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부문
빅뱅
김영욱(김이응)
꾀죄죄한 동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든 장터 초입, 로켓 모양의 무쇠 덩이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땡전 한 푼 없는 아이들의 눈동자도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달달한 냄새를 참지 못해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 곧 있을 로켓 발사를 앞두고 긴장감이 맴돈다. 어느새 회전 속도를 높인 무쇠 덩이는 벌겋게 달아오르고 흰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다. 장을 보러 온 어른들은 귀를 막고 멀찍이 돌아가고, 아이들은 눈까지 질끈 감고서 뒷걸음을 친다. 속으로만 외쳐대던 카운트다운 숫자가 작아지길 여러 번, 마침내 대폭발음이 시장바닥을 뒤흔든다.
그야말로 빅뱅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무쇠 덩이 문이 활짝 열리면서 급속으로 연결된 철망 자루로 뜨거운 튀밥들이 튀어나오고 있다. 고작 쌀 한 바가지를 쇳덩이 기계 속으로 밀어 넣었을 뿐인데, 쌀 한 말쯤 부피로 부풀어 오른 튀밥이 쏟아진다. 주인아저씨가 결정적 순간에 무쇠 로켓의 걸쇠를 잡아당기며 ‘뻥이요’라고 외쳤지만, 눈앞에서 직접 본 광경은 전혀 뻥이 아니었다. 이 정도 뻥튀기라면 쌀, 보리, 옥수수, 콩알만 잔뜩 부풀릴 것이 아니라 코흘리개의 오백 원 동전도, 독거노인의 다섯 평 쪽방도 뻥뻥 튀겨주면 좋겠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내가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던 눈 깜짝할 사이, 아저씨가 무쇠 덩이를 비스듬히 기울이고도 한 자루에 전부 다 담을 수 없던 튀밥을 플라스틱 소쿠리로 옮겨 담았다. 이윽고 삽시간에 달려든 아이들의 시커먼 손들이 잽싸게 한 움큼씩을 낚아채 갔지만, 아저씨는 그 아이들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그저 허겁지겁 입안으로 뻥튀기를 쑤셔 넣고 또다시 소쿠리로 향하는 날랜 손등을 빗자루로 툭툭 쳐낼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불룩했던 양 볼이 홀쭉해진 아이들은 혹시라도 입술 가장자리에 튀밥 한 알이라도 붙어 있을까, 혀로 한 번 쓰윽 훑고는 아저씨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아가고 있다. 나도 서둘러 그 틈바구니로 끼어들어 온기가 남아 있는 튀밥 한 봉지를 사 들고 무리에서 벗어났다. 겨우 천 원과 맞바꾼 것이지만, 두 팔 가득히 안기는 튀밥 한 봉지만으로도 부자가 된 것만 같다.
무려 132억 원, 글쎄, 이 금액은 동그라미를 몇 개나 쳐야 도달할 수 있는 숫자일까? 이 정도라면 보통 사람들이 평생을 열심히 일해도 가져볼 수 없는 천문학적 금액이건만, 몇 해 전 불꽃 튀는 경합을 벌인 지 고작 십여 분 만에 김환기 화백의 <우주>가 이 가격으로 낙찰되었다. 이 작품으로 말하자면, 화가가 고단하고 외롭던 뉴욕 시절에 캔버스 바깥으로 무한히 퍼져나가는 푸른 동심원들을 점묘로 그린 추상화다. 점 하나에 그리운 이의 얼굴과, 점 하나에 고향집과, 점 하나에 화가 자신이 살았던 신안 앞바다의 섬을 담아내려 했으니, 작품 속의 동심원이야말로 절절한 그리움을 발신하고 수신하기 위해 화폭 속에 세운 대우주 안테나라 할 수 있겠다. 그나저나 얼마나 사무치는 마음이기에, 몇 백 몇 천 몇 만 개의 점들을 찍으며 무엇이 되었든 꼭 다시 만나길 기원했을까? 어쩌다 이 세상은 돌아가신 화가의 바람은 아랑곳없이 그 간절함을 천문학적 금액으로 사고파는 곳이 되어버렸을까?
언제부터인가 텔레비전을 켜기만 하면, 눈이 큰 여배우가 그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부자 되세요’라고 말하는 광고가 자주 보였다. IMF의 광풍으로 시중은행 대출이 막혀, 중산층이 도미노로 무너지고 쓰러진 직후였다. 내게도 그즈음에 집과 공장을 전부 잃은 가까운 친척이 있었으니, 그 말은 소위 루저들을 격려하는 덕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차라리 그것은 불난 집을 부채질하는 조롱만 같아서 두 볼이 화끈거렸다.
지구 종말 운운하던 세기말적 소문을 뒤로 하고, 새로운 각오로 다 함께 문을 연 21세기의 1분기도 어느새 거의 끝나가고 있다. 그 사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가상화폐를 주고 파는 인터넷 장이 들어섰다. 금수저도, 은수저도 아닌, 핸드폰을 손에 쥐고 태어났다는 밀레니엄 베이비들이 성장해 투자한 비트코인이 몇천, 몇만 배로 부풀어 올랐고, 그들은 신흥 부자가 되었다. 그야말로 뻥튀기 사건이자, 시쳇말로 ‘대박’난 전설이었다. 뒤늦게 대박의 판타지를 쫓는 인간 개미군단이 떼 지어 주식시장이나 가상화폐시장을 기웃거리며 은행에서 빌린 돈까지 쏟아 부었지만, 현실에서의 그곳은 고급정보를 쥔 자들에 의해 운용되는 롤러코스터가 기다리고 있는 이상한 놀이동산일 뿐이었다.
돌이켜보니, 세기말에 등장했던 ‘부자 되세요’란 광고문구 안에는 어떻게 부자가 되길 바란다는 노하우가 담겨 있지 않았다. 반면, ‘대박 나세요’란 신종 덕담 안에는 땀 흘려 꾸준히 일하는 노동보다는 제대로 된 타이밍에 제대로 된 종목을 노리는 투자의 기술을 독려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후자를 따르는 이들에겐 대박이냐 쪽박이냐, 그것만이 결정적인 세계관이다. 게다가 빨라진 인터넷 덕분에 대박 신앙 역시 빠르게 전파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처럼 ‘대박 첩경’을 바이블로 섬기는 신도들에게 점 하나를 다짐하듯 찍으면서 점점이 소망에 가닿으려는 간절함은 무당에게 쌀점이나 물으러 가던 어머니 세대의 푸닥거리로 치부될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래전 자신을 흑우黑牛라 부르는 타악기 연주자 김대환 선생의 드럼 연주를 무대에서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손가락 사이의 살점이 찢어져 너덜거릴 정도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수십 년 동안 소리를 단련해 온 선생의 드럼에서는 묵시록의 검은 비가 내렸다. 그 비는 인간이 사라진 세계 이후 쌀 한 톨 나지 않는 불모의 벌판을 내리치는 무서운 채찍이었다. 그날 밤 이후 나는 쌀 한 톨도 예사로 볼 수 없었다. 극미각極微刻의 세계 속에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생명이 빅뱅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설거지를 하다가도 개수대에 떨어진 쌀알들을 주워 담으며, 이것들도 하나하나 소중한 별이라는 상상을 하곤 했다. 하물며 밭에 씨를 뿌리고 곡식이 여물어질 때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구닥다리 마음이야 쌀 한 톨에 반야심경의 283자를 새겨 넣는 마음과 기실 다르지 않다고 믿게 되었다.
여전히 삼오일이 되면 마석우리엔 왁자지껄한 난전이 펼쳐진다. 장터 한쪽 구석에는 알록달록한 파라솔이 세워지고 뻥튀기 아저씨도 그 아래에 자리를 잡는다. 땡볕이 이글거리는 한여름에도 예외 없는 성실함이다. 그런데 MZ 세대는 얼씬거리지도 않고, 아저씨의 하루벌이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단내 섞인 열기가 후끈거린다. 그 와중에도 섭씨 200도가 넘는 쇳덩어리를 만지다 입은 아저씨의 화상 자국에 자꾸만 내 눈길이 머문다. 고마운 손이다. 저 손으로 바퀴 달린 작은 화로에 장작불을 붙이고 무쇠 기계에 달린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하면, 내 상상 속의 블랙홀도 덩달아 빙글빙글 돌아간다. 아저씨는 묵묵히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다. 잠시 뒤면 암흑물질 속에서 태어난 별들을, 생명을 품고 있는 따뜻한 씨앗들을 맞이하게 될 터인데, 얄궂게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번에도 ‘뻥이요’ 소리가 들린 듯하다. 그러나 아주 먼 데서 온 소리인 듯, 이내 눈앞이 뿌예지면서 먹먹해진다. 이건 또 무슨 징조일까? 지구는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는데 가슴까지 뻥 뚫린 듯, 후련해지는 이 느낌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눈을 감으니 어느 새카만 은하계로 초롱초롱한 샛별들이 우르르 쏟아지고 있다. 생명 탄생의 위대한 빅뱅이다.
검질을 그리는 여자처럼
계속 쓰겠습니다. 보잘것없고 하찮은 글이라도 누군가는 사람의 마음을, 사람들의 삶을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 또한 많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 글이 발견되고 읽어주실 분들을 만나게 될지 어떨지 몰라 안달복달했습니다. 느긋한 마음으로 글쓰기에 임하지 못한 시간이 길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지난 몇 해 동안 삶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는 개인적인 아픔의 시간을 만났습니다. 언젠가는 누구나 결국에 맞이하게 되는 죽음의 곁을 지켜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 삶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몸을 낮추고 시선을 낮은 곳으로 돌리고 여리고 자그맣고 사사롭고 소소한 것들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제 자신을 내려놓고 그들과 더불어 낮은 몸부림으로 살아가는 삶을 기록하라는 정언명령을 받은 때가 바로 그 시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저는 작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제주 섬 속의 또 다른 섬인 우도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제가 머물던 창작스튜디오 옆방에는 화가 한 분이 조용히 검질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검질이란 그 쓸모를 세상사의 잣대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뿌리째 뽑아져야 마땅한 잡초인데, 화가인 그녀는 매일 아침 녘 산책길에서 발견한 이름 모를 검질들을 화폭에 옮겨 심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의 방에 초대된 저는 그녀가 옮겨 놓은 캔버스 속의 검질들이 제각각 다른 개성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쓸모나 가치란 것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일시적인 것인지를 알아채게 되었고, 그 자의적 판단에 의해 인간의 손에 의해 함부로 베어 버려지는 숨탄것들의 운명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운명은 낮게 움츠려 보잘것없어 보이는 우리 곁의 타자들의 삶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그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 하지 않았을 뿐인 개개의 삶들이 갖고 있는 저마다의 고유한 무늬는 감히 그 어느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대신 죽어줄 수는 있어도 누군가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는 깨달음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누군가는 살아 있으되 자신의 아픔을 고백조차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언젠가부터 그런 아픔에 눈이 갔습니다. 그런 아픔 뒤에 담긴 사연을 좀 더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하며 꾸준히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왔던 저를 아무쪼록 『시와산문』에서 호명해주셔서 기쁩니다. 발이 없는 생명에게는 발이 되어주고, 입이 없는 생명에게는 입이 되어주는 글을 쓰겠습니다. 글보다 재미난 것이 많은 세상이고, 인공지능까지 창작품을 척척 내보이는 세상으로 탈바꿈되어가지만, 숨과 숨 사이에서 만난 세상 뭇 생명들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는 글을 쓰겠습니다. 부디 오래오래 글로써 함께 호흡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