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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여정 잠시 쉬는 동안 지나가는 영화 4편 만났습니다.
<인 더 쉐도우 오브 더 호스>는 체코슬로바키아 1953년을 무대로 한 역사 스릴러,
<명월도설야섬구>는 오랫만에 만난 초원 감독의 무협극,
<해피 이벤트>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어지러운 페미니즘극
<전설의 주먹>은 흥행에 실패하여 강우석의 미래를 어둡게한 진짜 아저씨 폭력물입니다.
일명, 그저그런 영화들이라고 하면 감독들이 섭섭해 하겠기에
여가를 소비하는 데 마땅한 작품들이라 하겠습니다.
1. 음지에서 Ve stinu, IN THE SHADOW OF THE HORSE (2012) : 다비드 온드리첵
= 소년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 수 있을까?
우울한 시대를 진실로 밝히려했던 인간의 초상화는 언제나 씁쓸하다.
1953년 동구 유럽이 소련의 지배 하에서 제대로 숨쉬지 못할무렵
어이없는 정치적 의도로 사법 살인이나 정치적 음모론으로 인해 숨져간 역사를 조명하는 시대 스릴러극.
아쉽게도 <살인의 추억>만큼의 성취는 발견할 수 없거니와
흘러간 할리우드적 만듦새가 물씬 풍겨나는 얼개는 연출력의 근원적 결핍을 발견하게한다.
아닌게 아니라, 살인을 쫓는 형사와 주변인물 그리고 반전이 모두 평범한 TV 드라마 수준이다,
여튼, 이같은 타국의 지난한 역사를 영화를 통해 마주할 때면
언제나 검색창에서 해당 사건의 줄기를 캐내어 읽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그같은 시도를 하지 않았다.
영화의 매력없음이 한 몫을 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역사 허무주의에 빠져든 탓이 크다.
해법도 보이지 않는 억압과 통곡의 시간들에 대한 위령제로서의 영화들조차도 이제 그저 피로만을 안긴다.
시대의 굴곡을 후인들이 뒤늦게 증언하고 참배하는 형식에 있어
본편이 취하는 방식은 <살인의 추억>과 같지만, 좀 더 자극적인 정치 살인 스릴러의 선명성을 보인다.
문제는 재론하지만, 그같은 장르성 안에서 각 캐릭터들이 다소 부산해지고,
서사의 흐름이 곳곳에 맥거핀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맥거핀들로 인해
오히려 영화가 세심함과 정교함이 증발되는 참혹한 드라마적 난맥을 경험하게 된다.
노련한 민완형사가 절도범을 잡는 초반부 배우들의 트렌치 코트 의상에서
너무 장르의 관습에 치우치지 않을까 저어했는데,
결국 그들의 얼굴 흉터, 아내의 가슴골이 드러나는 의상, 다림질에서의 유사 남편-아버지로의 전치,
이웃집 남자 류의 어색한 서사의 구멍 등이 마치 코스 요리별로
하나씩 제기되는 시간에 이르면 영화의 본령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본편의 존재이유, 1953년 소련 당국의 사주를 받은 체코슬로바키아 경찰 당국의 행정-사법 살인으로 인해
유대인회 집단이 전부 사형당한다는 역사의 숨겨진 참극에 대한 조명은 어느새
나치 전위대 출신의 독일 경찰이라는 적대자가 극 안으로 들어선 이후부터 통역사가 실재로 동원되어야할 정도로
극의 동심원 반경 너머로 자꾸만 이탈한는 경향을 보인다.
여기에는 1953년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시공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결핍이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영화 속 피해자들이 왜 소련 당국의 지시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해야하는지 다소 간의 설명이 필요했음도 분명하다.
만일 의도적으로 본편이 그같은 시도를 생략했다면 이는 본편이 영화의 사건을 그저 소재로만 한정하고
역사 속 모든 피해자들에 대한 추모에 대한 대유법으로서 본편의 진로를 가늠했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문제는 그같은 추론에 본편이 그다지 합당한 영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있겠다.
위 장면은 영화의 엔딩에 걸려있는데, 소년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시선의 통시성은 느닷없고 갑작스럽다.
엔딩의 여운을 위해서라해도 영화 전편의 조력을 받지 못하는
최종분석적인 눈빛조차 삼류 할리우드물을 복사한 듯 하다.
재론이지만, 몇 단점을 들어 본편을 파훼하자면
주인공 형사반장이 주변이 모두 정부요원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진실을 파헤치려는 명확한 이유가 부재한데,
이는 영화의 엔딩 타이틀 속 해설 자막을 동원하자면.
필시 1953년 당대를 살았던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의 저항 정도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
화폐개혁을 하지 않는다라고 허언하는 정부의 수회에 걸친 라디오 방송에 반하는
당대의 민중상으로서 형사가 동원되었다해도
그의 희생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관객은 기대할 수 없다.
정확히, 역사의 응보를 믿지 않는다고 해두자.
즉, 독일 경찰이 국경을 넘어 서방으로 건너가면서 보이는 증거로서의 탄피 등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보여주지 않고, 형사의 죽음 이후 체코 화가의 그림 한 점으로 대체함으로서 영화는 오히려 축소되었다.
중요한 것은 생존이었나 아니면 진실이었나, 빈약한 이분법을 뛰어넘을 의지도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SS 친위대 출신의 독일인 경찰의 캐릭터는 모호하지도 명확하지도 않다.
그가 용서되어야하는 이유가 가족이라면, 그 시대 모든 이는 허용되어야하는 것이며,
갈등과 의심의 고조를 위해 소비되었다고 한다면 그가 굳이 독일인이어야할 이유조차 부실하다.
서방으로 건너가는 독일인에게 모든 진실과 정의의 씨앗을 남긴 것은 지나치게 영화 속 미래-영화 밖 현재지향적이다.
<음지에서>는 국가 살인에 대항한 한 경찰의 진실 분신에 대한 기록이지만,
가족이 보존됨으로서 정의도 동시에 유지될 수 있다는 어색한 논리 안에서 스스로를 허물어버린 시대극 스릴러이다.
2. 명월도설야섬구 明月刀雪夜殲仇 (1977) : 초원
= 인생, 속옷 한장 없이 가는 것.
나는 이제까지 그를 19번 만날 수 있었다.
초원 감독은 1934년생이다. 현재 그의 생사를 정확히 알지못한다.
오랫만에 무협물을 보니, 이전에 본 듯도 하고, 여튼 나이를 못 속이고 기억력이 흐릿하다.
여튼,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했으니 회원들은 못마땅하더라도 글은 남겨야겠다.
김용과 더불어 대만 무림을 양분햇다고 할 고룡의 이야기를 다시 길게 들먹거리고 싶지는 않다.
카페 회원들은 여기에 관심 있으신 분은 없으실테니, 본편과 관련된 캐릭터만 언급하자.
물론, 고룡-초원 라인의 최고작은 두말할 나위 없이 <유성호접검>이다.
악화와 나열이라는 두 배우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유성호접검>은 무림지존을 두고
속고 속이는 암투와 비선의 작동이라는 측면에서 당대의 저물어가는 무협극의 마지막 등불과도 같았다.
불과 1년전에 만들어진 <유성호접검>의 성공 이후 초원-고룡은 꽤나 폭주한다.
물론, 그것은 홍콩 느와르와 서극의 등장 이전에 거의 막을 내리고 있었다.
본편 <명월도설야섬구>의 주인공으로서 당해 31살에 불과했던 적룡이
무협물의 단독자로 군림하던 70년대 후반을 지나 1986년 오우삼의 호출로 <영웅본색>의 대머리 따꺼로 등장하기 전까지
나름 배우로서의 불황기가 약 5년 가량 있었음(그 스트레스로 머리가 빠졌는지도 모르지만)을 생각한다면
70년대말 활활 타오르던 그의 대협의 풍모가 가끔은 초원-고룡의 작품의 초상처럼 그리워진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슈퍼맨보다는 무림협객에게서 먼저 영웅을 배우지 않았던가.
여튼 다시. 고룡-초원.
초류향, 육소봉이라는 일종의 무림탐정물 캐릭터의 양대 산맥이 다소 동일한 느낌이었다면
이심환 - 부홍설로 이어지는 허무하고 고독한 단독행의 이미지 또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작품 제작년도 상으로는 분명히 <천애명월도>가 본편 <명월도설야섬구>보다 1년 앞서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실상 부홍설이라는 캐릭터의 시작은 본편 <명월도설야섬구>에서 시작된다.
지금 현재로서는 아무리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천애명월도>의 흥행에 힘입어
일종의 리부트로서 <명월도설야섬구>가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기사, 그것이 뭐 중요한 정보이겠는가?
차라리. 적룡이 동일한 캐릭터인 부홍설을 47살의 나이로 다시 연기한 1993년판 <변성낭자>가
본편과 동일한 원작인 <변성낭자>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무협영화 뒷담화 정도로 기억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본편은 원작을 대폭 수정하여 누가 친아들인지, 친부의 죽음에 얽힌 사연 등등을 모두 생략한 반면,
1993년작 <변성낭자>는 비교적 원작에 충실했고, 이후 TV 무협드라마 역시 시리즈의 특성상 원작과 근접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따위는 회원들에게 그저 지리한 옛날 이야기에 불과하다.
냉정하게 본편만으로 가자.
아시다시피, 김용의 소설이 주로 시대상을 반영하고 거대 문파와 강호 도의를 물고 늘어지면서
일종의 규모의 전쟁에서 고룡과는 비교할 수 없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반면에
고룡은 고수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코믹, 우울, 허무, 고독을 다 삼켜버릴듯한 캐릭터와 더불어
나름 음모와 반전으로 앞일을 예측하기 어려운 죽음 뒤의 죽음, 삶 뒤의 삶을 절대배급을 자랑한다.
본편과 같은 해 만들어진 <다정검객무정검>에서 소리비도로 유명한 이심환의 제자인 엽개가
주인공 부홍설의 조력자로 등장하며, 심지어는 아비 역할의 이동승 마저도 짧은 조연으로 재등장한다.
이같은 고룡 소설에서의 캐릭터 간의 상호이동은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영화화되어, 이심환과 부홍설 모두를 배우 적룡이 연기함으로서 겹쳐진다는 것에 있다.
20년전에 30명과 홀로 대결하다가 암살된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는 뼈대 안에서
영화는 종말에 가서야 부홍설과 엽개 중 누가 진짜 아들인지 말하는데,
이는 원작 소설과의 괴리를 떠나서 허무한 지목 외에도 부홍설이라는 남자의 매력을 반감시켜버린다.
아닌게 아니라, 전작 <천애명월도>에서의 부홍설이나 <다정검객무정검>의 이심환에 비해서
본편 속 부홍설은 고수로서의 면모는 친숙하나, 무언가 감정적인 응어리나 행위가 보여지지 않는다.
이것은 곧바로 본편이 추리무협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서사의 맥이 풀리는 이유로 작동한다.
엽개 역할의 유영과 또다른 조력자인 노소가 역할의 나열이 흥을 돋구고 있기는 하지만,
유영이라는 배우로로서는 육소봉 전기, 나열이라는 배우의 익숙한 선악 이분법 연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마저도 엉덩이를 보여주는 엔딩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극의 받침목으로서의 역할을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 결국 역용술이라 불리는 진짜-가짜//삶-죽음이라는 이분법이
감성적으로 작품 내부로 파고들어 이분법적으로라도 승화되었어야하는 지점이 배제되어있다.
초원 작품의 특징인 기관 설비나, 사람으로 이루어진 진법에 갇힌 주인공들은 반복되지만,
무엇보다 애닮은 연정을 일으키는 여인 캐릭터가 실종됨으로서 영화의 한 구석이 비어있다.
더더욱 아쉬운 것은 상대편 진영과의 마지막 대결 시퀀스에서 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적어도 가짜들보다는 강렬한 진짜 악당들의 무공이 아쉬웠다.
배우 적룡도 이 점이 아쉬워 16년 뒤에 동일 원작의 영화 <변성낭자>에 출연했을까? 모를 일이다.
<명월도설야섬구>는 고룡-초원 작품 중 이심환-부홍설 캐릭터가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채
남성 무협 버디 무비의 미스터리물로서 너무도 쉽게 닫혀버린 아버지가 사라진 복수극이다.
3. 해피 이벤트 Un heureux evenement (2011) : 레미 베잔송
= 모성 신화는 어떻게 미끄러지는가
위에서 짧게 출산, 육아에 대한 페미니즘극이라 했고
아직 육아 단계에 이르지 않으신 여성 분들에게는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은 작품이기는 하지만,
본편 <해피 이벤트>는 다소 의외의 길을 가기에 '어지러운'이라는 표현을 덧붙였다.
오프닝의 성관계 신음소리나 곧바로 등장하는 아래 블룩한 임신의 복부를 보이는
여자주인공의 누워있는 전면을 보여주는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극의 의도는 드러난다.
관객의 시선 권력이 실제로 출산-육아의 여성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 의문을 표하면서
엔딩에 이르러서는 결국 의구심 가득한채로 천천히 포기하듯이 시선을 물러서는 자세를 갖춘다.
곧바로 내려다봄에서 멀리서 바라봄이라는 카메라의 이동 경로가 남성 감독이
솔직하게 여성 출산-육아에 대해서 취하는 경이와 반성의 태도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본편에서 영화광들이 좋아할 요소는 두 남녀 주인공이 만나는 장소인
DVD 대여점에서의 밀당 속에 담겨진 고전 DVD 타이틀의 행렬이 전부일 것이다.
<화양연화>, <투 다이 포>로 시작하여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 장 르느와르의 <위대한 환상>이 여성의 선택이라면
남성은 <남과 녀>, <마음의 저편>, <라스트 키스>,<뒤로 가는 남과 여>,<모퉁이 가게>
<용서받지 못한 자>,<내 입술 위에>, <참을 수 없는 사랑>등을 건넨다.
여성이 마지막으로 <캐치 미 이프 유 캔>을 건넴으로서 연애가 출발할 때까지 동원되는 DVD 들 중에
거의 절반 정도는 아직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한 작품이라는 것에 당혹감을 느낀다.
프랑스와 남한이라는 지역적 혹은 경제적 차이가 세삼 일감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여성의 선택이 일반적으로 고전임에 비하여, DVD 대여점에서 일하는 남성이 로맨스를 추구한 발랄함은 무시하더라도
마지막 여성이 선택한 <캐치 미 이프 유 캔>에 이르면 얼핏 본편이 가지는 영화적 향방을 엿볼 수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과연 남성인 당신이 이 영화를 따라올 수 -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초반부의 씨네필적인 초대장을 지나간 이후
관객이 목도하는 것은 오직 여성의 자리에만 초점을 맞춘 남성 감독의 출산-육아극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여기에 남성의 자리는 단 1%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남성 주인공이 DVD 대여점을 그만두고 회사원이 되기는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출산-육아에 대해서 기절하거나 아무 것도 모르는 무뢰한일 뿐이다.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남자가 게임에 몰두할 때 관객은 남성 감독의 과거를 보는 듯한 의구심이 든다.
문제는 역시 여성.
단호하게 영화가 선언하기를 후설, 칸트, 하이데거가 현실적인 힘이 없다고 선언한다.
설마 진심은 아닐지라도 영화의 본령을 위해서 너무 위험하고 유치한 발언을 동원할 정도로
극은 서사 내내 출산-육아의 엄연한 고통을 차원이 다른 지점과 비교하는 우를 범한다.
차라리, 포스트 페미니즘의 주역들,
줄리앙 크리스테바, 뤼스 이리가라이, 주디스 버틀러, 가야트리 스피박 등을
여성 주인공의 책장에 두었거나, 지도 교수를 여성으로 했다면 조금 더 공평하지 않았을까.
이는 영화 중간 스페인 좀비 호러물 <REC> 시리즈의 촬영 방식을 패러디한 느닷없는 화면조차도
시종일관 상큼발랄한 육아일기의 가벼운 부속품 혹은 씨네필로서의 감독의 여운으로 받아들이게 될 뿐
여성 주인공이 어머니, 언니와 여성 가족 연대적인 형태를 취할 때조차도 진정성이 의심되게 만든다.
영화가 취하는 회복의 관점, 지난한 육아의 여정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듯 하면서도
굳이 여성이 철학 대신에 육아 소설을 기록하는 것으로 종결맺을 때
다시 말하지만 관객으로서의 나는 남성이 완전히 배제된 그 자리의 결정에 동의하면서도
거기에 철학이 소용없다라는 결론에는 어지러운 엇박자를 감지할 수 밖에 없다.
육아 소동극으로서 본편은 부담없지만, 모성이라는 한 순간에 대해 영화는 신호를 무시하고, 차선을 이탈한다.
필요한 것은 철학이 아니라, 공동 양육에 대한 프랑스 너머의 시스템적인 고찰이었다.
아기 키우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나라 프랑스에서 보내진 행복한 사건이라 하기에
본편은 엉뚱한 씨네필과 고등 철학의 난잡함 속으로 스스로를 무리하게 실종시켜버린다.
<해피 이벤트>는 전혀 행복할 수 없는 자기 실종으로서의 육아 일기 드라마이며,
아버지 되기를 배제한 채 어머니 되기와 여성 되기를 혼합하지 못한 가련한 페미니즘극이다.
4. 전설의 주먹 (2013) : 강우석
= 마초 루저들의 뒤늦은 승리들, 제도권 여성을 전복하지 못하다.
나는 이제까지 그를 9번 만날 수 있었다.
강우석은 1960년생이다.
강우석-시네마 서비스에 대한 부당한 애도에 대해서는 전작 <이끼> 글에서 나눈 바 있으니 생략하자.
본편의 불편한 만듦새에 대한 지적이나 출연 배우들의 위치에 대한 불평들 역시 잠시 뒤로 미루자.
더불어 원작 웹툰과 본편 사이의 간극을 지적하는 어불성설의 뒷담화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나는 여기서 완성도를 떠나 최근 강우석 영화의 어느 경향에 대해서만 지적하고싶다.
이는 본편의 주인공 임덕규 역할에 정재영이 아닌 황정민이 선택되었다는 점과도 다소 연관이 있다.
19편의 장편을 내놓은 그에게서 지금 지적할 두 가지 경향의 전환점으로
청춘물이었던 초기작들을 제외하고, <미스터 맘마>부터 언급하는 것은 물론 과도하다.
나는 <미스터 맘마>에서 갑자기 집을 나간 부인의 결단과
이로 인해 직장에서의 육아를 담당하게 된 남자(최민수 역) 둘 모두를 지적하고 싶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과잉된 읽기이겠지만,
<미스터 맘마>의 최민수는 본편 <전설의 주먹>에서의 황정민과 그리 멀지 않다.
강우석이 <달콤한 신부들>에서 <스무살까지만 살고싶어요>라는 난감한 청춘물을 넘어서는 순간
그가 선택한 <미스터 맘마>라는 '해피 이벤트'는 사회-가정적 루저로서의 남자와
이를 걷어내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선언하고 조종하는 여성이라는 두 양성을 보게된다.
일면 유능해 보이지만, 사회-가정적으로 불구스러운 존재로 자리매김한 남자와
위풍당당한 여성-부인의 자리의 최절정은 당연 <마누라 죽이기>와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이다.
어색할지 모르지만, 이같은 여정의 끝에 <이끼>의 원작과는 다른 반전이었던 엔딩의 유선을 거론할 수 있다.
이쯤되면, 당신은 이같은 경향에 단단히 조의를 표할것이다.
삼류 정치극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부터 <투캅스>, <공공의 적> 시리즈와 더불어
<실미도>, <한반도>, <이끼> 류의 남성 버디액션극과 남성동성집단의 반란 혹은 민족주의의 기이한 쾌거 등에서
위 경향성을 찾지 못했다면, 이제부터 또다른 강우석의 실로 괴이한 현실 감각을 찾을 때가 되었다.이것이 내가 두번째로 말하려는 강우석의 자화상이고, 이것은 기실 위 경향성과 절반 정도 겹쳐져있다.
그는 현재의 윤리적으로 비난받겠지만 동시에 교정될 수 없는 시스템 자체를 용인하자고 과감히 권유한다.
투캅스에서 안성기가 초보형사 박중훈에게 했던 대사와 자해, 상황코미디 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도저히 어찌할 바 없는 현존이라는 과제 앞에서 분연히 남성 주인공은
총과 주먹과 의리와 이름과 민족과 아버지를 찾아내려 하지만, 시스템은 확실하게 전복되지 않는다.
<투캅스>의 형사, <공공의 적>의 검사, <실미도>와 <한반도>와 <이끼>의 정치들은
관객에게 해소의 쾌감을 주면서도 여전히 이름만 뒤바뀐 채 거기에 그대로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의 적 2>와 <글러브>는 홍보-실화물을 넘어서 강우석 자신의 애처로운 고백론이다.
본편에서 위 두 경향의 교차로는 좁혀진다.
누구나 지적하는 이요원의 무색한 연기의 이면에는
<미스터 맘마>와 <마누라 죽이기>의 최진실과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의 심혜진과
<이끼>, <글러브>의 유선이라는 선인들의 자리에 포개져있다.
나는 이요원의 연기와 캐릭터가 굳이 여성이어야할 어떤 이유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본편을 넘어서서 강우석의 세계 안으로 확장할 때만 다시 이요원의 자리는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본편을 그저그런 삼류 응징극에서 구출(?)하는 이요원의 어색한 존재감은
어떤 연기도 필요없이 여전히 스카우팅된 영악한 예능프로그램의 여성 PD가
관객의 기대심리와는 달리 어떤 도덕적 처벌도 받지 않을 때 만들어진다.
의리와 자존감, 가족이라는 감정적 도취에서 비롯된 관객과 나눌만한 승리감은 남성 3역에게 주어지겠지만,
그들이 멀리 각자 자기 갈 길을 갈 때, 여전히 시청률을 높이고 후속편을 준비하는 것은 PD 이요원이다.
관객으로서 당신이 혹여 끌어안은 해소의 자리가 믿음직했자면,
꺼꾸로 이요원과 더불어 정웅인의 자리 역시 그대로 거기 존재한다.
심지어는, 조폭-스포츠 도박 업자는 국정원에 의해 체포조차 되지 않는 처리를 쉽게 넘기지 말자.
코믹극이라는 형식이 동원되어야하는 이유는 이같은 시스템의 존속에 대한 덮개 정도로 이해해도 좋겠다.
코믹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좀 더 우스개를 펼쳐도 좋다면,
나는 본편에서 <실미도>의 그림자를 패러디처럼 엿본다.
일종의 후속편으로서의 일탈된 변명,
동원될 필요 없는 격투기 아나운서로서의 강성진과 제작국장 강신일의 복귀는
원작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축출된 국정원 요원 역할의 성지루와 어색하게 연결된다.
문제는 성지루가 진짜 국정원 요원이었다며는 극 말미의 처리인데,
여기에는 국정원 그 자체에 대한 현재의 정치적 상황이 전혀 배제된 선악 배제의 가치가 놓여있다.
<실미도>로부터 살아돌아온 두 남자와 국정원이 아닌 중앙정보부라는 머리띠를 두룬 성지루의 결합은
여전히 마초 루저에서 생환해야하는 강우석 세계의 남자들을 발견하게 만든다.
나아가자면, 유준상은 기러기 아빠이지만, 아들과는 통화해도 부인과는 통화하지 않으며
윤제문은 고교 졸업도 하지 못한 처지에 대학생, 총각을 두어번이나 반복 언급한다.
당신이 아직도 주인공 황정민의 부인이 왜 사망했는지 알고싶다면 이유는 여기에 있다.
황정민의 본가는 언급되지 않아도 처가쪽 장모님과 처제들이 여성 동성 집단만 등장해야하는 사유도 동일하다.
그녀들은 죽거나 생략되지만, 오히려 이요원 혹은 황정민의 고교생 딸만큼이나 마초 루저들을 조종한다.
그리고 그 이요원의 곁에는 <실미도>로부터 귀환한 강신일과 강성진이 있다.
물론, 당신은 88 올림픽 예선전과 사당동 철거와 대기업 총수의 야구방망이 구타와 경찰-조폭의 비리를 본다.
누군가는 이것이 이종 격투기가 횡행하는 세계에 대한 통시적인 강우석스러운 양념이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오히려 농구장에서 혼자 제대로 농구를 하지 못하는 남서울고 신재석의 밤에 주목하라고 주문하겠다.
잔인하게 가보자. 임덕규-황정민의 고교 동창생들은 전설 대전의 황정민-유준상-윤제문을 시청했을까.
아무도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감독이 이를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지금 개과천선, 인생무상을 관객이 읽었다면, 당신은 그 반대편 10대 시절의 아픔을 안고사는 이들을 잊은 것이다.
모두가 이종격투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혹은 이유가 사라져야하는 강우석의 세계,
시스템은 여전히 부당하게 존속하고, 여성은 은연 중에 남성을 이용하고 지배하는 자리가 본편을 위장한다.
지극히 신파스러웠던 웹툰 원작을 <이끼>만큼이나 자신의 세계로 개조한 강우석은
비록 흥행에 실패하고, 조잡한 만듦새로 지탄받을지라도 자신의 좌표를 구축하는 고집만큼은 유지하고 있다.
<전설의 주먹>은 관객이 다시 점검해봐야할 강우석의 세계에 대한 조감도이며
마초 루저들의 감상적 객기가 어떻게 여성-시스템에게 이용당하는지에 대한 액션 토로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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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설의 주먹은 조만간 볼 생각입니다.
강우석-시네마 서비스에 대한 부당한 애도에 대해서는 전작 <이끼> 글에서 나눈 바 있으니 생략하자.=>이건 본적이 없는데요?
오늘 술자리에서 이야기했으니, 충분하지 않은가요. 그나저나 10주년 기념식 계획은 어떻게 세우셨나요? <전설의 주먹>은 안 보시는 편이 건강에 좋으실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