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장군의 회고록 <백선엽의 6.25전쟁 징비록 >에 의하면
6.25한국전쟁의 8할은 중공군과의 싸움 이라고 했다.
제 5장에서는 "중공군은 강했다". "그들은 당나라 군대가 아니었다". "우리는 저들을 너무 몰랐다". "끝내 중공군에 서울을 내주다". 나는 최근에 백선엽의 징비록을 통하여 6.25전쟁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6.25전쟁에서 백선엽을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백선엽은 1920년생이다. 해방때에는 25살이었다. 6.25전쟁때는 30대 장교였다. 백선엽은 전쟁의 현장에 있었고 육군 참모총장과 32살에 한국군 최초의 별 넷 대장이 된다. 미국이 가장 신뢰했던 한국의 장군이었다. 나는 백선엽장군을 존경한다. 일부의 과오는 공칠과삼 功七過三으로 본다.
우리는 중공군이라고 부르는데 공식명칭은 <중국인민지원군>이다.
휴전협정문에 서명자 <펑 더화이 彭德懷>는 사령관 겸 정치위원이다. 그들의 참전 명분은 항미원조보가위국 抗米援朝保家 衛國이다. "미국을 대항하여 북조선을 지원하는 것은 가정을 지키고 국가를 보호하는 것이다".
1950년 10월 25일부터 2년 9개월동안에 한반도에 들어온 중국인민지원군의 수는 연인원 240만 명을 넘었다.
백선엽은 한국전쟁중 처음 3개월을 제외하면 인민군은 중공군의 향도向導(길잡이)에 불과 했다고 말한다. 한국전쟁의 대부분은 사실상 중공군과의 싸움이었다고 말한다.
우리국군은 1948년 정부수립 후 창설되어 겨우 2년이 지났다.
전력은 어린아이 걸음마 단계였다면 중공군은 중국본토에서 국민당 공산당의 합작으로 일본군과 싸웠고(국공합작) 해방 후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국공내전)으로 10년 넘게 실전 경험을 지닌 단련된 군대였다.
단지 중국 본토로 부터 멀어서 보급선이 길어서 어려움을 겪었을 뿐이다.
중국단동에는 항미원조抗米援朝기념관이 있다.
1) 백선엽의 6.25전쟁 징비록1.
목차
제2장 싸움에 목숨 걸 수 있어야 군인
이순신 장군은 아주 바빴을 것 048
도망친 분대장을 아직 찾는 이 055
6.25의 8할은 중공군과의 싸움 063
중공군이라는 ‘악몽’을 떨치다 070
제3장 맥아더의 영광과 좌절
지프에서 내리지 않았던 고령의 장수 093
적을 경시해 불렀던 여러 패착 100
중공군에게 곳곳에서 당하다 107
다시 생각하는 ‘압록강 물 뜨기’ 114
서울로 먼저 내뺀 국군 사단장 둘 121
제대로 적어야 할 우리의 패전 128
제4장 리지웨이의 빛과 그늘
오만했지만 싸움에 능했던 지휘관 138
중공군이 가장 두려워했던 장군 145
강력한 쇠사슬을 펼치다 153
제5장 중공군은 강했다
그들은 ‘당나라 군대’가 아니었다 182
참전 과정부터 드러낸 전략의 깊이 188
우리는 저들을 너무 몰랐다 216
맥아더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다 223
북한군과 중공군의 차이 229
기만에 매우 능했던 중공군 지휘부 243
애병(哀兵)과 교병(驕兵) 250
그러나 미국은 강했다 257
워커 장군 리더십의 명암 263
끝내 중공군에 서울을 내주다 270
2) 6.25전쟁 파워 리더 백선엽을 말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
선생님 감사합니다.
무더위입니다. 오늘도 화이팅하세요.
감사 합니다. 창해 선생님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화이팅하세요.
귀한 글과 정보들 감사합니다.
다시 6.25전쟁에 대하여 꼼꼼히 공부하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항미원조 보가위국.
抗米援朝 保家衛國. 오늘도 화이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