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꿀뚝
아버지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남에게는 후한 사람이었다. 집 짓는 일을 해주고도 품삯을 제대로 받아 온 적이 드물었다. 어머니가 동생을 업고 품삯을 받으러 간 적이 많았다 구례에서 다친 허리는 평생 아버지 발목을 잡았다. 방구들과 미장 기술은 있었지만 사실 중반을 지난 후 허리가 아파서 거의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화투는 즐겼다. 어린 마음에 "아빠는 허리 아프다면서 종일 어떻게 화투를 쳐요?"라고 물었다. ''화투 칠 때는 허리 하나도 안 아프재, 어린 것이 싹수없이 그런 걸 왜 물어!" 퉁명스러운 대답만 돌아왔다.
어떤 날은 아버지가 저녁이 다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어머니가 모시러 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오지않고 어머니만 돌아왔다. 할 수 없이 먼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저녁상을 물릴 즈음 밖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방문을 열었다. 마루에 있던 사기요강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네깟 게 뭔데 사람 많은 데 와서 오라 가라 하느냐?" 라며 어머니를 항해 욕하고 행패를 부렸다. 시간은 젖은 아까시나무처럼 타고, 아버지는 힘든 삶을 연기 속으로 내 보냈다.
아버지의 속을 모르는 철없던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학교에서 붓을 사야 했다. 나는 떼를 쓰다시피 졸랐다. 아버지는 "그렇게 학교 가기가 싫냐"며 오늘은 돈이 없으니 그냥 가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돌담에 서 있었다. 당신 성질을 못 이긴 아버지는 허리에 매고 있는 책보를 강제로 끌러갔다. "너 그렇게 학교 가기 싫으면 가지마!" 소리치며 책보를 통째로 아궁이에 밀어 넣었다. "아녀요. 아버지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나는 울면서 아궁이에서 타고 있는 책을 꺼내 발로 밟아 불을 끄고 재를 털어냈다. 다행히 절반은 타지 않았다. 그날 등굣길 아침, 굴뚝은 나무 대신 타다 만 검정 책 보따리를 토해냈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가 더 원망스러웠다. 내 아버지가 맞을까! 평소에 말이 없던 아버지, 어떻게 책을 아궁이에 넣을 수가 있더란 말인가. 어린 마음에 이해되지 않았다. 그후로 아버지가 내 가슴에서 멀어졌다. 나는 학교에서 필요한 준비물이 있어도 밀하지 않았다. 육성회비도 줄 때까지 내지 못했다.
사춘기가 지나 결혼하고 아버지와의 관계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다. 명절이나 생신 때 본 아버지의 일과는 티브이 볼륨을 크게 틀고 은종일 사극 재방송을 보는 것이었다. 그 옆 '장미' 담배는 아버지 하루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창문을 닫아 놓아서 앉은자리에서 피워대는 담배 연기의 굴뚝 역할은 고스란히 벽지 몫이었다. 남은 연기는 당신의 페 속으로 스며 들었다. 자식의 책을 아궁이로 밀어 넣었던 기운은 어디로 갔을까. 세월 앞에 장사 없듯 팔순 중반을 넘긴 아버지는 까칠한 성격이 둥글어지며 소탈해졌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좀 더 가까워질 무렵 "아빠 그때 왜, 내 책보를 아궁이에 넣었어요?" 라고 농담조로 물어봤다.
그 시절 참 암담했지, 집에 돈은 없재, 자석들은 눈 뜨면 돈 .달라고 보채재, 얼마나 속상했는지 아냐?" 아픈 대답이 돌아왔다.
아버지와 성격이 다른 큰아버지는 목기사업을 했다. 노는 동생에계 목기 일이라도 하라고 권유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기에 옻칠하는 일을 했다. 그것도 잠시, 큰아버지의 목기사업이 어려워지자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 집 전 재산이었던 논을 팔아줬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나에게 하소연해서 알게 되었다. '아버지, 빌려 간 돈을 달라고 하시지 왜 아무런 말도 못 하셨어요?" 네 큰엄마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돈 달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제' 그런 마음의 상처가 있을 줄 몰랐다. 그동안 아버지의 집안에 대한 무관심이 비겁하고 나약한 현실회피라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아버지가 안쓰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