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21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0-26)
"I pray not only for
these, but also for those
who will believe in
me through their word, so that they may all be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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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세 차례의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바오로는 보수적인 유다인들과 다시 충돌한다. 일부 유다인들은 바오로가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그리스인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거룩한 곳을 부정하게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그를 고발하여, 그는 최고 의회에 출두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여기서
바오로는 부활과 천사와 영에 관한 교리에서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이용하여 슬기롭게 대처하여 위기를
넘긴다(제1독서). 복음에서는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기도가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 당신을 믿게 될 이들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거룩하신 아버지,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신 예수님의 이 기도는 교회 일치 운동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우리 인간은 과연 분열이나 분파를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존재일까요? 사실 같은 하느님,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현실은 믿는 모든 이가 하나가 되기를 아버지께 기도하신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입문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그리스도인 모두의 일치를 위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더 작은 공동체들, 가톨릭 교회와 각 교구,
본당, 단체, 가정을 위한 기도라는 사실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오늘도 일치를 위한 작은 노력, 행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화요일부터
오늘까지 사흘 동안 우리는 요한 복음 17장의 ‘대사제의 기도’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둔 당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셨으며, 제자들이 하나가 되고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을 지켜 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제자들뿐 아니라
멀리 있는 사람들, 미래에 당신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게 될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광을 제자들에게도 주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영광이란 바로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차례 살펴보았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영광! 오늘 독서도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고 있음을 전하면서 주님을 증언하는 사람들은 모두 주님과 같은 운명임을 강조합니다.
바리사이들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바오로를 주님께서 찾아오시어 그가 용기와 결단을 내리도록 도와주시면서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는
새로운 사명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주님의 뜻에 따라 로마로 올라가게 됩니다. 사명을 수행하게 될 로마에서도 십자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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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인터넷에서
‘인사하는 아기’라는 동영상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길에서 보면 종종 인사하는 마네킹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마네킹이 배꼽 인사하는 것을 보고는
지나가던 꼬마 아이가 그 앞에서 똑같이 배꼽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아마도 이 꼬마 아이는 마네킹이
자기에게 인사를 하니까 어린이집에서 배운 대로 인사한 것이겠지요.
솔직히 저는 이
인사하는 마네킹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인사를 하는 마네킹에서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거든요. 그래서
마네킹이 아무리 인사를 한다 해도 저는 마네킹을 향해 인사하지 않습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뿐이지요.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그 앞에서 답례를 하지 않습니다.
진실성을 있느냐
없느냐에 따른 반응은 서로 정반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성을 느끼게 되면 당연히 나 역시 진실성을 갖고 대할 것이며, 반대로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으면 무성의한 모습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만약 상대방의 진실성에 대해서 무성의로 응답하게 되면 어떨까요? 실제로 그런 적이 종종
있지요. 나는 정말로 진실성을 가지고 대했는데, 상대방은 그 진실성을 알아주지 않고 오해하고 오히려 나를 이용하려는 모습이 보일 때에는 커다란
배신감까지 느끼게 됩니다.
문득 주님의 모습이
떠올려 집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나 우리들에게 진실 되게 다가오십니까? 그런데 우리의 응답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보이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런 기도를 하실 필요도 없지요. ‘나는 할 만큼 했다. 따라오지 않으면
너희만 손해지.’라는 마음으로 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진실 되게 다가오시고, 진실된 마음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진실됨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응답하고 있었을까요? 혹시 아무런 성의도 보이지 않으면서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하면서 당연히
내가 누려야 할 것처럼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 부분에서 한 번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죠. 나의 진심을 주님께서 몰라주신다면?
얼마나 서운하겠습니까? 아마 주님께서도 우리의 무성의함에 무척 서운해 하시지 않을까 싶네요.
주님의 진실함에
우리 역시 진실된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을 서운해 하시지 않게 합시다.
사랑이 깊은 사람은
행복의 손실을 가장 슬퍼한다(플라톤).
예측 가능한 인간
작가 앨버트 라즐로
바라바시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예측 가능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의 93%가 예측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우리는 부정하지요.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면서....
물론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으며, 그 예측을 향해 나아가는 노력을 통해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미래를 모른다면서
순간을 의미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며 현재에 충실한 것이 중요함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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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라는
일치관계
-이기정신부-
나만이 있는 편한
공간에, 누가 있으면 편하거나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한 공간에 같이 있다는 것, 그와 익숙해졌다는 것, 많은 시간 걸렸겠지요. 내가 누구를
책임져야 한다면 바로 그가 내 안에 있는 거나 다름없고요.
내 안에 누굴 모실
거며, 그와 얼마나 일치할 것이냐가 나의 큰 문젭니다.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과 일치한다는 인간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하느님과의
일치관계를 쉽게 ‘우리 안에’라 하시니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요한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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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기는
믿음에서 >
-전삼용신부-
우디 앨런은 코미디
방송 작가로도 명성을 누린 적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명성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그는 무대 뒤에 숨어 있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관객들 앞에 나서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스탠딩 코미디언의 주급 75달러는 원고료로 들어오는 1,700달러에 비하면
푼돈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앨런은 일의 영역을 넓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대에 섰습니다. 공연이 시작될 때쯤이면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긴장되었습니다. 박수를 받기도 했지만, 야유와 조롱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은 농구 선수가 큰 키를 가지고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가지고 태어난 그 재능을 사용할 용기를 갖고 있습니까?”
용기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오늘 독서에서 당시 유다 지도자들 앞에 홀로 서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고발하는 그들을 한 마디로 분열시켜 놓습니다. 그들이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고는 자신 또한
바리사이고 한 사람의 부활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고 말하며 바리사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부활과 천사와 내세가 없다고 믿는 사두가이들을 적으로
만들어 자신들끼리 싸우게 만듭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가지고 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겐 감히 고개도 못 들 위엄을 지닌
이들 앞에서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께 자신도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청하고 풍랑이
이는 물 위에 자신의 발을 내어 딛을 수 있었던 용기는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불안에 떠는 겁쟁이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바오로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세계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로마의 황제 앞에서도 결코 떨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큰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큰일을 맡기시는 것
같습니다.
박보영 목사가
자신이 데리고 있던 아이가 사고를 쳐서 재판을 받고 소년원에 가게 되었는데 그 재판을 받는 중에 성령께서 마음을 움직이셨다고 합니다.
‘네가 그 아이를
책임지고 맡아 키우겠다고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소리쳐라.’
그러나 법정의
엄숙함을 뚫고 일어나 재판관에게 소리를 지른다는 것은 여간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하라고 하시니 벌떡 일어나 그
아이를 달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렇게 법정에서 끌려 나가게 되었고 나중에는 유명한 골칫거리로 소문까지 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또한 믿는다면
용기를 내야합니다. 십일조를 낼 용기, 미움과 멸시를 받을 용기, 가난해 질 용기, 자존심이 무너져 내릴 용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
사람들에게 바보로 취급될 용기를 가져야합니다. 그래야 한다고 느낄 때 바로 그렇게 실천할 수 있는 용기가 우리 믿음의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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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학교에
다닐 때,
집합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전체집합,
부분집합,
공집합,
교집합’이
있었습니다.
수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자연수,
유리수,
무리수,
짝수,
홀수,
소수’가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끌어주는 통합된 ‘진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저마다 소중한 개성과 자유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집합의
종류는 서로 틀린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수의
종류역시 서로 틀린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분과 전체를 이해하게 되고,
함께
공유한 것을 알 수 있고,
서로
다른 것들의 자리를 인정하게 됩니다.
들의
꽃들도,
하늘의
새들도,
바다의
고기들도 다 이런 이치를 알기에 남을 비난하거나,
탓하지
않습니다.
자신만이
최고라고 우기지도 않습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도 않고,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억압하거나,
죽이지도
않습니다.
이
우주에 지구는 하나의 부분집합입니다.
이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지구의 부분집합입니다.
살아있다는
공통점이 있고,
삶의
방식에서는 차이점이 있을 뿐입니다.
광주에서
있었던 민주화 운동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35년이
지났습니다.
1년에
한번 광주에서 기념식을 하게 됩니다.
1년
365일에
많은 기념일과 기념식이 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고단한
삶을 살아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도 일상의 한 부분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으로 부르던지,
제창으로
부르던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민주화
운동의 당사자들이 원하고,
국회에서도
여와 야가 합의를 했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습니다.
제 안에서 분노와
원망이 독버섯처럼 자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좀
더 얻으려고 욕심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다양한 기능을 하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머리에는
눈,
귀,
코,
입이
있어서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를 맡습니다.
손과
발이 있어서 도구를 사용하기도 하고,
원하는
곳으로 이동을 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우리 몸의 지체들은 한 몸을 이루어서 원활하게 생활 할 수 있도록 서로 도움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 몸의 지체가 한 몸을 이루듯이 우리들 신앙인 모두가 한 몸을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
당신이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모두
하나 되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되리이다.”
건강하던
우리 몸에 이상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은 ‘암’입니다.
암은
우리 몸의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세포들은 자신의 영양분을 다른 세포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크기를 유지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암세포는 자신의 영양분을 다른 세포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혼자만 간직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성장하게 되며 주변의 세포들에게 피해를 주고 결국은 암세포도 죽게 된다고 합니다.
암세포의
비극은 자신의 영양분을 나누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암세포가
치유되는 것은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서 자신의 영양분을 주변의 다른 세포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누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빵이 되셔서 우리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를 통해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눔은
우리가 하나 되는 지름길입니다.
날씨는
점점 무더워 질 것입니다.
주변에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일들도 줄어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신앙
안에서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다면 그런 모든 것들도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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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중요
-반영억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많은 기도를 받고 또 기도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기도하는 것은 방법이 다를 뿐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 상관없이 삶 안에 젖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생각해 보면 ‘무엇을 해 달라’는 기도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하느님의 은혜로움에, 그분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라고 알고
있지만 막상 기도를 시작하면 나의 바람만을 쏟아놓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참되게 기도하기위해서는 먼저 침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침묵
없이는 제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증언하는 말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17,26).
하고 말씀하셨듯이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바로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사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고 예수님께서도 그들 안에 머물러 사시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의 관계를 확고히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17,24)
하고 간절히 기도한 것은 바로 당신이 누리는 영광을 믿는 이들에게도 전해주고자 하는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정성어린 기도를 봉헌하되 이기적인 기도를 벗어나 사랑의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기도는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랑을
일깨워 주는 것들을 생활 실천으로 옮겨야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성요한 비안네는 말합니다 “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실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분께 마음을 열며 거룩하신 하느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한 없이 기뻐하는 것,
이것이 가장 훌륭한 기도입니다.”
“기도란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여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오리게네스).이고,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 잘못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더 많이 사랑하여 기도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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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일
-하나됨의
비결-
-이수철신부-
일은
크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인 기도와 '함께 사는 일', '소임상의 일'입니다.
그중
중요하고도 힘든 일이 함께 사는 일입니다.
함께
사는 일이 원활해야 소임상의 일도 잘할 수 있습니다.
하여
교육의 목적도 더불어 사는 것과 제 앞가림 하는 것 둘을 꼽습니다.
세
일의 우선순위를 말하면 단연코 하느님의 일은 기도입니다.
하여
베네딕도 수도원의 모토도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
하느님의
일'(opus Dei)인 공동전례기도가 잘 되어야
함께
사는 일도 잘되고 소임상의 일도 잘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 없이는 공동체도 얼마 못가 공중분해 될 것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고별사 기도에 속합니다.
고별사가
끝나면 18장부터는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됩니다.
화,
수, 목 3일간 복음의 서두는 똑같이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라는 말마디로 시작되는 것이 이채롭습니다.
오늘
이 말마디에 이어 나오는 '거룩하신 아버지'란 호칭도 반갑습니다.
미사시
성찬전례가 시작되면서 성령청원을 할때의 기도문도
'거룩하신
아버지'로 시작됨을 어제 발견하고 기뻤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거룩함의 샘이시옵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
참
은혜롭게도 미사를 통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그대로 모심으로 예수님과 하나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추상적 철학적 하느님이 아니라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아버지입니다.
하여
미사때 마다 '거룩하신 아버지'라 부를 때 그 호칭이 그렇게 따뜻하고 정다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무려 아버지란 호칭이 17회 나옵니다.
얼마나
아버지인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독보적 유일무이한 관계인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고별사 17장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 지는데
1.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요한17,1-5),
2.제자들을
위한 기도(요한17,6-19), 그리고 오늘의
3.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요한17,20-26)입니다.
오늘은
셋째 부분을 셋으로 나누어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단락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새삼
공동체의 하나됨도 하느님의 순전한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거룩한 미사와
또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의 일인 시편공동성무일도의 은총을 통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의 열매가 여기 요셉수도원 공동체입니다.
서로
성격이, 마음이 맞아서가 아니라,
우리는
주님 안에 주님은 우리 안에, 서로 상호내주하기에 일치라는 것입니다.
하여
비로소 획일적 공동체가 아니라 자유롭고 행복한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가 가능하게 됩니다.
둘째
단락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경과
미사는 상호보완하는 한셋트임을 절감합니다.
바로
이 성경말씀이 그대로 실현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아버지께서
주신 영광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주십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의 3중적 차원이 드러납니다.
공동체를
원으로 비유한다면 큰 원안에는 그리스도라는 중심의 원이 있고,
그리스도의
원 중심에는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여
그리스도 중심의, 아버지 중심의 믿는 이들의 우리 공동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셋째
단락의 청원도 고맙고 아름답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빕니다.“
역시
이 성경말씀 역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앞당겨 맛보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복된 미래의 운명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 부분 영어로 읽고 은혜 받아 눈이 활짝 열렸습니다.
"Father,
they are your gift to me. I wish that where I am they also may be with
me
(아버지,
그들은
나에 주신 당신의 선물입니다.
나는
그들 역시 내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
이 말씀이 복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라니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복된 존재들인지요.
우리와
함께 사는 형제들은 물론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들'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우리들이기에 애지중지 당신 곁에 있기를 바라는 예수님이십니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나(I)'라는 단수는 예수님에만 해당되고
우리는
모두 '그들(they)'의 복수 안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새삼
주님 안에 있는 공동체적 우리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깊은 겸손에 이르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이런
상호내주가 온전히 통합된 하나인 '내'가 되게 하고, 하나의 '공동체'가 되게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말미의 증언을 통해
바오로
사도가 얼마나 주님과 깊은 상호내주, 일치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오로 앞에 서시어 그에게 이르셨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안에서 온전히 한 마음, 한 몸 공동체를 이루어 주시고,
우리
모두의 영육(靈肉)을 치유하시며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시편16,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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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 가는 일치의 뿌리
-기경호신부-
어느 외국인이
한국인을 가리켜 ‘다이아몬드’와 같다고 말했다. 이는 각 개인을 보면 탁월하고 재능이 많아 보석과 같으나 여럿이 모였을 때에 하나로 뭉치지
못하는 한국인의 성향을 지적한 말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와 믿음의 공동체에서 무엇을 하든 마음과 생각이 하나로 모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는 지연, 학연, 혈연 등 인간적인 동기나 인연에 의해 끼리끼리 뭉치고 파벌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런 것들이 사회를
비정상적으로 흘러가게 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가 되고 뭉치려 하지만, 문제는 어떤 동기와 지향으로 하나가 되려고 하느냐에 있다. 나아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하나가 되려고 하느냐 하는
것도 문제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행복으로 가는 일치의 원리를 찾아보자.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은 그분으로부터 직접 설교를 듣고서 그분의
사명을 이어받았다.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 들어온 말씀은 계속해서 활동한다.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계속 있게 될
것이다.
교회의 역할은
예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을 증언하는 일 뿐이다. 결국 우리가 복음 안에서 만나게 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당신을 믿는 이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하신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17,21)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이다.
사랑안의 인격적
일치는 제자 공동체의 조건이자 영적 토대이다. 다시 말해 신앙 공동체에서는 합리성이나 정의가 우선이 아니라 사랑에 바탕을 둔 존재적 일치가
중요하다. 이 일치는 교계제도나 권위에 의해 강요될 수 없는 것으로서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영원한
목표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세상 안에 있기에 하느님과 예수님 안에서 일치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 예수님께 속한 믿는 이들은 세상의 유혹과 도전을 늘 받는다. 하나이며
분리되지 않은 하느님의 사랑만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다(17,23ㄴ). 그런데 하느님의 예수에 대한 사랑과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은 하나이며 같은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교인들의 마음속에 근원적인 힘으로
작용한다(17,26).
우리 모두
신앙인답게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하나로 머물 때 새로운 창조의 지평이 열리며, 모든 관계 사이의 벽이 무너지고 생명이 흐르게 됨을 기억하자.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하느님과 무관한 인간적인 이유와 동기로 하나됨을 추구하지 말 일이다.
참 행복으로 가려면
‘예수님’과 ‘하느님’을 일치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 현세의 그 어떤 것을 위한 일치나 인간의 인연에 집착한 일치, 이기적 목적을 추구하려는
일치는 영적으로 참으로 추한 ‘담합’이요 졸렬한 ‘패거리들’의 처사임을 알아차리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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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이영근수사-
주님!
하나 되게
하소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제 자신을 건네주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나가
되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을
실현하소서.
당신을 받아들여
하나 되게 하소서.
똑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채로
사랑으로 하나임을
깨닫게 하소서!
당신과 아버지께서
하나인 것처럼
애시 당초 당신
안에서
‘우리’가 하나임을 깨닫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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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우신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랑의
핵심에는 언제나 일치가
있습니다.
사랑의 일치는
우리를 위한
가장 큰
생명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마어마한 일치로 우리를
이끄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남는 것이
아니라 일치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일치는
우리모두가 삶의 주체가
되게합니다.
일치를 위한
기도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하나되는
일치는 우리의
부족함을 결코 가리지
않습니다.
일치는
서로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일치는
아낌없이 자신을
주는 행복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을
향해 걸어갑니다.
완전히
하나가 될
때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잊지 않는
데서 일치는
시작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기도이며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일치를 위한
기도는 욕심에
가득찬 우리를
정화시키는 가장
아름다운 감사기도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완전히 하나되게
하는
것은 사랑과
감사입니다.
일치의 주님이
계시기에 오늘이
있습니다.
감사는 사랑과
일치의 가장 아름답고
맑은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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