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각의 선구자 위창 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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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창 오세창의 삶
- 최초의 한국 미술가 사전 엮어낸 위창 오세창 -
위창 오세창은 4∼5대에 걸친 집안의 전통을 이어서 20세 때에 역관 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사역원 역관이 됐다. 3년 후인 1886년에는 조정의 인쇄 출판기관이었던 박문국의 주사로서 (한성순보)(최초의 근대적인 신문) 기자를 겸했다. 이후 1896년에 일본 문부성 초청으로 도쿄의 외국어학교의 조선어 교사로 1년간 가 있게 될 때까지 그는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02년에는 개화당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에 망명, 5년만에 귀국했다. 그 무렵 일본에서 손병희·양한묵 등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이렇듯 개화운동의 적극적인 참가자였던 위창은, 망명지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인 1906년에는 천도교를 배경으로 손병희·권동진·이인직 등과 민족적 개화사상을 계몽하기 위해 (만세보)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했고, 1909년에는 다시 대한협회를 배경으로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대한민보) 창간에 협력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다음해에 가서 국운은 마침내 기울고 국토는 일제의 식민지로 병합당하고 말았다. 통탄스런 시대의 격변과 망국의 암흑기를 목격하면서 위창은 집안의 민족문화 컬렉션을 새로운 감회로써 되만지기 시작하였다.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그는 떠돌아다니는 민족문화의 유산들, 특히 서화를 힘 자라는 대로 더욱 찾아 모았다. 위창의 서화 수집은 여유를 즐기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그는 역대 서화가의 이름과 확실한 관계기록 및 진적을 조사·정리하여 우선 후학들을 위해 이 땅의 서화가 인명사전을 펴낼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1910년대 중엽에는 상당히 진척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매일신보) 기자가 위창댁을 방문하여 그의 서화 컬렉션과 연구·정리 생활을 보고 쓴 (별견서화총)이라는 기사가 있다.
"근래에 조선에는 전래의 진적서화를 헐값으로 방매하며 조금도 아까워할 줄 모르니 딱한 일이로다. 이런 때에 오세창 씨 같은 고미술 애호가가 있음은 가히 경하할 일이로다. 씨는 십수년 이래로 조선의 고래 유명한 서화가 유출되어 남을 것이 없을 것을 개탄하여 자력을 아끼지 않고 동구서매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1,275점에 달하는데, 그중 1,125점은 글씨요 150점은 그림이다. 세종·선조·숙종·영조·정조 시대의 것이 많고, 신라·고려 때 것도 적잖이 모았으니 명현석유와 고래화가의 필적을 망라하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로다. 씨는 앞으로 100여 점만 더 구득하면 조선의 명서화는 누락됨이 없으리라 하여 고심 수집 중이며, 다만 서화를 수집함에 그치지 않고 그 필자·별호·연대·이력 등을 상세히 조사하여 참고케 하였는데, 그 목록만 하여도 세상에서 가히 구득치 못할 가치가 있겠더라. 기자는 씨에게 그를 사진판으로 출판하여 조선의 고미술동호자에게 할애할 것을 권유했고 씨도 그런 계획이 있어 그 기회를 엿보는 중이라며 우선 그 목록을 정리·출판하여 서화 동호자의 참고자료가 되도록 하리라더라."
1910년대 중엽의 위창의 생활내막과 컬렉션을 가장 상세히 알려주는 글은 1916년 12월 7일부터 5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된 만해 한용운 선사의 위창댁 방문기인 (고서화의 삼일)이다. 3년 후의 3·1독립운동 때에 가선 다같이 33인 민족대표에 끼지만 만해와 위창이 만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작부터 서로의 존재와 민족사상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만해의 위창 방문기를 쉽게 풀어 긴요한 대목의 요지만 인용해 본다.
"11월 26일(1916년) 하오, 박한영·김기우 두 분과 동행하여 조선 고서화의 주인되는 위창 오세창 선생을 돈의동으로 방문하다. 나는 그가 조선 고화를 수집한다는 말을 들은 지 이미 오랜지라, 일찍부터 구경하고 싶었으나 여러 일로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기우의 소개로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되었다."
"위창댁에 이르러 중문을 들어서니 마당에는 국화분 몇이 놓여 있다. 응접실에 들어가 앉으니 기우가 나를 위창에게 소개하여 지면의 예를 나누었다. 그런 후 위창은 그의 오랜 친구인 기우를 시켜 별실에서 서화 축을 가져오도록 하였는데, 그전에 벽에 걸린 서화를 보라 한다. 나는 머리 들어 사벽을 돌아보았다.
북쪽 벽에는 '주정의 명' 을 탁본한 것이요, 서쪽 벽의 것은 석각을 탁본한 5폭을 이어서 표구한 것이다. 첫 번째 행의 '물하소형' 4자는 성벽의 각자이니, 위창은 내가 그것을 보고 있었을 때에 나무상자 하나를 열더니 한 조각의 돌을 보여주는데, '물하소형'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성석이라. 나머지 4행은 '통격석비' (백제의 유허 비문), '동우불광청' (단곡사의 신라 신행선사 비문), '대사유악장' (정토사의 고려 자등탑비 비문), '일시동인실개유지' (승암사의 이조 무학선사 비문)이었다."
"어느 겨를에 기우는 일곱 축의 화첩을 가져다 놓고 열람을 독촉하는지라, 벽에서 눈을 돌리니 (근역화휘)라고 표제가 적혔는데 위창이 직접 화첩을 꾸미고 쓴 것이라. 제1축은 31인의 그림 41점으로 되었는데 첫장은 고려 공민왕의 양 그림이요, 그외 신사임당의 '초충도' 등이 들어 있다. 제2축은 30인의 41점, 제3축은 31인의 41점, 제4축은 20인의 29점…. 나는 눈으로는 그림을 보고 손으로는 화가의 이름을 짚어 나가기에 바빴다. 이렇게 그리워하던 영예스러운 우리 고인의 수택을 접촉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계속해서 29인의 그림 32점을 모은 제5축, 24인의 34점이 들어 있는 제6축, 26인의 33점이 든 제7축을 모두 보았다. 도합 191인의 역대 화가가 그린 250점의 그림을 5시간 반이나 걸려 배람하였다. 다시 서첩까지 보려 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되고 하여 다음날로 미루고 발길을 돌렸다."
"다음날에는 오래 전부터 약속이 있었던 김남천, 강도봉 두 스님을 청하여 동행하려던 차에 마침 광문회에 머무르고 있던 김노석이 찾아왔길래 동행 여부를 물으니 그도 좋은 기회라고 흔연히 나서는지라, 4인이 동행하여 서첩을 보기 시작한 것이 하오 1시 반이었다. 표구는 화첩과 똑같고, 표제는 (근역서휘)니, 모두 23축으로 되어 있었다.
제1축에는 조선 최고의 명필 김생의 금니서와 최고운의 은니서가 있는데 이것이 진적(진짜)인지 아닌지 약간 의심의 여지가 있다지만, 그 밖에 정몽주의 글씨는 어제 공민왕의 그림을 보던 감회가 그치지 않았던 터라 더욱 감명을 받았다.
제2축 이하에는 성삼문·이황·정철·허난설·송운대사·한석봉·이괄·송시열·허미수·정약용·김정희의 각체 각종 내용의 글씨들이 모아져 있는데, 모두 692인의 진묵이라, 그것들을 불과 3시간에 다 보고 나니 속첩이 또 있단다. 그러나 그것은 내일 또 보기로 하고 일어섰다."
"다음날엔 혼자서 찾아가다가 중로에서 김노석을 만나 돈의동 위창댁에 이르니 조선 제일의 호고가인 최남선과 최성우가 먼저 와 있었다. 서로 오랜만의 인사를 나누고 곧 (근역서위.속)을 보기 시작하였다. 이 속첩은 모두 12축으로 408인의 글씨를 보충한 것인데 그 속엔 고려 때의 금니자를 비롯하여 임경업·이삼만·민영익 등의 필적이 수집되어 있었다. 본첩것과 합치면 실로 1,100인의 글씨가 모아졌고, 화첩이 그림까지 치면 도합 1,291인의 수적이라. 더구나 그것들이 신라의 김생으로부터 현대까지 1,200여 년에 걸쳤으니 이렇듯 잔편단간의 고서화를 채집하는 데 성공한 위창에게 그 동안의 고로를 위로하기보다 그 행복을 축하하겠도다."
만해는 그 외에도 미처 표구를 하지 못한 채로 있는 고서화와 탁본, 그밖에 살아 있는 서화가들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끝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선의 고서화를 이렇듯 수집함은 실로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며, 그 가전의 사업인데, 그가(위창이) 전력으로 수집을 착수하기는 7년전의 일로써 그 애씀과 성의는 누구도 동정을 표하지 않을 수 없도다. 서화의 원본을 수집함에 있어 어떤 땐 힘겨운 값으로 사기도 하고 혹은 어떤 이의 기증도 있었다. 그렇게 얻은 후에 필주(작가)의 역사기록을 찾아 연구하고, 그 연대를 찾아내어 순서를 정리하느라 정신과 체력을 모두 바쳤도다. 조선의 고인의 수적을 이같이 모음은 누구를 위함인가. 고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조선인의 안목으로는 이상하게 보이기 쉬우리로다. 나는 그 나라의 고물은 그 국민의 정신적 생명의 양식이라고 듣고 있다. 나는 위창이 모은 고서화들을 볼 때에 대웅변의 연설을 들은 것보다도, 대문호의 소설을 읽은 것보다도 더 큰 자극을 받았노라. 만일 훗날 조선인의 기념비를 세울 날이 있다면 위창도 일석을 점할 만하도다."
위창의 컬렉션에서 민족의 정신적 생명의 줄기를 본 만해는 크게 감동했던 모양이다.
불교계의 거인으로 독립투사였고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민족시인인 만해 한용운이 1916년 가을에 컬렉션에서 보고 감동한 (근역화휘)와 (근역서휘)는 그보다 10년 후에 이루어지는 위창의 필생의 업적인 (근역서화징)(한국 최초의 역대 미술가 사전)의 기본 자료였다. 위창은 그의 컬렉션의 분류·정리와 편저에서 '조선' 이란 말 대신에 이 땅의 상징적 명칭의 하나인 '근역' 으로 표기했다. 그는 (근역인수)라 하여 역대 서화가와 명인들이 직접 사용한 각종 도장의 인영도 체계적으로 모으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 서화사 자료의 입체적인 조사와 개척적인 정리는 위창의 생애를 영광되게 한 문화적 업적이지만, 반면 민족문화에 대한 그의 사랑과 집착은 그가 3·1운동 때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기개를 보인 투철한 독립정신과 함께 당시 조선사회에 참으로 값진 영향을 끼쳤다. 많은 뜻있는 학도와 인사들이 그의 주변에서 정신적인 영향을 받았고, 또 이땅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과 긍지를 높였다. 그러한 위창의 영향력은 한국 근대문화 초기의 커다란 사회적 공헌이었다.
서예와 전각, 그리고 서화감식안에서 모두 당대의 대가였던 위창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직후인 1921년 10월에 민족 미술가들의 단체인 서화협회가 기관지 (서화협회 회보)를 창간할 때 그동안 (삼국사기)와(삼국유사)를 비롯한 약 150종의 각종 문헌에서 뽑아 모았던 역대 서화가의 기록들을 '서가열전' 과 '화가열전' 이라는 제목으로 동시 연재를 착수했었다. '탑원초의' 라는 필명으로 '나대편' 을 소개하고, 이어서 '여대편'을 착수했다가 (서화협회 회보)가 제2호로 중단(1922년)되는 바람에 계속 활자화되지 못하고 말았지만 앞의 두 '열전' 은 한국미술 사료의 최초의 정리 작업이었다.
위창의 역대 서화가의 행적 및 사료정리는 1928년에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곧 (근역서화징)인데, 이 최초의 한국 미술가 사전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 방면의 유일한 문헌으로서 학계와 교양인 사회의 긴요한 사서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것 하나만으로도 위창의 공적은 너무나 크다. 1959년에 나온 김윤영 편저의 (한국서화인명사서)는 약간의 보충은 있으나 대체로 (근역서화징)을 국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집안의 풍부한 컬렉션과 근대적인 집념의 소산인 위창의 명저 (근역서화징)이 처음으로 출판되었을 당시의 반응은 앞에서 이미 소개한 육당 최남선의 표현, '암흑한 운중의 전광' 으로 대표되지만, 삼국시대 이후의 392인의 화가, 576인의 서가, 그리고 서화를 겸했던 149인의 기록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수록한 (근역서화징)의 출현에 대해 육당은 또 '참으로 일대경이에 속하는 업적' 이라고 신문에 썼다.
(근역서화징)에 앞서는 것이 있다면 추사에 완전히 심취했던 문도인 우봉 조희룡이 1844년에 기록한 (호산외사)를 꼽을 수 있다. 18∼19세기의 대표적인 명인 41인의 평전인데, 그러나 여기엔 화가로 최북·임희지·김홍도·김영면·이재관·전기가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근역인수)는 수집 정리자인 위창이 작고하고 15년 후인 1968년 가을에 서울 국회도서관에서 출판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치는 856명의 서화가가 애용했던 성명, 아호, 별호, 자, 기타 별칭, 이명의 도장 약 3,800종을 실제의 날인본(종이에 찍힌 상태)으로 모았던 이(근역인수)의 방대한 유고는 위창이 한국전쟁 중 대구에 피난하고 있다가 1953년에 90세로 별세한 후 유가족이 보관하고 있었다. 그것을 국회도서관의 강주진 관장이 출판을 전제로 인수함으로써 (근역서화징)과 더불어 위창의 필생의 큰 업적으로 쌍벽을 이루는 (근역인수)의 내용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한국의 전각예술의 역사적인 전통과 실제 사용을 한눈에 보여주는 최대의 자료 집성이기도 하다.
위창은 이 야심적인 인수(도장의 숲)를 반세기에 걸쳐 수집하는 동안 조선시대의 각종 인보·인집·인첩·인책을 모두 참고, 흡수하고 있다. 한편 역대 서화가의 진필 수집이었던 (근역화휘)의 일부는 3·1운동 이후 위창의 생활이 차차 어려워지던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당시 서울의 부호로서 미술품 수집가였던 다산 박영철에게 넘어갔다가 1940년에 경성제대(지금의 서울대)에 기증되어 지금도 대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근역화휘)에선 (천)·(지)·(인)의 세 화첩(도합 67점의 소폭 그림이 들어 있다)이, 그리고 (근역서휘)에선 모두 35첩이 다산의 기증으로 역시 서울대박물관에 고스란히 전해지게 되었는데, 당시 기증자의 친일색이 개운찮게 뒤따르긴 해도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행선지였다.
(근역서휘)와 (근역화휘)에 들어가지 않은 1,116점의 글씨와 그림(주로 근대의 문인화)들은 따로 (근묵)이라는 압축된 표제로 묶어(모두 34권) 위창이 끝까지 간수하고 있다가 유족에게 물려줬다. 그러다 1964년에 성균관대학에 들어가 현재 대학박물관에 소중히 보관되고 있다. 위창이 직접 쓴 '근묵' 이라는 제자 밑에 '팔십위' 라고 낙관 한 것을 보면 이 속첩이 꾸며진 것은 1943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 대로부터 이어졌던 위창의 컬렉션엔 진귀한 책도 많았다. 희귀한 고려본과 조선 초기의 진본들이 포함돼 있는 이 문고는 1962년에 국립중앙도서관에 들어갔는데, 약 3,200책이었다. 그밖에 낙랑시대의 명문이 있는 귀중한 전 2점(하나는 서기 335년명)과 역시 글자가 들어 있는 삼국시대의 기와조각 44점, 그리고 앞에서 이미 소개한 '고구려 성벽각자' 는 1965년 10월에 이화여대박물관이 위창의 유족으로부터 인수했다.
렘브란트의 명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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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세창 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모범적 삶에
그저 놀라울 뿐이에요 소운님 덕분에
뿌듯한 밤이 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