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仁弘(정인홍):(1535~1623)-(權力을 盜用當한 山林政丞) 1617年 12月 영의정 奇自獻(기자헌)이 失脚(실각)하자 이듬해 1月, 光海君(광해군)은 自身(자신)을 推戴(추대)하는데 功(공)을 세운 大北(대북)의 領首(영수)鄭仁弘(정인홍)에게 領議政(영의정)자리를 내렸다. 鄭仁弘(정인홍)은 本貫(본관)이 瑞山(서산), 아버지는 三嘉縣監(삼가현감) 鄭倫(정륜), 어머니는 晉州姜氏(진주강씨)로 中宗(중종)30年 陜川(합천)伽倻(가야)에서 태어났다. 鄭仁弘(정인홍)은 일찍이 여섯 살 때 글을 지어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열다섯 살 때 曺植(조식) 門下(문하)에서 學文(학문)을 닦았다. 처음에는 退溪(퇴계) 李滉(이황)을 찾아 갔다가, 李滉(이황)이 너무 强直(강직)해 보이는 그의 첫 印象(인상)때문에 꺼리자 미련 없이 曺植(조식)을 찾아가 그의 門下生(문하생)이 되었던 것이다. 鄭仁弘(정인홍)은 23歲 때 生員試(생원시)에 올랐으나 官職(관직)에 나가기를 꺼려했는데, 그의 名聲(명성)때문에 宣祖(선조)6年 卓行之士(탁행지사)로 薦擧(천거)되어 첫 벼슬로 黃澗縣監(황간현감)이 되었다. 鄭仁弘(정인홍)의 人品(인품)이 朝野(조야)에 떨치니, 그는 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으로 內職(내직)에 拔擢(발탁)되고, 이어 掌令(장령)等(등)을 歷任(역임)하며 朝廷(조정)에서 이름을 냈으나, 黨派(당파)에서 東人便(동인편)에 들어 西人(서인)鄭澈(철)等(등)을 彈劾(탄핵)하다가 오히려 反擊(반격)을 받아 그만 落鄕(낙향)해 버렸다. 어머니 喪(상)을 當(당)해 治喪(치상)에 沒頭(몰두)하고 있던 次(차), 1592年 4月 壬辰倭亂(임진왜란)이 터지니, 그는 故鄕(고향)에서 아들과 함께 義兵(의병)을 일으켜 星州(성주)·陜川(합천)·高靈(고령) 等등)지 洛東江(낙동강) 周邊(주변)에서 목숨을 걸고 倭軍(왜군)의 進路(진로)를 막아 敵(적)의 湖南進出(호남진출) 遮斷(차단)하는데 卓越(탁월)한 戰功(전공)을 세웠다. 倭亂(왜란)뒤 鄭仁弘(정인홍)은 大司憲(대사헌)·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工曺參判(공조참판)等(등)을 歷任(역임)하며 政界(정계)의 中心(중심)에 서서 西人(서인)에 屬(속)했던 柳成龍(유성룡) 등을 彈劾(탄핵), 罷職(파직)시켜 버리고 北人政權(북인정권)을 構築(구축)하였다. 北人(북인)이 다시 小北(소북)·大北(대북)으로 分裂(분열)되자 李山海(이산해)·李爾瞻(이이첨 )等과 大北(대북)을 領導(영도)하며, 宣祖(선조)의 信任(신임)을 받던 領議政(영의정)柳永慶(유영경) 등과 對立(대립)하였다. 1608年 世子(세자)光海君(광해군)을 廢(폐)하고 永昌大君(영창대군)을 擁立(옹립)하려던 柳永慶(유영경)을 彈劾(탄핵)하고 나섰다가 오히려 逆襲(역습)을 當(당)한 鄭仁弘(정인홍)은, 74歲(74세) 나이로 寧邊(영변)으로 歸養(귀양)을 가야하는 處地(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곧 論難(론난)끝에 光海君(광해군)이 登極(등극)하니, 鄭仁弘(정인홍)은 歸養(귀양)길 途中(도중)에 풀려 故鄕(고향)으로 돌아갔다 임금 光海君(광해군)은 그에게 漢城判尹(한성판윤)·大司憲(대사헌)·贊成(찬성)等(등) 高位職(고위직)을 내려 불렀으나 그는 番番(번번)히 辭職疏(사직소)를 올리고 混濁(혼탁)한 政治板(정치판)에 나가지 않았다. 1610年 光海君(광해군)2年 朝廷(조정)에서 이른바 五賢(오현)으로 金宏弼(김굉필)·鄭如昌(정여창)·趙光祖(조광조)·李彦適(이언적)·李滉(이황)等(등)을 꼽아 文廟(문묘)에 從事(종사)하기로 決定(결정)하였다. 이때 鄭仁弘(정인홍)은 老患(노환)으로 자리에 누워 지내는데 光海君(광해군)은 宮中(궁중)醫療陣(의료진)을 보내 問病(문병)과 아울러 出師(출사)할 것을 勸(권)했더니, 그는 곧 辭職(사직)上疏(상소)와 함께 文廟從事(문묘종사)에 曺植(조식)이 빠진 것은 不當(부당)하며, 李滉(이황)·李彦適(이언적)을 辛辣(신랄)하게 誹謗(비방)하는 上疏(상소)를 함께 올려 政界(정계)에 큰 波紋(파문)을 일으켰다.1612年 光海君(광해군)은 鄭仁弘(정인홍)을 기어이 右議政(우의정)에 이어 瑞寧府院君(서령부원군)封君(봉군)과 함께 左議政(좌의정)에 任命(임명)하고 机杖(궤장)을 내렸으나, 끝내 듣지 않고, 여덟살 어린 永昌大君(영창대군)을 逆謀(역모)로 얽어 죽인 지난 일을 糾彈(규탄)하였다. 1618年 光海君(광해군)10年 1月, 光海君(광해군)은 드디어 83歲된 鄭仁弘(정인홍)에게 領議政(영의정)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故鄕(고향)에 웅크리고 앉은 채 올라가지 않았는데, 牒紙(첩지)를 받은 10日만에 李爾瞻(이이첨)等(등)이 主導(주도)한 廢妃論(폐비론)이 새어 나오자 그는 領議政(영의정)身分(신분)으로 議政府(의정부)에 글을 보내 反對(반대)의 뜻을 分明(분명)하게 傳(전)한 뒤, 3月에 領議政(영의정)을 辭職(사직)하는 上疏(상소)를 올렸다. 以後(이후)그는 都城出入(도성출입)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런 鄭仁弘(정인홍)을 山林政丞(산림정승)이라 불렀고, 그를 미워하던 政敵(정적)들은 그를 遙執朝權(요집조권), 卽(즉)멀리서 고집스레 朝廷(조정)의 權勢(권세)를 左之右之(좌지우지)했다고 誤解(오해)하며 흘겨보았다. 事實(사실)鄭仁弘(정인홍)의 廢妃反對(폐비반대)書信(서신)을 李爾瞻(이이첨)等(등)이 中間(중간)에서 變造(변조)하여 贊成(찬성)한 것처럼 꾸미는 等(등), 그의 權限(권한)을 李爾瞻(이이첨)이 가로채 行(행)하였다는 說(설)도 紛紛(분분)하였다. 1623年 反正(반정)으로 光海君(광해군)이 쫓겨나자 鄭仁弘(정인홍)은 領議政(영의정)으로 廢母論(폐모론)을 主導(주도)했다는 陋名(누명)을 쓰고 서울로 押送(압송)되어 닷새 만에 處刑(처형)되고 家産(가산)은 籍沒(적몰)當(당)했다. 4月 3日의 일이었으니 그의 나이 89歲(89세). 罪名(죄명)은 逆敵(역적)의 魁首괴수), 목이잘린 屍體(시체)는 갈갈히 찢겨져 四方(사방)으로 옮겨가며 내 걸어지는 陵遲處斬(능지처참)刑(형)을 받았다. 그가 平素(평소)지녔던 哲學(철학)이나 國家觀(국가관)으로 봐서는 참으로 抑鬱(억울)한 面(면)이 컸다. 鄭仁弘(정인홍)의 決定的(결정적)인 失手(실수)는 天下(천하)의 奸臣(간신)李爾瞻(이이첨)을 가까이 함이었고, 스승 曺植(조식)을 學文的(학문적)으로 李滉(이황)과 같은 班列(반열)에 세우고자 執拗(집요)하게 버틴 일이었다. 光海君(광해군)3年 文廟(문묘)에 配享(배향)된 李滉(이황)·李彦適(이언적)을 기어이 文廟(문묘)에서 끌어 내리고 이를 反對(반대)하는 儒生(유생)들을 逐出(축출)해 버린 일이 있었는데,이 事件(사건)이 뒤에 政權(정권)을 掌握(장악)한 李滉(이황) 弟子(제자)들의 反感(반감)을 크게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鄭仁弘(정인홍)은 死後(후)280年 만인 1908年 비로소 逆敵(역적)罪名(죄명)이 벗겨지고 官爵(관작)서도 回復(회복)되었다. 일찍이 栗谷(율곡) 李珥(이이)는 그를“强直(강직)하나 識見(식견)이 밝지 못하니 用兵(용병)에 比喩(비유)한다면 突擊將(돌격장)이다했다. 鄭仁弘(정인홍)은 壬辰亂(임진란)때 외아들 沇(윤)을 함께 義兵(의병)에 參戰(참전)시켰다가 잃었다. 陜川(합천)伽倻(가야)에 그의 墓所(묘소)와 함께 祠堂(사당)이 마련 되었고, 1959年 文敎部長官(문교부장관) 崔奎南(최규남)이 지은 神道碑(신도비)가 세워졌다. [출처] 歷史와 人物-7 鄭仁弘(정인홍):(權力을 盜用當한 山林政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