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님이 준이의 아파트에 다녀온 후 일주일 동안은 어찌된 일인지
나우치로부터 전화가 없었다.
매일같이 협박전화를 받다가 별안간 뚝 끊어지자
이번에는 오히려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포기해 버릴 나우치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가 방법을 바꾸었거나 이미
어님의 신변 가까이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대한 해답이 병오의 전화에서 나왔다.
“나 병온데, 네 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으니 좀 만나자.”
직감적으로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걸 느꼈으나 저번 일도 사과할겸 해서
청하원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하고 아파트를 나섰다.
강회장이 다녀간 오후라 거기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어님이 먼저 도착해 5분 가량 있자 병오가 들어왔다.
웃지도 않고 잠자코 어님의 맞은편 의자에 와 앉은 병오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사람같아 사과의 말부터 해야 될 것 같았다.
“저번 일은 제가 잘못했어요. 그 후로 혼자 고민 많이 했어요. 용서하세요.”
“그 일은 말 않는 게 좋아. 그냥 없었던 걸로 해두자.”
“고마워요.”
어님은 탁자 위에 갖다 놓은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신 후 물었다.
“내 문제로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요?”
“그래. 내버려두고 있으면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아서 너를 만나자고 한 건데…
집으로 전화를 해 네 몸값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놈이 있다.”
어님은 얼굴이 사색이 돼 버렸다.
나우치가 드디어 마니등 저택으로 전화질을 시작한 것이다. 나쁜놈!
“전화 언제 왔어요?”
“어제.”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마침 아버지가 계시길래 친구 전화 받는 척 하고 끊었는데 모레 다시 하겠단다.
누군지 알겠냐?”
“나우치라고…나쁜 사람이에요.”
“뭘 하는 놈인데?”
“섬에서 다방 해요.”
“그럼 그 녀석이 시내가 아니고 섬에서 전화하고 있단 말이지?”
“아마 그럴 거예요.”
병오는 어님을 응시했다.
어님은 다음 질문이 무엇이 될지 짐작이 갔기 때문에 차마 병오를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어떠랴.
병오도 이미 알만한 것은 알고 있다.
무슨 질문을 하든 털어놓고 얘기하리라고 마음 먹었다.
“그래 몸값이라는 게 뭘 말하는 거냐?”
어님은 망설였다.
설명을 하려면 긴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고 너무 간단히 말을 해도 제삼자의 처지에서 들으면 이해가 안가는 얘기가 된다.
“얘길 해봐. 너 그 녀석이 한다는 섬의 다방에 빚지고 나온 거 있어?”
“없어요. 그 사람 말하는 몸값이라는 건 자기 마음대로 정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아요.”
병오는 얼른 이해가 안가는지 머리를 갸웃했으나 그 눈은 어님의 눈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럼 너는 그자에게 줄 게 없는데 그 자가 받을 게 있다고
몸값 어쩌구 생트집 부리는 거냐?”
“그런 셈이에요.”
“그런데 그 녀석 말이,
널 집에 두려면 6천만원을 내든가 아니면 널 내놓든가 하라는 거다. 기가 막히지, 허!”
병오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웃었다.
이 나쁜 자식! 어님은 나우치의 그 험상궂은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사이에 어님에게 요구하던 5천만원에다 천만원 더 붙여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님이 남자라면 이런 악독한 녀석과는
사생결단을 하는 한이 있어도 한판 싸워서 결판을 보았을 것이다.
“그 자가 모레 다시 전화한다고 했어요?”
“아니, 아버지 때문에 긴 얘기를 할 수 없길래 내가 모레 연락하자고 했어.
일단 네 얘기부터 들어봐야 할 것 같아서.”
“전화 오면 거절하세요.”
“그럼 너 어떻게 되는 거야?”
“나한테 5천만원 내라구 협박하다 안들어주니까 회장님 댁으로 전화한 거예요.”
“아버진 모르고 계시지?”
“모르고 계세요.”
“음.”
“이번이 두번째예요.
지난번엔 청하원 일꾼들에게 붙들려 매맞고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각서까지 쓰고 쫓겨갔거든요.
그 후 잠잠하더니 요즘 다시 협박전화를 시작한 거예요.
나를 죽이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어요.”
병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어떤 경위로 어님이 외진 섬에서 티켓다방 생활을 해야 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병오가 거기 대해 묻지 않고 있는 것은
어님의 어두운 과거를 굳이 건드려서야 되겠냐는 한 가닥 배려 때문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병오가 이윽고 먼저 입을 열었다.
“너, 그 자가 정말 너를 죽일 거라고 생각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에요.”
“그런 전과가 있어?”
“소문에, 도망간 다방 아가씨를 붙잡아 생매장해 버렸다는 말도 있어요.”
“악독한 놈이구나.
그렇다면 가만히 앉아 당할 수만은 없지.
너, 어떻게 하면 좋겠어? 대처 방안은 있는 거야?”
“청하원에 얘긴 했어요.
하지만 그 쪽에서도 나 한 사람 지켜주기 위해 사람을 동원할 순 없잖아요.
도와준다고는 하지만요.”
“그럴 테지. 사람 동원하려면 돈도 들어야 할 거구.
나도 방법을 생각해볼 테니까 너도 경계 늦추지 말고 조심해.
여차하면 내게 전화하구.”
병오는 자기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주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나, 내달 오픈한다. 터미널옆 시네센터 인수했어.”
“어머, 그래요? 그럼 이제 젊은 사장님이시네요.”
병오는 모처럼 활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님은 병오의 뒤를 따라 카페를 나왔다
카페에서 나온 병오는 어님을 차에 태워 아파트에 데려다주고
그 길로 터미널옆 시네센터로 갔다.
오픈 날자가 촉박해 내부 수리가 한창이었으나 개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건물이라
이번에는 간단히 내부 도장만 새로 하기로 돼 있었다.
개축 전에는 원래 이 건물이 한쪽이 영화관이고 그 옆은 점포로 돼 있었으나
그 점포를 뜯어내고 증축해 종합 공연 건물로 바꿔 놓은 것이었다.
건물에는 일반 영화관과 성인 전문관이 있었고
독립 영화만을 상영하기 위한 상영관이 하나 더 있었다.
일반관 옆에는 카페와 휴게실이 있고 사무실은 2층에 있었다.
병오는 차를 지하주차장에 넣어두고 도장작업을 하고 있는 성인관으로 들어갔다.
도장작업을 지휘하고 있던 사람이 몇 가지 보고하는 것을 듣고 나서
병오는 2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나희가 청하원의 왕석이 다녀갔다는 말을 전했다.
“그래 메모 남기고 갔나요?”
“아뇨. 마침 지나는 길에 한번 들렸다고 하면서 그냥 가셨어요. 만나기로 하셨어요?”
“아니요. 오던 길에 전화 넣었는데 안받길레 메시지 남겼더니 그래서 들렸나 보군요.
혼자 왔어요?”
“한 사람 따라왔던데요.”
“여기다 전화 좀 걸어주세요.”
병오는 왕석의 전화 번호를 나희에게 건네주었다.
나희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전화가 나왔다고 나희가 알려주었다.
“여보세요, 저 강병오입니다. 방금 사무실에 들리셨다는데 제가 밖에 좀 나가 있었습니다.”
“내달 오픈하려면 바쁘겠군.
아무튼 센터 인수한 거 축하하네.
그렇잖아도 자네 아버님과는 각별해서 한번 자넬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야. 자네가 전화했다기에 지나는 길에 들러봤지.”
“그러셨군요. 지금 시간이 나시겠어요?”
“만나게?”
“네, 사무실에 들어와 있는데요.”
“좋아. 그럼 우리 클럽에서 만나면 어떻겠나?”
“그러지요. 시간을 정하십시오.”
“클럽에서 만나기엔 아직 좀 빠른 시간인가?”
“아뇨. 전 상관없습니다. 되도록 빨리 뵙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럼 내가 잠시 누구 좀 만나고 한 시간 후 클럽으로 갈 테니 거기서 만나세.”
“그러지요.”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는 병오를 나희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병오가 무슨 일로 왕석같은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병오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왕석이 만나자는 클럽은 요 전날 병오가 가서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고
채희의 부축을 받고 나온 나이트클럽. 왕석이 관리하는 곳이다.
병오의 사무실에서 차로 가면 반 시간 거리밖에 안된다.
당장 출발하기에는 좀 시간이 일렀다.
나희가 병오 옆으로 오더니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병오는 머리를 저어 보였다.
홀에 있던 웨이터가 낯이 익은지 인사를 하며 병오를 조용한 자리로 안내했다. “혼자이십니까?” 웨이터가 묻는데 마침 왕석이 안에서 나왔다. “제가 좀 늦었나요?” 병오가 시계를 보며 왕석에게 말했다. “아냐. 나도 금방 도착했어. 차가 좀 막히더군.” 왕석은 그런 다음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웨이터를 보고 말했다. “여기 맥주 두어 병만 내와라.” 그러더니 병오게 물었다. “맥주 싫으면 다른 술 할텐가?” “아뇨. 술은 다음에 제가 모시고 따로 마시죠 뭐. 오늘은 이야기나 좀 하구요.” “나도 오늘은 술을 않는 게 좋겠어. 어제 많이 했거든.” “저도 요즘 시네센터 수리한다고 저녁이면 빠지지 않고 술을 했어요. 그랬더니 좀 그런데요.” “그럴 거야. 그래 오픈은 내달이라구?” “그렇습니다.” “자넨 잘 할거야. 회장님 하시던 것 보면 자네도 사업수완은 타고났을 거야. 부전자전 아닌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사실은 이번 일이 처음이라 걱정이 많이 됩니다.” “시작할 땐 누구나 그런 법야.” “앞으로 여러가지로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도움? 허, 도움은 내가 받아야지. 어쨌든 난 회장님을 존경하고, 회장님으로부터 도움도 받았지. 그러니 자네가 하는 일에 도움은 못돼도 힘을 보탤 수 있으면 보탤 생각이야.” “감사합니다.” 웨이터가 맥주 두 병을 갖다 마개를 따놓고 갔다. 병오가 왕석의 컵과 자기 컵에 맥주를 따라놓고 한 모금 마신 후 나우치의 얘기를 꺼냈다. “그 얘기라면 나도 신경쓰고 있네. 어니는 내가 회장님을 위해 보내드린 여자야. 그러니 당연히 신변 문제도 염두에 둬야지. 우리 애들 말 들으니 지난 번에 그 나우친지 뭔지 하는 녀석이 애들한테 매 좀 맞고 간 모양인데 떠나면서 다신 어니에게 접근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더군. 그러니 이건 그 각서를 휴지로 만드는 행위야. 더구나 이번에는 마니등 저택으로까지 전화를 해서 협박을 했다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 “집으로 전화했을 때 내가 전화를 받아 다행히 아버지와는 통화를 못했어요. 그런데 이 녀석 목표는 아버지와 통화를 해서 돈을 뜯어내려는 겁니다. 모레 다시 저에게 전화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직 이런 사실을 모르고 계세요. 모레 대답을 해주기로 하고 일단 전화를 끊었거든요.” “그 녀석이 시내에 들어와 있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럼 자네가 일단 만나자고 하게. 녀석을 유인하란 말야. 뒷일은 내가 애들 시켜서 처리할 테니까.” 병오 역시 그렇게 하는 수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나우치를 끌어내는 게 선결 문제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