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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무강이 물었다.
"당신들은?"
"백검문 서열 사십팔위부터 사십오위의 남자들이라고 해 두지. 어
차피 우리의 이름 따위는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테니까."
남자가 자신의 검을 뽑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나머지 세 명
의 남자들도 똑같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의 검은 각자 모양이나 길이가 달랐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
의 특색에 맞는 검을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군데군데 날이 빠진 그들
의 검신. 그러나 적무강은 그들을 경시하지 않았다. 비록 이가 빠진
검이긴 하지만 손질이 매우 잘 되어 있었다. 검을 아끼지 않는 자들
이라면 저토록 검을 잘 손질하지 못할 것이다.
어슬렁거리며 적무강에게 다가오는 자들, 태만해 보였지만 적무강
은 그들을 경시하지 않았다. 그들의 몸에서 풍겨지는 기도는 한 분야
에서 일가를 이룬 자들만이 내뿜을 수 있는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이 백 명이란 말이군.'
눈앞의 이들이 겁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이 백 명이나
모여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만약 이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그조차 승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천왕성주도 자신을 앞세워
한검우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그래야만 무혈로 이들을 제압할 수 있
을 테니까.
어찌 보면 웃긴 일이다. 서로가 서로의 속셈을 미리 파악하고 있는
데도 상대의 장단에 맞춰서 움직이는 것은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 하
기 위해서였다. 알면서도 속아 주고 움직이는 것은 그만큼 숨겨 놓은
한 수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적무강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
었다. 어차피 한 번은 치르고 넘어가야 할 홍역이었다.
"문주는 어디에 있소?"
"우리를 벤다면 그분에게 가는 길이 열릴 것이다."
"결국 죽여야 그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군."
"이해가 빠르군."
사내의 대답에 적무강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스르릉!
생사도가 도집을 빠져 나오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하지."
쉬아악!
순간 칼바람이 적무강을 향해 몰아쳤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칼바
람은 이제까지 적무강이 서 있던 곳을 그대로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적무강은 이미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팔황보를 이용해 순식간에 남자들의 포위망을 벗어난 적무강은 조
용히 생사도를 그었다. 그러자 부챗살 같은 기운이 일어나며 그들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카ㅡ앙!
그러나 소리도 없이 날아간 단천혈의 기운을 남자들은 너무나 수
월하게 감지해 막아 냈다. 그들의 검에는 어느새 은은한 기운이 맺혀
있었다.
'진짜 무인들...... 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검귀들. 천왕성주가
이들을 꺼릴 만하구나!'
적무강이 생사구류도를 후삼식을 깨달은 후 그의 공격을 이토록
수월하게 파훼한 이들은 저들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일문의 문주가
아닌 자들이 말이다. 그러나 적무강은 이내 다시 그들에게 쇄도해 들
어갔다.
화학!
그의 몸이 순식간에 확대되었어도 네 명의 사내들은 당황하지 않고
절기를 펼쳐 방어했다.
카가가가강!
연신 쇳고리가 터져 나오며 불꽃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동시에
그들이 눈밭을 맹렬히 휘저으며 격돌했다. 그들은 흐릿한 그림자만
남기며 사방으로 움직였다.
파바박!
눈밭에 그들의 발자국이 연신 찍혔다. 그러나 정작 발자국의 주인
은 도저히 형체를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까강!
생사도 위로 네 개의 검이 한꺼번에 작렬했다. 천하의 적무강도
그들의 합공에 몸이 뒤로 밀렸다. 그러나 이내 그는 눈을 빛내며 생
사도를 흔들었다. 그러자 네 명의 사내가 동시에 튕겨 나갔다. 그 순
간을 놓치지 않고 적무강은 혈폭풍의 초식을 펼쳐 냈다.
쿠르르~!
붉디붉은 도기의 폭풍이 일어나며 남자들을 향해 밀려갔다.
"피해!"
처음에 말을 꺼냈던 남자의 말에 다른 남자들이 일제히 기러기처
럼 날아올라 혈폭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적무강이
원하던 바였다.
쉬릭!
그의 몸이 흐릿해진다 싶은 순간 어느새 남자들의 뒤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홍선이 순간적으로 어렸다 사라졌다.
"당신들은 훌륭했소."
츄화학!
그의 말과 함께 도기가 엄청난 기세로 폭출했다. 마치 수십 마리의
늑대가 뛰쳐나오는 듯한 모습, 지옥랑이 발동된 것이다.
콰콰콰콰ㅡ!
남자들은 급히 방어하려 했으나 지옥랑의 초식은 그대로 그들을
휩쓸었다.
"큭!"
"허윽!"
남자들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처음
에 있던 자리에서 수 장 밖의 눈밭에 나뒹굴었다.
그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 연신 선혈을 토해 냈다. 하얗디
하얗던 눈밭은 어느새 그들의 선혈로 인해 붉게 물들었다. 그들의 몸
은 마치 늑대들에게 뜯어 먹힌 듯 처참하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아
직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이들은 발버둥을 치며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몸은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적무강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예전에 상대했던 낭혈문의 남자도 당신들과 마찬가지였소. 그는
죽어서도 싸우려고 했지. 잘 가시오."
적무강은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섬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주위의 집중된 살기가 느껴졌다. 살갗이 부르르 일어날 정도의 고
양된 살기, 마치 백검도 전체가 그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는 것 같았
다.
'광검문의 무인들인가?'
분명 자신들의 동료가 눈앞에서 목숨을 잃는 것을 보았을 텐데도
함부로 덤비지 않는 것은 그들에 대한 통제가 잘 되고 있다는 사실
을 의미했다.
적무강은 그들의 살기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백검도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살기는 더욱 짙어졌다. 일반 사람
이라면 단지 살기만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살기
만 내뿜은 채 적무강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눈이 수북하게 쌓인 숲 속을 지나자
널따란 공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 한 남자가 가부좌를 튼 채
검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의 머리와 어깨에는 하얀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밤새도록 이곳에 있었군. 내가 올 줄 미리 알았단 말인가?'
적무강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상대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역시 망설일 필요
가 없으리라.
그가 말했다.
"내가 왔소."
번쩍!
순간 한검우의 눈이 섬광을 내뿜으며 떠졌다. 지독할 정도로 차가
운 안광에는 그의 살기가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왔구려. 기다리고 있었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아니오. 성주의 기별을 받고 참을 수가 없었소. 그래서 머리도 식
힐 겸해서 나와 있었소. 부하들이 거칠게 대하지 않았는지 모르겠
소."
"웃는 얼굴로 마주할 사이는 아니지 않소."
"그건 그렇군."
푸스스!
한검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몸 위에 쌓였던 눈이 무너져
내렸다. 거의 하룻밤을 눈 속에서 보냈지만 그의 눈빛은 더욱 형형해
져 있었다.
"아마 지금쯤 그 늙은 여우는 어디선가 우리의 행동을 모두 지켜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소."
한검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천왕성주를 늙은 여우로 치부했
다. 그에 적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기 때
문이다.
한검우는 자신의 검집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적 형을 이긴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성주는 나머지 세 개의 문파를 자신에게 복속시킨 것으로 만족하고
올겨울을 보낼 것이오. 하지만 내가 죽고 적 형이 살아남는다면 이야
기가 달라지오. 성주는 자신의 야망을 드러낼 것이오. 그리고 적 형
을 노리겠지."
"짐작하고 있었소."
"그럴 것일 생각했소. 하지만 적 형은 멈추지 않을 것이오. 내 말
이 틀렸소?"
"맞소. 분명 난 멈추지 않을 것이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검우의 입가에 빙긋 웃음이 떠올랐다.
"그럴 줄 알았소. 나 역시 마찬가지니까. 당신과 동생의 대결에 한
점 의혹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그 아이는 내 동생이오.
그러니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소. 이런 나를 이해해 주길 바라오.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이 성주의 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움직일 수
밖에 없소."
"이해하오. 내가 당신의 상황이더라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후후~!"
두 사람의 얼굴에 비슷한 종류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럼 시작해 봅시다."
"그럽시다."
스릉~!
두 사람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이제까지 훈훈했던
분위기와 달리 살벌한 기운이 공터에 가득 찼다.
후ㅡ웅!
그들이 내력을 운용하자 바닥에 쌓여 있던 눈이 허공으로 흩날리
기 시작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천왕성이 존재하는 뇌정도에서 가장 높은 산봉
우리인 천왕봉이었다. 뇌정도와 백검도의 사이는 십여 리 정도였다.
보통 사람의 안력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거리였지
만 그들에게는 장애가 되지 못했다.
조그마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천하를 압도하는 존재감을 뿌리고 있
는 노인, 그는 다름 아닌 천왕성주 사도경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여인은 마도육문 중 하나인 혈화문의 문주 만화성모였
다.
다른 이들을 모두 물리친 채 그들은 산에 올라 물 건너 백검도에
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사도경이 입을 열었다.
"준비는 모두 되었는가?"
"소첩의 혈화문은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뇌정문의 준비는 상공
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흘흘~! 그런가?"
사도경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상공께서는 저들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 것이라고 보십니까?"
"글쎄. 둘 다 자신만의 뚜렷한 장점이 있기에 뭐라 말을 하지 못
하겠구나."
"그런가요?"
"저런 인재들이 뇌정문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안타가울 뿐이로
다. 내 뒤를 이었으면 훌륭히 천왕성을 이끌어 갔을 텐데."
사도경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이 전면을 바라봤다. 이에 만화성
모가 그의 팔짱을 끼며 몸을 밀착시켰다.
"소첩이 낳아 드릴 것이옵니다. 저들 못지않은 인재를......"
"흘흘! 물론이로다. 그렇기에 내가 너를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겠
느냐? 너의 골격이라면 훌륭한 아이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경의 말에 만화성모가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그녀의 나
이 중년을 훨씬 넘긴 지 오래지만 가공할 만한 내공은 그녀의 젊음
을 붙잡아 두고 있었다. 물론 아이를 수태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말
이다.
"사냥을 준비하라고 일러라."
"알겠사옵니다."
만화성모의 눈에 기이한 열기가 떠올랐다.
4
휘류우~!
바닥에 쌓여 있던 눈이 그들의 내력에 떠밀려 사방으로 흩날렸다.
마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외부의
공간과 차단된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단둘이 대치했다.
한검우는 자신의 애검인 홍화(紅花)의 손잡이를 잡았다. 겉모습은
마치 불쏘시개처럼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사실 홍화는 대단한 명검
이었다.
홍화는 삼백 년 전의 명장인 장도가 만든 필생의 역작으로 지난
시간 동안 대대로 광검문주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검신 전체가 붉은
색으로 빛나는 마검, 그것이 바로 홍화였다. 홍화를 든 이가 광검문
주이고, 광검문주가 곧 홍화의 주인이었다.
적무강 역시 생사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생사도 역시 은은
한 붉은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극도로 고양된 살기가 휘몰아쳤다. 방금 전까지 훈훈했던 기운은
온데간데없고,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지독한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
다.
비록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적이었다. 그들은
결코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냉정하리만큼 공과 사를
구별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들의 무정함을 욕할 수는 없었다. 그
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으니까.
팟!
어느 순간 동시에 두 사람이 움직였다. 그들은 흐릿한 잔상만을
남긴 채 격돌했다.
채ㅡ앵!
맑은 쇳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첫 격돌을 시작으로
그들의 몸이 마치 폭풍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무강의 손에서 단천혈을 시작으로 혈수련과 지옥랑 등이 연신
풀어져 나왔다. 생사도에서 은밀한 기운이 일어나며 한검우을 압박
해 들어갔다.
차차창!
그러나 한검우는 소리도 없이 이루어지는 적무강의 공세를 홍화를
몇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 파훼했다. 이제껏 적무강의 상대들이 기세
도 없이 이루어진 그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모습과는 상반
되는 모습이었다.
쉬악!
홍화에서 붉은색 검기가 일어났다.
반월형으로 날아오는 붉은색 검기를 아슬아슬하게 흘려보내며 적
무강은 한검우에게 접근했다.
콰콰ㅡ쾅!
두 사람 사이에서 연신 폭음이 터져나왔다. 그와 함께 그들이 손
에서 펼쳐진 검기와 도기가 대지에 작렬하며 더욱 눈꽃을 피워 올렸
다. 그러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두 사람이 움직인 자리에는 전혀 흔적
이 남지 않았다. 분명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속도로 눈밭
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들의 발자국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답설무흔(踏雪無痕).
그 전설적인 신법이 펼쳐진 것이다. 눈 위를 밟아도 전혀 흔적이
남지 않는, 지고한 내공과 더불어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지 않는 이상
펼칠 수 없다는 신법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적무강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그의 몸은 십여 장
을 날아가 커다란 고목을 향했다. 고목에 부딪치기 직전 적무강은 몸
을 뒤집어 다리로 고목을 박차며 오히려 그 탄력을 이용하여 한검우
를 향해 날아갔다.
피피핏!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눈보라가 몰아쳤다.
카카카캉!
이어서 터져 나오는 쇳소리. 홍화와 생사도가 격돌하면서 허공에
불꽃을 만들어 냈다.
검과 도가 격돌할 때마다 붉은색의 기운이 일어나며 그들의 얼굴에
진한 음영을 만들었다가 사라졌다.
쉬쉬쉭!
순간 한검우가 홍화를 종횡으로 흔들었다. 그러자 바로 지근거리
에서 검강이 일어나며 적무강의 전신을 난자해 왔다. 그러나 적무강
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생사도를 세워 자신의 전면을 막았다. 그러
자 거대한 불꽃의 검이 형성되며 한검우의 기운에 맞섰다.
쾅ㅡ!
단발의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이 모두 뒤로 밀렸다.
한검우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파 오며 내장까지 찌르르 울려왔다. 그런데
도 즐거웠다. 기이한 열기가 그의 눈에 감돌았다. 이런 감정은 혈전
마검(血戰魔劍)을 익힌 이후로 처음이었다.
한검우가 익힌 혈전마검은 오의만 있을 뿐 형태는 없는 검법이었
다. 전체적인 틀은 전해져 내려오지만 당대의 전승자가 어떤 방식으
로 익히는냐에 따라 성취가 크게 달라졌다. 계승자의 능력에 따라 위
력이 천양지차인 검, 그것이 바로 혈전마검이었다. 한검우는 삼백 년
내에 혈전마검을 가장 완벽한 형태로 익혔다는 소리를 듣는 남자였
다. 그리고 가장 원형의 형태로 복원해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검우가 혈전마검을 익힌 이후로 이토록 격렬하게 움직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혈류가 예전과 달리 급격하게 전신을 순환하면서
몸에 열이 올라왔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한검우는 기분 좋게 받아들
였다.
자신은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상대도 최선을 다한다. 지금 이 순
간만큼은 삼백 년의 원한이라든지, 천왕성의 암투라든지, 그가 동생
의 원수라는 것 따위의 복잡한 모든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단지 이 순간만큼은 한 사람의 무인으로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한검우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지금 이 순간 그는 광검
문이라는 문파의 수장이 아니라 한검우라는 한 명의 검사였다.
쩌ㅡ어엉!
두 사람이 다시 격돌을 했다.
찌릿찌릿!
온몸에 전율이 올라왔다.
그들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다
시 백 년이 세월이 지나더라도 이토록 완벽한 적수를 만날 수 있을
까?
검과 도가 부딪치면서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것은 기
이한 경험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검과 도
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들이 살아온 삶을, 자신들이 걸어
온 길을.
도와 검이 그들이 살아온 삶을 말해 주고 있었다.
웅웅!
생사도가 울고 있었다. 마치 사랑스런 연인을 만난 것처럼.
적무강은 그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 역시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한검우와 자신이 적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서로에
게 연민을 느끼고 친밀감을 느낀다지만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
을. 실제의 그들은 죽여야 할 적일 뿐이라는 것을.
쩌어엉!
또 한번의 격돌 이후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멈춰 섰다.
그들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검우가 말했다.
"정말 원 없이 검을 휘둘러보았구려."
"나 역시......"
"이젠 끝을 봐야겠구려. 언제까지고 적 형과 검을 섞고 싶지만 어
떤 일에도 끝은 있는 법. 이제 꿈에서 깨어나야겠구려. 그러나 내가
미몽 속에 잊힌다고 할지라도 결코 적 형을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
오."
"마찬가지요. 한 형과 도를 섞으면서 즐거웠소. 아마 내 평생 두
번 다시 이런 느낌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오."
한검우의 말에 적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 수많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도를 휘둘렀다. 그때마다 그
의 가슴에는 보이지 않는 조그만 상처가 남았다. 그는 자신이 죽였던
사람들의 눈을 잊지 못했다. 그들의 원망 어린 시선은 앙금이 되어
가슴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한검우와의 싸움은 달랐
다.
누가 죽든 그들은 상대에 대한 원망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한검우가
죽든지, 아니면 자신이 그의 손에 죽든지 말이다.
"혈전마검은 총 일곱 가지 초식으로 이루어졌소. 그중 전사식은 이
미 적형이 겪어 봤을 것이오. 그러나 후삼식은 전사식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오. 후삼식은 펼칠 수는 있어도 결코 혼자의 힘으로는 멈출
수 없는 검공이오. 상대가 완전히 숨통이 끊어지든지, 아니면 시전자
인 내가 죽든지, 둘 중의 한 경우에만 멈출 수 있소. 이것이 내 각오
요."
적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생사구류도 중 후삼식을 쓸 것이오."
"좋구려."
"그럼!"
이제 여흥은 끝이다 이제야말로 진짜 시작이자 마지막이었다. 이
제까지 검과 도를 섞으면서 그들이 느꼈던 유대감도, 알 수 없는 친
밀감도 이제는 끝이었다. 이제는 상대를 말살하기 위해 전력을 투구
할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의 기백이 백검도 전체를 덮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상대를 향해 비장의 초식을 펼쳤다.
"챠하핫! 혈전마검 제오식 마검마정(魔劍魔正)!"
"지옥혈(地獄血)!"
콰우우!
순간 거대한 암흑과 붉은 검강의 다발이 허공에서 작렬했다. 세상
의 종말이 찾아온 듯 그렇게 거대한 기운이 충돌했다.
방원 십 장 안의 모든 것이 초토화되며 거친 기의 폭풍이 사방으로
몰아쳤다. 도저히 인간끼리의 격돌이라고 볼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서 펼쳐지고 있었다.
적무강의 상의가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동시에 그의 전신
에 핏발이 흩날렸다. 그것은 한검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전신에
도 핏방울이 바람에 날렸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전
신을 거세게 짓눌러 오는 막대한 압력 속에서도, 살을 에는 강기의
기운 속에서도 그들은 웃었다. 그리고 상대의 숨통을 끊기 위해 움직
였다.
아직 격돌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공간을 향해 그들이 다시 검과 도
를 휘둘렀다.
한검우의 홍화가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혈전마검 제육식 마령동참(魔靈疼斬)!"
"제팔도 무정혈(無情血)!"
생사도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터져 나왔다.
무정(無情)이면 단정(斷情)이라......
붉은 강기가 중첩이 되고 생사도의 혈옥이 요사스런 붉은빛을 발
하며 출렁였다. 중첩된 강기는 한 점으로 모이고 한검우가 만들어 낸
강기의 벽과 격돌했다.
콰콰ㅡ쾅!
강기가 충돌하면서 거센 폭발을 일으켰다.
"크윽!"
"큽!"
두 사람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내장을 울리는 충
격과 막대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코피가 터져 나왔다. 호각의 힘
이 충돌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그러나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상대는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둘 중의 하나가 완전히 멈춰야만 끝나는
싸움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적무강의 눈이 한검우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은......
'당신은 웃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적무강은 한검우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문득 궁금해
졌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을.
한검우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은......
웃고 있었다. 자신 역시 한검우와 똑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결코 후회하지 않는 싸움. 내가 죽더라도.....'
적무강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이번엔 그가 먼저였다.
"생사구류도 제구도 천인혈(天刃血)!"
허공 높이 치솟아 오르며 그가 천지양단의 자세를 취했다.
한검우 역시 지지 않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허리가 완전히
뒤틀린다 싶은 순간 폭발적으로 튕겨 나오면 홍화를 휘둘렀다.
"혈전마검 제칠식 생사윤회(生死輪回)!"
순간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갔다.
그들을 휘감던 눈보라는 거대한 두 기운에 몸서리치며 녹아내렸
고, 백검도 전체가 거대한 진동에 몸을 떨었다.
푸드득!
백검도에 살던 새들이 때 아닌 천재지변에 놀라 날아올랐고 들짐
승들은 산속으로 몸을 피했다. 미물들조차 공포에 질리게 만든 엄청
난 충격이 백검도를 강타했다.
잠시 후 백검도를 하얗게 물들이던 빛이 조금씩 사그라졌다.
털썩!
이어 두 사람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무릎을 꿇은 채 서
로를 바라보았다.
문득 한검우가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핫! 좋구나, 정말 좋...... 우웨엑!"
그가 웃음을 터트리다 말고 검붉은 선혈을 토해 냈다.
투둑!
선혈 속에 섞인 부스러기들, 그것은 한검우의 내장 조각이었다. 이
미 한검우의 내부는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설혹 대라신선이 온다 해
도 그를 살려낼 수는 없을 것이다.
"크흑!"
적무강의 입가를 따라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 역시 한검우의 최후
초식에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혈을 억지로 삼키며
한검우를 바라봤다.
한검우는 근처의 박살난 바위 조각에 간신히 몸을 기댄 채 누워 있
었다. 그가 적무강을 힘겹게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 한 끗 차이......였어. 그......렇지 않소?"
"맞소! 한 끗 차이였소."
적무강은 그의 말에 수긍했다.
누가 이겼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싸움이엇다. 그만큼 그들의
실력은 호각이었다. 적무강이 이긴 것은 그가 살고자 하는 욕구가 더
욱 강했기 때문이다. 그에겐 돌아갈 곳이 있었다. 이곳은 그가 죽을
곳이 아니었다. 그런 마음가짐이 승패를 가른 것이다.
"하하하! 이...렇게 됐...으니 이제 그 빌...어먹을 늙...은이가
나타나겠군."
붉은 핏발이 선 한검우의 눈이 뇌정도가 존재하는 방향을 향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짝짝짝!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한검우가 흐릿해지는 눈을 들어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일단
의 무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빌...어 먹을 늙...은이! 역시나...였군. 정말 더럽게......"
죽어 가는 한검우의 입에서 독설이 토해져 나왔다. 그러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흘흘~! 이건 정말 기대 밖이라네. 설마 자네가 정말로 무릎을 꿇
을 줄이야."
적무강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천왕
성주 사도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생전 처음 보는 궁
장의 미부 한 명과 낯익은 두 사람이 있었다.
"해...서연, 북리강."
궁장 미부 옆에 있는 두 사람은 분명 해서연과 북리강이었다. 그
둘은 적무강을 보며 교소를 터트렸다.
"호호호~! 대단하구나. 정말 광검문주를 쓰러트릴 줄이야. 정말
대단해. 하지만 너의 신화도 여기에서 끝이다."
그녀가 적무강을 원독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적
무강에게 당했던 치욕의 순간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적무강이 허리를 쭉 피며 사도경에게 말했다.
"우리의 비무는 며칠 후로 알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거래 아니
었소?"
"물론 그랬지. 그런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일정이 변했네."
사도경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그의 눈이 궁장 미부와
북리강 등을 향했다.
"본래 천왕성의 모든 무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네의 비무를 받아
주려 했으나 이들이 반대해서 일정이 바뀌었네. 이들은 천왕성을 어
지럽히고 종국에는 광검문주까지 참살한 자네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하네. 이들의 요구가 너무나 거세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네."
사도경의 말에 뒤에 서 있던 궁장 미부, 만화성모가 살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때 북리강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자신의 허전한 왼쪽 어깨를
가리키며 말했다.
"난 아직 잊지 않고 있다. 네 녀석에게도 내가 당했던 고통을 맛
보게 해 주마."
그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때 한검우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천하의 천왕...성주가 이런 개...새끼인 줄 천하의 그
누가 알까? 개...새끼도 이렇게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지는
않...겠다."
그의 조소에 사도경의 미간이 지푸려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얼굴
을 펴며 말했다.
"자네의 광검문, 이제 내가 접수하겠네. 이로서 천왕성은 처음으
로 완전한 하나가 되는 걸세. 그건 자네도 원하는 바이지 않는가?"
"퉤엑!"
사도경의 말에 한검우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는 사도경을 노려
봤다.
"당...신은 그릇이 안 돼. 그렇...기에 나를 포용...하지 못했던
거야.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고.....“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