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3.9(토) 모처럼 서울 시내를 찾아서 한양의 고궁을 돌면서 새싹이 움트기 전에 풍경도
볼만해서 창경궁, 창덕궁과 경복궁을 둘러보면서 문화탐방도 해보았습니다.
고궁을 답사할때 편안한 음악을 들어며 문화탐방과 서울 나드리를 출발~~~
혜화역에 하차후 대학로 거리엔 젊은이들과 맛집들이 많아서입맛을 듣구는 물만두를 한사라 하고서~~~
1) 창경궁 홍화문을 들어서면 명정전을 만나고~~~
창경궁을 찾아서 고궁을 둘러보고 아름다운 산책로도 거닐며 마음만은 이조의 왕이 된 기분으로 걸어보았습니다.
창경궁은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로도 불렸으며 종묘와도 연결돼 있다. 경복궁, 창덕궁의 남향 배치와 다른 동향 배치로 왕실의 별궁으로 쓰였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을 때에 창덕궁 옆인 이곳에 별궁을 지어 거처로 삼았고, 이름을 수강궁(壽康宮)이라 했다. 이것이 창경궁의 시작이었다. 이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 후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쫓겨났다.
춘당지를 한바퀴 돌면서 봄샘을 하는 연못의 맑은 물과 봄준비를 하는 풍경을 담아보고~~~
팔각칠층석탑과 주변의 풍경이 잘 조화롭게 자리하고~~~
기존의 석탑과는 양식을 달리하는 석탑으로서 지대석과 기단부가 매우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일제 강점 초기 1911년에 창경궁에 이왕가박물관을 건립할 때 만주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구입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현재 창경궁 내 식물원 앞 연못(춘당지) 가에 위치하고 있다. 1992년 1월 15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119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의 춘당지 자리에는 본래 연못이 아닌 권농장(勸農場)이라 불리는 농지가 있었는데, 권농장은 궁궐 내의 작은 농장으로, 농본주의 국가였던 조선에서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소춘당지
창경궁 뒷산인 북악산에서 흘러 내린 물이 모여 생긴 연못으로 작은 연못을 소춘당지, 큰 연못을 대춘당지라 하며 조선시대에는 소춘당지만 있었다.
대춘당지 자리는 왕과 왕비가 농사와 양잠을 체험하던 곳이었으나 일제가 1909년 창경궁 안에 동물원을 조성하면서 만든 일본식 정원의 인공연못이다.
춘당지를 한바퀴 돌다 보면 무성한 숲길에 운치 있는 산책로를 걸으면 힐링이 되지요.
저 멀리 남산 타워도 보이고 아래엔 창경궁 건물들이 있어 돌아서 둘러봅시다.
성종 15년(1484)에 할머니 자성대왕대비 윤씨, 어머니 인수왕대비 한 씨, 숙모[4] 인혜왕대비 한 씨를 모시기 위해 궁의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고 궁을 크게 증축 확장했다. 성종 때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녕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仁陽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 등이 건립되었으며 궁의 둘레는 4325척이었다.
창경궁 명정전 서북쪽에 있는 정자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경서를 읽거나, 국상 때에 향을 올리는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전각의 명칭인 함인(涵: 젖을 함, 仁: 어질 인)은 '인(仁)에 젖는다.'라는.' 뜻이다.
가운데 칸의 도리 사방에는 사계절을 노래하는 시, 《사시(四時)》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각 계절이 상징하는 방위에 맞춰서 봄 시는 동쪽, 여름시는 남쪽, 가을 시는 서쪽, 겨울 시는 북쪽에 두었다.
문정전 앞 뜰에서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스토리가 있지요.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처분은 가혹하였다. 3~4시 무렵 밧소주방의 뒤주가 들어왔는데 크기가 작아서 쓸 수가 없자. 다시 어영청에서 쓰는 큰 뒤주를 들여왔고 영조는 여기에 들어갈 것을 명하였다고 한다.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히게 되었고, 영조가 직접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8일 만에 28세라는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아들이지만 수명이 왕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었던 조선왕조에서 최장수 왕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최대의 정적이기도 했다. 영조의 장수는 사도세자의 제거로 이어졌고, 영조는 세자가 제거된 후에는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부여하면서 미안한 감정을 표시했다.
명정전을 둘러보고~~~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 이용하였다. 조선 1484년(성종 1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일월오봉도
[ 日月五峯圖 ]
요약 다섯 개의 산봉우리, 해와 달을 그린 그림이다. 통치자가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한다. 주로 병풍으로 꾸며져 조선 왕실의 어좌(御座) 뒤편에 배설되었다.
2) 창덕궁 정문 돈화문을 뒤로하고~~~
창덕궁(昌德宮)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조선 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창덕궁 낙선재
낙선재는 왕이 책을 읽고 쉬는 공간, 즉 서재 겸 사랑채로 조성되었다. 국상을 당한 왕후들이 소복을 입고 은거하는 공간이었다고도 전해진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되었고,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 순종이 머문 곳이기도 하다. 1963~1970년 영친왕 이은, 1966~1989년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가 기거한 곳으로, 두 사람은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한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는 1926년 순종이 영면한 후 석복헌에서 생활하였고 1966년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마지막으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는 1968~1989년 수강재에서 기거하다 죽음을 맞았다.
궁궐의 으뜸 건물인 인정전,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 임금을 보좌하는 여러 관청인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자리 잡고 있고, 뒷부분에는 임금과 왕실의 사적인 공간인 임금과 왕비의 처소가 있다
창덕궁을 뒤로하고 북촌마을로~~~
3) 북촌한옥마을은 종로구 가회동, 계동, 화동 등 일부 법정동을 북촌거리는 한국의 전통생활상을 체험하는 곳이라
외국인관광객들에 아주 인기 있는 곳이라~~~
북촌한옥마을은 서울 북쪽에 위치한 한옥동네라는 뜻으로 조선왕조 때부터 왕족, 양반, 관료 출신들이 살았던 고급 가옥이 대부분이라 하여서 일각에서는 '양반촌', '양반 동네'라고도 불렸다.
북촌골목엔 온통 외국인들은 한복체험을 하며 추억도 담고 가장 붐비는 관광지로 유명하지요,
한옥과 주변 경관을 개선해 2009년 유네스코 아태문화유산상 우수상을 받았다.
4) 청와대 옆 총리공관을 지나서 청와대 거리로~~`
참성동 먹자 거리를 지나서~~~
청와대에도 제법 관람객들이 많이 찾고 있네요.
청와대정문으로 관람차 신고 및 줄 서서 관람을~~~
5) 경복궁의 정문은 광화문이지만 오늘은 북쪽문으로 경복궁을 들어서면서~~~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뒤 고종이 흥선대원군 몰래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이다. 실제로 1873년부터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건청궁 건설은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행보라는 해석이 있다
장안당은 고종이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사랑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곤녕합은 역사는 장안당과 같다. 명성황후 민 씨가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안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에게 명성 황후 민 씨가 시해된 장소이며, 시신은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했다가 곧 건청궁 뒤쪽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이곳 역시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향원정은 고종이 휴식을 취했던 공간으로 경복궁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대표 건물이다. 심미성과 비례감이 뛰어나며 주변의 풍경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3월 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경복궁 뒤뜰에도 봄이 오는지 노란 산수유 꽃망울이 터지고 있고~~~
경복궁의 경회루는 언제 오나 여유로운 마음을 갖게하는 천하의 안식처이라~~~
태종은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경회루’라는 글씨를 쓰게 하여 그것을 편액으로 삼았다. 경회루는 외국 사신을 접견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만난다는 뜻에 맞게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연회를 베푸는 공간으로도 자주 활용되었다. 그리고 때로는 이곳에서 기우제가 행해졌고, 무과 시험이 치러지기도 하였다.
경회루는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겨준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완전히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1455년(단종 3) 윤 6월, 단종을 압박하여 상왕으로 밀어내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연산군에게 있어 경회루는 쾌락의 공간이었다. 연산군은 경회루의 연못 위에 채붕(彩棚: 채색 누각) 세 개를 만들어 놓고, 첫째 것은 만세(萬歲)라 하고 둘째 것은 영춘(迎春)이라 하고 셋째 것은 진방(鎭邦)이라 하였다
6) 남산공원으로 이동차 경복궁을 나와서 전철역으로~~~
경복궁역 주변에 한복체험대여소엔 많은 외국관광객들이 분주하고~~~
경복궁을 나와서 남산타워로 갈려고 케이블카탑승장 근처 원조돈가스 맛집에서 영양보충 후
오늘은 너무나 많은 탐방을 해서 남산산책은 다음으로 돌리고 발길을 다시 집으로~~~
오늘도 즐겁고 유익한 문화탐방도 하면서 한양 시내나드리를 가져보았습니다.
첫댓글 멋진 삶에 핫팅~~!!!
방가방가~~~
감사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