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해설 자아 인식과 삶의 지향적 시적 진실 --전승진 시집 『자벌레의 오체투지』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1. ‘나’의 존재를 이해하는 삶의 현장 우리들이 자아(自我)를 인식하고 삶의 지표를 정립하는 일은 곧 존재를 이해하면서 성찰하고 다시 미래지향의 가치관을 탐색하는 인생 노정(路程)에서 다양한 상황에 대한 문제점들이 생성하게 되는데 우리 시인들은 이를 자신의 지적인 상상을 통해서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살아가는 지향점에서 획득한 인생론이나 존재의 의미를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일은 시인들만이 활용할 수 있는 환상적인 삶의 한 방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 생존에 대한 열망과 애착이 있다. 거기에서 체득(體得)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여운은 생생하게 재생되고 이를 기본으로 하여 시적인 이미지가 생성되어 한 편의 작품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여기 전승진의 시집 『자벌레의 오체투지』의 작품들을 일별하면서 이와 같은 담론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그가 추구하고 탐색하는 화두(話頭)가 바로 그의 인생의 애환에서 적시하는 다채로운 상황들이 아직도 명징(明澄)한 존재의식과 접목하지 못하는 삶의 단면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나’라는 주체를 설정하고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 내 인생만은 다를 거로 생각하며 /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았지만 /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주지 않으면 / 살았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해 / 세상에 나는 /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겠지(「화양연화」중에서)‘라는 어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생명과 존재의 확인을 통해서 진정한 ’나‘를 인식하고자 그의 혜안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를 살아내는 기술로 잃을 것 버릴 것 없어져 세상이 덜 무서워질 때 소박한 나의 꿈은 나를 잃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나인 채로 살고 싶었고 나대로 살기를 갈망하였는데 나답지 않을 때가 있었구나 --중략-- 살아갈 날이 나에겐 얼마나 남아있을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것 살아가야 할 이유는 살아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화양연화」 중에서 그렇다. 전승진 시인은 ‘나’를 추구하거나 탐색하는 심저(心底)가 적나라하게 현현되고 있는데 ‘하루를 살아내는 기술로 / 잃을 것 버릴 것 없어져 / 세상이 덜 무서워질 때’라는 성찰의 현장에서 그의 소박한 소망은 ‘나를 잃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 나인 채로 살고 싶었고 / 나대로 살기를 갈망하였는데 / 나답지 않을 때가 있었’다는 소회(素懷)를 통해서 자아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나’는 나의 중심에서 사유(思惟)하는 인생과 그 존재의 진실은 무엇인가를 자신의 철학으로 확립하고 있다. 그는 ‘언제는 나였고 / 언제는 내가 아니었던가 / 내가 가는 이 길이 내 길이고 / 그대로 나 자신이면 족’하다는 어조로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안온한 심연(深淵)에 흡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마지막 결론에서 적시한 바와 같이 ‘살아가야 할 이유는 / 살아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그의 진정한 내심(內心)은 바로 그가 평소에 의문으로 남아있던 ‘살아갈 날’의 시간성이 그의 뇌리에서 말끔하게 지워지는 시적상황은 그가 그간에 축적한 인내와 지향의 삶이 ‘나’를 변환시키고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 상상 속 나와 현실 속 나 자신을 위해 지난 흔적 미래 세상을 찾아 눈을 감고 찾아간 곳은 시간의 어두운 비밀 속 스스로 생각에 갇혔던 내가 나로서 살아본 세상 내가 나로서 살아야 할 삶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세상은 내 것처럼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사우나에서」중에서 전승진 시인은 다시 그가 즐겨 찾는 사우나에서도 이처럼 ‘나’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실재의 현실과 관념의 정신적인 상상의 ‘나’와의 비교 탐구를 위해서 ‘시간의 어두운 비밀 속’을 헤매고 있었으나 지금은 과거(‘내가 나로서 살아본 세상’)에서 현재(‘내가 나로서 살아야 할 삶’)로 인식이 전환하는 중대한 심리적인 변화를 감지(感知)하면서 ‘세상은 내 것처럼 /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단정적인 결론을 적시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공감을 유로(流露)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내 삶은 내 욕심에서 시작되기에 / 내 삶을 관조하며 /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한 / 내가 책임져야 할 / 그것 역시 오로지 나일뿐’이라는 그가 삶에서 감응(感應)한 숙제가 ‘내 인생 최고의 /행복이고 행운’이라는 인생의 궁극적인 지표를 확고하게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작품 「나의 발자국」 「이름을 준다는 것」 「서광사에서」 「물맴이」 「내가 있거나 말거나」 등에서 그가 시적 소재로 천착한 ‘나’에 대한 탐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그의 내면에 잠재한 자아와 존재의 인식과 성찰의 감도(感度)를 공감하게 하는 흡인력을 발양하고 있는 것이다. 2. 삶에 대한 의문형과 해법의 양상 전승진 시인은 지금까지 ‘나’에 대한 집중적 탐구에서 다시 재인식하게 된 중요한 시점은 삶에 대한 의문을 풀어나가는 시법(詩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미지(未知)의 생(生)에 대한 해법 찾기에 골몰하고 있는데 우선 그는 의문형의 문장으로 질문을 제시하고 있음을 간과(看過)하지 못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해받으며 / 살아갈 생각은 없지만 / 나도 나를 모르는데 / 누가 나를 알아나 줄까’라는 의문형 종결어미의 수사법으로 화두를 먼저 던지면서 스스로 자문자답의 형태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그의 내면 의식을 이해하게 된다. 나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무슨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까 내가 조금 더 크면 저 별도 잡아낼 거로 생각했는데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니란 걸 이 세상이 천국도 아니라는 걸 동전 한두 개로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세상이라는 걸 알게는 되었지만 한 번도 죽어보지 않은 사람이 세상의 참맛을 알기나 할까 살다 보니 살아진 세상에 어차피 미련은 없지만 살다 보니 그렇다 해도 이렇게 삶을 살아왔기에 나 자신을 벌하기 위해서라도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그림자 없는 바람처럼 삶의 빗장을 열어야 한다 멈춰서면 바람이 아니듯 --「멈춰서면 바람이 아니듯」중에서 전승진 시인은 삶에 대하여 많은 의문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는 먼저 ‘나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 무슨 생각을 가지고 /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까’라는 자문의 어조로 회의적 또는 염세적인 심경의 상황으로 전개하는 시법은 다분히 그가 절망의 구조적인 삶의 형태에서 일탈(逸脫)하려는 심리적인 변화의 욕구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하듯이 삶은 생명과 상관하는 생사의 문제와 동행하면서 인생을 구가하게 된다. 일찍이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은 ‘삶은 실험이다. 많은 실험을 할수록 좋다’는 언지로 인간의 생애에서 애환을 통한 생존의 성숙을 예비하는 교시적(敎示的)인 담론처럼 그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 좋은 일만은 아니란 걸 / 이 세상이 천국도 아니라는 걸 / 동전 한두 개로 인간의 가치가 / 결정되는 세상이라는 걸 / 알게는 되었’고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 그림자 없는 바람처럼 / 삶의 빗장을 열어야 한다’는 해법을 인지(認知)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승진 시인의 삶에 대한 자신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겠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진 / 새우와 고래는 / 생명의 가치가 같고 / 백년 사는 거북이와 / 하루 를 사는 하루살이의 / 삶의 크기는 같다(「우문현답」중에서) -성숙한 삶의 경계에 서니 / 하루하루 하나하나가 / 바라볼 수 있음만으로 신비롭다(「종심(從心)」 중에서) -살기 위해서라 해도 / 삶 자체가 위선이라 해도 / 인간에게 잘못이 있다면 / 그것은 / 신의 잘못이라 해야 하겠지(「살아있음은」 중에서) -주지도 못해본 / 받지도 못해본 처절한 삶 /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 내 인생의 이력서에 / 나를 애달프다 썼을까(「이제부터」 중에서) 그리고 전승진 시인은 시적 표현에서 하나의 관습처럼 의문형 종결어미를 자주 사용하면서 삶에 대한 미지의 해법을 탐색하고 있어서 흥미롭게 몰입하게 된다. 몇 가지 간추리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작품 「멈춰선 바람이 아니듯」 중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살아있으니까 살아야 하나 / 살아야 하니까 살아야 하나’ 또는 ‘나도 나를 모르는데 / 누가 나를 알아나 줄까’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하려고 / 어떤 흔적을 남기려고 / 엄마의 가슴을 열고 나왔든가’는 등의 어조로 그의 의문은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의문의 적시는 어떤 결론을 창출하기 위한 하나의 질문에 해당되어 그는 이의 해답을 인지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작품 「내가 있거나 말거나」중에서 ‘나는 왜 이렇게 여기 있어야 하는가 / 날개 잃은 나는 / 여기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또는 ‘나는 언제쯤 꽃길을 걸을 수 있을까 / 나로 인해 세상이 /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을까 / 나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얼마일까’ 등에서도 그는 나와 삶에 대한 깊은 애정의 해법을 탐색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 밖에도 그의 의문은 작품 「넋두리」「별들이 윤슬처럼」 등의 시편들에서도 아직 풀지 못한 인생문제들이 많은 의문을 내포하고 있어서 존재의식이나 자아인식에서 회의(懷疑)하면서 지속적으로 탐구하면서 또 다른 형태의 가치관을 확립하려는 그의 지적인 욕구를 엿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이어령 교수가 ‘의문‘이야 말로 창조의 산모(産母)이며 발전의 도약대이다’라는 논지를 대입해보면 생에 대한 의문은 새로운 지표를 수립하기 위한 삶의 한 과정이 아닌가 생각되어 진다. 3. 지향적인 인식에서의 기원 의식 미국의 시인 칼 센드버그는 시란 무지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왜 사라지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환상의 대본이라고 했다. 이렇게 무지개에 대한 ‘왜’라는 의문은 과학논리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들의 심정에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현실적 갈등문제를 비롯하여 다양한 현상들이 발현하게 되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 탐색에도 이 ‘왜’라는 문법상 부사를 많이 사용하게 된다. 전승진 시인도 현재 동행하고 있는 현실 생활(real life)에서 감내(堪耐)해야 하는 다채로운 실상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현명한 대처방안인가 하는 문제에 몰입하면서 무지개가 왜 생성하고 소멸하는가를 인생의 의심점을 심층적으로 접근하려는 의식의 흐름을 이해하게 한다. 나무줄기에 의태(擬態)하여 있을 것이지 언제 나에게 다가섰을까 자벌레 한 마리가 한 자 두 자 재어 가다 무릎 위에서 얼핏 멈추어 선다 나도 감전된 듯 시선을 멈춘다 자벌레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재게 되면 그 사람은 죽는다고 하던데 한 자 두 자 재며 가는 길에 어떤 저항이 있었기에 옴의 법칙 Ω자로 쉬는 것일까 자벌레는 얼마를 측량해야 얼마나 오체투지 참회 고행을 해야 우아하게 우화(羽化)하여 넓은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을까 --「자벌레의 오체투지」 전문 전승진 시인은 이 시집의 표제시인 ‘자벌레의 오체투지’의 삶을 조감하면서 그의 내면에 잠재한 의문들은 어느 날 문득 응시한 자벌레 한 마리의 동작에 감전하고 있다. 그의 예리한 감성은 나와 자벌레와의 행동에서 동행을 의식하면서 ‘언제 나에게 다가섰을까’ 혹은 ‘한 자 두 자 재며 가는 길에 / 어떤 저항이 있었’ 나, 그리고 ‘얼마나 오체투지 참회 고행을 해야 / 우아하게 우화(羽化)하여 / 넓은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을까’라는 고뇌의 어조가 그를 혼란스럽게 흔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뇌와 갈등은 우리 인간들의 심성(心性)인 정의(情誼)에서 발현하게 되는데 인간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현현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전승진 시인은 이러한 욕구는 지적으로 승화한 정신적인 서정성을 강조하는 시법으로 이의 해답을 찾고자 하는 여력을 분명하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인간이 만든 껍질을 벗어버리고 태어난 본모습으로 쏟아지는 달빛 속으로 강아지처럼 달려가고 싶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데 무작정 손짓 발짓 휘두르고 허둥대며 소리 지르고 싶다 눈물 콧물 흘리며 노래하고 싶다 뒹굴며 몸부림도 치고 싶다 한 곳에 머물지 않는 바람처럼 채워지지 않는 갈증 찾아 절제된 모습에서 한 번쯤은 일탈하고 싶다 이런 것이 본래 나였던 것처럼 --「머물지 않는 바람처럼」 전문 여기에서 그는 ‘싶다’라는 문법상의 보조형용사를 심저에서 꺼집어내어 자신이 취하고자 하는 심정의 일단을 분사(噴射)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소망이나 여망이 성취되기를 ‘머물지 않는 바람처럼’ 간절히 바라는 시법으로 전환하고 있다. 그의 간구(懇求)는 ‘태어난 본모습으로 / 쏟아지는 달빛 속으로 / 강아지처럼 달려가고 싶다’라거나 ‘무작정 손짓 발짓 휘두르고 / 허둥대며 소리 지르고 싶다 / 눈물 콧물 흘리며 노래하고 싶다 / 뒹굴며 몸부림도 치고 싶다’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갈증 찾아 / 절제된 모습에서 / 한 번쯤은 일탈하고 싶다’는 강렬한 어조로 자신의 신념을 ‘싶다’라는 작심(作心)의 의ㅣ지로 나타내고 있어서 우리들의 공감을 광범위하게 흡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는 마지막 행에서 ‘이런 것이 본래 나였던 것처럼’이라는 ‘본래의 나’에게 초점을 맞추고 이 세상 풍파에서 벗어나 ‘본래의 나’의 지향을 탐색하는 그의 시적인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희구(希求)의 상황에서도 진정한 ‘나’를 심인(尋人)하는 일종의 방편으로 시법을 전개하고 있어서 작품 「이름을 준다는 것」 중에서 ‘나는 너를 어떻게 부르고 있나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 이름을 헛되게 할 수 없는 / 이름에 걸맞게 살아왔던가’하고 자성하면서 ‘네가 나를 지켜봄에 / 내가 나를 지켜봄에 / 허울이 하나씩 벗겨지고 있다’는 어조로 ‘나’에 대한 생태적인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서는 ‘본시에 있던 나’를 찾아서 돌아간다는 개념으로 일상생활이 나를 덮어버려서 진정한 내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진정한 나를 발견하지 못하지만 그속에 파묻혀서 보이지 않는 자신을 되찾을 때 사람은 실존(existenz)하게 된다고 했다. 이처럼 전승진 시인은 ‘나’를 찾기 위해서 다변적인 의문을 설정하고 그 해답을 탐색하기 위해서 ‘어쩌면 내일 / 내가 이 세상에 없을지라도 / 다음 생애 역시 / 나는 나로 다시 태어났으면(「내가 여기 있었구나」 중에서)’하는 건전한 의식이 시적 원류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4. ‘이슬’이 꽃이 되는 서정적 이미지 전승진 시인은 서정시인이다. ‘나’를 탐구하고 ‘삶’을 탐색하는 성찰의 시인이기도 하지만 결국 나와 삶의 동행에서 조망하거나 응시한 인생의 향기는 자연 서정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이에 심취한 서정성에 감읍(感泣)하는 진솔한 그의 시정신과 이를 승화하는 시혼(詩魂)을 공감하게 한다. 누군가 잊을 수 없는 가질 수 없는 슬픔에 벌개미취꽃이 되어 차마 말도 못 하고 곱게 울다간 눈물 한 방울 --「이슬」 전문 어디로 가야 하나 갈 길 잃어 허전한 가슴에 귀린처럼 유성처럼 한 줄기 빛으로 살며시 다가서는 노란 꽃잎 하나 --「반딧불」 전문 이 작품 「이슬」과 「반딧불」은 시각적으로 이미지를 창출하는 무기적 물체와 유기적 사물로 분리하여 관찰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사물에 투영된 이미지는 모두가 꽃으로 전이(轉移)하여 우리 인간들과 교감하는 시법이 전승진 시인의 인생 철학으로 간직한 외연(外延)과 내포(內包)의 진리를 형상화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 그는 ‘이슬=개미취꽃’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잊을 수 없는 슬픔과 ‘가질 수 없는 슬픔’으로 ‘곱게 울다간 / 눈물 한 방울’로 ‘이슬’은 그의 내면에서 서정적 자아의 이미지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그는 ‘반딧불’이라는 유기체에서 그 불빛이 귀린(鬼燐)과 유성(流星)처럼 변하는 ‘한 줄기 빛’이 그의 심중(心中)에서는 ‘노란 꽃잎’으로 재생된 이미지가 바로 그가 추구하고 구현하려는 시적인 이상향의 여망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이처럼 아름다우면 되잖아요 과거를 묻지 마세요 이렇게 우아하면 되지 않나요 세월이 벌려놓은 추억의 간격은 잊어주세요 하늘의 조화와 상관없이 사락사락 날고만 싶거든요 꽃 찾아 향기 찾아가는 저와 함께 가실까요 꽃길만 걷게 될 거예요 당신도 예쁜 꽃이 될 겁니다 --「나비」 전문 전승진 시인은 이 ‘나비’를 통해서도 결론에서 적시하였듯이 ‘꽃 찾아 향기 찾아가는 / 저와 함께 가실까요 / 꽃길만 걷게 될 거예요 / 당신도 / 예쁜 꽃이 될 겁니다’라는 인식 단정이 꽃과 나비의 불가분의 상관성에서 그는 ‘추억의 간격’과 ‘하늘의 조화’가 ‘사락사락 날고 싶’은 나비의 기원은 ‘예쁜 꽃’으로 환생하는 변용(變容)의 시법을 공감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착목(着目)하는 만유(萬有)의 자연 사물에서 이처럼 생동하는 지적인 이미지로 변모하는 고도(高度)의 시법은 바로 그가 작품 「개심사」 중에서 ‘꽃잎 사이 벌 나비 / 마음을 여는 / 하얀 웃음소리’이거나 ‘살며시 어우러지는 / 잔잔한 불경 소리 / 세상이 편안해’지는 심성의 조화도 한결같이 이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꽃의 변신은 보편적인 사물에서 뿐만 아니라 ‘꽃=당신’이라는 등식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세상에서 / 제일 예쁜 꽃 / 당신과 / 함께 피는 꽃 //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 내 곁에 / 함께 하는 당신(「예쁜 꽃」 중에서)‘라거나 ’꽃 앞에 서 있는 당신 // 당신은 // 이미 꽃이 되었습니다 // 당신 곁에 있으니 // 나 또한 (「꽃의 꽃」 전문)‘ 과 같이 꽃에 대한 예찬과 함께 영원한 미학적 연결로 주제를 명민(明敏)하게 수렴(收斂)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밖에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대할 수 있는 감나무, 단풍잎, 옥수수, 호박, 까치밥 등등의 사물과 ‘가을 하늘’ 등의 자연 현상에서도 그의 서정적 이미지는 유감없이 발현되고 있다. 잔바람 가슴 조이며 으스스 별 무리 흐느적이는 밤 불그스레 등 하나 들고 고운 임 기다린다 --「감나무」 전문 이 짧은 표현에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이미지나 주제의 이해는 많은 사유를 요구한다. 단순한 사물 ‘감나무’가 내포한 무한의 시적인 의미는 막연한 ‘감나무=기다림’을 훨씬 벗어나 상황이나 전개가 사유의 진폭을 확대하는 시법에 공감을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시법은 앞에서 다채롭게 인용한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배제한 순전히 객관적인 조응(調應)으로 사물을 응시하면서 전승진 시인의 순정적인 메시지를 표출하고 있어서 정감과 감응을 배가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5. 결-존재 현장에서 당면한 해법 찾기 이제 전승진 시집 『자벌레의 오체투지』의 읽기를 마무리해야겠다. 그는 시집 전체의 흐름에서 ‘나’라는 주체가 당면한 다변적인 현실적 갈등과 고뇌에서 탈출하려는 심적인 지향성이 잘 반추되고 있어서 그가 진실로 성취해야 할 인생의 지표는 바로 시라는 정신적 매체에 그가 보편적 사유를 가미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는 열정을 엿보게 하고 있다. 옛 로마의 대시인 호라티우스는 그의 『시론』에서 언급했듯이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말처럼 시는 생에 대한 불타는 창조적 정신의 결실로서 공유할 수 있는 주제가 명징하게 적시되어야 할 것이다. 전승진 시인은 이러한 원대한 사유의 발흥으로 이 시집에서 나의 존재를 인식하는 삶의 현장에서는 많은 의문과 그 해법을 탐구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생성하는 문제들을 지향적인 기원의식으로 화해를 시도하는 고도의 시법을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대체적으로 관망하거나 조망한 심리적인 변화는 자연 서정에서 온화한 이미지를 창출하고 이를 우리 인간들의 애환과 접맥하여 화목하면서도 진취적인 인생관의 정착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그에게 내재된 고매(高邁)한 지적 정서가 관류하고 있어서 최상의 시정신 고양(高揚)을 위한 인본주의(humanlsm)의 실현을 위한 하나의 잠언(箴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오체투지 참회 고행’을 지나서 ‘바닥을 기어가는 호박넝쿨처럼 / 둥글게 살아가자 / 세상살이 춥고 허전해도 /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 반짝이는 시간 찾아올 테니(「호박처럼」 중에서)‘와 같은 겸손과 긍정의 미덕으로 인생론을 정리하고 있어서 존재의 인식을 통한 성찰의 진정한 시적 진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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