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姜尙(강태공)- 병가의 비조, 모략의 종사 ① 백성을 힘들게 한 죄를 벌한다는 기치를 높이 치켜들다. ② 문무의 조화로 대사를 성취하다. ③ 군사행동의 주도권을 빼앗다. ④ 인간을 중시하고 천명이라도 얽매이지 않는다. 서주 건국에 남다른 공을 세운 강상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관직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는 동시에 군사모략 이론의 창시자이자 걸출한 모략가이기도 했다. 강상은 이름과 별명이 많다. 여상(呂尙)·여아(呂牙)라는 또 다른 이름과 태공망(太公望)·사상보 같은 존칭으로도 불렸다. 후대에는 흔히 '강태공'이라 불렀다. 그의 생애와 행적은 기록이 소략하고 견해도 일치하지 않지만 기본적인 윤곽과 중요한 사실은 그래도 분명한 편이다. 군사사의 관점에서 보면 다음 몇 가지가 눈길을 끈다. 전쟁에 있어서 시기(時機)는 절대적 요소다.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진정한 모략가 강상은 이 하나만으로도 '병가의 시조'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다. 첫째, 강상의 활동 범위는 대단히 넓었다. 그의 선조가 하나라의 시조 우 임금을 도와 치수사업에 공을 세워 여(呂, 지금의 하남성 남양)라는 지역에 봉해졌기 때문에 성을 여, 이름을 상이라 한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가난한 생활을 했다. 한때는 조가에서 도살업에 종사하기도 했고, 맹진에서는 밥장사까지 했다고 한다. 그 후 동해에 은거했으며, 위수에서 낚시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의 발길은 지금의 하남·하북·산동·섬서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미치고 있다. 훗날 그가 쉽고 익숙하게 주 무왕을 도와 맹진에서 제후의 군대를 열병하고 목야 결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한 것도 이런 그의 경력과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둘째, 강상은 정치경험이 풍부했다. 사마천의 『사기』 기록에 따르면, 그는 박학다식하여 한때 상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를 모신 적이 있는데 주 임금이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하자 바로 떠났다고 한다. 이후 그는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뜻을 펼치려 했으나 임자를 만나지 못하다 마침내 서쪽의 주에 몸을 맡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경력을 통해 그는 상·주 두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각지 제후국들의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주 임금이 통치하는 상 왕조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분석과 판단을 내린 바 있었다. 지금 저 상나라는 너나할 것 없이 홀려서 끝없이 색을 밝히고 있다. 내가 저들을 보니 잡초가 곡식을 뒤덮고 사악함이 정직함을 이기고 있다. 관리들을 보니 도적처럼 포악해서 법을 깨뜨리고 형벌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런데도 위아래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망국의 때가 온 것이다(『육도』 「무도」, 이하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모두 『육도』에서 인용한 것임). 이 기록은 강상이 상과 다른 나라에서 정치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상 왕조에 대해서 넓고 깊게 관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는 훗날 그가 서주 문왕과 무왕을 도와 정확한 전략을 수립할 수 있게 한 중요한 조건이 된다. 『손자병법』에 "주나라가 흥기할 때 강상은 상에 있었다"고 한 대목은 근거 있는 사실로 보인다. 셋째, 강상과 주 문왕의 만남은 역사의 선택이었다. 『여씨춘추』에 따르면 강상은 "한 시대를 다스리고자 했으나 주인을 못 만나고 있다가 문왕이 어질다는 소리를 듣고는 일부러 위수에 낚싯줄을 드리워놓고 살폈다"고 한다. 『사기』는 강상이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낚시로 주 서백(문왕)에 접근하려 했다고 기록했다. 또 다른 설도 『사기』에서 나왔다. 그에 따르면, 일찍이 주 서백이 유리성에 갇혀 있을 때 여상은 바닷가에 숨어 살고 있었다. 평소 여상을 알고 있던 산의생과 굉요가 그를 불렀다. 이에 여상은 "내가 듣기에 서백은 어질고 어른을 잘 모신다고 하니 어찌 그에게 가지 않을소냐"라고 했다고 한다. 요컨대 주 문왕은 상을 멸망시키고 주를 흥기시키기 위한 사업 때문에 인재를 필요로 했고, 강상은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유능한 군주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누가 주동했든 간에 서로를 이해하는 기초 위에서 쌍방이 서로를 선택한 결과였다. 우연을 통한 역사의 필연성이 드러난 셈이다. 강상과 문왕이 위수에서 만난 이야기는 널리 퍼져나가면서 신화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 고사에 따르면 주 문왕이 사냥에 나서기 전에 점을 쳐본 결과 용도 이무기도 호랑이도 곰도 아닌 왕을 보필할 자를 잡을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문왕은 위수 북쪽으로 사냥을 나갔고, 아니나 다를까 초가집에 앉아 낚시를 하고 있는 여상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낚시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으로 화제를 바꾸었고, 대화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활기에 넘쳤다. 두 사람은 단번에 의기투합했다. 문왕은 자신의 선조 고공단보가 언젠가 성인이 주나라를 도와 강성하게 만들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다면서 "우리가 태공 선생을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라며 감격스러워했다. 그러고는 여상을 '태공망'으로 높여 부르면서 함께 수레를 타고 돌아와 사(師)에 임명했다. 사마천은 이런저런 전설을 거론한 다음, 전설에 따라 여상이 주를 섬기게 된 경위는 다 다르지만 그 요점은 그가 주 문왕과 무왕의 사가 되었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넷째, 강상은 서주의 개국과 건국사업에 남다른 공헌을 했다. 문왕과 무왕 두 왕이 집권하는 기간 강상의 직무는 '사'였다. '사'는 국왕을 보필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정치적으로는 보(保, 태보)·재(宰, 태재)와 같이 조정의 백관과 사방의 제후들을 통솔하고 국가의 중요한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후대의 재상과 같았다. 군사적으로는 국왕의 군대통솔을 보좌하여 군사정책의 결정과 전투에서의 지휘에 참여하는, 후대의 군사(軍師) 또는 사령관에 해당했다. 개국 단계에서 강상은 문왕을 도와 은밀히 덕을 닦아 상의 정권을 무너뜨렸는데, 그 일을 위해 주로 용병술과 기묘한 계책을 마련했다. 그래서 훗날 용병술과 주의 권모를 말하는 이들은 모두 태공을 그 주모자로 존경했다. 천하의 3분의 2가 주나라로 귀순한 데는 태공의 계책에 힘입은 바 컸다. 그뒤 무왕을 보필해서 상의 주 임금을 정벌하러 나섰다. 그는 맹진에서 제후들의 회맹을 조직하고 목야전투를 지휘하여 단숨에 상 왕조를 뒤엎었다. 건국 단계에서는 무왕을 도와 일련의 정치·군사적 조치를 취했다. 예를 들면, 축문을 읽어 신에게 주 임금의 죄를 징벌한 사실을 아뢰고, 녹대에서 얻은 돈과 거교의 창고에서 식량을 풀어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했다. 아울러 상 왕조에서 박해를 받았던 비간의 무덤을 높이 쌓고 갇혀 있던 기자를 석방시키는 한편 구정을 주나라의 도읍으로 옮겨 천명이 주나라로 기울었음을 만방에 선포했다. 주나라는 정치를 정비하여 천하를 새롭게 했는데, 이런 일들 대부분이 강상의 계책에 따른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무왕은 공신과 모사들에게 논공행상을 실시했는데 사상보(강상)가 단연 으뜸이었다. 강상은 제 땅에 봉해졌다. 제에 도착한 강상은 정치를 가다듬고 그곳의 풍속에 따라 의례와 절차를 간소하게 했으며, 상공업과 어업 생산을 장려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제나라에 귀순했고 제나라는 동으로 동해, 서로 황하, 남으로 목릉, 북으로 무체에 이르는 지금의 산동성·하남성 동부·강소성 북부·하북성 동부의 넓은 지역을 관할하는 큰 나라가 되었다. 강대한 제나라는 제후들을 정벌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등 그 지위가 다른 봉국과는 달랐다. 이상의 기록들은 강상이 정치와 군사활동에서 보여준 두드러진 특징이 '모(謀)'에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의 공헌은 서주의 정치·군사 방면의 정책결정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강상은 또 자신의 실천 경험을 이론으로 승화시켰다. 말하자면 고대 중국에서 처음으로 계통적으로 모략 이론을 제기한 정치가이자 군사가인 셈이다. 강상의 모략사상을 기록한 책이 전국시대에 널리 유행했으며, 진·한 이후로는 그 영향력은 더욱 넓어졌다. 한나라 때 전적 중에는 '태공 237편'이 있었는데, 그 중 모(謀)가 71편, 언(言)이 71편, 병(兵)이 85편이었다고 한다(『한서』 「예문지」). 강상의 저술로 전하는 『육도(六韜)』는 현존하는 중국 고대의 병서 중에서 모략사상을 체계적으로 논술한 최초의 저작으로 꼽힌다. 강상은 '병가의 비조'로 불린다. 후세에 용병술과 주나라의 권모술수를 말하는 이들은 모두 태공을 그 주모자로 떠받든다(『사기』 「제태공세가」). 강상의 모략사상은 소박한 유물론과 변증법적 관점을 갖추고 있다. 전쟁에서 인간의 자각적 능동성을 강조하며, 군사투쟁을 정치투쟁과 외교투쟁과 결합시키는 데 관심을 돌렸다. 특히 모략을 운용하여 싸우지 않고 완벽하게 이기기 위해 노력할 것을 강조한다. 그의 모략사상은 그의 저술과 실천활동을 통해 체현되고 있다. 그 요지는 대체로 다음 몇 가지로 압축된다. ① 백성을 힘들게 한 죄를 벌한다는 기치를 높이 치켜들다. 강상은 인심의 향배가 전쟁의 승부를 결정하는 요소이며, 이해득실은 인심 향배의 물질적 기초라고 생각했다. 이는 강상 모략사상의 기본 출발점이자 뚜렷한 특징이었다. 그는 추상적인 인의도덕을 떠들지 않았다. 대신 인심의 향배와 물질적 이익을 직접 연계시켰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천하를 얻으려는 것은 마치 들짐승을 쫓는 것과 같아 천하가 모두 고기를 나눌 마음을 가지는 것이며, 또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 것과 같아 물을 건너고 나면 모두 그 이익을 나누고 패하면 모두 피해를 입는 것입니다(「무도」)." "인민들과 더불어 같이 아파하고, 같은 마음으로 일을 이루고, 좋지 않은 일은 서로 돕고, 좋아하는 일에 서로 모이면 군대 없이도 이기고, 무기 없이도 공격하며 참호 없이도 지킬 수 있습니다(「무도」)."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의 천하입니다. 천하의 이익을 함께 나누는 자는 천하를 얻고 천하의 이익을 혼자 차지하려는 자는 천하를 잃습니다(「무도」)."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하여 그는 문왕과 무왕을 도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가 흥기할 때 일련의 조치로 인심을 얻었다. 대내적으로 인민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더불어 생산을 발전시키고 유능한 인재를 초빙했다. 이로써 인민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자기 일에 힘쓰고, 형벌은 줄이고 세금은 가볍게 했다. 위정자는 궁실을 검소하게 꾸미고, 관리들은 너그럽고 깨끗하게 일함으로써 평민과 노예주 귀족 사이의 모순을 완화하고 경제력을 키워나갔다. 대외적으로는 덕을 닦고 좋은 일을 많이 베풀어 동맹국을 많이 끌어들였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자. 당시 노예들이 대규모로 도망치자 상나라의 실권자인 주(紂)를 비롯한 그 주변의 노예주들은 이들을 마구 차지했다. 반면에 주나라는 도망친 노예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조사하여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조치는 국내의 노예제 통치질서를 다지는 효과를 보았을 뿐 아니라 각지 노예주 귀족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 결과 제후들이 주 임금에게 등을 돌리고 서백(주 문왕)에게 귀순함으로써 천하의 3분의 2가 주나라의 영향권에 들게 되었다. 이런 기초 위에서 공개적으로 백성을 괴롭히는 자를 토벌한다는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상나라를 멸망시키는 군사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태서(泰誓)'·'목서(牧誓)' 등과 같은 정치선언문을 발표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죽여 그 악행이 천하에 퍼졌다며 주 임금의 죄악을 폭로했다. 서주는 하늘의 뜻을 저버리고 인민에게 원한을 산 천하 공공의 적을 없앰으로써 하늘을 대신하여 천벌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공세로 제후들을 단결시키고 주 임금을 고립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는 서주가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잡고 상나라를 공격하는 군사행동과 적절하게 어울려 상승효과를 낼 수 있었다. ② 문무의 조화로 대사를 성취하다. 강상의 모략사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변증법적이고 상호 연계적이며 발전적인 관점으로, 나와 적의 형세를 살펴 군사투쟁을 정치투쟁·외교투쟁과 절묘하게 결합시킨다는 점이다. 서주와 은상의 전쟁에서 기본 형세는 서주의 열세였다. 수는 적고 실력도 약세였다. 따라서 서주의 과제는 어떻게 약세를 우세로 바꿀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상은 적을 분열시키고 와해시키는 전략을 집중적으로 세웠다. 강상은 실력의 강약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바뀔 수 있다고 보았다. "존재냐 멸망이냐는 멸망을 근심하는 데 달려 있고, 즐거움이냐 아니냐는 재앙을 걱정하는 데 달려 있다." "지금의 상나라 왕은 자신이 살아남을 것만 알았지 망할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즐거움만 알았지 재앙은 모르고 있다."(이상 「문도」 '병도') 따라서 기세에 따라 유리하게 상황을 이끌고 정확한 모략을 운용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실력을 키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상은 이러한 사상을 자신의 정치적·군사적 실천에 철저하게 관철하여 문왕과 무왕이 성공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정책을 실행하도록 도왔다. 첫째, 자신의 실력과 진면목을 철저하게 숨기는 도회(韜晦)의 계책을 실행했다. 이를 통해 적을 유혹하고 조종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쌓고 기회를 기다리게 했다. 서주의 흥기는 은상 왕조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계력(季歷)이 살해되고 문왕 희창(姬昌)이 유리성에 감금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상은 이러한 일련의 강경 조치로 서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교훈을 받아들여 강상은 문왕에게 부드럽게 상의 주 임금을 떠받들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꾸미라고 건의했다. 자신의 진면목을 감춘 채 표면적으로 상을 섬기면서 주는 은상을 멸망시키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시켜나갔다. 강상은 이렇게 말했다. 매가 먹이를 덮치려 할 때는 날개를 거두고 낮게 날며, 맹수가 먹이를 덮치려 할 때는 귀를 내리고 몸을 낮추는 법입니다. 이처럼 성인이 움직이려 할 때는 반드시 어리석은 척합니다(「무도」 '발계'). 이러한 사상에 기초해 "미녀와 기이한 물건 그리고 좋은 말 따위를 구해 주 임금에게 바치고……낙서 땅을 바쳐 포락형과 같은 혹형을 폐지해달라고 요청(『사기』 「은본기」)"하고, 서쪽의 제후들을 거느리고 주 임금에게 인사를 드렸다. 한편으로는 그 자신도 미녀들과 어울려 음주가무에 빠진 것처럼 위장하기까지 했다. 상의 주 임금은 이러한 서주의 위장술에 속아 "서백이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쳤으니 이제 걱정할 것이 없구나"라며 서주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주 문왕을 서주로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문왕에게 제후들을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상징하는 큰도끼를 하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의 확실한 징표로 군대의 주력을 서쪽 전선에서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이렇게 해서 서주는 시간을 벌었다. 거기에 서쪽 제후들을 정벌할 수 있는 특권까지 얻었다. 서주는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군사·경제적 역량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 결과 "서백의 세력이 날로 커지고 주 임금은 서서히 권력의 무게 중심에서 멀어졌다(『사기』 「은본기」)." 둘째, 상 왕조의 약점과 모순을 이용하여 상의 통치집단을 분열시키고 와해시켜 적의 실력을 약화시켰다. 상의 주 임금은 결코 못난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었다. 스스로 충고를 듣지 않아도 될 만큼 지혜롭고, 잘못을 덮을 만큼 말재주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교만하고 음탕하여 백성들을 포악하고 잔인하게 다루었으며 제후들의 권리를 함부로 빼앗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에 맞추어 강상은 군사투쟁을 정치·외교투쟁과 결합하여 전개하는 이른바 '문벌(文伐)'을 건의했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두 가지를 제시했는데 요점은 유혹과 부패였다. 즉 각종 미끼로 적국의 군주를 유혹하여 통치집단을 부패시키는 것이었다. 구미와 그 뜻에 맞추어주고, 그 명성을 치켜세우며, 건전한 비판 같은 언로를 막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난신들을 포섭했다. 미녀들을 바쳐 주색에 빠지게 하고, 좋은 개와 말을 바쳐 놀이에 빠져 지치게 하여 부패와 포악한 행위를 조장했다. 이렇게 해서 형세판단을 그르치게 하여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했다. 군주와 신하 사이를 이간질했다. 적국의 신하들을 각종 이권으로 매수하여 그들을 통해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신하들이 두 마음을 가지게 하여 통치집단을 분열시켰다. 이로 인해 적의 통치집단 내부의 모순은 갈수록 확대되고 심화되었다. 또 온갖 이권으로 내부의 신하들을 유혹하여 놀이와 주색에 빠지게 함으로써 국고를 텅 비게 하고, 나아가서는 생산라인을 마비시켜 적국의 경제력을 약화시켜 나갔다. 강상은 이러한 책략들은 군사투쟁으로 이룰 수 없는 목적을 달성케 하고 군사투쟁의 승리를 가속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책략들이 잇달아 실천되자 결국 뚜렷한 효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상의 임금 주는 부패되어갔고 통치집단 내부의 모순은 심화되었다. 상을 섬기던 속국의 민심은 점차 상을 떠났고 상 왕조의 정치·군사·경제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이제 상나라는 안팎으로 민심이 떠나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형세를 근본적으로 역전시켜 상을 멸망시키기 위한 전략수립에 필요한 조건을 준비할 수 있었다. ③ 군사행동의 주도권을 빼앗다. 강상은 전쟁이란 교전 쌍방의 힘 겨루기이자 전쟁을 이끄는 쌍방 지도자의 지혜 겨루기라는 사실을 조보적인 수준에서나마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모략투쟁을 대단히 중요한 위치로 끌어올렸다. 일에 앞서 모략을 잘 구사하는 자는 번창하고, 그 반대인 자는 망한다는 이치를 체득한 것이다. 전쟁의 승부는 오로지 모략을 얼마나 교묘하게 잘 구사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든 군대를 동원하든 장수를 선발하든 그는 모든 분야에서 지모(智謀)를 중요시했다. 그는 현명한 지도자의 세 가지 조건에 대해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눈은 밝아야 하고, 귀는 총명해야 하며, 마음은 지혜로워야 한다. 지혜가 보통 사람과 같으면 국사(國師)가 아니다. 장수가 지혜롭지 못하면 군대 전체가 의심한다. 그러면서 지혜롭게 권모를 구사할 줄 모르는 자를 장수로 기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전쟁을 이끌고 군사상의 정책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필승의 전기를 파악하는 것이고, 용병과 실제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은폐와 신비이며, 군사행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의 의도를 벗어나는 것이고, 군사모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이 나의 행동을 간파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강상은 적에게 겉으로 보여주는 이른바 '시형(示形)'의 책략으로 적을 착각하게 만들고 예상치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겉으로는 어지러운 것 같지만 속으로 차분히 다듬고, 겉으로는 배고픈 것 같지만 속으로는 배불리 먹으며, 겉으로는 둔한 것 같지만 속은 날카롭게 만들어놓으라는 말이다. 합쳐졌다 떠나고, 모였다 흩어지는 것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은밀히 꾀하고 몰래 살피고 높이 보루를 쌓고 정예병을 숨겨두는데, 아군 병사들은 소리를 내지 않고 적은 나의 준비를 눈치채지 못한다(「문도」 '병도'). 그런 다음 틈을 타서 허를 찌르고, 동쪽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서쪽을 치고, 미처 대비하지 못한 곳을 공격하며, 의외의 전략을 구사한다. 강상은 이렇게 말한다. "잘 싸우는 자는 이익을 보면 때를 놓치지 않고, 때를 만나면 의심하지 않는다. 이익을 잃고 때를 놓친다면 재앙이 도리어 내게 닥친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는 때를 잃지 않고, 치밀한 자는 결단을 내림에 머뭇거리지 않는다(「용도」 '군세')." "싸워서 이기는 방법은 몰래 적의 기미를 살피고 틈을 타서 빠르게 그 이익을 취한 다음 다시 신속하게 불의의 기습을 가하는 것이다(「문도」 '병도')." 강상의 이러한 모략사상은 그가 직접 참여하여 지휘한 세 차례 군사행동에서 집중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먼저, 상나라의 날개를 자르는 군사행동이었다. 상나라 후기 통치에 가장 큰 위협이 된 적은 동방의 이족(夷族)과 서방의 주족(周族)이었다. 동이는 복종과 반항을 수시로 바꾸어가며 한 걸음 한걸음 상의 중심으로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현실적 위협 세력이 아닐 수 없었다. 서주는 실력은 약했지만 의욕적으로 발전을 꾀하고 있는 잠재적 위협이었다. 양면협공의 형세에 직면해서 상은 동시에 작전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 쪽을 먼저 격파하는 전략을 구상했다. 즉 동이를 평정하는 데 전력을 집중하고, 서주에 대해서는 공세를 저지하는 정책을 취했다. 또 서주의 공손한 태도를 곧이곧대로 믿고 한순간 서주에 대한 통제와 방어를 늦추었다. 서주는 강상의 모략을 채택했다. 상의 주 임금이 특별히 내린 제후들에 대한 정벌권을 이용하여 상의 서방 속국들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먼저 지금의 섬서성 서부와 감숙성 경하 유역, 즉 상의 서북쪽에 있는 견융(犬戎)·밀수(密須)와 완(阮)·공(共) 등을 정벌하여 등 뒤의 걱정거리를 해결했다. 그런 다음 동쪽으로 황하를 건너 여(黎, 지금의 산서성 장치 서남)·한(邗, 지금의 하남성 심양 서북)을 정복하고 상나라의 심복 속국인 숭(崇, 지금의 하남성 숭현)을 소멸시켜 상의 도읍 조가(朝歌)로 진군하기 위한 길을 닦았다.
둘째, 맹진에서의 군대 사열이었다. 이는 강상이 '사상보'의 신분으로 주 무왕을 도와 행한 군사훈련으로, 그 목적은 주 임금을 정벌하는 전쟁에 제후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를 관찰하는 데 있었다. 아울러 군대의 작전 준비를 점검하는 실용적 목적도 있었다. 강상은 왼손에는 큰도끼를 오른손에는 흰 깃발을 들고 무왕의 호령을 대변하면서 군대의 기율을 선포했다. 맹진의 회맹에 참가한 8백 제후는 모두 같은 적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내면서 무왕의 지휘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이 회맹으로 서주는 정치·군사적으로 우위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그때까지 통일된 훈련을 받지 못했던 제후들의 연합군에게 한 차례 행동통일을 위한 훈련을 실시함으로써 장차 다가올 전략수립에 필요한 조건을 창출할 수 있었다. 셋째, 목야의 결전이다. 맹진에서의 회맹과 군대 사열을 성공적으로 마친 서주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나라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면서 결전의 시기를 기다렸다. 2년 뒤 상 왕조는 정치적으로 민심이 떠나고 통치집단이 지리멸렬하는 곤경에 빠졌다. 국가 원로인 비간을 죽이고 기자는 감금했고, 이 때문에 많은 인재들이 나라를 빠져나갔으며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군대의 주력은 동쪽 전선에 신경을 쓰느라 겨를이 없었고, 서방의 군사력은 허약하여 수도 조가는 텅 비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강상은 무왕에게 전쟁의 시기를 놓치지 말고 바로 수도를 치고 들어가자고 건의했다. 마침내 상을 토벌하는 전략이 결정되었다. 상의 주 임금은 서둘러 대응에 나섰으나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완전히 궤멸되고 말았다. 17만 대군이 순식간에 와해되고 주 임금은 분신자살했다. 6백 년을 이어온 상 왕조가 이로써 멸망을 고했다. ④ 인간을 중시하고 천명이라도 얽매이지 않는다. 이는 강상의 모략사상이 갖는 뚜렷한 특징의 하나다. 언젠가 무왕과 강상이 용병의 원칙에 관해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무왕은 천도(天道)·지리(地利)·인사(人事) 등을 열거하면서 무엇이 첫 번째냐고 물었다. 강상은 인사가 으뜸이라고 대답했다. 이와 관련하여 강상은 이렇게 말했다. "천도는 살피기 어렵지만 지리와 인사는 얻기 쉽습니다." "천도와 귀신 따위는 보고자 해도 나타나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찾으려 해도 얻을 수 없습니다." "천도를 따른다고 꼭 길한 것이 아니며, 천도를 어긴다고 꼭 해로운 것이 아닙니다. 지리를 잃으면 병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인사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싸울 수 없습니다." "유능한 인재를 잘 기용하고 일을 시행함에 지리를 얻으면 시기를 살피지 않아도 유리해지며, 점을 치지 않아도 길하며, 빌지 않아도 복이 옵니다." 따라서 '천도'나 '점복' 따위는 지혜로운 장수라면 연연하지 않지만 어리석은 장수는 그것에 얽매인다(이상 『육도』의 잃어버린 문장). 당시 역사 조건에서 천도와 귀신을 신봉하는 통치집단과 사회사조에 직면해서 강상은 이런 소박한 유물주의 관점을 견지했다. 군사상의 정책결정과 전쟁을 이끄는 실천적 활동에서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목야 결전의 전략수립과 전투과정은 인간과 인간의 일을 중시한 반면 천도에 얽매이지 않았던 강상의 사상을 생동감 넘치게 체현한다. 『주서(周書)』의 기록에 따르면, 주 왕조의 정책 결정과정은 최후에는 점복의 길흉으로 결정한다. 목야 결전의 결정도 이렇게 이루어졌다. 대략 기원전 1027년 서주는 상의 주 임금을 정벌하는 전략의 세부 항목들에 대한 준비를 완성했다. 정치적으로는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국면을 창출했고, 군사적으로는 상나라 도읍 조가에 대해 칼을 씌우듯 공세를 취했다. 상 왕조는 안팎으로 곤경에 처했다. 민심은 떠났다. 서주는 마침내 상에 대한 총공세를 결정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출병에 앞서 친 점복의 점괘가 '불길'하다고 나왔다. 게다가 폭풍우를 만나 중무장한 전차가 빗물에 잠기고 깃발이 세 동강이 나는 등 불길한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모두들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주공 단과 산의생 등은 '하늘이 돕지 않으니 거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주 무왕도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강상에 정벌이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이런 중대한 고비에서 강상은 굳세게 처음 의지를 밀고 나갔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는 달리 무왕에게 얻기 어려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출병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인은 천지간에 쇠퇴한 난세를 타고 일어납니다. 거북점이라는 것은 알고 보면 뼈를 말려 치는 것이고, 산가지점이라는 것은 풀을 꺾어 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길흉을 판단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지금 주 임금이 비간의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 죽이고 기자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게다가 비렴 같은 자에게 정치를 맡겼으니 그를 반드시 정벌해야 합니다."(『태평어람』 권328) 무왕은 강상의 주장을 받아들여 폭우를 뚫고 군대를 동쪽으로 진군시켰다. 3백 개의 전차와 3천의 정예병, 4만 5천의 병사들 그리고 제후들의 연합군이 물밀 듯 상의 수도로 밀려갔다. 목야 결전의 승리로 서주는 마침내 상을 멸망시키는 대업을 달성했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 「대명(大明)」이란 시는 목야 결전의 장렬한 장면과 강상의 탁월한 공헌을 아주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다. "넓고 넓은 목야 평원으로 눈부시게 단단하고 날카로운 단목으로 만든 전차가 달려가고, 장대한 전투마는 위풍도 당당하구나. 모략에 뛰어난 군사 강상은 매가 날 듯이 계책을 꾸미는구나. 무왕을 도와 상을 멸하고 주를 흥기시키니 파랗게 갠 하늘에 욱일승천하는 해와 같구나!" 【인물소개 - 강상】 전쟁에서 시기는 절대적 요소다.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진정한 모략가 강상은 이 하나만으로도 '병가의 시조'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다. 모략가로서 그는 문왕을 도와 주가 은을 물리치는 데 절대적인 공을 세운 정치와 군사 방면의 전문가였다. 그 공으로 제 지역에 책봉되어 제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병서인 『육도』를 남겼다 하나 후세 사람이 그 이름을 빌린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인물이자 군주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좌했던 유능한 정치가이자 군사모략가의 대명사로 꼽힌다. 출처:강상 [姜尙] - 병가의 비조, 모략의 종사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출처] 강상姜尙(강태공)- 병가의 비조, 모략의 종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