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지마 페트로프봇킨(1878~1939), ‘붉은 말의 목욕’, 1912년, 160×186㎝, 트레티야코프미술관(모스크바, 러시아)
우리에게 꿈은 있는가?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한 시간 더 공부하면 마누라(남편)의 얼굴이 바뀐다.
미국의 한 명문대학 도서관에 붙어 있다는 권학 30훈(訓)의 첫 번째와 서른 번째 항목입니다. 또 ‘꿈이 바로 앞에 있는데, 당신은 왜 팔을 뻗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희망이란 눈뜨고 있는 사람의 꿈’이라고 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언과도 맥이 닿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꿈을 꿉니다. 꿈은 ‘잠자는 동안에 생시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는 일’로 생리적 현상입니다. 꿈도 가지가지입니다. 횡재를 한다는 돼지꿈 똥꿈, 출세 길이 확 열린다는 용꿈은 길몽에 속합니다. 사람 또는 짐승에 쫓기거나 온갖 신고를 겪는 경우는 흉몽입니다. 개꿈이라고도 합니다. 간절한 바람과 욕망, 애절한 사랑과 그리움이 꿈으로 나타나는 것이 잡몽(雜夢)이라면, 신내림을 경험하는 영몽(靈夢), 심신허약으로 꾸는 허몽(虛夢)도 있습니다.
권학 30훈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꿈은 위에서 말한 생리적 현상의 몽환이 아닙니다.
인간의 불타는 야망과 의지・희망의 결정체를 말합니다. 각고의 노력, 끊임없는 정진으로 평생 한우물을 파야 비로소 이룰 수 있는 목표이자 과실입니다. 꿈은 성취한 사람에게는 자신감과 자긍심을 갖게 합니다. 주변 사람에겐 부러움과 도전정신을 북돋아 줍니다. ‘꿈은 불만족에서 나온다’ ‘꿈꾸는 힘이 없는 자는 사는 힘도 없다’는 선각자들의 말처럼 꿈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 지위에 올려놓은 원동력입니다.
# ‘행복 고문’으로 꿈을 깨뜨리는 허구의 말잔치
그 꿈을 깨뜨리는 허구(虛構)가 도처에서 끊임없이 벌어집니다. 먼저 떠오르는 건 70년이 되도록 못다 이룬 남북 이산가족들의 꿈입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 찬 흥남 부두에서 지아비와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가 피눈물 나는 회한의 작별을 해야 했던 실향민. 꿈에 본 내 고향, 내 가족을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그들 대부분은 피붙이와의 상봉을 이루지 못한 채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서 얼싸안고 춤도 추어보기는커녕 편지 교환, 전화 통화, 상시 상봉도 정치흥정에 밀려 사라지는 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남과 북의 책임 떠넘기기 탓입니다.
‘대박’이라고 했던 통일의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있는지 아리송합니다.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찾는 데 통일 / 이 목숨 바쳐서 통일 / 꿈에도 소원은 통일’~ 얼마나 애절하게 바라고 외치던 통일이었습니까.
대박 대신 ‘평화’를 앞세운 통일도 북한의 몽니에 번번이 태클을 당하고 있습니다. 북이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중장거리 미사일과 신형 장사포를 끊임없이 쏘아대도, 남은 “위중한 군사협정 위반이 아니다”라며 태연합니다. 도발과 함께 “겁먹은 개”라는 막말・조롱에도 문 정부는 꿀 먹은 벙어리입니다. 나라 안보는 꿈에 오줌을 싸 이부자리만 적셔 놓은 꼴입니다.
젊은이들의 꿈, 야망과 희망이 사그라지고 있습니다. 조국(祖國)을 두 동강 낸 조국(曺國) 가족의 비리 정황과 딸의 대입 특혜 의혹은 백성을 서초동 ‘국민’과 광화문 ‘우중(愚衆)으로 갈라놓았습니다. 해당 서울대는 특혜 여부 진상조사도 않고 ’대학 공정성‘ 포럼을 연다고 합니다. 단국대 논문을 입시에 반영한 고려대는 논문이 취소됐는데도 수사를 지켜볼 것이라며 윤리헌장을 공표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학술대회 보고서에 중1 아들을 저자로 올리는 등 미성년 공저자 부정 등재 교수가 7명이나 적발됐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날 날을 꿈꿔 온 대다수 젊은이들은 부모 잘못 만나 지렁이 꿈도 꾸지 못합니다. 꿈 깨지는 신음소리가 요란합니다.
# 애 못 낳는 년이 밤마다 태몽 꾼다는 격
일자리는 어떻습니까?
지난 2년간 30, 40대 취업자가 41만 명 줄었는데도 정부는 “고용이 양적 질적으로 뚜렷한 회복세”라고 합니다. 예측할 수 없는 천재지변 등에 쓸 예비비 예산을 들여 도로변 덩굴 뽑기, 철새 감시, 자전거사고 다발지역 조사, 독거노인 전수조사 같은 급조한 단기 일자리 증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공공 자전거 따릉이 사업(서울시), 미니태양광 설치(울산시), 숲 가꾸기(충북), 하천 정비(대전시) 등은 여성가족부의 ‘성 인지 사업’ 지원 요청에 부응한 지자체 사업들입니다. 여가부는 이를 ‘성 평등 사업’이라고 합니다. 역겨운 해몽입니다.
평균 근로시간이 법정 근로시간(주 52시간)에 맞으면 업무량에 따라 근로시간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탄력근로제는 입법 9개월째 국회에서 헛바퀴를 돌고 있습니다. 어제는 “우리 경제가 튼튼하다”고 했다가, 오늘은 “경제 상황이 녹록하지 않고 엄중하다”며 자꾸 말이 바뀌는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재정지출 확대를 해법으로 내놓았습니다. 그 와중에 한전・한수원・건보공단 등은 지난해 10조 원의 빚을 졌는데도 임원들에게 12억 원을 주는 성과급 잔치를 벌였습니다. 정부는 이들 공기업의 실적보다 ‘사회적 책임’ 배점을 늘려 “경영을 잘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어느 것이 검은 고양이인지 흰 고양이인지 헛갈려 꿈자리가 어지럽습니다.
암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하니 너도나도 강아지 구충제를 찾는 어리석은 백성들. 그들에게 말로만 만화방창 꽃을 피웠다가 이 가을에 거둘 열매・뿌리가 없으면 그 말이 꿈에 다시 들릴까봐 몸서리가 쳐집니다. ‘죽을 각오’로 삭발한 한국당 대표와 국회의원들, 산하기관을 쥐어짜 취업률을 높이려는 청와대의 강짜, 재원 대책도 없이 수도권 서부지역 광역급행철도(GTX) 설치를 검토하겠다는 국토교통부, 3년 살면 무조건 등록금 200만 원을 지원하는 조례를 만든 안산시 등이 야멸치게 내놓은 꿈입니다. 속담처럼 ‘애 못 낳는 년('씨 없는 놈'이 원인일 수도 있지만)이 밤마다 태몽 꾼다’며 자랑하는 격입니다.
[퍼온 글] / 출처; 2019년 11월 06일 (수) 00:11:10의 자유칼럼그룹 칼럼 / 필자소개; 김홍묵(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창경궁 춘당지
11월의 방정환
‘어린이’는 1920년 방정환 선생이 외국 동시를 번안하면서 처음 사용한 이래 어린이날 선포, 월간 ‘어린이’ 발간 등을 통해 점차 일반화된 어휘이다. 근대 계몽운동의 대상이자 주체로서 강조된 ‘소년’과 비교할 때, 어린이라는 말에는 윤리적,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난 완전한 인간으로서 권리를 보장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어린이를 뜻하는 한자는 유(幼)이다. 한 가닥 실의 모양을 본뜬 요가 작다, 약하다 등의 뜻이고 여기에 역(力)을 더한 유(幼)는 힘이 약한 아이를 가리키는 글자가 되었다. 2500년 전에 나온 <주례(周禮)>의 백성 양육 정책이 자유(慈幼)와 양로(養老)로 시작된다는 사실에서, 연약한 존재인 아이를 잘 보살펴야 한다는 인식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유(幼)가 대개 노(老)와 함께 먼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사용되는 데 반하여, 방정환 선생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어린이’는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한 인격 존재임을 부각하였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어린이날이 있는 5월과 가장 먼 계절인 11월에 방정환 선생을 떠올리는 것은, 11월9일이 그분이 태어난 지 120년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탁월한 문화예술인이기도 한 선생은 1918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재학 시절 연극 <동원령>을 각본, 연출하여 공연하였고, 이듬해에는 최초의 영화 잡지인 ‘녹성’을 창간하기도 했다. 이번주에 탄생 120주년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100년 차이가 나는 후배들이 <동원령>의 연내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계몽과 독립이 급선무이던 시절,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선언은 낭만적인 이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편으로 지금 우리 사회는 어린이를 지나치게 떠받들고 있으니 어린이날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것 아니냐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구태의연한 공부 경쟁에 내몰린 채 스마트 기기에 영혼을 빼앗긴 어린이들을 보며,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가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라는 방정환 선생의 당부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100년 전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라는 낯선 말을 보급하며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 냈다. 지금 우리는 ‘어린이’라는 낡은 말을 다시 음미하며 그 무한한 가능성에서 우리의 ‘살길’을 찾을 때다
[퍼온 글] / 출처; 경향신문 / 송혁기(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 2019.11.05 20:30
부겐벨리아꽃
내가 지은 집이야
일산 신도시에 살던 시절이었다. 시를 쓰는 친구가 놀러 와선 멀리 보이는 열병합 발전소를 가리키며 "저 집 내가 지은 거야"라고 말해서 놀란 적이 있다. 그는 시를 짓지, 집을 짓는 사람이 아니었고 설계를 전공하거나 목수처럼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그 건물을 지을 당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잠시 벽돌을 나른 것이 "내가 지은 거야"라고 말한 근거의 전부였다.
사실 그 말은 건축업에 종사하는 내내 들은 소리다. 집주인은 당연했고, 집을 설계한 건축가도, 집을 지은 시공자도, 짓는 것을 감독한 감리자도, 허가를 내준 공무원도, 그리고 지게차 운전사도 그렇게 말한다. 심지어 우리 회사 인턴 직원도 자신이 참여한 집수리의 오픈하우스에 부모님을 초대하여 "엄마, 이 집 내가 지은 거야"라고 (나직이) 말했다.
건축판에서 흔한 말 중 또 하나는 시공자에겐 "돈을 주니까 했으면서 무슨" 설계자에겐 "그림만 그렸으면서 무슨" 감독자에겐 "말로만 했으면서 무슨" 공무원에겐 "도장만 찍어놓고 무슨"이란 평가다. 마치 혼자서 집을 지은 듯하거나 혹은 상대를 폄하함으로써 자신의 공적을 암시하려는 것인데 화법만 다를 뿐 내용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집을 지은 이가 이토록 여럿일 땐 누구 말을 믿어야 할까?
내가 볼 때 모두가 맞거나 혹은 모두가 틀리다. 건축가의 설계, 집주인의 자본과 의지, 시공자의 기술, 감독자의 잔소리 그리고 지게차의 동력 중 어느 하나만 없어도 집 짓기 가 어렵지만 그렇다고 혼자 지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집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짓다'의 주체는 기여도가 높은 누군가가 아니라 짓는 데 참여한 모두를 칭한다는 것이다.
그래, 언젠가 인턴을 만나면 (나직이) 말해줘야겠다. "이 집은 네가 지은 거야"라고. 인부들로부터 점심 메뉴를 주문받고, 현장 방문객에게 길을 안내하는 일도 이 집에서 꼭 필요한 몫이었으니.
[퍼온 글] / 출처; 조선일보 / 김재관(집수리 건축가) / 2019.11.05 03:02
소국
공감능력 결핍 사회
20일째 계속되는 칠레 시위의 도화선은 정부의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 발표였다. 경제산업관광부 장관이 “새벽에 일어나 조조할인을 이용하라”고 말해 시민들을 격분시켰다. 대통령은 비상사태 속에서 한가로이 가족 식사를 즐기고 그 부인은 시위대를 외계인에 비유했다. 지도층의 공감능력 결핍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취소라는 국제 망신까지 초래했다.
한국 정치권도 입만 열면 ‘민주주의’와 ‘공정’ ‘정의’를 외치면서 정작 공감과 소통에서는 무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국 사태’를 겪으면서도 청와대와 여야 정치인들이 정파적 언쟁과 진영논리로 일관해 국민의 공분을 샀다. 고질적인 이념 갈등에 더해 경제・외교・안보・교육 문제까지 편가르기와 선동으로 일관하며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다.
학자들은 공감의 속성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남의 처지를 충분한 사고로 이해하려는 ‘인지적 공감’과 남의 감정을 내 감정처럼 느끼는 ‘정서적 공감’, 상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공감적 관심’이 그것이다. <공감하는 능력>의 저자 로번 크르즈나릭은 “공감능력을 키우기 위해 뇌의 공감회로를 작동시키고, 남의 관점을 인정하려고 노력하면서 배려하는 마음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공감능력이 부족하면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고 아집과 독선에 빠지기 쉽다. 남의 아픔에 완벽하게 공감하지 못하면서 마치 동일하게 고통받는 것처럼 행세하며 선동을 일삼는 경우도 있다. 미국에서는 엄청난 전기를 쓰며 대저택에 살면서 환경보호를 부르짖는 앨 고어 전 부통령 같은 사람을 ‘공감 오남용형 인간’이라고 비꼰다.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독선과 아집도 경계해야 한다. 가치관이 비슷한 집단 속에서 ‘편향된 감정’에 사로잡히는 부작용 또한 크다. 정치권이 이를 ‘잘못된 잣대’로 악용할 땐 문제가 더 커진다. 선거를 눈앞에 둔 정당들이 ‘감성팔이’로 유권자를 유혹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만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폴 블룸 예일대 교수의 충고를 귀담아들을 만하다. “한 국가의 시민들이 우물에 빠진 아이의 소식에 눈을 떼지 못하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안전대책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진정한 공감의 답은 가슴과 머리를 결합한 ‘효율적 이타주의’다.”
[퍼온 글] / 출처; 한경닷컴 / 고두현(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2019.11.06 00:17
행운의 상징 ‘아기상어’
할리우드 여배우 메릴린 먼로가 뭇 남성의 연인으로 사랑받았다면, 비슷한 시기의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는 세계 여성팬들의 로망이었다. ‘상류사회’(1956년)라는 뮤지컬 영화에 출연한 뒤 모나코 왕자와 결혼하면서 당대의 신데렐라가 됐다. 특히 이 영화에서 행운의 징표로 받은 지폐 덕분에 신데렐라가 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미국 사회에서는 ‘2달러 지폐’가 행운의 상징이 됐다. 1928년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에서 최초로 발행한 2달러짜리 지폐는 지불 수단으로는 불편함이 많아 사실 잘 사용되지 않았지만, 이후 지금까지 국가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념으로 발행되고 있다.
유럽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네잎클로버’는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해 준 일화가 알려지면서 행운의 상징이 됐다. 몽골인들은 어깨 위에 독수리를 올려놓으면 1년 동안 행운이 함께한다고 믿는다고 한다. 태국과 미얀마에서는 코끼리를 행운의 상징으로 여기며, 코를 높이 든 코끼리일수록 큰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일본과 러시아에서는 인사하는 고양이 ‘마네키나코라’와 나무 인형 ‘마트료시카’가 행운의 상징으로 통한다.
최근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의 한 출판사가 제작한 동요 ‘아기상어’(Baby Shark)와 그 가족들의 캐릭터가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알려져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2015년 국내의 유아 콘테츠 제작 업체가 북미권의 구전동요를 각색한 것으로 그야말로 5~6세 전의 아기들을 위한 노래다. 평이한 가사와 ‘뚜루루뚜루’라는 중독성 높은 후렴구로 인해 현재 유튜브 재생 조회 수가 40억 건에 다가가고 있을 정도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특히 올해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에서 이 곡을 팀의 간판곡으로 사용한 뒤 ‘워싱턴 내셔널스’가 창단 95년 만에 시리즈 우승까지 거머쥔 사실에 전 미국인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몇 해 전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싸이의 ‘강남스타일’ 말춤과 요즘의 방탄소년단(BTS)의 인기를 능가할 수준이라고 하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이달 초부터 미국의 100개 도시를 순회하는 ‘베이비샤크 라이브’를 진행 중인데, 가는 곳마다 매진이라고 한다. 세계인을 매료시킨 엘사 공주를 비롯해 곰돌이 푸, 미키마우스 등 캐릭터 왕국 미국에서 한국인이 만든 ‘아기상어’ 동요와 캐릭터가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니 마냥 자랑스럽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일 백악관에서 연 월드시리즈 우승 축하연에서 이 동요가 울려 퍼졌다. 트럼프는 “강렬하고 귀여운 노래”라고 칭찬했단다. 행여 그가 재선 홍보용으로 이 노래를 사용할까봐 지레 걱정이다.
[퍼온 글] / 출처: 서울신문 / 이동구(서울신문 논설위원) / 2019-11-06 02:25
연화바위솔
술병의 연예인 사진
‘너는 술병 / 나는 속병 / … / 처음에는 불만 해소 / 나중에는 숙취 해소’. 주객들 사이에 떠도는 ‘소주병’이라는 제목의 시다. 해설 달지 않아도 내용은 다 안다. 주당이라면 다들 겪어본 일이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몸이 알코올을 거부하거나 다른 신념으로 일평생 술 한 모금 안 마시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술은 사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자리 잡았다. 대개는 주위의 권유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그러다 횟수가 늘고 적정량을 넘기는 일이 계속되면 숙취에 시달리다 병까지 얻어 고생하게 마련이다.
정부의 고민도 거기에서 시작된다. 시비와 실례와 다툼과 폭력, 주취 운전 등으로 이웃에 폐를 끼치거나 금지선을 넘는가 하면 건강마저 잃곤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습 음주로 알코올의존증을 앓게 되면 국민건강보험에도 부담을 떠안긴다. 지난해 건강보험이 지출한 연간 총급여액은 58조7500억 원에 가깝다. 이 중 음주로 인한 급여액 지출은 2조2000여억 원이나 된다. 또, 2017년 1년 동안 알코올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만 4809명에 이른다. 이 모든 문제의 중심에 과음(過飮)이 있다.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 진안대군 방우(芳雨)는 술을 좋아해 날마다 마셨는데, 결국 39세에 술병이 나서 졸(卒)했다. 또, 태종 때 경상도 경차관 김단은 서울에서 경상도로 가던 중 충청도 옥주(옥천)에서 급서했다. 지방 수령이 마련한 자리에서 과음한 나머지 목숨을 잃었다. 경기도 금천현감 김문 역시 소주를 너무 마신 나머지 알코올중독으로 절명했다. 그에게 술을 너무 권해 과음 치사케 한 수원부사 박강생과 봉례랑 윤돈은 파직됐다. 다만 “술을 권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려 함이 아니요, 동료 관리를 전별하는 일 또한 상사(常事)”라는 태종의 배려로 다른 처벌은 면했다.
보건복지부가 술병 등 주류 용기에 연예인 사진을 담지 못하게 하는 방향으로 국민건강증진법 시행령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인기 연예인, 그것도 유명 여성 모델을 내세운 술 광고가 음주를 미화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금연정책에 비해 금주정책이 상대적으로 미온적이란 질타도 있단다. 하지만 주객들은 술병의 연예인 사진 때문에 술을 더 마시거나 덜 마시거나 하지 않는다. 자칫 정책의 기대 효과는 거두지 못한 채 술 광고 여성 연예인에 대한 비호감만 키우게 되지 않을지 염려스럽다.
[퍼온 글] / 출처; 문화일보 / 황성규(문화일보 논설위원) / 2019년 11월 05일(火)
위험한 독서
독자 형편 따라 텍스트 바뀌는건 아닌데… 정보 무한한 시대 확증 편향은 아이러니
문자로 된 텍스트는 영상과 달라서 이미지로의 번역 과정을 통해서 이해된다. 가령 ‘석양 무렵 인상이 험악한 젊은 남자가 도시 변두리에 있는 한갓진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문장을 읽을 때 독자는 석양 무렵의 하늘과 거리를 머릿속에 그려야 하고 인상이 험악한 젊은 남자, 도시 변두리, 도시 변두리에 있는 한갓진 여관, 그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를 그려야 한다. 그렇게 해야 이 문장은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받아들여짐은 거의 항상 완전하지 않다. 모든 독자의 머릿속에 똑같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남자는 얼마나 젊고 어떻게 험악한 걸까. 도시 변두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한갓진 여관은? 한갓진 여관의 문은? 그 험악한 젊은 남자는 그 문을 어떻게 열고 들어올까? 같은 문장을 제시하고 자기가 읽은 문장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하면 사람마다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그림을 그릴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 개인의 고유한 경험과 환경, 선입견과 고정관념 같은 것이 문장 번역, 즉 그림 그리기에 관여한다. 기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부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석양은 따뜻하고 포근한 인상을 준다. 어떤 사람은 석양에서 신비와 경외감을 느낀다. 쓸쓸함이나 황량함을 느끼는 사람이 없으란 법도 없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자신의 전 삶(에 의해 형성된 감각)이 참여해서 하는 번역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외국의 호텔이나 카페에서 소설을 읽을 때 소설 속의 시간과 공간, 인물들이 여행지의 시간과 공간의 침입을 받아 변하는 걸 경험한다. 한국 작가가 쓴, 틀림없이 한국의 어느 도시가 배경인 소설을 읽는데도 자꾸만 현재 있는 도시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문장을 이미지로 바꾸는 과정에, 이제까지의 전 삶(에 의해 형성된 감각)만이 아니라 책을 읽고 있는 현재의 상태 역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석양 무렵의 젊은 남자, 도시 변두리의 한갓진 여관 등이 한국의 어느 도시가 아니라 내가 있는 도시에서 보이거나 보일 거라고 예상되는 모습으로 바뀌어 그려진다.
호텔에 누워서 읽을 때와 카페에 앉아서 읽을 때도 텍스트는 미세하게나마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읽을 때와 푹신한 소파에 앉아 읽을 때 역시 마찬가지다. 우울할 때와 명랑할 때 읽는 책이 같은 감상을 줄 리 없고, 열여섯 살 때와 쉰아홉 살에 읽는 책 역시 그럴 것이다. 독자의 처지나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는 것, 그것이 문자 텍스트의 숙명이다.
있는 자리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는 명제는 사실 특별하지도 새롭지도 않다. 객석의 사이드에 앉으면 자기 쪽 무대는 다른 관객보다 더 잘 볼 수 있지만, 반대쪽 무대는 다른 관객보다 더 잘 보지 못하는 이치다. 한쪽을 잘 볼 수 있는 이점이 있지만 다른 쪽을 잘 볼 수 없는 단점도 있는 것이 사이드 객석의 조건이다. 기둥 뒤에 앉은 사람은 어떨까. 그는 기둥 앞에서 일어나는 일은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객석의 조건과 독서 환경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망각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내가 보지 못하는 다른 쪽, 그리고 내 눈앞의 기둥 앞에서도 누군가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와 다르게 문장을 번역해서 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이 세상을 읽는 독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정보의 양이 무한하고 누구나 제한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 확증편향 현상이 더 심화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사회관계망서비스가 이런 현상을 부추긴다는 보고가 있다. SNS는 성향의 공유를 통한 소통을 강화함으로써 같은 쪽에 있는 것은 더 잘 보이게 하지만 다른 쪽에 있는 것은 잘 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기둥 뒤에 앉아 기둥 앞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반쪽짜리 무대만으로 연극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파리의 한 카페에서 읽는다고 해서 철수가 앙리가 되는 일은 없다. 독자의 형편에 따라 바뀌는 텍스트는 없다. 그렇게 보일 뿐 실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가 있는 자리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 독서는 위험하다.
[퍼온 글] / 출처; 국민일보 / 이승우(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2019-11-06 04:02
산사나무
갈등과 타협
정신분석 초창기에 시작해 꽤 오랫동안 분석의 목표는 갈등의 해소였습니다. 갈등(葛藤)을 의식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함’이라고 정의합니다. 약간 더 들어가면 ‘두 가지 이상의 상반되는 요구나 욕구, 기회 또는 목표에 직면하였을 때, 선택을 못 하고 괴로워함’입니다. 이런 심심한(?) 정의로는 갈등 해소의 대책을 세우기가 막막해집니다.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갈등을 살펴보면 어떨까요? 그 정체는 훨씬 복잡하고 활동은 매우 교묘하게 이루어집니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현실 판단력에 장애를 일으키며 심각한 정신질환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갈등은 대부분 무의식이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며 본능적 욕구와 소망이 저항과 금지와 충돌하면서 불안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불안이라는 불편한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방어하는 과정에서 타협의 결과물로 증상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구조이론에 기반을 둔 갈등의 정체이고 그는 갈등을 해소와 제거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갈등은 주로 무의식에서 활동하며 무의식은 우리가 알기 어려운 마음이라면 분석과정에서 어떻게 갈등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정신분석 현장에서 분석가가 사용하는 ‘갈등 감지기’는 자유연상입니다. 정신분석이 진행되는 공간에서, 분석을 받는 사람이 그 시점에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모두 분석가에게 말하도록 하는 겁니다. 실제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분석가가 되려고 ‘교육 분석’을 받았던 경험을 돌이켜보아도 자유연상은 쉽지 않았고 늘 가능하지도 않았습니다. 감추고 싶은 것을 때로는 숨겼고 때로는 말하면서 수치심을 참느라 힘들었습니다. 분석 비용을 내고 얻은 귀중한 시간이 계속 흘러가는 것이 초조하고 아까워서 되도록 자유연상을 하려고 애쓰기도 했습니다만. 그만큼 자유연상은 어렵고 그 역시 갈등을 일으키지만 떠오르는 생각을 숨기거나 모호하게 흐리면 분석의 대상인 갈등의 모습은 멀어집니다.
자라면서 겪은 부족함(정서적 결핍)을 보충하는 작업도 분석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하는 ‘자기 심리학’이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것의 영향을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관계 정신분석학’이 힘을 얻으면서 정신분석학의 ‘갈등’이 차지하고 있던 독점적 위치는 다소 퇴색되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갈등은 정신분석의 중심에 잡은 자리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정신분석학을 갈등 심리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동아일보 기자)
갈등의 해소가 여전히 정신분석의 목표가 되어야 할까요? 프로이트 이후, 세월이 흐르고 현대 정신분석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등이 전혀 없도록 마음을 관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마음에서 갈등을 전부 없애려고 노력하는 일 자체가 불필요한 심리적 저항으로 작용해 분석과정에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니 갈등의 정체를 이해하고 차라리 받아들이면서 타협책을 찾는 것이 더 낫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느끼는 상태가 갈등이라면 서로 충돌하는 사랑이나 미움 중 한쪽을 없애야 갈등이 해소되겠지만, 양가감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힘을 키우는 방향이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갈등의 정체와 생겨난 의미를 이해하고 갈등과의 공존을 감당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을, 갈등을 무조건 없애려고 애쓰는 것보단 더 나은 선택으로 봅니다.
갈등 없는 삶을 꿈꾸는 것은 인생 자체를 부정하는 겁니다. 갈등은 늘 우리 곁에 있고,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없애려고 애를 쓰며 세월을 보내기보다는 그 정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건강한 대처법을 찾는 것이 현명합니다. 인생에는 어차피 굴곡과 매듭이 있고, 매듭이 있어서 키가 크는 대나무처럼 삶을 이겨내야 마음의 힘도 성장합니다. 매듭 없는 인생을 꿈꾼다면 환상일 뿐입니다.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환상과 기대는 살아가는 일을 더 힘들고 지치게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인생은 이겨내는 겁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정점에 달했습니다. 앞으로 심해질 가능성도 큽니다. 사회적 갈등의 경우에 정신분석의 경험을 옮겨 풀어본다면 이러합니다. 우선, 갈등의 정체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인간이 가진 진보와 보수의 성향은 어디에나 섞여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성격 안에도 어떤 면에서는 진보적이고 다른 면에서는 보수적인 성향이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한쪽을 없애버리려고 덤빈다면 저항과 싸움만 일으킵니다. 정신분석이 한때 주장했던 갈등 제거 목표처럼 낡아서 버리는 방법입니다. 갈등의 원천인 양 측면을 서로 알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공존의 타협책을 찾아야 합니다. 정신분석의 자유연상처럼 역시 말은 쉬우나 실천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면하고 있는 갈등의 매듭을 제대로 풀어낼 수 있다면 우리 자신들과 우리가 모여 사는 사회가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퍼온 글] / 출처; 동아일보 / 정도언(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 2019-11-06 03:00
케네디와 포드도 '아메리카 퍼스트'였다
1940년 '유럽 전쟁' 개입 않겠다며 '아메리카 퍼스트 위원회' 결성
오바마는 '뒤에서 리드한다', 트럼프는 '뒤에서 빠지겠다' 차이뿐
자유・민주 가치 공유 없는 미국 일방주의, 중국보다 매력 있지 않아
습관적인 사실 왜곡에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엔 종종 수긍할 만한 대목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는 영국・독일・프랑스 등이 시리아에서 미군에 붙잡힌 자국 출신 이슬람 테러 조직 IS 대원 2000여 명의 본국 송환에 난색을 표하자 "쿠바 관타나모 미군 수용소에 50년간 감금하고 수십억달러를 쓰라고? 노! 당신네 국경에 떨어뜨릴 테니까, 다시 잡아들이는 즐거움을 누리라"고 조롱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테러 집단에 대해서도 "우리가 7000마일 떨어진 그들과 싸우는 동안 바로 이웃인 인도와 파키스탄은 거의 아무것도 안 했다"고 비판했다. 미국에만 부담을 지우는 국제 질서 유지에선 발을 빼겠다는 것이다.
사실 해외 분쟁에 절대로 휩쓸리지 말라는 것은 미국을 세운 국부(國父)들의 유지(遺志)이기도 했다. 조지 워싱턴은 고별사에서 "우리의 진정한 정책은 세계 어느 곳과도 영구적 동맹을 맺지 않는 것"이라고 했고, 존 퀸시 애덤스 6대 대통령은 "해외 괴물을 부수러 나간다면 미국은 세계의 독재국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00년 전 당시 태동한 국제연맹 가입을 놓고도 미국 사회는 크게 분열됐다. 고립주의자들은 "무질서한 세계에서 미국은 발을 빼야 하며 일본・중국・인도인 노동력으로부터 미국을 지키자"고 주장했다. 국제주의자들은 "고립주의 시대는 지나갔는데도 미국이 외부와 절연(絶緣)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망상"이라며 "과수원의 과실(果實)을 지키려면 동맹을 통해 울타리를 크게 쳐야 한다"고 맞섰다. 트럼프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아메리카 퍼스트'란 표현도 이 두 대전(大戰) 사이에 나왔다.
◇ 소련이 헝가리혁명・프라하의 봄・폴란드 자유 노조 짓밟아도 미국 개입 안 해
유럽이 2차 대전에 휩싸인 1940년 '유럽의 전쟁'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는 전국 조직인 '아메리카 퍼스트 위원회'가 결성됐다. 이 위원회 멤버에는 뒤에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민주)와 제럴드 포드(공화)도 있었다. 이 조직은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해체됐다.
이후 역대 미 행정부는 글로벌 전쟁의 참화를 막고 해외 위협으로부터 미국인의 삶을 지키기 위해 군국주의 독일과 일본의 재부상을 막고 중동의 석유를 지키는 국제 질서 구축에 나섰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로버트 케이건은 "미국은 어떻게 하면 글로벌 전쟁을 막을 것이냐는 냉정한 자기 이익에서 행동했고, 이렇게 구축한 질서는 미국에 100배의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냉전 시절 미국은 소련이 헝가리 혁명(1956년)과 프라하의 봄(1968년),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1980년)을 짓밟아도 개입하지 않았다. 이 나라들은 미국인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소련 영향권에 속한 나라들이었다.
'미국인의 삶 보호'라는 해외 개입의 원칙이 깨진 것은 1991년 냉전(冷戰)이 끝나 미국 중심의 단극(單極) 체제가 되고 아들 부시 대통령 때 9・11 테러로 '테러와의 전쟁'에 돌입하면서였다. '미국 예외주의(exceptionalism)'라는 사명감에 젖은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들이 미국의 뜻대로 전 세계를 바꾸기 위해 급격히 군사력 사용을 확대했다. 동시에 미 유권자들의 해외 개입 피로감도 높아갔다. "뒤에서 리드한다(leading from behind)"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독트린은 이 맥락에서 나왔다. 그는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이 화학무기로 수많은 자국민을 살해했을 때에도 크루즈 미사일 한 방 쏘지 않았다.
미 대선이 있었던 2016년 5월 퓨리서치 여론조사에선 지지 정당에 상관없이 미국 유권자들의 70%가 미국의 해외 개입 축소를 원했다. 트럼프의 승리는 이런 분위기의 산물(産物)이었다. 작년 7월 트럼프는 "인구 60만 명의 나토(NATO) 회원국인 몬테네그로가 러시아의 공격을 받았다고, 왜 (나토 조약에 따라) 우리 아들이 그 나라를 지키러 가야 하느냐"는 뉴스 앵커의 질문에 "나도 같은 생각"이라며 "그들이 러시아에 호전적이 되면 우리가 3차 대전에 뛰어들게 된다니"라고 맞장구를 쳤다. 미 애틀랜틱 몬슬리는 파리 기후협약 불참이든 이란 핵 합의 파기든, TPP 거부든 밑바탕엔 "젠장, 우리는 미국이잖아"란 생각이 담겼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그래도 된다'는 예외주의의 또 다른 표현이다.
◇ "세계는 엉망이어도 미국은 안전할 수 있다"는 환상
오랜 동맹국과도 철저히 득실(得失)을 따져 거래하고 일방적으로 '뒤에서 빠지겠다(leaving from behind)'는 지금의 미 외교 노선은 트럼프 이후에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미국인들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엔 몇 가지 치명적 오류가 있다. 뉴욕의 외교협의회(CFR) 회장인 리처드 하스는 "현재 미국 국방비는 외교, 정보수집, 핵무기 유지비를 포함해 8000억 달러이지만, GDP 대비 비중은 냉전 때(근 10%)에 훨씬 못 미치는 3~4%이며, 이를 통해 막은 실현되지 않은 재앙은 측정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또 사이버 공격이나 교묘한 선거 개입, 지구온난화 등의 문제엔 거리나 국경이 없다.
미국 외교 노선이 좀 더 현실적이 되더라도, 그 근본이 '일방적' '동맹국 착취'라면 나라들의 산법(算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공해인 남중국해를 제멋대로 군사화하고는 "중국은 큰 나라이고, 당신들은 작은 나라"(2010년 양제츠 당시 중국 외교부장)라는 중국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가 공유되 지 않는 세계에서 미국은 중국보다 더 매력적이지도 않다. "세계는 엉망이어도, 미국은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케이건은 "자유주의 세계 질서는 관리하지 않으면 잡초와 덩굴이 압도해 버리는 정원과 같다"고 했다. 2차 대전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왜 그걸 지키려고 죽겠느냐"고 했던, 자치도시 단치히(그단스크)에 대한 독일의 함포 사격에서 시작했다.
[퍼온 글] / 출처; 조선일보 / 이철민(조선일보 선임기자) / 2019.11.06 03:13
George Swinstead(English, 1860-1926) / Fisherman's Friend / Oil on canvas. 50x76 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