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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실~~카페지기 스크랩 동학혁명
대풍선생 추천 0 조회 20 09.01.24 08: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전봉준 동상 /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조선 후기 세도정치 아래서 사회가 동요되고 민심이 불안해 가고 있을 때, 1860년 농촌에서는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였다. 동학사상은 이미 서민에 대한 지도력을 상실하고 있던 성리학과 불교를 배척하는 동시에 천주교도 배척하였다. 동학은 그 후 최시형()에 의해 교리가 정리되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로 전해졌고, 포() ·접() 등의 교단조직이 강화되면서 삼남을 중심으로 교세가 급격히 확장되었다.

동학의 교세가 확대되자, 많은 동학교도들은 억울하게 처형된 교조()에 대한 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추구하여 전라도의 삼례, 충청도의 보은에서 집단적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점차 그 양상이 종교운동에서 사회운동으로 전화되어 갔다. 동학운동은 1894년 전라도 고부민란을 계기로, 안으로는 유교적 전통사회를 부정하고 개혁정치를 요구하였으며, 밖으로는 외국의 침략을 배격하며 반봉건 ·반민족운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한때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 집강소()를 설치하여 치안과 행정을 바로잡고 각종 개혁안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개입으로 동학의 교세는 크게 꺾여 손병희()에 의해 명맥만 유지되다가, 1905년 동학교도인 이용구()가 일진회()를 조직하여 매국활동에 앞장서자, 손병희는 이용구와 손을 끊고 천도교()를 일으켜, 이로부터 동학은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정통성을 유지하였다.

 

동학혁명의 배경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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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의 배경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난 동학 혁명, 그 진원지는 고부이다. 고부는 본래 호남 곡창지대의 노른자위로서 치부의 근거지였다. 당시 이 곳에 부임하기 위해 온갖 뇌물상납과 비리의 흥정이 오가던 차에 척족 세도정치의 모델인물인, ‘조대비의 근친’이며 좌의정이었던 조병세, 전라관찰사 조병호와 동족의 항렬인 [조병갑](趙秉甲)이 임진(壬辰, 1892)년 1월 고부군수로 부임하였다. 조병갑은 악리의 표본이었다. 수탈이 유행병처럼 자행되던 당시 이듬해(1893) 11월에는 고부, 진주, 익산 등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원래 동진강이 흐르는 이평면의 배들평야에는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어떠한 가뭄에도 걱정이 없이 대풍이 들어 보(洑) 이름을 만석보라 하였다. 그런데 조병갑은

① 하류에 필요없는 둑을 쌓게 하여 다음해에 700석이라는 수세를 거두어 착복했다.
② 또 고부의 유지들에게는 불효, 간통, 도박, 형제불화 등의 온갖 트집을 잡아 가두고 형을 가한 뒤 2만 냥을 착복했다.
③ 그리고 익산군수로 있었던 자기 부친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송덕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천 냥을 강제 징수하였다. 이러한 토색과 협잡질에 마지막 불을 당긴 것은 조병갑과 친척인 전운사(轉運使) 조필영이다.
④ 세미(稅米)를 서울로 운반하는 도중 날씨가 건조하고 쥐가 먹는다는 구실을 붙여 정량보다 한 가마니당 셋 내지 다섯 되를 추가 징수하여 군민의 원성을 더욱 높여만 갔다.
⑤ 게다가 인간성도 아주 잔학하여 수염을 뽑거나 상투를 매다는 악형을 가하며 농민들을 수탈했다.

이렇게 갖은 토색과 협잡질을 일삼으며 무명잡세와 온갖 죄목으로 백성들을 옭아넣고 있던 조병갑은 계사(癸巳, 1893)년 11월 30일자로 익산군수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전라감사 김문현을 설득시켜 유임운동을 벌이며 계속적인 수탈을 자행했다. ⑥ 이 해 11월,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두 명의 친구와 함께 민폐와 탐학에 시달리며 극도로 분격한 고부 16개 면의 대표자로 나서서 조병갑에게 하소연했으나 오히려 몰매만 맞아 그 여독으로 죽고, 부친의 한을 품은 전봉준이 수십 명의 백성들과 함께 조병갑에게 찾아갔으나 역시 늘씬하게 볼기만 맞고 쫓겨왔다.

 

--------사발통문(沙鉢通文)

전봉준을 비롯한 20명은 신종리 대뫼부락 송두호의 집에 모여 ‘고부성을 격파하여 조병갑을 죽이고 탐관오리를 숙청한 다음 전주를 점령한 뒤 서울로 진격하자.’는 내용의 사발통문에 서명하였다. 전봉준은 영향력 있는 동지를 구하기 위해 11월 밤 정읍 과교리에 사는 친구 손화중(孫華仲)을 찾았으나 교주 최시형의 비폭력주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래서 12월에 다시 60여 명이 2차로 모여 조병갑을 찾아가 진정했으나 역시 죽도록 매질만 당하고 돌아왔다.

 

(1) 1차 혁명 거사일 1894.1.9.새벽

 

1차 집결지 : 이평면 말목장터

그럴 즈음에 조병갑의 유임운동이 성공하여 다시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군민들은 사무친 원한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첫 거사일을 조병갑의 부임일인 갑오년 1월 9일로 잡아 이평면의 말목장터에 천여 명이 모였다.

 

2차 집결지 : 부안군 백산면

그들이 고부군청을 습격하여 아수라장이 된 사이에 조병갑은 담을 넘어 전주로 도망쳐 버렸다. 전봉준은 옥에 갇힌 억울한 장두(狀頭)들과 불쌍한 백성들을 풀어 주고 부안군 백산면으로 진격하여 일찍이 조병갑이 수탈했던 4천 석의 쌀을 모두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이 곳 백산에 총사령부를 두고 그 이름을 “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將所)”라 불렀다.

고부에서 쫓겨난 조병갑의 후임으로 박원명이 새로 부임하여 진심으로 선치를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은 어느 정도 원성이 풀려 백산에 모였던 군민들이 모두 해산 귀가하였다.

 

--------동학혁명에 대한 정부의 1차 대응

전주로 도망했던 조병갑의 충동질로 정부에서는 민심수습과 고부민란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그는 난리가 끝난 지 한 달이나 뒤인 2월 15일 8백 명의 역졸을 거느리고 고부에 나타나서 동학교도 대검거령을 내렸다. 고부 전역에 역졸들을 풀어놓아 마을에 돌아다니며 부녀자를 강간하고 재산을 강탈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때리고 조기꿰미 엮듯이 포승줄로 묶어들이므로 전 군민의 통분이 뼈에 사무쳐 민심은 순식간에 다시 흉흉해지고 장차 큰 난리가 터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전라감사의 군사마 최영년은 이렇게 통탄하였다. “슬프도다! 호남의 난은 조필영으로 시작되어 조병갑을 거쳐 마지막에 이용태가 저질러 놓은 것은 만고불역의 정론일 것이로다.”

 

(2) 동학혁명 2차 3월(1894년) 기포와 그 운명

민심의 원한의 마디가 너무 굵어져서 이미 대세가 어긋나 있음을 통감한 전봉준은 손화중과 김개남을 설득하여 갑오년 3월 21일 백산에 총사령부를 두고 일어나 천하를 호령하니 각지에서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

전봉준은 동도대장(東徒大將)의 칭호를 받고, 손화중 김개남이 총관령, 김덕명 오시영이 총참모, 최경선이 영솔장, 송희옥 정백현이 비서가 되었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은 동학의 구거두이다.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은 온건파인 북접의 지도자 최시형과 강경파 김개남 사이의 중도파였다.

전봉준은 부친의 복상중이라 백의를 입고 머리에는 백립을 썼으며 105염주를 들고, 포사들에게는 동심의맹(同心義盟)을 쓴 횡대를 매게 하고 ‘5만 년 수운(受運)’이라는 큰 기를 세워 따르게 했다. 맨 앞에는 흰 깃발에 동도대장이라 쓴 대장기와 ‘보국안민(輔國安民)’ 등을 쓴 깃발을 펄럭이며 대죽창을 흔들며 백산을 향해 행군하니 인산인해의 물결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백산에서 기병한 이들이 모두 일어서면 흰 옷 입은 사람의 물결만 보이고, 앉으면 죽창만이 보이므로 “일어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옛 비결이 맞았다고 하였다.

동도대장 전봉준은 무장(武裝)에서 4천 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고부로 가서 대폭 강화하여 관군을 격파한 다음, 만석보를 헐어 버리고 황토재로 진군하여 4월 7일 새벽에 관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黃土峴은 해발 35.5m의 나즈막한 황토언덕으로 말목장터와 고부 사이에 위치)

 

--------정부의 2차 대응

정부에서는 이용태를 파면하고 홍계훈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여 전주성으로 보냈다. 경군(京軍)은 야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청국 함선 평원호로 인천을 떠나 군산항에 도착하여 황토현 접전이 있던 4월 7일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머리에 백의민족의 백두(白頭)를 상징하는 흰 띠를 두른 동학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전주성으로 향하지 않고 방향을 돌려 남진(南進)하였다. 남진 이유는 황토현 전투의 여독을 풀고, 남도의 동학세력과 합세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관군을 남쪽으로 유인해 내기 위함이었다.

 

--------무장에서 창의문 발표(4월 18일)

4월 7일 정읍의 현아를 습격한 동학군은 흥덕을 거쳐 4월 9일에 고창읍 무장현으로 진입하였다. 무장 신촌리의 여시매봉에서 창의문(倡義文)을 전봉준이 직접 발표하고 계속 영광, 함평, 무안으로 진군하였다. 무장은 정읍의 손화중 포의 근거지로서 금구, 원평의 김덕명 포와 함께 전라도에서 동학의 세력이 가장 컸던 곳이다. 동학군이 무장에 진주했을 때 무려 1만 명을 헤아리는 대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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