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Ⅴ- 목차 41. 리얼리즘 - 사회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대공황·파시즘 강타… 추상에서 현실로 눈 돌려 42. 색면추상 - 형식이 아닌 형이상학을 그리다 - 신비한 공허 숭고한 미학 43. 네오 다다이즘 - 작가는 중개자…작품 정의는 보는 이 해석의 몫 44. 누보 레알리슴- 음식 먹다 남겨진 식탁… 일상의 쓰레기, 작품이 되다 45. 아르테 포베라-네오리얼리즘 - 똥은 예술이다 41. 리얼리즘 - 대공황·파시즘 강타… 추상에서 현실로 눈 돌려 : 사회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동파, 8인회, 애시캔파, 대공황, 파시즘, 뉴딜정책, 벽화운동, 인민성, 계급성, 당파성, 혁명적 낭만주의 사회 변혁 이데올로기 결합해 등장 - 사회적 리얼리즘 뉴딜정책 혜택 가장 미국적 미술운동 자리 잡아 - 에드워드 호퍼·하트 벤튼 등 대표 화가 소비에트 연방 공식 실천적 미학 - 사회주의 모든 국가 미술 양식 채택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사진=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 사실주의를 영어로 표기하면 리얼리즘(Realism)이다. 하지만 미술사의 리얼리즘과 사실주의는 같지만 다르다. 사실주의는 이미 정치와 경제의 양대 혁명인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결과물로 탄생했다. ‘당대 사회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19세기의 근대 리얼리즘을 우리는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의’라고 한다. 20세기에 등장하는 사회적 변혁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리얼리즘, 즉 ‘사회적 리얼리즘(Social Realism)’과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 또는 변증법적 리얼리즘은 대개 19세기 사실주의와 구분하기 위해 ‘리얼리즘’이라고 표기한다. 19세기 사실주의는 당대 사회, 특히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도시 빈곤층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거나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반영했다. 사실주의는 1870년대 영국의 루크 필즈(1843~1927), 헤르코머(1849~ 1914), 프랭크 홀(1845~1888), 윌리엄 스몰(1843~1931) 같은 화가들이 선도했다. 러시아에서는 ‘사악한 차르 시대’가 이동파(Peredvizhniki) 화가들의 사회적 리얼리즘을 낳았다. 레핀(1844~1930)에 의하면 이는 ‘사악한 사회의 모든 괴물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거대한 산업·경제·사회 및 문화적 변화를 경험한 미국의 초기 사회적 리얼리즘은 미국의 성장과 번영, 문화적 풍요를 노래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상의 현실적인 인물을 통해 20세기 초반 뉴욕시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들은 5번가를 주름잡는 부유층보다는 사회적 하층인 이민자들의 삶을 주목해 뒷골목이나 연립주택, 빈민가, 술집 등을 주로 그렸다. 그 중심에는 1908년 뉴욕의 로버트 헨리(1865~ 1929)를 중심으로 구성된 ‘8인회(The Eight)’가 있었다. 8인회는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상징주의와 추상미술 대신 뉴욕의 변두리와 서민들의 삶을 묘사하고자 했다. 이들을 경멸하는 일부는 이들을 ‘깡통 재떨이’를 의미하는 애시캔 파(Ash Can School)라고 불렀다. 구성원으로는 헨리와 조지 럭스(1867~1933), 로손(1873~1939), 글락켄(1870~1938), 신(1876~1953), 프렌더게스트(1858~1924) 등이 있었다. 이들은 그림은 물론 삽화와 에칭 및 석판화를 매개로 뉴욕의 이민과 도시빈곤 등 ‘자신감과 의심, 흥분과 떨림으로 표시되는 불안하고 전환적인 시간’을 기록했다.
디에고 리베라의 ‘우아한 승리’. 사진=푸시킨미술관 루스벨트 뉴딜 정책 일환 다양한 예술분야 투자 지원 초기 유럽의 사실주의에 뿌리를 둔 사회적 리얼리즘 작가들은 대공황과 유럽에서 등장한 파시즘(Fascism)이라는 두 대형사건을 겪으며 추상에서 현실로 눈을 돌렸다. 이들은 미국 농민들의 삶과 도시노동자, 빈민과 이민자들의 고단한 삶을 조망하면서 더 의식 있고 비판적인 사회적인 리얼리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호황을 맞았던 미국 경제는 곧 과잉생산으로 인한 가격 하락과 기후 급변, 기계화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1929년 주식시장은 폭락해 시가 총액이 40%나 증발하면서 전 세계를 공황의 늪으로 빨아들였다. 1933년이 되자 기업과 공장들은 문을 닫았고 은행들도 파산했다. 많은 농장 노동자들은 일을 잃었고 소규모 농사업자는 부채에 허덕였으며 농토는 빚 대신 압류됐다. 농부들의 소득도 거의 절반으로 떨어졌고 시가 총액은 1929년의 5분의 1로 줄었다. 1932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했을 당시 약 200만 농가가 빈곤에 허덕였고, 수백만 에이커의 농지가 토양 침식과 열악한 농업으로 피폐화된 상태였다. 미국인 4명 중 1명이 실업자였다. 당시 주요 구호 기관이었던 취로 사업청(WPA)은 이를 극복하고자 도입한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단순한 복지 혜택보다 많은 건물과 도로, 공항 및 학교 등 사회간접자본(SOC)을 세워 일자리를 창출해 나갔다. 또 연방 극장 프로젝트, 연방 예술 프로젝트와 연방 작가 프로젝트 등 다양한 예술 분야의 투자를 통해 많은 배우, 화가, 음악가와 작가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이런 지원 활동에 힘입어 미술 분야에서도 5000개 이상의 일자리가 만들어졌고, 미국인을 위한 22만5000개 이상의 작품이 제작됐다. 농촌의 빈곤 퇴치를 위해 설립된 농장보안관리(FSA) 프로그램은 활동의 시각적 증거를 남기기 위해 사진가를 고용했다. 이때 제작된 8만 점에 달하는 사진은 시대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의 결정체이자 사회적 리얼리즘 사진의 보고가 됐다. 이렇게 사회적 리얼리즘은 대공황과 뉴딜 정책의 혜택을 입어 가장 미국적인 미술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이때 혜택을 입으며 사회적 리얼리즘 또는 미국적 리얼리즘(American Realism)의 중심에 선 화가로 에드워드 호퍼(1882~1967)와 토머스 하트 벤튼(1889~1975), 윌 바넷(1911~2012), 벤 샨(1898~1969), 그랜트 우드(1892~1942), 와이어스(1917~2009)가 있다. 또 워커 에번스(1903~1975), 에드워드 스타이켄(1879~1973), 도로시아 랭(1895~1965) 등 많은 사진작가들도 있다. 이런 움직임은 1920~1930년대에 걸쳐 멕시코에서 벽화운동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리얼리즘의 큰 흐름 중 하나를 차지하는 멕시코 벽화운동은 대체로 정치적인 경향이 강했다. 이들은 대부분 마르크스주의(Marxism)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1910년 시작된 멕시코 혁명 이후 멕시코의 정치·사회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 운동에는 디에고 리베라(1886~1957), 시케이로스(1896~1974), 오로즈코(1983~1949)와 타마요(1899~1991) 등이 중심에 섰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인민성·계급성·당파성’을 기본 축으로 사회적 리얼리즘 화가들과는 달리 사회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은 공통점이 일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사회적 리얼리즘은 공식적으로 정부나 기관이 주도하는 예술이 아니며 작가들의 주관에 바탕을 둔 자율적인 공간과 지점을 허용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사회주의 국가의 공식적인 미술 양식으로 자리한 이상화된 리얼리즘 스타일의 양식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기존의 리얼리즘과 달리 ‘인민성’ ‘계급성’ ‘당파성’ 그리고 ‘혁명적 낭만주의’를 기본 축으로 한다. 1932년 9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작가협회(RAPP)’가 해산되면서 새로운 사회주의 문학예술의 방향이 설정됐다. 1934년 열린 소련작가동맹 제1차 회의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기본적인 창작 방법으로 채택됐다. 소련작가동맹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예술가들에게 현실을 혁명의 발전과정 속에서 진실하게,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고 묘사할 것을 요구한다. 현실 묘사의 진실성과 역사적 구체성은 노동자를 사회주의정신에 따라 사상적으로 개조하고 교육하는 과제와 부합해야 한다’고 정의했다. 이는 1960년대 후반까지 국가로부터 승인받은 지배적이며 공식적인 실천적 미학이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기까지는 말이다. >/사진=필자 제공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41. 리얼리즘 - 대공황·파시즘 강타… 추상에서 현실로 눈 돌려 / 국방일보 2019. 11.27. 42. 색면추상: 형식이 아닌 형이상학을 그리다 - 신비한 공허 숭고한 미학 :마셜 플랜, 풍요의 시대, 제스처 페인팅, 숭고,아메리칸 타입 페인팅 ‘풍요 속 불안’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표출 - 대상과 배경 같이 취급… 전면회화 방식 추구 구성 요소 간의 연관성보다 무관계 강조 - 화면은 칠해지는 바탕 아닌 그 자체로 그림 돼 바넷 뉴먼·마크 로스코 등 대표 화가
마크 로스코, 무제, 1947, 아크릴릭 유화, 122.2x101.9㎝, SFMOMA
바넷 뉴먼의 ‘Onement III’. 사진=MoMA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뒤 1947년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통해 영국·프랑스·이탈리아·서독·벨기에 등 서유럽 16개국을 지원하며 세계 최고의 국가로 자리매김한 미국은 미술에서도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로 세상을 제패했다. 특히 1952년부터 1960년까지 8년 동안 집권한 아이젠하워(1890~1969) 대통령 시절은 미국 역사상 가장 부유한 시기였다. 경제학자 갈브레이스(1908~2006)가 ‘풍요의 시대’라고 명명했던 이즈음 미국의 국민총생산은 급속하게 늘었고 사회보험과 복지 혜택은 증가했으며 소득의 재분배도 적절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경제적 안정과 풍요로운 삶은 사회의 동질화와 획일화로 이어지고, 절실할 것 없는 삶이 주는 이완된 심리상태는 내적 불안과 무력감으로 나타났다. 미 역사상 가장 부유한 시기 지나 내적불안·무력감 나타나청교도적이며 보수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던 미국에서 흑인 인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고, 피임약 개발로 촉진된 여성의 성혁명과 소련의 수소폭탄 실험 성공은 미국인들을 ‘풍요 속 불안’으로 이끌었다. 이는 절대적인 어떤 힘에 의존하려는 집단적인 심리상태로 이어져 사회적 신경쇠약 상태에 다다랐다. 또 많은 이들은 광적으로 종교에 빠져들었다. 이런 사회적 갈등과 모순은 1960년대 후반 폭발하게 되지만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갈등은 1950년대에 이미 극에 달해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표출됐다. 사회적 갈등과 불안이 증폭되던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에 추상표현주의에 가담했던 화가들은 컬러필드 페인팅(Color Field Painting·색면추상)과 제스처 페인팅(Gestural painting) 등 두 방향으로 움직였다. 특히 일부 화가들은 ‘신비한 공허와 숭고의 미학’이 화면을 덮는 종교적 느낌의 색면추상으로 방향을 선회했는데, 이들이 색면추상화가들이다. 이런 분열은 1950년대에 이르러 비평가들에 의해 정리됐다. 이들은 추상표현주의의 대안 역시 추상예술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뒀다. 색면추상화가 하나의 장르로 인정을 받은 것은 1964년 LA의 카운티미술관(KACMA)에서 열린 ‘탈회화적 추상(Post painterly abstraction)’이라는 제목의 전시회에서다. 전시회에는 프랭크 스텔라(1936~ ), 헬렌 프랭컨탈러(1928~2011), 케네스 놀런드(1924~ 2010), 모리스 루이스(1912∼1962), 줄스 올리츠키(1922~2007), 엘스워스 켈리(1923~2015) 등 당시 미국과 캐나다에서 막 떠오르는 추상화가들이 참여했다. 이 전시를 두고 그린버그(1909~1994)는 “이들의 작품이야말로 팝아트와 달리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그린버그는 1955년경부터 ‘아메리칸 타입 페인팅(American Type Painting)’을 정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인상주의자들이 화면의 깊이와 부피를 표현하기 위해 명암의 대비를 억제한 것과 같은 이들의 표현 방식에 주목했다. 그린버그는 ‘그림으로 그리는 바탕’이 아닌 ‘바탕과 그림이 하나가 되는 장’이 된다고 봤다. 물론 색면추상화가들은 이미 1947년 베티 파슨스(1900~1982) 갤리리에서 열린 표의적 회화전(The Ideographic Picture)을 통해 이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바넷 뉴먼(1905∼1970)은 이때 모든 비유적 또는 준구상적 모티브가 사라진 추상예술을 추구했다. 그는 1948년 ‘이제는 숭고다(The Sublime is Now)’라는 글을 통해 “우리는 유럽 회화의 수단이었던 기억, 연상, 향수, 전설, 신화 등의 장애물로부터 해방되고 있다”면서 추상적인 형태는 ‘살아있는 것’이며 추상적인 것은 자연이나 대상으로부터 단순히 추상화된 형태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밝혔다. 커다란 화면에 한두 가지 색면으로 구획 짓고 그림 완성 뉴먼과 마크 로스코(1903∼1970) 등이 주도한 이런 경향은 잭슨 폴록의 평면적 개념에 색채를 더한 것이었다. 이들은 모네의 ‘수련’처럼 그림의 주제가 되는 대상이나 배경을 같이 취급해서 전면회화(All-Over)의 방식을 추구했다. 또 화면의 구성 요소들 간의 연관성보다는 무관계(Non-Relational)를 강조하면서 극도로 단순화한 형태, 즉 평면을 강조했다. 따라서 화면은 물감이 칠해지는 바탕이 아니라 그 자체로 그림이 됐다. 색면추상을 시도했던 화가들은 벽면처럼 커다란 화면에 한 가지 색 또는 두어 가지의 색면으로 화면을 구획 짓는 것으로 그림을 완성했다. 이 때문에 이들 작품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관객은 걸어가면서 전체의 부분을 이어서 볼 뿐이다. 마치 우리가 서울에 살고 있지만, 서울 전체를 한눈에 보고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관객들은 보이는 것을 시각적으로 장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편하다. 이론가로서, 미학적 아방가르드의 실천가로서 바넷 뉴먼의 큰 화면은 이렇게 동시에 전체를 파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시간은 있되 흐름은 없이 지속될 뿐이며 다질적이지 않은 균질한 표면, 흘러가면서도 정지된 듯한 화면은 관객들이 무의 숭고함을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로스코도 커다란 화폭에 2개나 3개의 색면을 수평으로 배치한 작품으로 색면추상의 대표적인 작가가 됐다. 그가 캔버스에 색채가 일체를 이루도록 스펀지로 칠한 색면들은 화면 속에서 각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신비로우면서 숭고한 존재로 변한다. 시간과 공간을 날실과 씨줄로 화면을 짜 내려간 로스코는 정신분석학에 열중하면서 1920년대 무정부주의자들의 영웅이었던 니체(1844~1900)와 음악에 심취했다. 그는 불명확한 경계를 지닌 사각형 화면 속 사각형들의 만남과 경계의 모호함, 간섭과 교차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묘한 신비로움을 탄생시켰다. 마더웰(1915~1991)이 “그것들은 진정으로 종교적인 것들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로스코의 그림은 종교적 신비감으로 충만했다. 하지만 ‘종교적’이란 표현이 어떤 특정 종교를 일컫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의 존재와 그 존재의 모호함, 합리주의와 물질주의가 인간의 풍요를 대변하던 시절의 불안과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불멸의 절대정신을 추구함으로써 회화를 종교의 반열에 올려 놓은 것이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 이들의 그림을 진정으로 보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인가를 반드시 믿어야 한다면 관습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감상자의 섬세한 영혼을 믿는다. 그들이라면 어떤 정신적 열망을 위하여 이 그림들을 이용할 것이라고 염려하지 않아도 되며, 정신과 열망이 있다면 진정한 교류가 있기 때문”이라는 로스코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추상은 형식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신화와 미술의 관계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회화의 엄숙함은 종교적 무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42. 색면추상: 형식이 아닌 형이상학을 그리다 - 신비한 공허 숭고한 미학 / 국방일보 2019. 12. 04. 43.네오 다다 - 작가는 중개자…작품 정의는 보는 이 해석의 몫 : 이벤트, 해프닝, 행위예술, 아상블라주, 환경조각, 컴바인 페인팅, 신사실주의, 펑크아트, 이코노클래즘 소비문화에 경의와 조롱…비판적 사고 권장 - 냉전 분위기 거스르지 않는 은밀한 전략 취해 새로운 현대 미술 운동 기초가 된 네오다다이스트 콜라주·퍼포먼스 등 여러 방법으로 미술 경계 넓혀 라우센버그·케이지·커닝햄 등 대표 작가
라우센버그, 모노그램, 1955~1959 ,혼합재료, 106.7x160.7x163.8㎝, 스톡홀름미술관.
키엔홀츠, 포터블 전쟁기념비, 1968, 혼합재료, 289.6x975.4x243.8㎝, 독일 루트비히미술관. 인류사에 없었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동맹국이었던 소련과 미국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중심국으로 갈라섰다. 이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국가들 사이에 매우 긴장된 적대관계가 형성, 유지되는 냉전시대(Cold War)를 맞는다. 군사적인 전쟁은 없었지만 미국과 소련은 동유럽의 정치체제와 원자력 관리 등을 두고 대립했다. 미국은 1948년 서유럽 원조 부흥계획인 마셜 계획을 시행하고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결성했다. 소련도 바르샤바 조약기구(Warsaw Treaty Organization)를 창설해 서로 대립했고 위성을 쏘아 올리는 등 우주에서까지 경쟁하면서 냉전은 극에 달했다. 이런 냉전 상황은 미국에서 반공산주의적인 정서를 강화시켰고, 전후 약 15년 동안 미국은 전례 없는 고도성장을 이룩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됐다. 사회적으로는 다소 획일적인 문화가 주를 이루었고 국가와 사회에 순응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민권운동이 일어나 인종차별이 위헌이란 판결이 나오면서 개인의 자유와 자신만의 개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후 냉전 시대의 국가주의적인 규율과 질서가 일상이던 시절,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 1922~1922),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1919~2009)에 의해 변화가 시작됐다. 케이지는 이들과 함께 1952년 노스캐롤라이나의 블랙마운틴 대학(Black Mountain College)에서 ‘더 이벤트(The Event)’라는 ‘해프닝(Happening)’, 즉 행위예술을 펼치는 개념적인 퍼포먼스 형태로 자신들을 표현했다.
라우센버그, 모노그램, 1955~1959 ,혼합재료, 106.7x160.7x163.8㎝, 스톡홀름미술관. 이 퍼포먼스는 기회와 개성, 관객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여러 매체가 모두 하나의 작업으로 결합된 것에 대한 운동의 관심사를 요약해 담아냈다. 다다이즘의 공격적이며 호전적인 스타일과 달리 냉전의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는 은밀한 전략을 통해 새로운 도발을 시도한 것이다. 이들은 소비문화에 대한 경의와 조롱, 추상화와 리얼리즘 등 상반된 개념의 통합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통적인 미적 기준을 넘어서 모순과 부조리한 배열, 서사와 기타 혼합된 신호에 의해 생성된 비판적 사고의 과정을 통해 의미를 해석하도록 권장했다. 즉 가장 중요한 예술에 대한 태도는 ‘창작자의 의도보다 작품을 정의하는 것은 관람객의 해석’이며 이 과정에서 작가는 중개자라는 뒤샹의 가르침을 따랐다. 당시 케이지는 창조자의 역할과 예술의 창조성에 대해 선불교와 같은 동양 철학을 통해 강의했다. 이 수업을 들은 라우센버그는 자동차 타이어를 종이 위에 굴려 그 자국을 작품으로 만들거나 캔버스를 순수한 흰색으로 칠해 주변 환경을 주요 주제로 반영하는 등 전통적이지 않은 예술적 과정을 중시했다. 커닝햄은 같은 맥락에서 자신의 자연적 능력과 동물적 본능을 공연예술과 춤을 조합하거나, 고전 발레와 현대 무용을 종합해 네오 다다를 미학적으로 정의하고자 했다. 이후 이들은 뉴욕으로 이주해 예술가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관점이 중요하다는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켰다. ‘네오 다다’라는 용어는 1957년 미술평론가 로버트 로젠블럼(Robert Rosenblum, 1927~2006)에 의해 처음 사용됐고 그 다음해 미술잡지 아트뉴스(ARTnews)의 토머스 B.헤스(Thomas B. Hess,1920~1978 ), 그 후 1962년에는 비평가이자 미술사학자인 바버라 로즈(Barbara Rose,1938~ )가 네오 다다를 매우 광범위한 운동으로 규정하면서 팝아트에 자리를 내준다. 하지만 네오 다다는 다다 이후 잊혀진 이론적 틀을 되살려 그 이후 등장하는 많은 새로운 현대 미술 운동의 기초가 됐다. 다다이스트들이 부르주아 문화에 대해 공격을 서슴지 않았지만 네오 다다이스트들은 콜라주와 퍼포먼스, 우연성을 무기로 다양한 방법과 매체를 사용해 미술의 경계를 넓히려 했다. 10여 년간 뉴욕 화단을 지배해 온 추상표현주의는 서서히 네오 다다에 자리를 내줘야 했다. 라우센버그와 케이지, 커닝햄 외에 재스퍼 존스(Jasper Johns, 1930~)와 앨런 캐프로(Allan Kaprow, 1927~2006)도 모두 네오 다다에 중요한 작가들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네오 다다를 지향했지만 독창적인 기법과 양식을 통해 스스로의 작업에 대한 밀도를 높여나갔다. 특히 라우센버그는 결합을 의미하는 3차원 회화인 컴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을 고안해 냈다. 그는 소비가 미덕이던 당시 미국 문명의 폐기물 즉 만화, 콜라병, 종이, 나무, 고무, 금속, 천은 물론 박제된 동물이나 작동하는 라디오, 선풍기, 전구 등 일상의 오브제를 사용하는 대담한 부조 또는 조각에 가까운 회화적 스타일을 시도했다. 그는 뒤샹이나 슈비터즈, 조셉 코넬(Joseph Cornell,1903~1972)의 회화에 대한 질문에 나름의 답으로 컴바인 페인팅을 내놓았다. 1960년대 후반까지 지속한 이런 유의 작품으로 그는 실제 삶을 미술 속에 끌어들여 미술의 경계를 가장 명확하게 재정의한 작가로 남았다. 그의 이런 유형의 작업은 아상블라주(Assmblage)로 연결된다. 장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가 나비 날개를 붙이는 콜라주 기법을 ‘자국(d’ empreintes)’이라 칭했다. 이런 작업은 뒤샹이나 피카소, 타틀린과 칼더(Alexander Calder, 1898~1976)를 거쳐 1930년대 루이즈 네벨슨(Louise Nevelson, 1899~1988) 그리고 1950~1960년대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로 이어진다. 재스퍼 존스는 1958년 첫 개인전을 통해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을 활용해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과녁과 깃발, 문자와 숫자 같은 ‘마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작업하면서 잘 알려진 기호의 가독성과 판독 가능성의 불일치를 통해 기호의 폭력성을 드러냈다. 그는 익숙한 것을 작품으로 발표하면서 현대인의 일상 속 대중 매체의 침투에 대해 비판하고 일상의 주변을 추상화했다. 뉴욕에서 잡다한 일상용품이나 폐품들을 끌어모아 3차원적 회화를 시도할 즈음 서부 해안 캘리포니아에서는 에드워드 키엔홀츠(Edward Kienholz, 1927~1994) 같은 작가들이 이와 유사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들의 작업은 ‘보잘것없고, 가치 없는 사람’을 일컫는 ‘펑크(Funk)’라는 단어를 차용해 펑크아트라 불렀다. 이후 1967년 사이츠(William G. Seitz, 1914~1974)가 펑크아트 전시를 열면서 일반화했다. 사실 펑크라는 단어는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경멸과 조롱 그리고 외설적인 빈정거림 같은 의미로 마치 ‘우상파괴’를 뜻하는 현대판 이코노클래즘(Iconoclasm)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1960년대 미국미술이 ‘차가운’ 경향이었던 데 비해 펑크아트는 재료에 있어서 반기능적이며 뜨겁고, 미학에서는 반지성적·반형식적인 입장을 취했다. 또 인간을 다루지만 그 인간상은 뒤틀리고 통속적인 이미지다. 따라서 네오 다다란 용어는 이후 케이지나 캐프로보다는 존스와 라우센버그의 작품을 지칭하는 용어가 됐고 이후 하위문화를 소재로 예술과 일상 간의 틈에서 활동했던 네오 다다는 팝아트를 세상에 불러내게 된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43.네오 다다 - 작가는 중개자…작품 정의는 보는 이 해석의 몫 / 국방일보 2019. 12. 11.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43.네오 다다 - 작가는 중개자…작품 정의는 보는 이 해석의 몫 / 국방일보 2019. 12. 11. 44.누보 레알리슴- 음식 먹다 남겨진 식탁… 일상의 쓰레기, 작품이 되다 : 콜라주, 아상블라주, 퍼포먼스 아트, 모노크롬, 제로그룹, 컨셉추얼 아트, 레디메이드, 데 콜라주, 인스톨레이션, 해프닝 비평가 레스타니 의해 명칭…이브 클라인 주축으로 아르망·다니엘 스페리 등 활동 현실의 직접적 제시·소비과잉 시대 반영…기계부품·인간 붓 등 실험적 형식 작품화
다니엘 스포에리 갤러리 j의 푸른식탁 1963 문화 강국으로 20세기 초 세계의 문화 수도를 자처했던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즈음 많은 정치적 혼란을 겪는다. 전쟁 중 임시정부 총리였던 드골(1890~1970)은 전쟁 후 연정에 실패하면서 하야했고 그 후 4공화국이 발족한다. 4공화국은 친서방 반공 정책을 중심으로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다. 하지만 군소 정당의 난립과 인플레이션,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의 독립운동으로 어려운 시기를 넘겨야 했다. 이후 1958년 10월 국민투표에 의해 12년 만에 드골이 총리직에 복귀한 후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켜 1959년 프랑스를 세계 네 번째 핵 보유국으로 만들었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등 미국과 소련의 양극 체제 속에서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다. 특히 그는 1959년 ‘문화부’를 신설하고 말로(1901~1976)를 장관에 임명해 중앙집권적 문화정책을 통해 국가를 재건하고자 했다. 말로는 ‘문화를 통해 프랑스 민족의 우위를 표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문화로 개인들을 결합시켜, 국가에 대한 소속감의 기초를 만들고 동일한 신념과 가치를 공유’하도록 해서 각 개인의 영혼을 고양하기보다는 국민적 일치를 도모하고자 했다. 이 시절 영화에서는 이탈리아 전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아 ‘거짓 없는 인간의 일상’을 그대로, 즉 리얼하게 표현하며 사실성이 강조되는 누벨 바그(Nouvelle Vague)가, 소설에서는 누보 로망(Nouveau roman)이 나타났다. 미술에서도 사실보다는 현실이 일상처럼 반영된 작품들이 등장했다. 이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현실도피적 태도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이렇게 등장한 것이 누보 레알리슴(Nouveau Realisme)이다. 1960년 5월 프랑스 미술비평가 피에르 레스타니(1930~2003)가 아르망(1928~2005), 프랑수아 뒤프렌(1930~82), 레이먼드 하인즈(1926~2005), 이브 클라인(1928~1962), 장 팅겔리(1925~1991), 자크(1926~ ) 등이 같은 해 4월 밀라노 아폴리네르 화랑(Galleria Apollinaire)에서 개최한 작품들을 논하면서 ‘누보 레알리슴 1차 선언’을 발표했고 이후 이 표현이 이들 유파의 명칭이 됐다. 하지만 정식으로 누보 레알리슴이 출범한 것은 그해 10월 이브 클라인의 작업실에서였다. 그리고 1960년 파리에서 열린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을 통해 제2 선언, 그리고 1961년 5월 레스타니와 그의 아내가 문을 연 파리 J화랑에서 ‘다다를 넘는 40도(40°Above Dada)’전을 개최하며 제3 선언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사실 레스타니의 ‘기계화되고 공업화되면 광고로 넘치는 우리들 현대의 자연’ 즉 ‘현실을 직접적으로 제시’한다는 생각은 클라인의 영향에서 비롯됐다. 1955년 레스타니는 파리에서 열린 클라인의 첫 개인전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미술사조라 할 수 있는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당시 하나의 균일한 색상으로 칠해진 사각형 같은 다양한 색상의 모노크롬(Monochrome) 회화를 제작했다. 하지만 관객들이 이를 장식적이라 생각하자 클라인은 색과 관계없이 오직 푸른색만 가지고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이때 사용된 자신만의 독창적인 푸른색을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IKB·International Klein Blue)라 명명했다. 그 후 클라인은 레스타니에게 팅겔리, 아르망을 소개했고 이들은 일상적인 도시의 소비자들을 탐구하면서 이를 통해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으며, 일상의 쓰레기, 광고 등등 소비 과잉의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로서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후 1958년 클라인의 ‘아무것도 전시되지 않은 빈방’을 전시한 아이리스 클레르(Galerie Iris Clert) 화랑에서 열린 ‘감각의 공간화’를 위한 ‘공허(Le Vide)’전에 레스타니는 글을 썼다. 이후 1960년에는 같은 화랑의 진열장을 쓰레기로 가득 채운 아르망의 ‘충만(Le Plein)’이란 전시를 열었다. 클라인의 이 전시에서 단순히 대상을 바라보는 존재(voyeur)로서의 관객은 대상을 읽어내는 존재, 즉 투시해 내는 존재(voyant)로 변화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나치게 뒤샹에게 경도된 레스타니의 입장과 거리를 두면서 클라인은 기존의 모든 형식적 틀을 벗어나 영(0)에서 창조적 행위를 시작하는 제로그룹(ZERO Group)과 가까워졌다. 결국 클라인은 누보 레알리슴을 넘어 보다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동했다. 그의 모노크롬 회화는 추상표현주의의 지위에 대한 조롱이자 도전이었다. 또 그의 개념적인 조각이나 퍼포먼스(Performance) 그리고 문서가 곧 작품이 되는 ‘중요하지 않은 회화적 감수성의 영역’ 같은 아이디어와 불꽃으로 그린 그림 등은 재료와 매체를 뛰어넘어 미술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1961년 클라인은 뉴욕의 레오 카스텔리 화랑(Leo Castelli’s Gallery)에서 전시를 열었지만 작품을 한 점도 판매하지 못한 채 머물던 첼시 호텔에서 선언문(Chelsea Hotel Manifesto)을 통해 ‘다양한 새로운 가능성’을 선포하고 그 이듬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 누보 레알리슴은 성황을 이룬다. 그리고 1962년 뉴욕 시드니 자니스 화랑(Sidney Janis Gallery)에서 열린 전시에서 레스타니는 새로운 선언을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선언이자 운동의 마지막이 됐다. 이들 누보 레알리슴 작가들은 각기 독창적인 기법을 선보였는데 아르망의 수집 또는 집합(아상블라주·Assemblage)은 투명한 통에 많은 쓰레기를 가득 넣어 쌓아 올리는 작품이었다. 제라르 데샹(1937~ )은 같은 옷가지나 직물류, 넝마를 가득 쌓은 작품을 선보였다. 이들의 작업은 대량생산과 소비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지녔다. 한편 2차원적으로 아상블라주와 유사한 의미의 데 콜라주(Decollage) 방식을 취한 작가들도 있었다. 다다의 콜라주 방식에서 차용한 기법으로 뒤프렌, 하인즈, 자크, 로텔라(1918~2006)는 광고용 포스터나 각종 전단지를 붙이고 다시 찢어내는 작업을 통해 시각적이며 예기치 못한 파괴적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클라인이 시도한 전라의 여성이 몸에 물감을 묻히고 캔버스에 몸을 굴려 스스로 ‘인간 붓’이 되는 ‘인체측정법’이나 아르망이 피아노를 때려 부순 조각들을 다시 모아 통에 넣는 퍼포먼스는 일반적인 장르가 됐다. 또 다니엘 스페리(1930~ )의 음식을 먹다 남긴 식탁 자체가 작품이 되었고, 생 팔(1930~2002)의 경우 물감이 든 풍선을 캔버스에 매달아 놓고 총을 쏘아 물감이 튀어나와 흐르는 것을 작품화하기도 했다. 이렇게 누보 레알리슴은 고정 관념에 대한 도전을 관객과 함께하면서 그 결과 자체가 성과로, 작품으로 전환되는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실험적인 예술 형식을 즐겨 사용했다. 또한 팅겔리(1925~91)는 많은 기계부품을 재조립해서 움직이는 조각을 만들었으며 세자르(1921~1998)는 자동차를 압축(Compressions)해 새로운 색채와 형태로 전환시켰다. 또 크리스토(1935~ )와 그의 아내 장 클로드(1935~2009)는 건물이나 자연을 천으로 포장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이들 누보 레알리슴은 독일의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과 유사하지만 다른 미술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 44.누보 레알리슴- 음식 먹다 남겨진 식탁… 일상의 쓰레기, 작품이 되다 / 국방일보 2019. 12. 11. 45.똥은 예술이다 : 아르테 포베라-네오리얼리즘, 뉴 이탈리아 영화, 68혁명, 가난한 예술, 예술과 삶의 이분법, 공간개념, 미국식 미니멀리즘, 설치미술 아르테 포베라, ‘가난한 예술’ 의미 - 1960년대 말 이탈리아서 나타난 미술운동 배금주의 풍자…예술과 생활 경계 해체 - 만초니 작품 ‘예술가의 똥’ 금값에 판매 화제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넝마의 비너스, 1967-1974, 대리석·천 2.12x3.4x1.1m, TATE.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 이탈리아에서 전쟁 이후 나타난 아상블라주, 누보레알리즘, 독일의 플럭서스(Fluxus)와 맥을 같이하는 미술 운동이다. 이탈리아는 1947년 이탈리아 강화조약으로 파시즘 정권이 점령했던 발칸반도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반환했다. 이곳에 거주하던 대다수 이탈리아인이 고국으로 이주하면서 이탈리아는 인구 변동을 겪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도 미국의 마셜 플랜의 영향으로 고도성장을 거듭해 1951년부터 1971년까지 20여 년간 평균 5% 이상의 성장률을 보였다. 부작용도 있었다. 이탈리아 경제 기적을 선도한 공업화는 급격한 인구 변동을 유발해 약 900만 명이 공업지역인 ‘산업삼각지대’ 밀라노, 토리노, 제노바로 몰려들었다. 경제근대화로 새로운 철도와 고속도로가 들어섰고 에너지 산업도 증가했다. 하지만 급속한 도시화와 인구 팽창 때문에 도시개발은 계획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성장의 후폭풍은 1963년 바욘트 댐 붕괴 사건과 1976년 밀라노 인근의 세베소에서 일어난 화학플랜트 공해 사건 등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사회 양극화 문제와 ‘프랑스 68혁명’ 영향으로 노동자들이 주 40시간 노동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대규모 투쟁과 파업도 발생했다. 그 와중에도 고도성장은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매스 미디어가 발전하고 중산층은 경제적 여유를 소비로 과시했다. 여가에 대한 관심은 영화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940년대 중반 네오리얼리즘(Neo-Realism) 이후 전후 복구기를 지나면서 이탈리아 영화는 정치·사회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개인의 내면을 천착하기 시작했다. 이를 주도한 페데리코 펠리니(1920~1993),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1912~2007),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1922~1975),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1941~2018) 등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감독들은 뉴 이탈리아 영화(New Italian Cinema)의 전성기를 끌어냈다.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혁명적이며 비판적인 태도로 번영의 그늘을 살폈다. 이들은 작품을 통해 상업화된 화랑을 중심으로 한 시스템을 흔들고자 했다. 천박한 배금주의 사회에 대한 풍자도 함께 한 이들은 전통적인 캔버스와 유화, 대리석, 청동 등의 재료를 넘어 흙이나 넝마, 나뭇가지 등 하찮은 다양한 재료를 작업에 사용했다. 이렇게 이탈리아에서 1960년대 말에 탄생한 것이 ‘가난한 예술’이란 의미의 ‘아르테 포베라’다. 이 말은 미술비평가이자 큐레이터인 제르마노 첼란트(1940~ )의 글에서 비롯됐다. 그는 1967년 제노아의 베르테스카 화랑(Galleria La Bertesca)에서 아르테 포베라 에 임 스파지오(Arte Povera e IM Spazio)라는 전시를 기획하고 알리기에로 보에티(1940~1994), 루치아노 파브로(1936~2007), 야니스 쿠넬리스(1936~2017), 줄리오 파올리니(1940~ ), 피노 파스칼리(1935~1968) 등과 함께 작업했다.
피에로 만초니, 예술가의 똥 No.14, 1961, 혼합재료, 6.5x4.8㎝, MoMA. 이 전시에서 작가들은 모두 ‘가난한’ 재료를 써서 아르테 포베라의 개념적 특성을 구현했으며 일상적인 일이나 행위를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냈다. 이들은 일상이 예술의 영역에 침입 또는 반입되는 것에 초점을 맞춰 이전에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들을 끌어들여 새로운 시각으로 보도록 했다. 이 전시 후 조반니 안젤모(1934~ ), 마리오 메르츠(1925~2003), 지아니 피아센티노(1945~ ),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1933~ ), 질베르토 조리오(1944~ ) 등이 합세해서 ‘예술과 삶의 이분법’을 파괴하고자 하는 공통의 욕구를 개념적으로 연결했다. 이들은 예술과 생활의 경계를 해체하는 한편 사회의 많은 부조리한 일들에 대해 혁명적인 주장과 세상을 자극하는 주장을 펴며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내기도 했다. 첼란트의 선구자적 글과 토리노, 밀라노, 제노아와 로마에서 활동하던 많은 이탈리아 젊은 작가들이 참여하면서 이런 경향은 집단적인 정체성으로 나타났고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경제가 다시 불안정해지자 급속도로 파급됐다. 아르테 포베라는 이탈리아의 추상미술이 쇠퇴하고 1920~1930년대의 초현실주의 같은 전위적인 태도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등장했다. 특히 알베르토 부리(1915~1995), 피에로 만초니(1933~1963), 루시오 폰타나(1899~1968) 등 세 명의 선지자가 있어서 가능했다. 부리는 삼베 포대와 타르, 모래를 써서 가난한 재료로 회화를 전위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폰타나는 캔버스를 칼로 짼 ‘공간 개념(Concetto spaziale)’을 제시했으며 만초니는 자신의 대변을 통조림통에 넣어 당시 같은 무게의 금값으로 판매하는 작품을 발표해 혼란을 야기했다. 이들은 단순한 개념과 유머, 전복을 통해 전통적인 미술의 경계를 교란하면서 미술을 개념화했다. 이들의 작업은 일상적인 재료를 사용한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토양, 음식, 물과 저렴한 건축자재 같은 재료를 사용했다. 또 전후 이탈리아의 문화적 맥락에 적합하지 않은 미국의 미니멀리즘(American Minimalism)과 민감하게 대조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파괴적이고 전위적인 전술과 조각에 대한 비전통적인 접근 방식 등 오늘날의 설치미술(Installation art)과 같은 방식을 선호했다. 이들은 예술과 삶을 연결하기 위해 각각의 작품에 대해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반응을 중시해 순전히 작품과 관객 간의 상호 작용을 중시했다. 이들의 작품은 자연과 인공을 연결하거나 그 차이에 집중했다. 물과 흙이 기하학적 틀이나 구조에 의해 모양이 결정되는 작업을 통해 물성의 대조 또는 불협화한 물질을 결합해 폐기물 또는 다른 방식으로 폐기될 것들을 병치시키는 방식으로 ‘웅대한 대상’이라는 개념을 어지럽혀 작품과 작품이 놓인 전시장의 가치 체계에 내재된 모순을 드러내고자 했다.
루치아노 파브로, 하늘의 두 얼굴, 1986, 대리석·철사·스테인드 스틸, 98x270x20㎝, 크뢸러 뮐러미술관. 1960년대 이탈리아의 중요한 운동인 아르테 포베라는 1969년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의 윔 뷔렌(1928 ~2000)이 큐레이팅한 ‘둥근 구멍에 네모난 말뚝, 구조와 암호화(Square Pegs in Round Holes: Structures and Cryptostructures)’와 하랄드 제만(1933~2005)이 베른 시립미술관에서 기획한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orm)’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두 전시는 현대미술사와 미술관 전시의 혁명적인 일로 기록됐다. 이들은 한정적인 물질이 귀속하는 관점을 지양하고 작품을 결정짓는 여러 가지 조건 즉 작품이 놓이는 방법, 작품이 존재하는 공간 등을 중시해 ‘사물’이란 수준에서 바라보며 반미학적인 재료의 물질적인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기존의 문화체계와 예술 개념을 해체하여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다. 특히 공간과 인식의 문제, 과정 및 에너지와 관계된 다양한 재료의 도입, 언어사용과 정체성의 문제는 아르테 포베라를 이해하는 주요한 화두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