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완 신부가 수녀회를 창설한다는 것이
당시에 그를 알던 이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여자라고는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
심지어 어머니의 얼굴조차 제대로 대하지 않던 사람이
여자 수녀회를 창설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으며,
더욱이 수녀회를 창설할 즈음 선 종완 신부는 신학교 강의와 성서 번역의 막중한 임무 가운데 있었기에,
그의 수녀회 창설은 많은 이들의 염려와 주목을 끌은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선 종완 신부의 학교 생활과 사제 생활을 통해 그를 아는 사람들은 선종완 신부에게서 성직자보다는 수도자의 모습을 발견했음을 알 수 있다. 선종완 신부가 소신 학교 학생이었을 때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혜화동 본당 신부인 오기선 신부는
"모든 외형 내형이 과묵하시고 조용하신 어린 소신 학교 시절부터 저는 옆에서 '내일의 신부님'을 보아 왔답니다. 저 학생은 수도원 길을 신학교 길로 착각을 했나 봐 하고 내 동창들에게 속삭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또한 선종완 신부와 함께 서품을 받은 동창인 박성춘 신부는 이렇게 회고한다.
"소신 학교 시절부터 그는 학우들간에 성인답다는 말과 신부보다는 수도자가 되는 것이 더 맞을 거라는 평을 들었다. 학우들과도 필요 없는 대화는 일절 나누지 않고 농담도 할 줄 모르고 고향집 이야기도 입밖에 내는 법이 없었다."
좋으신 하느님은 선종완 신부를 통해 당신의 뜻을 펼치시고자 어린 시절부터 이미 그의 마음에 수도에의 갈망을 심어 주었다.
소신 학교 2학년 때인 1930년에 선종완 신부는 일본 흑해도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기 위해 학교에 자퇴 원서를 냈다. 학교를 떠나기 전날 그는 이스라엘인들이 서둘러 에집트를 나오듯이 동료 신학생들이 모르게 모든 준비를 해 놓고 옷을 다 입고 신발을 신은 상태로 잠을 자서 아침 기상벨이 울리자 동료들이 세수하러 간 사이에 몰래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가 학교를 나갔는지 학우들은 근 1주일이 지나도록 알지 못했다. 일주일 후에야 친구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고 이는 당시 소신학교 교사인 김피득(베드로) 신부의 권고에 의한 것이 밝혀졌다. 그만큼 그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사는 사람이었다.
학교를 나간 라우렌시오는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부모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으며, 결국 대동아 전쟁으로 입회의 길이 막혔다. 이 시기가 라우렌시오에게 있어서는 시련의 시기로 이때 라우렌시오는 방갓을 쓰고 고신극기 하기 위해 생식을 하며 지냈다. 이 시련의 시기는 2년간 계속되다가 1932년 라우렌시오는 용소막 본당 신부님인 이희연 신부님의 설득으로 다시 사제의 길로 나갈 것을 결심하고 학교로 복교하였다.
수도회의 입회가 좌절되었지만 그러나 라우렌시오의 마음에는 언제나 완덕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음악을 포기하고 성서를 하게 된 이유도 물론 그의 신체적 조건의 이유도 있지만 하느님 말씀을 잘 알아들으려면 信心과 관계 깊은 성서를 해야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기에 처음부터 성서학자가 되고자 결심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의
하느님께 대한 신심을 들어 높이고자 성서 공부를 한 것이 그를 한국 최고의 성서학자로 만든 계기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