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와 영천
글. 사진 / 김경식
밤꽃 향기가 산과 들을 가득 채우면 6월이다. 6월의 산과 들에는 전쟁의 상흔과 기억을 숨기려는 듯 숲이 무성하다. 여름으로 다가서는 우리의 국토는 더욱 짙은 녹음이 우거지고 있다. 이 땅 어디든 시대마다 조상들이 살다가 떠나간 흔적들과 이야기들이 남아 있다.
특히 전쟁터가 되었던 지역은 무수한 사람들의 절망과 절규의 땅이었다.
조양각 전경
전쟁터가 아니었던 곳이 드문 우리나라는 외세의 침략을 당하면 끝까지 저항하면서 민족의 생존을
이어 왔다. 이런 이유로 어딜 가나 싸움터가 존재한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글 읽고 시를 쓰던 선비들도 칼을 들었다.
이번 문학기행은 선비들이 칼을 들고 민족을 지키려 했던 지역을 찾아 떠난다. 경북 영천이다. 문학기행은 문인들의 삶과 문학적인 발자취를 찾아 가슴을 열고 떠나는 여행이다. 여행지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떠나간 이름 없는 선비들의 삶과 이야기들이 감동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때로는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들 중에도 그의 삶을 왜곡하여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문학작품이 지금까지 전해오는데 정작 정확한 작가의 삶을 규명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곳이 영천이다. 포은 정몽주(鄭夢周,1337~1392) 선생과 영천의 선비들의 삶과 문학에 접근하면서 영천으로 문학기행으로 떠나는 일은 아마 처음이리라.
조양각에서 본 영천
포은 정몽주의 고향 경북 영천을 향해 떠나는 문학 기행은 전쟁에 참여했던 문인들의 삶의 뿌리를 찾아가는 기행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의 신념과 조국애에 투철했던 조상들을 찾아 떠나는 기행이다. 포은 정몽주 그가 무너지고 있는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포은 정몽주의 고향 영천을 기행 하는 일은 변화의 시대에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목숨을 걸고도 지켜야 하는 것은 끝까지 지킨 이들이 많았던 영천을 향해 떠난다.
영천은 삼한시대(골벌국), 삼국시대(임고군), 고려시대(영주군), 조선 태종14년에 비로소 영천군이 되었다. 영천(永川)은 두 물줄기가 합류하는 장소를 표현한다. 이 강이 금호강이다. 영천의 진산인 보현산에서 흘러내린 자호천이 시작된다. 이 자호천이 고경천과 합류하고 남천과 북천이 영천시에서 만나 금호강이 시작된다.
영(永)’자는 二 자와 水 자가 합한 글자의 형상이다. 결국 두 하천이 만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조양각(서세루)은 영천의 상징 건축물이다. 금호강이 흐르는 암벽위에 1363년 영천 부사였던 '이용'이 포은 정몽주의 건의로 건립하고 명원루(明遠樓)라는 이름을 붙였다.
200년 이상을 잘 버틴 이 누각은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고 만다. 지금의 조양각은 1637년 조선 인조 때 영천 군수 한덕급이 재건하였다. 이때 조양각이란 새 이름을 얻는다. 조양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영천시의 중심지를 지키고 있다. 오래전부터 조양각은 영남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와 함께 영남의 3대 누각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영천 시내를 흘러가는 금호강
또한 조양각(서세루)은 문학의 보고다. 60 여편이 시가 목판(木板)으로 새겨져 걸려 있는데 이름을 대면 알만한 사람들의 작품도 걸려있다.
이중에서도 조양각의 역사성과 문학성을 가장 잘 표현한 시가 있다. 조양각(명원루)의 낙성식때 포은 정몽주가 쓴 시 ‘청계석벽(淸溪石壁)’이다.
淸溪石壁抱州回(청계석벽포주회) : 바위언덕 아래 푸른 강물 영천을 돌아 흐르고
更起新樓眼豁開(갱기신루안활개) : 다시 지은 누각에서 깨어보니 눈앞이 훤하다.
南畝黃雲知歲熟(남무황운지세숙) : 남쪽 밭에 노란 구름처럼 곡식이 익었고
西山爽氣覺朝來(서산상기각조래) : 서산의 시원한 기운 아침에 몰려온다
風流太守二千石(풍류태수이천석) : 풍류 즐기는 태수는 이천석의 허비하고
邂逅故人三百杯(해후고인삼백배) :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술 삼백 잔은 마신다네
直欲夜深吹玉笛(직욕야심취옥적) : 밤이 깊어 옥피리 불며
高攀明月共徘徊(고반명월공배회) : 높고 밝은 달과 함께 배회하고 싶어라
이 시를 읽고 나니 조양각의 주변 경치는 600년이 지났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지금과 흡사하다.
조양이란 뜻은 '시경'이란 책의 '권아' 편에 있는
“ 봉황새는 높은 언덕에서 울고 오동은 ‘조양’에서 자란다.”라는 싯구에서 따온 말이다.
이것은 영천의 지형이 풍수지정적학적으로 봉황새의 형국으로 인식한 발상의 이름이다. 봉황새는 오동나무에서만 앉는 새라고 알려져 있다. 오동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조양(朝陽)이 필요하다. 봉황새가 오직 조양의 오동나무에만 사는 이상적인 장소가 결국은 조양각(서세루)가 되는 것이다. 서세루란 조양각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옛 사람들은 누각의 이름을 하나 만드는데도 이렇듯 정성을 다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지었다.
금호강에서 바라본 조양각(서세루)
물론 남쪽 강 건너 마을의 밭은 없어지고 아파트와 건물로 덮여 있지만 여전히 강물을 영천시내를 적시면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포은 정몽주 노계 박인로(朴仁老), 율곡 이이(李珥), 서거정(徐居正), 김종직(金宗直)등의 시가 목판에 새겨져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다.이렇듯 영천시의 상징적인 정자인 조양각은 역사성과 문학성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조양각은 지금도 여전히 금호강이 흐르는 절벽에 앉아서 영천시내를 바라보고 있다.
조선시대 시인 '서거정'은 조양각에 올라 이수와 삼산으로 둘러싸인 영천의 자연을
찬미하였다.
이수는 남천과 북천을 삼산은 작산, 마현산, 유봉산을 칭한다. 아름다운 고장 영천은 포은 정몽주 뿐만 아니라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고려 때 화약제조 기술을 고안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최무선의 고향도 영천이다. 호국의 의지가 가장 강한 곳 중의 한곳인 영천은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활약이 어느곳 보다 강한 곳이었다. .왜군에게 점령당했던 영천성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들의 힘으로 탈환하기도 했다.
이런 나라 사랑의 뿌리는 포은 정몽주와 최무선의 영향이 있었을 터이다.
어린 시절 정몽주의 어머님인 영천이씨는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올세라.
청강(淸江)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러일까 하노라.
라는 '백로가'를 지어 정몽주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태조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하여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긔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하여가'라는 시조를 지어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려 하였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이 시조에 답례 시조인 '단심가'는 정몽주의 죽음과 함께 오늘까지 지조의 상징이 되고 있다. 포은집에 한문으로 되어 있는 것을 한글로 번역된 청구영언(靑丘永言)에 게재된 글을 읽으면 그의 지조가 알만하다.
이 몸이 죽어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포은집의 초간본은 1439(세종 21년) 그의 아들 정종성에 의해 7권의 목판본으로 간행된다.
이 초간본에는 당시 여러 사람이 소장했던 작품들과 제자들이 기록 등을 수집하고 편찬하였는데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쓴 한시13편도 수록되어 있다. 이후 포은집은 조선 후기까지 여러번 간행되면서 포은의 위대한 삶을 선양하게 된다.
임고서원 전시각 내부
이런 간행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포은의 단심가와 이방원의 ‘하여가’를 한역한 것이 게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를 지은 당시의 사회상황과 현실에 충실하고자 문장도 중국의 한시작법에서 우리의 고유어인 이두를 섞어 표기하였다. 결과 일반 백성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14년에 '신편포은선생집'이 박남철, 박이양 등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이때는 이미 일제강점기라는 점이 특징이다. 일제에 아부하고 친일하던 자들에게 포은의 시, '단심가'는 그들을 부끄럽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 포은의 단심가가 게재되어 있는 것을 알았더라면 총독부에서 그냥 두지는 않았으리라.
종장에서 포은은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라고 충성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시대적인 변혁이 무르익고 서산에 해가지듯 고려는 스러져갔다. 그러나 정몽주 선생은 마지막까지 고려의 사직을 지키려고 했다. 죽는날까지 지조를 지키려는 절규였던 ‘단심가’란 시조는 오늘날까지도 감동을 주고 있다. 두 왕조를 결코 섬기지 않겠다는 정몽주 선생의 일관된 신념은 결국 조선왕조 오백년에도 사표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다.
우항리의 유허비를 보호하는 포은 선생 비각 현판
정몽주는 위대한 시조 시인이다. 단심가(丹心歌)는 오늘날까지 읽혀지고 있다.
정몽주의 '단심가' 시조가 600년 이상 충성과 지조를 나타내는 상징이었지만, 문인으로서
정몽주의 위상은 초라하다. 생애에 관해서도 알려진 내용이 미흡하다.
일반인들은 개성의 선죽교는 잘 알고 있지만 고향 영천과 임고서원, 조양각은 잘 모르고 있다.
정몽주의 고향은 경북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며 호가 포은(圃隱)이다. 어린 시절에 이름이 몽란(夢蘭)이었다.
정몽주의 어머니는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떨어뜨리는 꿈을 꾼 후 그를 낳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이름이 ‘몽란(夢蘭)’이었던 이유다. 시호가 문충(文忠), 곧 글과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니 그가 살았던 삶 그대로다.
고려 공민왕 때인 1357년에 ‘감시’라는 시험에 합격하고 1360년에 문과에 장원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후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워 1364년 ‘전보도감판관’이 되었다. 문인으로 전쟁터에 나가서 치열한 싸움을 하였다는 것이 특이하다.
성균사예, 예조정랑, 성균박사, 성균사성을 역임하다가 1372년 서장관의 직책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고려 우왕때인 1376년 이인임 등이 주장하던 배명친원(排明親元)의 당시 외교지침을 반대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언양으로 유배된다.
약 1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풀려난다. 이후 일본 규수(九州)로 건너가 왜구에 의해 잡혀갔던 수백명의 고려인을 귀국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임고서원에 있는 단심가, 백로가 시비
이성계와 첫 인연은 1380년 그가 ‘조전원수’가 되어 이성계의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면서 부터다.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한 것은 1383년, 그가 ‘동북면조전원수’로 있을 때다. 이듬해 ‘정당문학’이란 직책으로 명나라로 가는 성절사로 임명된다. 상호 불편한 관계에 있던 고려와 명나라간 대명국교를 회복하도록 기틀을 마련하고 돌아온다.
2년 후인 1386년 명나라를 방문하여 고려와 명나라의 우호증진을 다지고 돌아온다. 정몽주는 '예문관대제학'과 '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더불어 공양왕을 옹립하지만 생각보다 이성계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낀다. 이때부터 정몽주는 이성계를 제거할 결심을 굳힌다. 기회가 왔다. 황해도 황주에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왕 세자가 돌아오는 것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드러눕게 된다.이때 이성계와 그 수족들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지만 정몽주는 끝내 이 기회를 잡지 못했다.
1392년 4월4일 죽음을 예감한 선생은 막역한 친구인 성여완의 집에서 술을 많이 마신다. 이 집은 선지교 근처에 있었는데 말을 거꾸로 타면서
“ 이 몸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라 맑은 정신에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나를 죽일 흉한이 앞으로 달려들 것이기에 그것을 볼 수 없어 말을 돌려 타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선지교에 도착하자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의 쇠도리깨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당한다. 붉은 피가 낭자한 다리 근처에서 그 해 여름부터 대나무가 솟아났다.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를 목격한 사람들은 선지교란 다리 이름을 선죽교(善竹橋)로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다. 결국 포은 정몽주 선생이 이렇게 비극적으로 떠나고 1392년 7월 500년 이어온 고려 왕조는 그 막을 내린다.
정몽주는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의창(義倉)을 세웠으며 유학을 알리고 성리학의 전문가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바탕을 두고 당시의 윤리도덕의 정당화를 실현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도읍지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발전에 헌신한다..새로운 법을 개정하고 신율(新律)을 발행하여 나라의 법질서의 확립을 확립하고 스러져 가는 고려의 외교와 군사를 튼실하게 하려고 무진 노력을 다한 분이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운이 다한 고려는 결국 당시 막강한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이성계 일파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명을 공격하기 위해 떠나 이성계가 돌연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돌아 왔을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 선생의 마음을 떠보려고 읊은 '하여가'는 오늘날의 정치판을 보는 듯하다.
유허비에서 바라본 정몽주 고향 우향리 들판
이때의 정치적인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고려말의 역사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고려말은 원나라의 내정간섭과 귀족들의 부패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중국은 몽골족이 지배하는 원나라에 저항하는 한족의 반란이 일어났다. 홍건적의 난이다. 원나라는 이제 명나라에 자리를 내주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공민왕은 이런 중국의 혼란한 정치적인 혼란기를 이용하여 자주적인 왕권체계를 유지하게 하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와 친원 정책을 갈구하던 권문세족의 강한 저항에 개혁이 어렵게 된다. 이에 공민왕은 이들을 견제하고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정몽주, 정도전 조준과 같은 신진사대부를 등용한다. 또한 군사적인 적임자로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 무인세력에게도 세력을 준다.
정몽주 나이 37세 때 불행히도 이런 공민왕이 세상을 떠난다. 10세의 어린 나이로 ‘우왕’이 왕이 즉위한다. 다시 친원정책을 폈던 세력이 정권을 잡는다. 이것을 빌미로 명나라는 철령이북의 땅을 내놓으라며 고려에 압력을 가한다. 친원배명 정책을 퍼던 고려 조정은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요동정벌에 나선다. 신흥무인세력의 수장이 된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하여 압록강 ‘위하도’에서 회군하여 고려조정을 장악한다.
위하도 회군이후 신흥사대부는 둘로 나누어 대립하게 된다. 고려왕조체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 개혁을 주창하던 정몽주의 온건파와 급진적인 개혁과 왕조 교체를 정도전등 혁명파가 서로 대립한다. 결국 정몽주의 죽음은 혁명파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조선이 개국한 이후에는 그의 충절된 죽음을 선양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된다. 급진파가 정권을 잡게 되면 다시 보수화되기 때문이다. 충성을 강조하면서 효를 강조하기 위해 정몽주의 삶은 큰 표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몽주의 고향인 영천은 넓지만 사방이 산으로 막혀있는 분지다. 산의 가장 낮은 곳에 길을 낸 사람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고개를 만들었다. 사람들의 왕래는 오래전부터 높은 길을 만들었고 아직도 이때의 고개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시티재는 영천에서 포항과 안강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영천에서 대구로 가는 고개는 ‘땀고개’다. 의성과 군위 지역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갑티재’며, 노구재는 청송으로 난 고개다.
금호강에서 바라본 영천시
이런 고개를 통해서 영천은 외부와 연결되고 소통이 되었다. 특히 영천장은 유명했다.영천장은 경상북도 남단 상거래의 중심지였다. 영천에는 이런 속담이 전한다
."잘가는 말도 영천장, 못가는 말도 영천장" 이 말은
아무리 먼저 가도 결국은 영천장에서 만날 수 밖에 없다. 영천장은 당시에 상거래를 위해서는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경북 남동부에서 서쪽으로 흘러가는 금호강은 길이가 116km로 짧은 강이다. 자양천을 비롯한 여러 하천이 영천시에서 합류하여 대구지역과 달성군을 휘돌아 낙동강과 합류하는 금호강은 이름처럼 아름답다.
금호강변의 갈대들이 자신의 몸을 부대끼어 내는 소리가 마치 거문고 소리 같다고 하는 듯 여름이 오고
있는 강변은 푸른 갈대들이 무성하다.
갈대들이 거문고 소리를 내는 듯 조양각 옆에는 황성옛터의 작사자인 왕평 이응호 선생의 노래비가 나그네의 심기를 슬프게 만든다.
그는 영천읍 성내동에서 출생한 이곳의 토박이다.
이응호 선생은 영천시 성내동 56번지(현 석류원 한정식식당)에서 태어났다. 일제하 암울하던 시기에 우리 민족의 시련을 달래던 ‘황성옛터’와 첫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인 ‘항구의 일야’, 로 민족정서를 일깨워 주었다.
때는 1927년 여름 장마 때 이응호 선생은 황해도 지방에서 공연을 하다가 백천읍의 한 숙소에 갇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치지 않는 비는 상념에 사로잡힌 그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아득한 옛날 무너진 고려의 도읍지 개성의 만월대를 떠올리며 빼앗긴 조국의 산하를 생각했다. 마음은 몹시도 처량했다. 이런 마음을 담고 펜을 들어 순식간에 노랫말을 써 내려 갔다.
작사가 완성되자 바이올린 전공한 전수린에 의해 ‘황성옛터’는 작곡된다. 이 곡은 그해 가을 서울공연을 가지게 되었는데 서울 단성사에서 가수 이애리수 통해 발표 되었다. 관중들의 반응은 가히 열광적이었다.
왕평 이응호 선생을 기념하는 황성옛터비
이 노래를 듣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식민지 조선인의 민족정서를 자극하였다. 이로 인해 이응호 선생과 개성출신 작곡가 전수린은 일제 경찰에 잡혀가 많은 고초를 당한다. ‘황성옛터’ 노래는 일제에 의한 최초의 금지곡이 된다. 이 무렵 일제에 의한 우리 민중에 대한 탄압과 압제가 가중되었다.
소작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만주와 시베리아로 이주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선생은 이후에도 일제에 항거하는 의미로 민족성이 강한 노랫말을 담아 ‘대한팔경’과 ‘조선행진곡’같은 작사를 하지만 모두 금지곡이 된다. 1943년 평북 강계에서 ‘돌아온 아버지’란 연극공연을 하던 중 무대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니 그의 나이 39세였다.
다행히 그의 민족혼과 슬픈 영혼을 위로 하는 ‘황성옛터’의 노래비가 조양공원에 세워져 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스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서 잠 못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영천에는 1930년대를 불같이 살다가 홀연히 떠나간 여류 소설가 '백신애'의 고향이다.그녀는1908년 영천군 영천면 창구동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한문을 공부하다가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를 한다. '박계화'란 필명으로 192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나의어머니’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다.
그러나 워낙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나고 자유분방한 삶을 갈구하였기에 그는 여성운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그는 학교에서 권고 사직당한다. 특히 1934년 개벽지에 발표한 적빈(赤貧)은 당시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1939년 3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그녀는 22편의 소설과 기행문과 수필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녀의 문학작품은 일제하의 소작농과 노동자등 식민지 민중의 삶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왕성한 창작과 더불어 여성운동을 전개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한다. 이런 백신애의 문학성과 슬프고 애절한 삶을 영천시민들은 잊지 않았다.
최근 지방 문학 기념사업으로는 큰 활성화를 보이고 있는 ‘백신애기념사업회" 가 있다. 이 단체는 영천시 시민들로부터 성금 5천만원을 모아 최근에 ‘백신애문학비’를 세웠다. 자칫 일반인들에게 잊혀 질지도 모르는 여류 소설가를 당당하게 선양하는 영천시민들의 문학 사랑이 돋 보인다.
최무선의 고향이 영천인 것을 영천시민들은 자랑한다. 최무선은 1326년 금호읍 원기리에서 태어났다. 최무선은 어린 시절부터 왜구의 침략이 심한 것에 큰 상처를 받았다. 왜구를 공격하는 데는 화약이 절대 필요함을 인식한 최무선은 원나라 화약제조 기술자 ‘이원’의 도움을 받아 화약 제조에 성공한다.
당시 화약 제조는 중국에서만 가지고 있는 신기술이었다. 1370년 고려는 최무선의 노력으로 당시 세계 2번째로 화약 제조국이 된다. 최무선이 제조한 화약을 가지고 화포를 만들어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투는 금강 입구의 진포 전투였다. 이 싸움에서 왜구의 배 500여 척을 격파한다.
임고서원 500년 된 은행나무
조선 초기 학자 ‘권근’은 이 싸움의 의미를 “최공은 처음으로 화포를 만들었네‘라는 시(詩)로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님의 재략이 때맞추어 태어나니
30년 왜란이 하루만에 평정되도다
바람 실은 전선은 새들도 못 따라가고
화차는 우뢰소리를 올리며 진을 독촉하네.
주유가 갈대숲에 불 놓은 것이야 우스갯거리일 뿐이고
한신이 배다리를 만들어 건넜다는 이야기야 자랑거리나 될까 보냐
이제 공의 업적은 만세에 전해지고
능연각에 초상화 걸려 공경 가운데 으뜸일세.
공의 화약무기 제조는 하늘의 도움이니
한번 바다 싸움에 흉포한 무리 쓸어버리네
하늘에 뻗치던 도적의 기세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세상을 덮은 공과 이름은 해와 더불어 영원하리
억만 백성의 목숨이 다 소생하는 도다.
임고서원
정몽주의 위패를 봉안한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는 늙었지만 아름다운 은행나무 아래
‘임고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1553년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1603년에 다시 지었다.
이때 ‘임고서원’이란 임금이 내린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된다.
서원내에는 서재 함육재, 동재 수성재, 내삼문, 유정문, 강당인 흥문당, 정몽주신도비, 유물보호각, 삼진각, 문루인 영광루가 있다. 퇴계 선생이 쓴 임고서원의 상향축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학문은 천인에 이르고 충성은 달과 해 같으니 앞의 성현들을 빛내시고 후학의 길을
인도하신다. 이 일을 영원토록 그치지 않으리다.”
임고서원 낙성무력에 퇴계선생은 자신 명종대왕에게 하사 받은 성리군서(性理群書) 한 질을 임고서원에 기증한다. 임금에게 하사 받은 서책을 기증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다.
다음과 같은 퇴계가 한 이야기가 임고서원에 전해온다.
“ 혹자는 임금님이 주신 것은 남에게 준다고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서원을 위하여 장서를
받드는 것은 하나는 선현을 위함이다. 또 하나는 후학을 위함이니 어찌 남을 주었다고 하겠는가.”
임고서원이 위치한 산 기슭에는 정몽주 선생이 6년간 묘막을 짓고 살았던 자신의 부모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500살된 늙은 은행나무도 당시를 기억할 수는 없다. 고향마을에서 가까운 이곳은 아마도 정몽주 선생의 깊은 추억이 묻어 있는 곳이리라. 19세부터 21세까지, 다시 29세 때부터 31세까지 벼슬길을 접고 이곳에 와서 묘막을 짓고 생활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고향마을 임고면 우향리로 가는 길을 찾기는 쉽지 않다.
영천시청에서 포항방면으로 난 28번 국도인 조교삼거리에서 임고방면69번 지방도를 따라 간다.
4.5km 정도 가다보면 임고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 임고서원이 있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약400m 가면
'임고중학교'다.
임고중학교앞에서 우회전 한후 큰 시냇물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약 승용차로 5분쯤 달리면 그 마을이 '우향리'다.. 동네 입구에서 약 500m 가면 작은 비각이 보인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유허비'다.
정몽주의 고향을 지키는 유허비를 찾아 떠나며 정몽주 선생이 명나라 사신 길에 지은 시 ‘제성역야우(諸城驛夜雨)’를 읽는다.
今夜諸城驛 오늘밤 제성역에 머무르면서
胡爲思舊居 조용히 고향을 생각하노라
遠遊春盡後 멀리 타향에 살다가 봄이 다 지난 뒤에 와서
獨臥雨來初 홀로 누워 있노라니 밖에는 비 내리네
永野田宜稻 영천 앞들에는 벼농사 풍년 들고
烏川食有魚 오천 바닷가에 물고기 잡히는데
我能兼二者 내 어찌 이 둘을 다 가지고서도
但未賦歸歟 어찌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못 하는고
포은 정몽주 유허비
과수원 길을 지나 시멘트 포장의 일차선 도로를 따라 들판길로 접어 들면 작은 비각이 보인다. 이 비각 입구의 작은 마을이 우향리다. 이곳은 본래 정몽주 선생의 외갓집 마을이다. 그의 어머니 변한국부인 영천이씨는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결국 그는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선생이 9살 때 외가댁의 여종이 변방에 있는 남편에게 보낼 편지를 써준 글의 내용이 전해온다.
“ 雲聚散(운취산) 月盈虧(월영휴) 妾心不移(첨십불이)”
“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달은 찼다가 지더라도 첩의 마음은 변치 않겠습니다.”
편지 내용이 한자로 10자 밖에 되지 않자 여종은 어린 정몽주에게 몇 자 더 써 줄 것을 부탁한다.
“緘了 却開添一語(함료각개첨일어) 世問多病是想思(세간다병시상사)”
“이미 봉한 봉투를 다시 열고 한 말씀 더 씁니다. 세상에는 많은 병이 있다더니 이것이
상사병인가 봅니다.”
9살 짜리가 이런 표현을 쓸 줄 알았던 것으로 보아 포은 정몽주는 신동 이었음이 분명하다.
1346년 어느날 이곳 어딘가에서 정몽주가 이런 편지를 써 주던 광경을 상상해 보시라.
유허비 인근의 마을과 산과 들, 시냇물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문학기행은 이런 상상이 가능해야 제맛이 난다.
‘백로가’를 지어주며 정몽주의 인생길의 출발에 근신과 경계를 당부하던 그의 어머니의 고향마을을 걸어보라. 650년이 지났지만 오히려 당시보다 우향리는 작고 초라한지 모르겠다. 빈집에는 개짓는 소리만 요란하고 몇 몇 농부들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다. 찾아든 이방인에게 몇 번 고개를 돌릴 뿐 그들은 무심히 밭일을 하고 있다.
우향리 이곳이 정몽주 선생의 선생의 고향 마을이다. 정몽주 선생의 생가터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이 유허비가 세워진 근방일 것으로 추측한다. 아마도 근방에 있는 밭 가운데 한곳일지 모른다.
비각 안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유허비가 서 있다. ‘孝子里’ 라고 쓰여진 화강암은 얼핏 보아도 고색이다. 비석 우측에는 작은 글씨로 ‘공신 찬성사 대제학 정몽주 익양군 경오 봉충의군’ 이란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좌측에는 ‘홍무 기사 3월 영천태수 정유입비’라고 역시 한자로 새겨져 있다. 포은 선생은 19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지금의 임고서원 산위에 있는 부친의 산소에서 3년을 생활한다. 10년 후에 모친상을 당하여 다시 3년을 모친의 산소 옆에 묘막을 짓고 생활을 한다.
당시에는 불교의 관습으로 모두 100일이면 탈상을 했다. 조정에서 포은 선생의 이런 효의 행위를 높이 기리기 위해 당시 영천의 태수인 정유에게 명하여 이 유허비를 세우게 한 것이다. 조선이 건국하고 정몽주의 삶이 잊혀지던 1487년 경상감사 손순효가 이곳을 지나다 근방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비석을 꺼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결국 이 비석은 땅속에서 꺼내어 지고 비각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포은 정몽주 선생 유허비
영천댐을 지나 호수를 보며 산모퉁이를 돌고 돌다 보면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 78에 있는 ‘강호정’ 입구에 닿는다. 호수 정세아(1535~1612)의 학덕과 충의 정신을 흠모하며 지역의 뜻있는 선비들이 세운 정자이다. 강호정은 선조 32년(1599)에 자호천 언덕에 자호정사(紫湖精舍)를 건립한 것이 시초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험난했던 여생을 회고하면서 살기 위해 그가 직접 지은 집이었다.
세월이 지나자 ‘자호정사’는 무너지고 1790(정조)년에 후학들이 이 터에 누각을 지었다. 정자의 이름이 강호정(江湖亭)이 된다. 그러나 강호정은 영천댐 건설로 수몰지역이 되었다. 1973년 영천댐이 보이는 기룡산 기슭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세아의 손자인 정호신이 세운 삼휴정(三休亭)은 옛 선비의 삶의 여유를 느끼게 해준다. 정자 오회당(五懷堂), 사의당(四宜堂) 등도 모두 강호정 아래로 옮기었다.
강호정에 걸린 정세아 의병장의 시를 읽는다.
장렬한 뜻으로 적장의 목 벨 것을 기약하였더니(壯志期梟賊將頭)
쇠잔해진 몸 도리어 귀밑털 센 것에 놀라노라(殘骸驚却邊秋)
밧줄이 있으나 한나라 종군이 요청한 것처럼 뜻을 이루지 못하고(有纓未遂終軍請)
힘없는 사람이 공연히 당나라 늙은 두보처럼 시름을 품는다(無力空懷杜老愁)
노쇠하고 병든 몸이 어찌 벼슬길에 달려가리요(衰病豈宜馳世路)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며 맑게 흐르는 시냇물과 놀고 싶구나 (退閒端合玩淸流)
백구도 강호의 늙은이 싫어하지 않나니(白鷗不厭江湖)
이제는 반가이 백구와 죽는 날까지 즐기리라(靑眼從今至死休)
정세아의 호는 호수,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영일을 오천(烏川)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호정
정세아는 1558(명종13년) 24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지만 곧 벼슬길의 단념한다. 부모님을 봉양하고 경전과 역사서를 연구하며 시(詩)를 썼다. 용계서사(龍溪書舍)에서 인근의 아이들을 가르치며 인재 양성에 정성을 다한다.
1592년 4월13일 왜적은 동래와 울산, 경주를 4월23일 영천군을 함락한다. 당시 영천 군수 김윤국은 기룡산에 있는 묘각사로 도망가고 왜적은 영천을 파괴하고 북으로 향했다. 북으로 진격하던 왜군 들은 약 1000여명의 군사들을 영천성에 남겨두었다. 남아 있는 왜군들의 약탈과 살상은 영천을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글 읽던 선비 정세아는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떠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책을 덮고 장칼을 차고 집을 나서며 아들 의번에게 말한다.
" 왜놈에 의해 영천이 피바다가 되고 이제 임금이 피난을 가는데, 우리가 어찌 살기를 구하겠느냐. 이 나라를 구하지 못하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자신이 오랫동안 가르쳤던 제자들을 모두 모아 각 지방으로 격문을 돌린다.
정세아의 이 격문을 읽고 감격하여 일어난 의병들이 10일 동안 900여명이었다. 그는 이들의 손을 일일이 잡고 통곡하며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을 맹세하였다. 모인 의병들은 정세아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한다.
이를 도화선으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가 일어났고 권응수 장군 휘하의 의병들도 합세한다. 이들 의병대장들은 모두 영천 인근의 유력한 선비들이었다. 평소에는 시를 쓰고 글을 읽던 문인이었던 것이다.
학봉(鶴峯) 김성일이 조정에 올린 장계(狀啓)에는 영천의 진사 정세아 의병활동이 처음으로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정세아의 아들 정의번은 영천성을 탈환하며 경주성 싸움에서 전사한다.
용계서원
그의 시신을 끝내 찾지 못한 정세아는 아들의 시를 모아 시총(詩塚)으로 시신의 무덤을 대신한다. 정세아는 아들을 잃은 것은 조용히 침묵하면서 시신없는 무덤에서 아들이 쓴 시를 읽어야 했으리라. 자신을 분신처럼 따르던 하인 억수(億壽)도 아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니 참담한 심정이었다. 이런 삶의 슬픔이 그가 자양천 위에 자호정사를 짓고 만년을 살았던 이유가 되었으리라.
임란이후 조정에서 영천 대첩 포상을 하려하자. 정세아는 " 영천성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한 것은 모든 의병들의 단결에 의한 것이다. 내가 어찌 그 포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의 위급함에 따랐을 뿐이고 공명에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라고 하며 포상을 거절한다. 그리고 그 공로를 이름없는 영천의 의병에게 돌린다. 그는 임진왜란 때 불탄 임고서원을 복원하는데 큰 역할도 하였다. 이원익 대감이 정세아의 덕망이 높음을 알고 자호정사에 찾아와 그를 격려하였다. 정세아가 세상을 떠나자 영천의 선비 ‘장여헌’은 그를 위한 제문을 짓는다.
"정세아가 영천에 있을 땐 각박한 자는 부끄러움을 깨달았고 게으른 자는 마음을 일으킬 것을 생각하였다. 선을 행하는 자는 믿는 곳이 있어서 스스로 그치지 아니하였고, 악을 짓는 자는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서 감히 방자하지 못하였다" 정세아의 인품과 덕망의 넓고 깊음을 알수 있다.
임진왜란 때 참전한 영천의 시인이 있다. 노계 박인로다.
삼휴정
노계 박인로朴仁老1561~1642)은 영천 도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시에 많은 재능을 보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천의 의병장 정세아 의병장 밑에서 별시위가 되어 무공을 세운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왜군이 물러나자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의 고단했던 삶을 위로하는 가사인 태평사(太平詞)를 지었다.
도계서원
박인로 시인의 시조 조홍시가(早紅枾歌)를 읽으면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난다.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이 아니라도 품엄 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기리 업슬세 글로 셜워하나이다.
한음 이덕형이 경북 영천을 방문했을 때 노계 박인로에게 조홍시를 보내왔다.
이 감을 받아든 노계는 자신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지은 시조다.
이 시조를 다시 해석해 본다.
"쟁반속에 있는 일찍익은 감이 곱게 보이네
유자는 아니지만 옷소매에 넣고 가고 싶지만
이 감을 가져가도 반가워 할 분이 없어 서럽구나”
이 시조는 감을 선물로 받고 먼저 어머니를 생각하는
노계 박인로 시인의 효성 된 모습을 보여준다.
‘동기로 세 몸되어’라는 시조를 읽어본다.
동기로 세 몸 되어 한 몸같이 지내다가
두 아운 어디 가서 돌아올 줄 모르는고.
날마다 석양 문외에 한숨 겨워 하노라.
형제가 비록 세 사람의 몸이지만 한 몸처럼 가까이 지내다가
임진왜란 중에 소식을 알 수 없는 동생 둘을 생각하며 매일 문밖에
나가 한숨지면서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전쟁의 참담함과 이별의 서러움이 인간적인 표현으로 나타낸 시조에서 노계의
인간적인 삶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노계 박인로 묘소
고향 영천에 은둔해 살면서 많은 독서와 시작(詩作)에 혼신을 다하였다.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적인 시와 현실적인 삶의 애환을 담아 썼다. 박인로의 이런 시조들은 그를 조선의 위대한 시인이 되게 만들었다. 가사문학 발전에 큰 이정표를 남긴 그의 흔적이 머문 도계서원과 묘소를 거닐어 보시라.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영천성이 함락되자 정세아가 쓴 격문을 읽고 시인이기에 앞서 목숨을 걸고 싸움판으로 달려가던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저수지와 서원의 건물이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 내고 있는 도계서원에 가면 박인로 시인의 삶의 길을 알게 된다. 가까이에 있는 박인로 시인의 묘소는 잡풀이 무성하다. 그는 조선의 민중시인 답게 그렇게 작고 초라하게 숲속에서 잠자고 있다.
용산 마을에 있는 이맹전 선생 제단
영천댐을 지나 굽이 굽이 산길을 휘감아 한참을 들어가면 자양면의 소재지가 나오고 이내 용산마을에 닿는다. 이 마을은 유서깊은 동네다. 생육신중의 한 분인 이경은 선생의 부조묘와 제단,용계서원이 있는 마을답게 고색창연한 고가가 즐비하다.
이맹전 선생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왕권을 갈취하자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이후 27년간이나 귀머거리와 벙어리로 행세하며 충절을 지킨 생육신중의
한 명이다. 용산마을 입구에는 늙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며 방문객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생육신 이맹전 선생을 선양하는 용계서원이 있는 용산마을 입구 숲
현대는 변화의 시대다. 변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기에 모두들 생존을 위해서 변신하면서 살아간다.
생존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변화를 배신과 배은망덕, 권모술수까지 허락하는 행위는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세상은 계속해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충절과 의리를 지키라고 주문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래서 더욱 정몽주의 삶과 문학을 찾아 영천으로 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꼭 떠나야 하는곳인지 모른다.
영천에 가면 나라를 위해 헌신한 문인들과 가난한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분들의 고향을 찾아가서 정자에 있는 시문을 읽고, 옛 문헌의 뒤적여 보시라.
자신이 비록 지금은 가난하고 고독하다고 하더라도 많은 위안을 얻게 될 것이다. 옛 선비들은 자신들의 삶을 청빈하게 하기 초가집과 초라한 누각을 지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시를 쓰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런 장소에 앉아 보면 지금 내 삶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우리의 조상들은 당대를 치열하게 살면서 삶과 문학에 얼마나 열정을 보였는지 알게 되리라. 결코 현대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고난의 길에도 문학과 나라 사랑이 대단했음을 알게 된다. 이렇듯 조상들의 삶과 문학적인 궤적을 탐구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적인 안목과 미래가 보이게 될 것이다.
영천의 아름다운 산과 들을 쏘다니다보면 유독 누각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몽주 고향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동네마다 문학적인 토대를 이곳에서 토론하였기 때문이리라. 역사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는다.
포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영천이 낳은 다른 인물들의 삶과 문학적인 이야기들을 찾아낸 이번 문학기행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