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4. 17. | 즐거운 교환④:세상염려를 신령한 염려로 |
마태복음6:24-34 |
옛날 어떤 임금이 사가들에게 인간의 역사가 무엇인지 기록해 보라고 했더니 10권의 두꺼운 책으로 만들어 오더랍니다. 너무 길다 줄여보라고 했더니 1권의 책으로. 다시 줄이고 줄여 한 자로 요약을 해보니 괴로울 고(苦)자가 되더랍니다. 인생이 산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요 염려지요. 오늘은 즐거운 교환 그 네 번째 주제 「세상의 염려를 신령한 염려로」입니다. 저희 할머니는 4남매를 두셨습니다. 그중 저희 아버님은 막내 아드님이 되십니다. 할머님의 4남매 자녀 중 막내아들되는 저희 아버님께서 제일 먼저 별세하셨습니다. 그때 제 나이 여덟 살 - 초등학교 1학년 마칠무렵이었습니다. 제 동생은 네 살 쯤 되었나 봅니다. 저희 할머니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어린 두 손자가 안쓰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래 늘상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우리 영모 중학교 가는 걸 보고 내가 죽어야 하는데, 중학교 가는 걸 봐야 하는데...”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할머니가 저 중학교 가는 걸 보셨을까요? 못 보셨을까요? 물론 보셨지요. 그 다음엔 “우리 영모 고등학교 가는 걸 보고 내가 죽어야 하는데”하셨습니다. 물론 고등학교 가는 것도 보셨습니다. 이번엔 “대학교라도 보내고 죽어야 하는데”하셨습니다. 그러시던 할머님은 제가 대학교 4학년때 “우리 영모 장가가는 걸 못보고 죽는구나”하시며 눈을 감으셨습니다. 물론 많은 손자들 가운데 특별히 저를 사랑해 주신 할머님의 사랑이 고맙기도 하고 그분의 저를 향한 애정 어린 걱정이 이해도 됩니다. 그러나 그분은 어린 손자 류영모가 이 세상에서 과연 잘 자라 줄까하는 염려 하나로 평생을 보내신 것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그분의 손자 류영모는 중학교 고등학교 잘 갔고 물론 그 이후 장가도 갔고 그 아들 딸이 벌써 시집 장가 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염려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염려함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해결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는 여러분의 염려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자랍니다. 여러분의 사업은 염려로 유지되고 번성하는 법이 없습니다. 믿음이 승리합니다.
인생을 갉아먹는 두 개의 적이 있는데 하나는 어제에 대한 후회요 다른 하나는 내일에 대한 염려입니다. 기억하십시요. 염려한다고 과거가 바꾸어지거나 현재가 새로워지거나 미래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Edward Podolsky가 쓴 책 “염려를 멈추어라” (Stop worrying and Get well)에 의하면 염려는 우리몸의 유익한 인자들을 죽이고 독성 인자들을 높여서 정신질환 고혈압, 천식, 류마치스, 감기, 갑상선, 관절염, 편두통, 시력장애, 심장병, 위장병 등의 원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염려는 암세포를 죽이는 항암인자와 킬러 세포를 죽여서 각종 암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숨쉬고 살아가는 인간이 염려하지 않고 살수가 있을까요? 그럼요. 염려하지 않고 살수가 있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은 염려하지 않고도 살수가 있습니다.
오늘 짧은 본문 말씀 속에서 “염려”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나 반복되고 있으며 “염려하지 말라”는 동사가 3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무려 550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아시지요. 이스라엘의 모든 장수들이 골리앗의 덩치에 주눅이 들어 벌벌 떨고 있을 때 소년 다윗은 오히려 덩치가 커서 쉽게 맞출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똑같은 환경, 똑같은 사정을 바라보고 한쪽은 “쳐부수기엔 너무 큰 존재”라고 했고 다른 한쪽은 “커서 맞히기 좋은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시간도 여러분은 벌벌 떨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살수도 있고 골리앗을 물리치고 백성의 영웅이 된 다윗처럼 살수도 있습니다. II. 염려의 특징 여러분, 백해무익이란 말을 아십니까? 백가지 해가 될지언정 유익이라곤 전혀 없는 일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염려”라고 하는 것입니다. 1. 불필요 “불필요” 이것은 염려가 지닌 첫 번째 특징입니다. 전혀 필요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많은 사람들이 염려의 노예가 되어 기쁨은 잃어버리고 무력증에 빠져 헤매고 있습니다. 염려로 역사나 상황을 바꾼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얼마전 양복을 한 벌 맞춘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제 몸이 거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헐렁한 옷을 좋아하는데 이번에 맞춘 옷이 제 맘에 꼭 맞아 기분좋게 착복을 했습니다. 거기다 교우 중 한 분이 넥타이를 하나 선물로 사왔는데 새로 맞춘 양복과 잘 조화가 되었습니다. 양복을 입고 나서자 제 아내가 조목조목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얼굴도 그만하면 괜찮고 옷도 잘 맞고 넥타이도 멋있다구.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잔뜩 기분이 좋아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또 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키가 10cm만 더 컸으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염려하지 말라고 키 작은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27절) 손으로 잡듯 이 확연한 진리앞에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으며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키 작은 것을 탓하고 아무리 고민한다고 한들 조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성경을 보십시오. 27절 “너희 중에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할 때 “키” 옆에 No.2라고 쓰고 아랫단에 “혹 목숨을” 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이 말은 “네가 염려하므로 네 목숨을 한 시간이나 더 연장할 수 있으냐”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옛날 번역엔 “생명을 일각이나 더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염려한다고 임의로 키가 다 큰 장년의 키를 임의로 끝난 목숨을 일각이라도 변경시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2. 유해 둘째, 염려는 무익, 불필요 할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유해합니다. 해롭습니다. 염려라는 말을 성경 원어에서도 메림네오(μερ?μΥ?ω)라고 썼는데 이 말은 메르나오(μερναω) - “쪼갠다, 갈라낸다”는 말과 누스(νου?) “마음”이란 말이 합쳐서 된 말입니다. 염려란 우리의 마음을 갈라놓습니다. 인격을 분열시킵니다. 갈라진 인격을 가진 사람은 그 모든 일에 견고함이 없고 변덕스럽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감정을 쪼개어 상하게 만듭니다. 염려하면 감정이 상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그대로 보지 아니하고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어떤 사건이든지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염려는 이성을 분열시키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해야할 일, 못 할 일의 구별도 못하고, 해야할 말, 해서는 안될 말도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 편한대로 살아갑니다. 영어로는 염려를 worry라고 하는데 이 말의 어원은 “물어뜯는다” “짐승의 이빨로 목을 물어뜯어 결식시킨다”는 뜻에서 온 말입니다. 염려에 물린 사람은 무력해집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염려를 서서히 사람을 죽이는 느린 형태의 자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염려의 도가 깊어지면 드디어 자신의 건강을 해치고 수명을 단축시키게 되는 것이지요. 미친 개에 물린 생쥐처럼 염려에 물린 사람은 영혼의 기능이 마비됩니다. 영적인 무력증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3. 전염성 셋째 염려의 특징은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염려는 전염성이 대단히 강합니다. 성홍열이나 소아마비, 니프테리아, 염병같은 전염병보다 염려는 전염이 더 잘됩니다. 염려하는 사람과 늘 만나고 같이 지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염려라는 병에 전염이 됩니다. 아니 때로는 염려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얼굴만 쳐다봐도 때로 염려가 옮겨갑니다. 이처럼 염려는 첫째 무익하고, 둘째 유해하고, 셋째 전염성이 있습니다. 무서운 질병입니다. III. 염려하지 않고 사는 신비: 그러므로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이 험악한 세상에서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예. 있고 말고요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단어를 세 번 쓰고 있는데 첫째 25절에서 염려하지 말라. 둘째 31절에서 염려하여... 쭉 나가다가 ... 하지 말라. 셋째 34절 염려하지 말라입니다. 그런데 눈여겨 관찰하시면 이 25절, 31절, 34절이 한결같이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즉,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이런 공식이 성립됩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 접속사, 단어 하나에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담겨져 있고 능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1. 25절 그러므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가지고 있는 뜻은 “이미 선택과 결론이 내려졌으므로” 이런 뜻입니다. 이런 정의를 이해하시고 25절 “그러므로”를 연구해 보십시다. 이 그러므로는 항상 앞 귀절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너희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내용에 이어서 본문 25절 “그러므로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 이렇게 연결됩니다. “이미 선택과 결론이 내려졌으므로”라는 그러므로의 정의와 연결해 본다면 이런 뜻이 됩니다. “재물과 하나님,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너희는 이미 하나님쪽으로 선택과 결론이 내려졌으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과 행복의 원천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신분에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편으로 선택이 끝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쪽으로 결론이 내려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 이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여기에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은 걱정거리를 만나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위기를 당해도 동요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는 죽어도 하나님을 택하기로 결론을 내린 사람들입니다.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다른 사람을 위로합니다. “염려”를 해결한 아씨 랭크라는 사업가의 얘기입니다. 많은 염려에 시달리던 랭크씨는 매일같이 염려에 시달리기보다는 일주일 중 하루를 염려하는 날로 정해 놓고 나머지 날은 염려를 잊어버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이디어를 내길 “토요일의 염려상자”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한주일동안 염려거리가 생길때마다 그 내용을 적어 상자에 넣으며 “하나님, 이 염려 내용을 잠시동안만 맡아주세요. 제가 토요일 날 다시 끄집어 내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드디어 토요일 오후 염려상자를 개봉해 보고 랭크씨는 깜짝 놀랐습니다. 큰 염려거리로 생각되었던 문제들 가운데 40%는 완전히 해결되어 있었고, 25%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바뀌어져 있었고, 25%는 염려했던 자신이 잘못 판단한 문제들이었으며, 나머지 10%는 그 다음날 주일 아침 기도하고 다시 하나님께 맡기므로 해결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품에 들어오기만 하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 품으로 들어오십시요. 하나님 앞에 고아란 없습니다. 단지 미아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당신!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미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곁엔 항상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공중의 새를 보라” 여기 보라는 뜻은 눈으로 보라는 뜻이 아니라 “배우라”는 것입니다. ① 새는 날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새에겐 곳간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곳으로 날아가면 됩니다. 날개를 달고 높이 날아가 보면 땅의 것들이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습니다. 눈앞에 바위가 있고 태산이 있다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날아서 넘어가 버립니다. ② 새는 위도 작고 창자도 짧습니다. 새가 돼지의 욕심, 황소의 배를 가졌더라면 날지 못할 것입니다. 새는 대변 소변 산란을 한 기관으로 다 합니다. ③ 새는 멀리 보는 원시안을 가졌습니다. 벌레는 코앞의 일만 봅니다. 새는 멀리 봅니다. 하나님은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 믿음의 날개를 주시고 멀리 보는 눈을 주십니다. ④ 먹어야 살지만 또 너무 먹어서 죽습니다. 요즘 가진 사람들 중에 보약을 너무 많이 먹어 걸리는 보약 중독증이란게 있답니다. ⑤ 옷이 날개라구요. 아닙니다. 믿음이 날개입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그 안목을 버리세요. 하나님이 당신을 어떻게 볼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에겐 염려가 없습니다. 2. 31절 그러므로 두 번째 31절 “그러므로”의 말씀은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들의 백합화를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도 하나님이 돌보시거늘 하물며 하나님을 선택한 너희를 버려두겠느냐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주부들은 당장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살림을 안해 보셔서 그렇지. 하루를 지내면서도 뭘 먹일까 뭘 입을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걱정거리인데... 사실 여러분, 인간에게 의식주 문제가 얼마가 중요한 문제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이걸 해결해 보겠다고 웬 종일 뛰어 다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이 따위로 연연하며 염려한다면 “너희는 이방인과 같다. 불신자와 같다” 이 말입니다. 왜요? 만일 우리가 의식주 문제에 너무 매달려서 염려하다보면 그 문제에 붙잡혀 더없이 초라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영적인 관심을 멀리하게 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적 염려를 하나님께 가져가 그분께 맡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염려들을 다 거두시고 영적인 만족, 신령한 염려를 주십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즐거운 교환입니다. 헛된 염려를 진정한 염려로 교환해 주십니다. 세상의 염려를 하늘의 염려로 교환해 주십니다. 그래서 죠지 물러는 말했습니다.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요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다. 너희가 염려하느냐 너희 믿음의 죽을 것이다. 너희가 믿음을 갖겠느냐 너희 염려가 죽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염려를 맡기고 믿음과 평안을 얻는 즐거운 교환의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염려를 평강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3. 34절 그러므로 세 번째 34절 “그러므로”의 신비는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이 본문에서 개역판에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라고 하던 것을 개역 개정판에서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번역합니다. 원문상으로는 이것이 맞습니다. 염려의 주어가 달라집니다. 염려를 하더라도 내일이라는 시간이 염려할 것이니 너희는 평안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염려는 그 시간을 반드시 하나님이 하실 것이니 너희가 미리 잡아당겨 염려하고 앉아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으면 내일은 언제나 절망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내일은 언제나 희망입니다. 여기에 염려를 십자가 앞에 맡기고 믿음을 얻는 즐거운 교환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즐거운 교환을 통하여 삶의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수없이 급한 일들이 내게 횡포를 부립니다. 긴급한 일들이 다 중요한 일은 아닌데 늘 이 급한 일에 쫓겨 중요한 일을 못하게 됩니다. 급한 일은 늘 소란스럽고 방정맞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은 언제나 조용하고 차분합니다. 그래서 소란스런 일을 먼저 하다보면 조용한 일, 중요한 일을 놓치게 되는 겁니다. IV. 즐거운 교환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세상 염려를 신령한 염려로 교환했다면 우리가 해야 그 신령한 염려가 무엇입니까?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건 염려거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① 늘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던 사람이 의의 옷을 염려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정결하게, 좀 더 거룩하게 살 수 있을까를 염려하게 됩니다. “성도는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3:7) “너희가 큰 악에 빠지지나 않을까 염려하라”(잠5:14) ②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던 사람이 성령에 목이 말라 헐떡이게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던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을 더 먹고 싶어 몸부림하게 됩니다. 기도의 갈증, 말씀의 배고픔, 심령의 목마름, 하나님을 향한 갈망 - 이것이 성도의 신령한 염려입니다.
4세기의 교부 가운데 크리소스톰이 있었습니다. 이 크리소스톰에 관한 여러 가지 감동적이 일화가 많이 전해지는데 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크리소스톰이 체포되어 로마 황제 앞에 서게 됩니다. 황제의 회유를 듣지 않는 크리소스톰에게 황제가 말합니다. “나는 너의 전 재산을 몰수할 수 있다.” 크리소스톰은 말합니다. “저의 재산은 하늘에 있나이다!” “나는 너를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떼어놓겠다” “나의 가족과 친구는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나는 너를 이 나라에서 영원히 추방하리라” “저의 나라는 하늘나라입니다!” “나는 너의 목숨을 끊으리라.” “저의 생명은 이미 하나님의 품에 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이어서 말합니다. “황제여, 당신이 나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나이다. 나의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 품에 있나이다.” 보십시요. 신적 교환, 즐거운 교환을 맛본 사람의 멋입니까? 이 얼마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당당함입니까?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죽어지고 살아난 신적교환을 경험한 사람 - 그는 곧 세상 염려를 신령한 염려로 교환한 즐거운 교환의 소유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