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가 들려주는 우리 노동조합 이야기
-장지희 장콜노동조합 자문(전 1대 장콜지부장)인터뷰
현재 우리 노동조합 집행부의 자문을 맡고 계신 장지희 선배가 이 달 말이면 정년 퇴직해서 현장을 떠나십니다. 우리보다 앞서 이 직종에 입문해서 17년 근무하는 동안 운전원으로서, 초창기 노동조합의 대표자로서 어떻게 판단하고 대처하고 행동했는지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물론 지금 오래 전 일을 들춰 내봐야 현재 내 삶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한 사람의 기억과 주관적인 견해가 과연 진실과 부합할까? 또한 과거의 현장에 있어 보지 않은 제가 당시 사실관계를 정확히 글로 표현해 전달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와 두려움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현장 조건이 왜 이렇게 됐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지향과 목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지나온 행적을 무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한 개인의 이야기가 정확하지 않거나 편견에 사로잡혔을 수도 있지만 그 속에는 객관적인 이론서에서 찾기 힘든 생생한 진정성과 개성, 일말의 깨달음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제 필력을 헤아릴 겨를도 없이 그가 떠나기 전에 서둘러 그의 이야기를 글로 담아내겠다고 덤벼들었습니다. 혼자 또는 집행부끼리만 듣고 끝내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글로 남겨서 신입 조합원들에게는 장콜노동조합의 역사를 알리고 선후배 조합원들 간의 거리감을 줄여보겠다는 포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정보가 많아 깜냥도 안되는 주제에 괜한 일을 저질렀다는 후회가 들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마냥 미룰 수는 없는 일이고 약속은 지켜야 하므로 장 선배의 이야기를 글로 갈무리하여 내어 놓습니다.
읽는 이에 따라서 이 분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 활동 성과의 한계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척박한 여건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주체적으로 발견하고 현장의 어려움을 돌파해온 도전과 개척의 정신은 오늘날의 우리가 되새기고 음미해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장선배는 곧 우리 현장을 떠나지만, 선배의 따뜻한 마음과 생생한 이야기가 남아 있는 조합원들 곁에서 오래도록 힘과 웃음과 위로가 되어 준다면 저 또한 뿌듯하겠습니다.
1. 만남
장지희 선배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미래의 어느날 둘이 식당에 마주 앉아 인생 얘기를 주고 받고, 내가 그에 대한 글을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작년 여름이었던가? 운행 중에 신호 대기를 하고 있는데 우측 편에 장콜 차량 한 대가 부드럽게 다가와 정차했다. 서로 차창을 열어 목례를 했는데 늙수구레한 운전원이 웃음 띈 얼굴을 차창으로 쓱 내밀며 “아유, 반갑습니다. 어디 차고지에요?” 하고 물었다. 마포라고 답했더니 이두형 반장 잘 있는지, 내 이름이 어찌 되는지 묻고 이름을 밝혔더니 조합원 대화방에서 본 기억이 난다며 엄지를 치켜올려 반색했다.
짧지만 유쾌한 여운이 오래 남는 만남이었다.
차고지에 복귀했을 때 “최주임, 지희 형 만났다며? 그 형이 예전에 지부장이었잖아”하는 반장의 말을 듣고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아저씨가 노조의 리더였다고? 근데 거기 지부장했던 사람이 왜 지금은 장콜노조 조합원이지?하는 의문이 잠깐 들었다 잊혀졌다.
그 뒤 내가 얼떨결에 대의원으로 당선된 후 처음 노조 워크숍에서 그를 다시 만났는데 역시나 껄껄 잘 웃고 술 잘 마시고 격의 없이 어울려서 사람들이 “자문님”혹은 “고문님”이라 부르지 않았다면 최고 연장자였는지 짐작 못 했을 정도였다.
10월 하반기 노조 워크숍을 앞두고 그가 올해 정년이란 사실을 알게 됐고 그러고보니 그의 활동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데 이렇게 떠나 보낸다는 게 뭔가 어떤 소중한 보물의 가치를 모른 채 급히 버리는 일처럼 아쉽게 다가왔다. 게다가 나처럼 최근에 입사한 운전원들은 예전의 현장 상황과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선배 운전원들의 고민과 노력들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기에 한 때 노동조합의 대표자였던 장 선배가 그 얘기를 들려 주기에 적격이라 여겼다. 한마디로 장콜의 투쟁의 역사가 어떠했고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이고, 떠나면서 후배들에게 진지하게 전해주고 싶은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떠날 때는 말없이”라며 내 청을 딱 잘라 거절했다. 자화자찬식으로 떠들고 나가는 선배들에게 염증을 느꼈고 후배들은 잔소리 듣기 싫어한다는 게 주요 이유였다. 나는 단지 개인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신입 조합원들과 젊은 세대들에게 객관적 사실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라도 예전 활동들에 대해 들려 달라고 재차 부탁했지만 답이 없었다. 대의원 회의 마치고 뒷풀이할 때 어떻게 합석하게 됐을 때 조금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일반직 전환 투쟁에 관한 얘기만 간단히 들려줬다.
하지만 전후맥락을 모른 채 그 사안만 들으니 그게 당시에 얼만큼 간절하고 중요한 문제였는지 감이 잘 와 닿지가 않아서 정식으로 시간을 내달라 요청했다.
“그 때 얘기한 게 다에요. 별로 해 줄 말이 없는데...”하며 선뜻 내켜하지 않는 사람을 거의 질척대듯이 졸라서 마침내 둘이 따로 만나는 날을 잡았다.
11월 초 어느날, 운행을 마치고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들어간 마포역 뒤편 음식점. 돼지고기를 굽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장 선배의 과거로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2. 장지희 선배의 이야기
그는 2007년 마흔 다섯의 나이에 장콜에 입사했다. 그 때에 겉늙어 보여서 지금 얼굴과 똑같았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IMF를 굉장히 세게 맞았어”
작은 간판 시공업로 시작해서 프랜차이즈 광고로 사업을 키웠는데 98년 IMF 파고를 넘지 못하고 부도가 났다. 막노동으로 5년간 빚을 다 갚은 뒤 설비 기술을 배워 일하던 중 잠깐 쉬는 동안에 시작한 게 장콜 일이었다. 당시에는 1년짜리 단기계약직이었는데 그 현장에서 정년퇴직을 한 달 남겨둔 둔 시점에 이르렀으니 어떤 면에서는 투쟁의 결실을 당사자가 바로 얻은 경우라 할 만하다. 그는 오랫동안 사업자 위치였기 때문에 노조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는데 장콜에 들어와 기존 노사협의회의의 횡포와 부조리에 반기를 들면서 노조활동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처음에 노사협의 사무장으로 출발해 2014년에는 서울시설공단 노조 초대 장콜지부장에 선출됐다. 이사장과의 첫 면담부터 일반직(정규직)전환 요구하며 투쟁했고 결국 2016년에 사측과 최종합의를 보고 2017년 7월부터 일반직으로 적용되는 성과를 이뤄냈다.
-막 입사하셨을 때 분위기 좀 말씀해 주세요.
그 때 당시 운전원이 200여명 있었고 1년짜리 계약직야. 아마 2002년도 월드컵 기점으로 장콜이 생겼을 거야. 처음에는 운전원인 100명이었을거야. 내가 5년 지나 들어왔지.
입사를 하고 보니까 노사협의회의(이하 노사협)라는 게 있었지. 회사에서 노동자 대표를 내세워서 그 협의회를 만든거야. 그럼 회사에서 요구하면 다 들어주잖아. 들어준 만큼 회사에서는 여기에 유,무형의 권한을 줘. 노사협은 그냥 회사에서 무시해도 돼. 노동조합은 법적으로 제재를 받기 때문에 무시를 못 하잖아. 노사협은 서로 좋은 게 좋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노사협이 기득권을 다 차지하고 나머지 직원들은 하수인? 소모품? 뭐 이런 느낌이 들어.
회사로부터 시간, 돈을 지원받고 노사협 의장은 반장을 임명하고 반장에게 권한을 줘.
그 때는 반장들은 표독스럽고 악독하고 사람들을 막 지배하고 그런 역할 하는 거야. 너 평균 콜이 여덟 개 밖에 안돼냐? 열 개는 해야지? 이런 식으로 쪼기도 하고 의장 선거나 대의원 선거 있으면 누구 찍어라, 누구 찍어라 지정해서 반강제적으로 했어.
-그때는 사회복지직 노동조합은 만들어지기 전이었나요?
그 전에 장콜에 노동조합 조직이 한번 있었어. 초창기 운전원 100명 당시에. 민주노총 소속에 아주 강력한 노조가 하나 있었어. 그 사람들은 사측과 완전히 적대적 대결을 벌이는 거야.
근데 공단이 노사협에 권한을 주니까 노동조합이 힘을 못 써. 그러니까 노조에서 파업을 했어. 서강대교 앞에 철탑이 있어. 거기 올라가서 고공 시위하고 몸을 쇠사슬로 묶고 퍼포먼스하고 그랬어. 그때는 다 계약직이었거든.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을 타겟을 삼아서 약점을 찾아내는 거야. 위수지역 이탈, 휴게 시간 남용, 근무 태만 등등 건수를 찾아서 연말되면 재계약에서 빼버리는거야.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보냈지. 복직 투쟁을 하면 투쟁의 강도가 더 세지잖아? 그러니까 노사협을 시켜서 공격을 하는거야. 내가 입사하기 전에 주동했던 노조 임원, 조합원 10여명이 다 계약 해지가 됐으니 나는 그 사람들 얼굴도 못 봤지. 권재수, 정광서 등 몇 명을 우리가 전설의 이름으로 알고 있었지. 근데 노사협에서 지라시 뿌리면서 홍보를 하니까 우리는 저 사람들이 진짜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거야. 나는 권재수 씨가 이마에 뿔이 두 개 달린 줄 알았어. 옛날에는 민주노총 하면 빨갱이랑 동급이잖아?(웃음) 가스라이팅이지.
-당시 현장 분위기가 위축되고 암울했을 것 같은데 선배님은 어떻게 노동조합 활동에 관심갖고 앞장 서게 되신 거에요?
노사협이 노조를 다 쳐내고 나니까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거지. 아주 회사의 주인 행세를 하는 거야. 내가 2,3년 지내보니니까 이거는 너무 하는거야. 운전원들을 갈취해서 자기들 이익만 누리고.
우리가 동기들끼리 관악산에 갔어. 거기서 술 한잔씩 하고 그런 불만들을 토로하다 보니까 의견이 일치가 된거야. 근데 우리들끼리는 저 노사협을 이길 만한 힘이 안 된다. 여기에는 의견 통일했어.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물망에 오른 사람이 하나가 있었어.
그게 바로 김성일(55년생)이란 사람이었어. 그 당시에 장콜에 나랑 같이 입사를 했는데 오히려 노사협 편에 서 있던 사람이었어. 크게 협조했다기보다는 조금 우호적인 정도? 노사협에서 여러 가지 제안을 하며 입질하는 중이었어. 그 양반은 너무 잘났어. 스펙 자체가 좋고. 장콜 하기에는 과분한 정도? 전직 증권회사 지점장 출신에 외모도 멋지고 재력도 만만치 않고. 노사협에서 쓰기에는 너무 벅차. 이 사람을 당겨오자니 자기들이 자리를 내줘야 할 것 같은 위협을 느끼는거지. 그때 우리가 대쉬를 하니까 우리 말이 일리가 있거든. 김성일씨가 많이 망설이다가 결심을 한 거지. “우리가 노사협에 도전을 하자. 이대로는 운전원들이 너무 불쌍하다.” 그렇게 된거야.
근데 거기는 너무 어렵고 높은 산이야. 운전원들을 완전 점령을 해서 우리 동기들 이외에는 손을 뻗칠 데가 없어. 그 때 우리 동기 50여명부터 설득을 했지.
노사협 의장 선거가 추울 때였는데 우리가 김성일을 후보로 추대한 거지. 근데 그쪽의 아성이 너무 높잖아? 선거운동 다닐 때 그쪽에서 예상하는 득표율이 자기네가 70대 우리가 30 정도였어. 니네는 조족지혈에 불과해. 그렇게 공공연하게 우리를 조롱하고 무시했어.
근데 내가 운전원 바닥 민심을 보니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는거야. 우리가 나서니까 민심들이 막 뒤로 들어오잖아.
“야, 김성일 씨 이번에 나오기로 했어?” 반장들이 전화가 와. “어떻게 하면 되냐?”“어유 밀어주셔야죠. 그쪽 차고지 밀어주실 거에요?” 그러면 “어 내가 한번 해볼게” “나도 그 놈들 맘에 안 드는데 이번에 잘해서 한번 뒤집어”하는 응원의 의견들이 막 들어오는 거야.
나중에 선거운동이 막바지에 접어들어서 우리가 집계를 하니까 표면에 드러난 거랑 바닥 민심이 너무 다른 거야. 우리가 끝까지 힘을 바싹 내서 차고지 반장들과 교신을 하고 어디, 어디 차고지 포섭했는지 현황표를 만들었지. 그래서 막상 선거날 표를 까보니까 우리가 7:3으로 이긴 거야.(웃음) 2010년 쯤, 김성일 씨가 노사협 의장으로 선출되고 내가 사무장을 맡았지.
그러면서 각종 부조리, 비리, 독재적인 요소 이런 거를 다 척결해나갔지.
-그러니까 운전원들이 노사협을 민주적으로 장악한 셈인데 사측에서는 별로 안 좋아했을 것 같아요.
우리가 힘의 우위를 점했는데 관리자들은 우리를 인정 안 하려는거야.
빛 좋은 개살구라고 무늬만 의장이지 우리랑 접촉을 안 하려고 하고 심지어 운영팀장이란 작자가 우리 일거수일투족을 항상 감시를 해. 모니터를 보면서 얘가 어디서 뭘 하나, 블랙리스트 감시하는 거야. 소문에는 써버를 집으로 연결해서 집에서도 감시했다는 설도 있었어. 나도 그 그물에 걸린 적이 한번 있었어. 그래서 차고지 변경까지 결정이 났어. 그럴 정도의 사안이 아니거든. 내가 서울대학교에 내려주고 관악경찰서에 형사하는 후배가 있었어. 마침 그쪽에서 끝났는데 저녁이나 같이 헐까? 추어탕 집에 가서 밥을 먹었어. 그리고 어영부영 얘기하다보니까 시간을 놓친거야. 휴게시간이 한 시간인데 7분을 더 쓴 거야. 허겁지겁 휴게를 풀었지.(현재는 휴게 1시간 지나면 자동으로 운행 시작이지만, 당시에는 운전원이 시간 맞춰 종료해야 했다)
그걸로 근무태만?(웃음) 며칠 있으니까 차고지에 소문이 싹 돌더라구. “창동 얘기 들으니까 너 천호 차고지로 발령났다더라?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휴게 7분 오버한 것밖에 기억이 안나. 목동(집)에서 천호까지 검색해보니 한 시간이야. 며칠 있다가 눈발이 흩날리는 날이었어. 호출을 받은 거지. 공단에 갔더니 운영팀 애들이 아주 싸늘한 느낌으로 나를 외면하는 거야. 나를 불러다 놓고 “여기 왜 오신 줄 알죠? 쓰세요”하는 거야. 내가 ‘관악경찰서에있는 후배랑 밥 먹다가 휴게 시간 늦었다 끝.’ 이렇게 썼더니 왜 삼성동에 있었냐, 왜 내려주고 강남까지 갔냐 이거야. 그때는 관악구에 삼성동이란 지명이 새로 생겨서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때라 얘들이 강남구 삼성동이라고 생각한거야. 빈차로 관악구에서 강남구까지 이십 킬로 갔다고 문제 삼은 거야. 아유 관악구에도 삼성동 있어요. 그 때서야 아차 하는 거지. 이미 판을 벌렸는데 폭삭 망한 거지. 거기서 끝. 그런 불합리까지 당할 뻔 했어. 그놈들이 그 정도로 타켓을 정해서 약점을 찾는 거야.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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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나간 것들은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죠...선배님들의 노고가 있기에 지금의 장콜이 있는거죠...감사합니다.
선배님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