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소(無名簫)] 나란히 가지 않아도…(21)
사마웅의 웃음을 보며 황보미완의
표정이 약간 차가워졌다.
“공자님의 그 말씀이 아니더라도 저는 아름다워요.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제가 아름다운가 아닌가가 아니겠죠.”
여전히 웃으며 사마웅이 대꾸했다.
“천하인들이 얘길 하오. 미인과 노닐고 싶다면 악양성의 동정루로 가라.
그곳 죽실(竹室)에만 가도 그대의 뜻은 이뤄지리라.
아름다움에도 격(格)이 있음을 알고 싶다면 동정루로 가라.
그곳 국실(菊室)에 들어서는 순간 아름다움의 격을 알게 되리라.
절세의 미를 보고 싶다면 동정루로 가라.
난실(蘭室)에서 그대는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황보미완이 약간 차가운 표정 그대로 사마웅을 지켜보는 가운데,
사마웅은 시를 읊듯 아름다움과 동정루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설파(說破)하고 있었다.
난실의 절세미인까지 얘기한 사마웅은 살피듯 황보미완을 쳐다봤다.
그 얼굴에 피어있는 웃음이야말로 아름다움이
아닐까라고 황보미완이 생각하는 순간,
사마웅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름다움이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믿지 못한다면 동정루로 가라.
그곳 매실(梅室)에 들어서는 순간 생물(生物)로서 움직이는 아름다움 그 자체를 보리라.”
“공자께서 탐미주의자(眈美主義者)임을 저는 미처 몰랐군요.”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난 사람은 모두 다 아름다움을 찾는 법이오.
나만이 특별한 건 아닌 것이오.”
“그런데 우리의 얘기가 언제부터 이렇게 길을 잃은 거죠?
저는 공자께서 수라마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얘기했는데,
공자께선 어느새 제가 아름답다로 결론을 지으시려는군요.”
“길을 걷다가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어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향기를 맡은 거지요.
가던 길을 잠시 멈췄을 뿐, 길을 잃은 건 아니라는 뜻이오.”
“그럼 대답하실 수 있겠군요. 제 의문에 대해서.”
사마웅이 웃으며 끄덕였다. 끄덕이며 그가 물었다.
“우선 내 의문부터 먼저 물어봅시다.
그대는 지금 어느 것 하나 합당한 증거라곤 없이 그저 불쑥,
느낌 하나로 내가 수라마인이 아니냐고 묻는데,
이건 신비문의 숨은 전략가인 당신으로선
하지 않는 일이고 하지 않아야 할 일 아니겠소?”
“때로 주어진 여러 가지 근거보다 느낌
그 자체를 믿고 싶을 때가 있죠. 지금이 그런 때이고요.”
“그럼 그 느낌을 믿으시면 되겠구료. 뭣하러 구태어 확인을 하려는 것이오?”
“용사공자라 불리는 사람에 대한 제 예의지요.”
“예의라… 만약 내가 그대의 느낌이 틀렸다고 하면
그대는 그대의 느낌을 던져 버리겠소?”
“공자님께서 직접 아니시라는데 제가 제 느낌을 고집할 일은 없지요.”
사마웅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화선지를 하나 주시겠소?”
화선지 한 장이 사마웅 앞에 펼쳐졌다.
사마웅이 붓을 휘둘러갔다. 몇 개의 선이 그어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한 사람의 얼굴이 그려졌다
. 수라마인의 얼굴이었다.
그리기를 마친 사마웅이 화선지를 펼쳐들고 쳐다보더니
화선지를 황보미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태평림 관도(官道)에 나타난 수라마인의 얼굴이오.
내가 그렸지만 잘 그렸구먼. 똑같애!”
화선지를 받아들고 쳐다보고 있는 황보미완의
귓가에 갑자기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듣기 힘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지금 그대가 듣고 있는 이 목소리와 똑같소.
만약 그대가 그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더라도
이 목소리만 듣는다면 바로 수라마인이라고 생각해도 될 거요.”
황보미완이 방긋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그 목소리를 들으면 수라마인이라고 생각하면 되는군요.”
그녀가 삼매진화를 일으키자 그녀 손에서 수라마인의
초상화가 한줌 재로 변하고 있었다.
[무명소(無名簫)]254-나란히 가지 않아도...(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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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진우명을 구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수라마인에게 있어 진우명은 적일 수가 있을텐데 말이에요.”
수라마인의 초상이 그려진 화선지를 삼매진화로
한 줌 재로 만들어 버린 황보미완이 천연덕스럽게 사마웅에게
묻고 있었다.
본래의 맑은 목소리로 사마웅이 대답했다.
“적이 아닌가 보지요.”
황보미완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제가 아는 진우명은 사마전 대협을 가장 존경하죠.
그를 닮고 싶어 해요. 그러기에 천하제패(天下制覇)의
야망을 품은 자들은 그와 적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제 오라버니가 굳이 진우명을 제거하려는 이유 중의 가장 큰
것도 그것이니까요.”
사마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라마인의 야망이 천하제패가 아닌 모양이구료.
그게 아니라면 적이 될 이유가 없다니까 말이오.”
“그럼 수라마인은 무엇을 위하여 움직이는 거죠?”
바짝 다가서듯 묻는 그녀의 질문에 사마웅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수라마인에게 물어야지, 용사공자에게 물어서 무엇 하겠소?”
“공자님께 듣고 싶어요. 수라마인은 무엇을 위하여 움직이는 거죠?”
“수라마인은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 모양입디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움직이는 거겠지요.”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요, 수라마인은?”
사마웅이 빙그레 웃었다. 웃음은 아름다웠지만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고 황보미완은 생각했다.
“글쎄 그는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요?
흠. 인간의 어리석음? 그렇게 인간을 어리석게 만드는 끝없는 탐욕?
정의(正義)니 대망(大望)이니 이상(理想)이니 하는
고상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결국은 탐욕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거?”
“그걸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은 건데요?”
“인간이라고 불리는 동물들이겠지요.
아하! 어쩌면 수라마인이 진정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인간이 결국은
한낱 짐승에 불과할 뿐이라는 건지도 모르겠소. 어떻소? 내 추리가?”
장난스레 얘기하던 사마웅의 눈길이 슬픈 듯
바라보는 황보미완의 눈길과 마주쳤다.
“내 추리가 한심하다는 거요, 그 눈초리는?”
황보미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으며 말했다.
“왜 그는… 그래요… 수라마인은 인간이
한낱 짐승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걸까요?”
“인간이 진정 그들이 생각하는 인간이 될 수 있으려면,
먼저 짐승임을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그런 뜻이겠지요.”
“사람은 모두 짐승인가요?
아니, 공자님의 말씀 저는 공감해요.
저 역시 미망에 사로잡힌 한 마리 짐승…
맞아요. 그런데 공자님은 아니잖아요?
사람 모두가 짐승은 아니잖아요? 진우명도 짐승 아니고,
공자님도 아니고…
인간이 모두 짐승인건 아니잖아요?”
언제나 허무한 표정의 그녀에게서
허무와는 거리가 먼 격정적인 음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사마웅이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나라고 짐승이 아니겠소?
그대가 그대 스스로의 미망으로 자신을 짐승이라고 인정하듯
나 역시 그런 이유로 오래 전부터 짐승인거요.
아마도 짐승이 아닌 인간도 있을 거요.
당신 곁에는 진우명이 인간으로 서 있고,
내 곁에는 내 아버지가 인간으로 서 있지요.
그런데 세상이 인간세상이 아니고 짐승들의 세상이라면,
그 속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오히려 고통 아니겠소?
더욱이 그 짐승들을 짐승이라 깨닫지 못하고 인간으로 생각한다면
더욱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