 사마라고 불리워지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음무극의 위치라는 것이 무정산에 있는 뭇 마두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같이 자신 없는 일을 시험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 결과로 전모백과 하옥지의 목숨이 희생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로서는 경솔하게 그런 짓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에이는 듯 아파왔으며 머리마저도 약간 띵해졌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상위에 올라가 운기행공을 하려하는 데 문 밖에서 누가 불렀다.
『전대협, 계시오?』
전옥린은 정신을 가다듬고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뉘시오?』
문 밖에서 불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미타불! 빈승 오용이 공동파의 비비자와 무당파의 성균 사제와 함께 여기 찾아왔소이다.』
전옥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갑자기 음무극이 어째서 그토록 공손하게 예의를 차려서 자기를 찾아왔는지 그 원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음무극, 너는 한 개의 돌을 던져서 세 마리의 새를 잡으려 했구나!'
그는 격앙되는 감정을 억제하고 천천히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문 밖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는데 과연 오용대사와 비비자, 그리고 좌수신검 성균이었다.
공동의 비비자는 언제나 서북쪽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좀처럼 중원에 오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전옥린은 강호에 나선 이후 그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소림사의 오용대사와 무당의 좌수신검 성균과는 안면이 있었다.
십여년 전 그가 처음으로 강호에 나와 협명을 떨치고 다녔을 때 하남(河南)에서 오용대사와 성균 두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성균은 나이가 젊은 편이었으나 무림에서의 명성은 오히려 대단했다. 그는 전옥린을 만나자 곧 인재를 아끼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두 사람은 하남의 열빈루(悅賓樓)에서 꼬박 사흘을 함께 지내며 같이 술을 마시고 검도를 논하며 유쾌한 나날을 보냈다.
나중에 소림사의 오용대사도 어울리게 되어서 세 사람이 다시 사흘을 같이 지내고 난 후에야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졌던 일이 있었다.
그 후 전옥린은 북방으로 돌아갔고 그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성균과 오용대사를 알아볼 수 있었지만 탁 털어놓고 그들과 만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남삼객이 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양심신공비급을 오대문파에 넘겨주고 싶은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같은 그의 결정은 음무극의 출현으로 시행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양심신공비급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오용대사와 성균은 전옥린을 만나게 되자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그들은 진무진에게서 전옥린의 용모에 관해 들은 바가 있었지만 그 괴인이 바로 과거 수려한 용모로 이름 높았던 금응대협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음무극의 말을 듣고 그들은 커다란 의혹을 느꼈고 이제 일제히 달려와 직접 살펴보기에 이른 것이었다. 전옥린은 문을 열자마자 그들은 그만 멍청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균은 눈을 크게 뜨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옥린은 십여년 전과 비교해서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그의 뇌리에 남아있는 금응검객 전옥린의 인상은 옥면주순의 미남자였다. 지금 바로 그 영기발랄한 얼굴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십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생긴, 지혜의 빛이 그의 눈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이었다.
성균은 격동되어 한 걸음 내딛으며 손을 내밀었다.
『전형, 십년이 넘도록 뵙지 못했구려. 당신은 여전하시오.』
전옥린은 포권을 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 성형, 오용대사, 이런 곳에서 뵙게 되었군요. 실례지만 무슨 볼 일이 있으신지요?』
성균은 그의 차갑고 데면데면한 태도를 보자 대뜸 하려고 하던 말을 씹어 삼키지 않을 수 없었고 겸연쩍어하며 내밀었던 손을 움츠려야 했다.
오용대사도 안색이 약간 변했다.
『전대협, 그간 별래무량하시오?』
전옥린은 한 걸음을 물러섰다.
『대사께서도 별고 없으셨습니까? 오늘 저는……』
비비자는 눈썹을 치켜뜨고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대가 바로 그 옛날 천하에 협명을 떨쳤던 금응대협 전옥린이 맞소?』
전옥린은 대답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만 바로 그렇소이다.』
비비자는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내가 듣기에 금응대협은 기개를 가진 영웅호걸이라 했는데 이제 보니까 듣기와는 영 딴판이로군.』
전옥린은 평상시와 같은 얼굴빛으로 조용하게 물었다.
『도장의 그 말씀은 무슨 뜻인지요?』
비비자는 대답했다.
『오용사형과 성사제의 이야기를 듣자니 한때 당신은 호기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사내대장부라고 했소. 따라서 그들은 당신을 십여년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이곳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놀라고 반가운 마음으로 급히 달려왔는데 당신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대체 그게 뭐요?』
전옥린이 반문했다.
『도장의 말씀은 이분들을 대하는 내 태도가 너무 냉담하다는 것이오?』
비비자는 되물었다.
『그럼 당신의 태도가 오랜 친구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고 생각하시오?』
전옥린은 조용하게 웃었다.
『만약, 오랜 친구들이, 노리는 목적없이 찾아왔다면 나는 마땅히 성의를 다해 대하겠지만 다른 목적을 가지고 왔다면 그렇듯 깍듯이 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비비자는 다시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찾아왔다고 단정하시오?』
전옥린은 말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음무극 이외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오. 그런데 당신네들이 무단히 찾아온 것을 보면 음무극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기 때문일거요.』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성균을 향해 물었다.
『성형, 만약 그대가 양심신공비급에 관계된 일로 오셨다면 소제가 친구로 대접하지 못하는 점을 아무쪼록 용서해 주시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옛날과 같이 통쾌하게 술을 퍼마실 수 있을 것이오.』
성균은 탁 털어놓고 말했다.
『소제는 전형과 술을 마시러 온 것이 아니라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전형께서 먼저 비급을 들먹이시는데, 혹시 그 비급이 이미 전형 손에……』
전옥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말을 가로챘다.
『미안하게 되었구려. 성형, 한 걸음 늦었소이다. 비급은 이미 소제의 소유가 아니라오.』
오용대사가 물었다.
『전대협, 당신의 말씀은 비급을 이미 음무극에게 넘겼다는 뜻이오?』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이다.』
성균은 어리둥절해졌다.
『전형, 어째서 그렇게 했소?』
전옥린은 대답했다.
『소제는 그 한 권의 비급을 한 사람의 목숨과 맞바꿀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오.』
오용대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소승은 시주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구려.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오.』
전옥린은 눈을 빛냈다.
『두 분께서 만약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으시다면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소제가 말씀드리리다. 그리고 이분 도장으로 말하자면……』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매우 죄송스러운 일이오만 소제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함부로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청할 수가 없소이다.』
충천하는 노기로 비비자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옆구리 아래쪽 장검으로 가져갔다. 전옥린의 다음 말이 조금이라도 잘못 나온다면 검을 뽑을 태세였다. 전옥린은 가만히 그의 이러한 동작을 바라보았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오용대사에게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대사께서는 이번 일을 알고 싶지 않으시오? 그렇지 않으시다면 소제는 옛 친구를 소홀히 대접했다는 힐책을 감수할 수 밖에 없소이다.』
오용대사가 미처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비비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을 뽑아서 전옥린을 향해 떨쳤다. 그의 일검은 번개와 흡사했다. 검의 광채는 한 줄기 무지갯빛을 그었고, 검의 파도(劍浪)는 놀랍게도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대뜸 전옥린의 앞쪽을 순식간에 봉쇄하는 것이었다.
그가 펼친 검식은 공동파의 진산검법(眞山劍法)으로 제 칠대 공동조사가 창안한 소주천칠살검(小週天七殺劍) 가운데 가장 독랄한 일식이었다.
이 일식검법은 변화가 복잡했으며 일단 검을 먼저 뽑게 되면 상대방이 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일초검식의 장점은 바로 검세를 펼쳐낸 직후 어떤 각도에서든 검을 뻗쳐내어 전문적으로 상대의 요혈을 찌를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다.
오용대사는 검을 전문으로 연마한 사람이 아니지만 좌수신검 성균은 바로 무당검파의 직계제자인지라 이 공동검법의 일초식이 기이하고 야릇하며 독랄할 뿐만 아니라 변화가 막측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비비자가 대뜸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일식을 펼치자 그만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도형, 이 무슨 짓이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부신 검의 광채가 갑자기 사그러지면서 비비자는 장검을 든 채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온 얼굴에 가득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띄우고서 전옥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당신은 어쩌자고 피하지를 않소?』
전옥린이 되물었다.
『내가 왜 피해야 한단 말이오? 당신에게는 애초에 나를 죽이겠다는 뜻이 없었지 않소?』
비비자는 어리둥절해졌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이런 일을 믿을 수가 없구려. 나는 도저히……』
성균은 비비자가 어째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속에서 그가 아직도 손을 쓸 의도를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옆으로 한걸음 내딛으며 비비자의 앞을 가로 막았다.
『도형, 이러시면 아니되오.』
그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비비자는 몸을 번쩍 날리더니 성균의 오른쪽으로 돌면서 손목을 떨쳐 다시 일검을 찔러댔다.
그의 이 일검은 완전히 조금전과 똑같은 초식이었는데 다만 검끝으로 겨냥하는 각도가 바로 전옥린의 목과 심장 등의 요해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전옥린이 피하든 피하지 않든 간에 상대를 찌르기로 마음먹은 것이 틀림없었다.
오용대사는 한 켠에 서 있었는데 비비자가 느닷없이 살수를 펼치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무겁게 소리를 내질렀다.
『사제, 손을 멈추시게.』
말과 함께 그의 넓다란 소맷자락이 한차례 펄럭였으며 주먹이 벼락같이 뻗쳐지자 태산과 같이 무겁고도 강경한 힘이 곧장 비비자의 장검을 향해 부딪쳐갔다.
그가 펼쳐낸 것이 소림신권인지라 권로의 재빠름과 경력의 맹렬함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 세찬 힘이 막 뻗쳐났을 때, 그는 비비자의 비쩍 마르고 기다란 몸체가 조금전보다도 더욱 빠르게 뒤로 물러서게 되고 되려 방안에 섰던 전옥린이 앞으로 한 걸음 사뿐 쫓아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은 마치 비비자의 장검에 한가닥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서 전옥린을 문밖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정세의 갑작스러운 변화로 오용대사가 내지른 권풍은 오히려 전옥린을 공격하는 것처럼 되었고 비비자와 더불어 협공하는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오용대사가 깜짝 놀라서 재빨리 숨을 들이마시며 쏟아내었던 그 진력을 급히 거둬들이려 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소림문하의 쟁쟁한 고수이고 소림신권을 이미 구성 이상의 경지까지 연성한 상태였지만 그 강대한 주먹 힘을 눈 깜짝할 사이에 완전히 거둬들인다는 것은 역시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권풍이 방향을 바꾸며 소용돌이쳤다. 권풍은 이미 오용대사에 의해 십의 육칠 할은 거두어지게 되었지만 나머지의 기운도 적지 않았는데 전옥린의 몸에 부딪치기 전에 이미 그의 전신 옷자락이 높다랗게 펄럭이며 솟아올랐다.
오용대사는 전옥린이 한번 몸을 흔들하자 그 소용돌이치는 주먹 힘이 어느덧 그의 곁을 스치면서 미끄러져 지나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바로 이때, 오용대사는 뚝! 하는 가벼운 쇳소리를 들었다. 비비자의 손에 들린 장검이 어느덧 두 토막이 나고 앞쪽의 반 토막 검날이 전옥린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오용대사는 아연해졌으며 그제서야 삼안신검 진무진이 전옥린의 일초에 패하게 된 사정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전옥린의 무공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무공의 높고 낮은 차이는 조금도 억지를 부릴 수 없는 일이었으며 간발의 차이만으로도 생사가 결정 날 수 있는 일이다. 더군다나 쌍방의 무공이 이토록 차이가 나는데야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다.
오용대사만 이같은 점을 발견한 것이 아니고 옆에 서있던 성균 또한 똑같은 것을 느꼈다. 그들은 전옥린의 노한 일검이 비비자를 죽이게 될까봐 두려웠다. 오용대사는 재빨리 부르짖었다.
『전시주! 손에 사정을 두시오!』
좌수신검 성균은 전옥린과 비비자 사이에 서 있었는데 놀란김에 차고 있던 왼쪽 허리의 장검을 어느덧 번개같이 뽑아내었다. 무당검법은 무겁고 표일함으로 이름 높았다. 성균이 창졸간에 일검을 떨치자 그 검세는 마치 구름이 떠가고 물이 흐르는 듯 자연스러웠으며 또한 검로가 방정(方正)하여 전옥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결코 전옥린과 손을 쓸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검식이 펼쳐지게 되자 자연히 한가닥 살기가 검 자체에서 용솟음 쳐 나왔다. 전옥린은 오른손 두 손가락에 쥐어진 그 부러진 검으로 성균의 검세를 막았다.
순간 쩡! 하는 소리가 가볍게 울려퍼지면서 손에 들렸던 반 토막의 검조각이 어느덧 성균의 장검과 교차하면서 즉시 두 자루의 검날이 한데 엉키게 되었다.
성균은 장검이 봉쇄되자 불끈 힘을 주었지만 놀랍게도 검을 거둬들일 수도 찌를 수도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그만 깜짝 놀랐다. 전옥린은 두 눈에서 정광(精光)을 쏘아내며 성균을 한번 바라보더니 부러진 검에 실은 힘을 거두어들였다. 성균은 장검을 거둬들이고 망설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전형, 손에 사정을 두어주셔서 고맙소이다.』
전옥린은 손에 들고 있던 반 토막의 검날을 땅바닥에 가만히 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만 가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