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기-후 6차시 습작품 종합 (9월 16일 용)
1. 성격 유형별 화해하기/이수진1
1. “요즘은 혈액형을 묻는 게 아니라 MBTI 성향을 묻거든요.”
아들이 친구들과 나누었던 얘기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겨우 4가지로 분석하는 혈액형보다 MBTI는 기준도 적절하고 16가지나 되니 훨씬 공감이 간다고 했다. MBTI는 내, 외향성, 감각과 직관형, 인식과 판단에 있어 감정과 이성 중 어느 쪽에 치우치는지의 기준에 선호도를 매겨서 16가지 유형으로 나누는 성격유형검사이다. 검사의 정확도에 대해 논하다가 결론은 60갑자로 분석하는 우리 선조들의 사주가 제일이라고 결론지었다는 이야기였다. 중국에서 유래되었지만, 우리 조상들이 많이 써 온 것을 아이들이 농담이지만 은연중에 존중하는 것 같아 나도 웃음이 나면서 오래 전 처음 MBTI 검사를 받았을 때가 생각났다.
2. ‘자연의학센터’로 유명한 홍천의 힐리언스 선마을을 만든 이시형 박사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신경정신과 전문인 이시형 박사는 강의가 시작되자마자 우리에게 아직 생소했던 MBTI 검사부터 실시했다. 나를 잘 알고, 나와 다른 상대방의 성향을 이해하면 서로 간에 오해나 스트레스가 쌓일 일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성향분석은 끝났지만 조별로 짝지어진 상대방의 성향에 맞추어 어떻게 대화해야 할 지는 선뜻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간단한 다른 예시로 강의를 진행했는데, 먼저 우리는 질문을 받았다.
“가장 친한 사람이랑 다투었을 때 주로 누가 먼저 화해하며, 화해의 첫 문장이 무엇입니까?”
그때는 미혼이어서 단짝 친구를 대상으로 생각했는데, 공감보다는 재미가 컸다. 그런데 결혼하고 세월이 흐를수록 남편과의 대화에 꼭 들어맞는 경우라서 더 생각나고 와닿는 질문이었다.
“식사나 하러갈까?”
“커피어때?”
“쇼핑가자.”
“드라이브 갈래?”
“영화볼까?”
“우리 얘기 좀 하자.”
많은 재미있는 답변들이 있었지만 대략 위의 내용으로 요약되었다.
3. 사람은 머리형, 가슴형, 배형의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배형 사람은 일단 배가 불러야 만족감이 일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도 잘 먹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밥 먹자.’ 가 ‘화해하자.’ 라는 말이다. 잘 먹고 싶으면 이런 사람을 사귀라고 충고했다. 가슴형 사람은 앞뒤가 어긋나고 논리적이지 않아도 감성과 낭만에 호소하면 다 풀리는 유형이다. 영화를 보거나 드라이브를 하고 분위기가 좋으면 어느 새 사이좋은 커플이 되어 있다. 머리형 사람은 이성적으로 잘잘못을 따지고 이해가 되어야 풀리는 유형이다. 배형 사람으로부터 화해의 제의를 받았어도 머리형 사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데 ‘이런 상황에 밥이 넘어가느냐?’ 는 생각을 하게 된다.
4. 우리는 여러 질문에 대해 머리형으로 대답하고 다시 가슴형으로, 배형으로 답하기를 연습해 보았다.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처럼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각자의 그룹으로 나누어 ‘소풍갈래?’ 라는 말을 비롯한 몇몇 질문에 그룹별로 답했다. 머리형 그룹은 언제, 어디로, 왜, 무엇을 타고 갈 지 등 현실적인 문제로 접근하며 답했다. 가슴형 그룹은 ‘어머나, 좋아!’ 같은 감탄사부터 시작해서 감수성이 풍부한 창의적인 답변이 많이 나왔고, 배형 그룹은 ‘뭐 싸갈까?’, ‘가서 무엇을 먹을까?’ 라는 반응이었다.
5. 실험을 해 보니 다름을 인정하더라도 이해하기까지는 더 노력이 필요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형, 가슴형, 배형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방식으로만 이야기하고 들을 때 상대방과 오해가 쌓이기 쉽고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이럴 때 상대방의 유형을 인지하고 있으면 ‘밥 먹자.’라는 말도 ‘잘 지내 보자.’ 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요즘은 자기 감정을 정확하게 들여다 보고 잘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머리, 가슴, 배형 유형으로 나누는 것을 MBTI 검사의 이전 버전 쯤으로 생각하면 활용하기가 쉬울 것 같다. 각기 다른 유형에 대한 반응을 이해하면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더 수월해질 수 있다.
6. 그다음 시간 강의 주제는 화해에 관해서였다. 이렇게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부부가 되어 서로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화해하기가 더욱 어려워지니 서로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 잘못했다고 생각했을 때는 깔끔하게 사과하고, 사과를 받아들이거나 말거나는 상대의 문제라고 했다.
덧붙여 생각해 볼 문제는, 어떤 사람은 잘잘못을 떠나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서 먼저 화해를 청하기도 한다. 남에게 냉정한 행동을 했다 싶으면 스스로 마음이 편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의 불편한 마음이 신경쓰여서일 수도 있다. 교통사고에서도 100% 과실로 보는 상황이 드문데 서로 다른 입장에서 감정섞인 문제에 대한 잘잘못은 아무리 따져도 끝이 없게 마련이다.
7. 우리는 아이들에게 항상 마음을 크게 가지고 먼저 화해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실제로는 화해하자고 손 내미는 이미지가 잘못을 인정한다고 보여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화해를 먼저 청하는 데에 자존심을 운운하기도 한다. 주변에서 저 사람이 뭔가 잘못했구나 하는 시선을 두기에 더 큰 마음과 용기를 내야 한다. 충돌로 문제를 인식했으면 서로가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고 개선하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하는데 이런 현상은 안타깝다. 성격유형에 대한 이해로 소통이 원할해서 화해를 하는 일이 훨씬 쉬워지고 나아가 우리 사회가 먼저 손 내미는 사람에게 지닌 시선과 인식에도 변화가 있으면 좋겠다.
2. 등 / 박정애
1 잠에서 깬 남편이 파스를 들고 와서 등을 내밀었다.
“여기 좀 붙여줘라.”
부탁도 명령도 아닌 애매한 말투에서 평소의 자신감을 찾을 수 없었다.
2 전날 남편은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전화를 받지 않았고 문자에도 답이 없었다. 다 큰 어른이 늦는다고 무슨 일이야 있겠냐만, 새벽까지 연락이 없자 걱정이 되었다. 작은 불을 켜놓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온전히 잠들지 못했었다.
3 아침에 들어온 남편이 태연하게 말했다.
“어쩌다보니 연락을 못했네.”
연락도 없이 외박한 사람이 맞나 싶게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못 다한 잠을 잔다며 누웠다.
4 이유를 따져 물을까 했지만, 그런다고 시간을 어제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무사히 집에 왔으니 걱정했다는 말은 이제 잔소리가 될 것이었다.
5 ‘밤새 고스톱이라도 쳤겠지. 놀다보면 연락할 때를 놓치기도 해. 자주 그런 것도 아니고.’
남편 대신 내가 나에게 변명을 했다.
6 전투력은 앞을 마주할 때 생긴다. 남편이 앞에 없으니 싸울 곳이 없었다.
자는 남편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저 등이 좋았었는데.’
7 남편과의 결혼을 결심한 것은 어쩌면 그 ‘등’이었다. 내가 우유부단한 반면 남편은 결단력 있고 분명한 사람이었다. 가야 할 길 외에 허투루 눈을 주지 않았다. 나는 그 단호함이 좋았다. 남편의 등 뒤에 있으면 세상 무서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8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생활을 꾸렸다. 그러는 사이에 남편이 내 '등'에 기대는 일이 늘어났다. 남편이 못하는 일이 생겼고 내가 나서야 할 일은 많아졌다. 결혼 생활에 혼자서만 기댈 수 있는 '등'이란 없었다.\
제 아무리 잘난 사람도 혼자서는 등에 파스 한 장을 붙일 수 없고, 별 것 아닌 가려움조차 해결 할 수 없다. 그래서 결혼이 탄생했나보다.
9 파스를 붙이며 남편의 등을 보았다. '뭘 하다 왔길래.', 한 대 툭 치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젊은 날의 탄탄했던 등이 아니었다. 파스 몇 장을 붙인 구부정한 등이었다. 와락 안아주고 싶은 그런, 등이었다.
3. 이사 한번 못 갔지만/남경수1
1 진주에서 살았던 부모님 세대가 부산 영주동, 남부민동의 천막집을 거쳐 자리 잡은 곳은 주례동 냉정이다. 차가운 물이 나오는 샘이 있는 동네다. 부모님이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곳이며 막내인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2 할머니께서는 땅을 사서 햇살이 잘 드는 남향으로 집을 지으셨다. 화장실은 마당에서 멀리 떨어진 나무들 사이에 있었다. 밤이면 화장실 가기가 무서워서 늘 부모님이나 막내 오빠가 따라나서야 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나무로 된 바닥에서 나오는 소리는 항상 공포의 대상이었다.
3 아버지는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나오셔서 집 짓는 일을 하셨다. 집 옆에 딸린 우리 밭에 양옥집 두 채를 지으셨다. 친구랑 동업해서 각 1채씩 지었는데 집이 너무 좋았다. 대문에서 이어지는 넓은 마당에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현관 앞에 작은 마당 같은 공간이 있었다. 거실과 방이 있고 욕실과 화장실까지 있는 집이었다. 집을 지을 때 자주 구경 가서 우리 집이 되는 꿈을 꿨다. 저기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4 “아버지, 우리도 좋은 집으로 이사 가요”
아버지는 더 좋은 집을 지어서 살 거라며 세를 주었다. 세 들어 사는 사람에게는 또래 학교 친구가 있어 자주 놀러 갔었다. 이 집이 우리 집이었으면. 그래도 더 좋은 집을 지어준다는 아버지 말을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5 어릴 적 내 소원은 우리 집이 좋은 동네로 이사 가는 것이었다. 이 변두리 달동네를 벗어나서 양옥집이나 아파트에 살고 싶었다. 셋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화 바꿔주는 것이 귀찮았고 가족들의 공간에 불쑥불쑥 들어오는 사람들이 싫었다. 우리 집 마루는 동네 사랑방이었다.
6 하지만 그 집은 다른 돈벌이를 위해서 팔아 버렸다. 뒷집에 살던 친구는 길 건너에 처음 생긴 아파트로 이사 갔다. 화장실이 집 안에 있고 거실이 있는 가족들만의 집으로.
7 중학교 다닐 때부터 집에 친구를 데러 오지 않았다. 스레트집과 가난한 동네가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친척인 사기꾼에게 속아서 번 돈을 다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사 한 번 못 가고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이 지나갔다.
8 아버지는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 나무가 많았던 넓은 공간을 세를 받기 위한 스레트집으로 채웠다. 가을이면 동네 아이들의 서리 대상이었던 석류나무, 무화과나무가 없어지고 탱자나무도 사라졌다.
9 결혼하고 나서는 재개발 예정지로 지정되어 이사하기가 또 어려워졌다. 재개발은 이권 다툼에 한 십 여년을 끌며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중단되었다. 아버지는 그 집에서 돌아가시고 지금은 리모델링만 좀 해서 어머니가 혼자 살고 계신다.
10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대학에 들어갔는데도 내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친정집은 아직도 내가 태어난 그곳에 머물러 있다. 동네 주변이 다 바뀌어 다른 세상이 되었는데도 우리 동네만 살아남아 옛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11 동네를 가운데에 두고 앞쪽으로는 지하철역이 생기고 뒤쪽은 큰 도로가 났다. 힘없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 그런지 좌회전 신호가 없어 돌아가야 하고, 가까운 곳을 두고도 길이 없어 멀리 돌아가는 수고로움을 해야만 한다. 고층 아파트와 빌딩 사이로 오래된 좁은 골목과 스레트집들이 나지막이 모여 있다. 동네 이름도 ‘희망마을’이다. 가끔은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 정도다.
12 하지만 그 동네에는 60년 이상을 함께 살아온 이웃들이 있고 정이 흐른다. 진주통닭집 아줌마, 6통 통장 아줌마, 남도 이모가 있다. 남도 이모는 부모님이 태종대에서 여관업을 할 때 같이 일했던 분인데 그 인연으로 이 동네에 정착하게 되었다. 6.25 때 할머니랑 같이 월남하셔서 혈혈단신인 분이다.
13 6통 통장 순자 아줌마는 매일 아침 동네 한 바퀴 걷기 운동 후에 우리 집에 들러 엄마랑 커피를 마신다. 경로당에 안 가는 날에는 전화하거나 직접 와 보시고 데려가기도 한다. 사람들이 함께 정을 나누고 산다. 그분도 자식을 먼저 보낸 아픔을 가진 분이다.
14 엄마는 지금 그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계시니 행복한 노년이라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치매 증상이 좀 있지만 심하지는 않다. 익숙한 환경과 자식보다 더 자주 보는 이웃들 때문인 것 같다.
15 친정에 갈 때마다 따뜻함을 느끼는 것은 엄마가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동네가 주는 다정함도 크다. 이사 한번 못 갔지만 이제는 오히려 오래된 시간이 머물러 있는 우리 집이 좋다.
4. 집 /조정숙 1
1. 마당 가득 햇볕이 쏟아진다. 뜨거운 여름을 이겨낸 풀들이 자기자리를 지키며 견디고 있다. 발밑 풀들 사이로 민달팽이가 몸을 밀어 길을 당긴다. 집도 없이 여름을 어찌 견뎠을까? 어디로 가는지 쉼 없이 촉수를 세우고 간다. 맨몸의 달팽이를 보니 집을 갖기 위해 살아 온 지난날이 생각난다.
2. 나는 어릴 때부터 집주인에게 쫓겨나지 않고, 눈치 보지 않는 우리 집에서 사는 게 꿈이었다. 경제적으로 힘이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 나, 동생 다섯, 모두 여덟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았다. 공동수도가 있는 마당을 가운데 두고 단칸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에 일곱 가구가 엉켜 살았다. 문이라고는 들어가는 문밖에 없는 방, 햇볕도 놀러오지 않는 방, 아침이면 화장실에 가는 줄이 길게 서 있는 집이었다. 초라한 단칸방 하나 유지 할 돈이 없던 우리는 밀린 월세를 내지 못해 보증금마저 날리고 그 방에서 쫓겨났다.
3. 보잘 것 없는 세간을 식구들이 짊어지고 민달팽이처럼 비탈진 달동네를 걸었다. 골목을 몇 바퀴 돌았더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판잣집들로 이어진 골목, 가파른 계단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불빛들이 수를 놓았다. 집은 저리 수두룩하건만 우리가 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아버지는 돈을 구하러 갔고 어머니와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때로는 침묵도 위로가 되니까. 가진 게 없는 우리는 하늘의 반짝이는 별빛보다 저 아래 찬란한 불빛을 동경했다. 그날은 공터 평상에서 달빛을 이불로 덮고 하룻밤을 보냈다.
4. 이튿날 새소리에 눈을 뜨니 산비탈 미루나무에 까치가 집을 짓고 있었다. 저렇게나마 제집을 지을 수 있는 까치가 부러웠다. 차가운 이슬을 피하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게 우리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여기서는 무소유가 미덕이 아니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5. 한 달은 얼마나 빨리 돌아오던지, 다달이 내는 집세를 내지 못해 주인 집 아줌마가 어머니에게 욕을 퍼붓던 일, 아이들이 많다고 쫓겨날까봐 두꺼운 담요를 문에 걸어 놓고 소곤소곤 말했던 일, 주인집 아들이 때려도 아무말도 못하고 맞아야 했던 일 들은 비참했다. 그래서 살아가며 고래 등 같은 기와집,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은 아니지만 마음속으로 내 집을 몇 채나 지었다 허물기를 반복했는지 모른다. 집을 사는 일이 어디 한두 푼으로 되는 일이던가. 먹고 사는 일이 급급해 내가 시집갈 때까지도 남의 집을 전전했다.
6. 결혼을 하고 열 평짜리 서민 아파트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시어머니는 전세를 얻어주며 그 돈을 갚으라고 했다. 월급에서 절반을 매달 갚으며 생활을 했다. 전세금도 다 갚지 못했는데 계약 기간이 끝날 무렵, 집주인이 찾아왔다.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했다. 큰 목돈이었다. 조금이라도 깎아 달라 사정했으나 손톱도 들어가지 않았다. 집주인은 형편이 안 되거든 다른 집을 알아보라며 돌아갔다.
7. 집을 보러 다녔다. 돌도 안 된 아기를 업고 그 돈에 맞는 집을 구하러 다녔지만 없었다. 돈에 맞춰 보증금을 걸고 달세가 있는 집을 얻었다. 허리를 더 졸라맸다. 어린 것을 두고 돈을 벌러 갈 수가 없어 나는 집에서 하는 일을 찾았다. 과자 값과 부식비만이라도 벌어 볼까 싶어 수출품 뜨개질과 밤 까는 일을 했는데 아이를 돌보면서 하려니 힘이 들었다.
8.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내 집이 생겼다. 이 십여 년 된 스무 평짜리 아파트였는데 돈이 모자라 대출을 내고 샀다. 낡았지만 남편 명의로 된 집, 전세금 올려 달란 말 듣지 않아도 되고, 이사 다닐 일이 없어 날아갈 것 같았다. 좋아서 잠도 오지 않았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아이들 방이 있고 거실이 있는 집,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꿈을 이룬 집에 봄이 가득 들어앉았다.
9. 꽃밭에 꽃이 늘어나듯 봄이 온 집에 식구가 늘어났다. 시이모가 지방으로 이사를 가면서 아들 둘을 맡겼다. 중학교 1학년, 3학년이었는데 데리고 갈 형편이 안 된다고 부탁을 해서 1년 가까이 데리고 있었다. 이종사촌 시동생을 보내고 나니 시동생이 취직이 되어 우리 집으로 왔다. 불편했지만 내 집이라도 있으니 시동생들과 함께 살 수 있음에 고맙게 생각했다.
10. 십년 가까이 살고 집을 옮겼다. 작은 단독주택을 샀다. 방이 세 개, 부엌, 거실, 화장실 두 개, 내 집 땅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이 아파트와는 다른 기쁨이었다. 무엇보다도 화초를 심을 수 있는 작은 마당이 있어 좋았다.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던가. 매일 꽃밭에서 피어나는 샛노란 양지꽃과 민들레, 분홍색 앵초와 패랭이가 반갑고 예뻤다. 아침마다 들여다보는 게 일과가 되었다.
11. 성장한 아들과 딸이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났다. 아이들이 머물던 자리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마음이 휑하고 텅 빈 것 같았다. 집으로 투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집을 늘려가며 내 욕망을 키우며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늘려가며 산 집이 몸을 편안하게 하는 도구가 될지 모르나 행복까지 보따리가 커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12. 지독히도 가난했던 시절을 돌아봤다. 그만그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나던 인정과 눈물은 가난과 싸우면서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꽃은 비바람을 맞고 커야만 비로소 꽃다워지고 겨울이 춥고 길수록 봄꽃 색이 깊고 아름다운 것처럼 시련의 극복이 있었기에 내 집을 가질 수 있었으리라.
13. 집은 집 이상이다. 그냥 집이 아니고 지난날 우리들의 삶과 애환이 응축되어 있는 공간이다. 가난하고 누추하지만 안식을 주는 집이기도 했고,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집은 상처를 주기도 하는 곳이기도 했다. 방 한 칸 얻기도 어려운 사람은 집을 단지 비바람을 막는 곳이라 말한다. 잠만 자고 나오는 곳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 꿈을 가지고 어려움을 이겨내고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간다. 집은 이처럼 소중한 곳이다.
14. 민달팽이를 본다. 앞으로 날씨는 점점 추워질 텐데 보호해 줄 지붕 하나 없이 추위와 메마른 날씨를 견뎌야만 한다. 이제는 이 작은 화분의 손바닥만 한 흙덩어리를 떠나, 어머니 같은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 안길 것이다.
15. 고급스런 아파트나 저택은 아니지만 방문을 열면 한낮 해가 제 마음대로 들어와 놀다 가는 집, 환한 햇살이 물밀듯 들어와 삶의 그늘을 지워 주는 집, 별다른 장식 없어도 내가 읽고 싶은 책 갖춰두고 독서와 글쓰기에 열중할 수 있는 방이 있는 집이 있음에 감사한다.
5. 쏟아진 옷장 / 이명조
며칠 전 아침,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간혹 안부를 묻는 사이의 지인이었다. 최근엔 연락이 서로 뜸했다.
“오랜만이네요. 요즘 무더위에 잘 지내요?”
“저어! 그런데요, 제가 좀 아파요, 형님!”
몇 마다 대화를 나누다가 아무래도 내가 가봐야 할 것 같은 상황이라는 판단이 섰다. 마침 외출 준비를 하던 터라 급히 서둘러 집 근처 유기농 반찬가게에 들러 묵채와 곤드레 나물 반찬을 사 들고 쨍쨍 뜨거움을 안고 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짐작보다 훨씬 심각함을 한눈에 알아보았디. 바로 뭉크의 절규였다. 흐트러진 거실 구석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형상이 바로 그러했다. 머리는 다 빠지고 앙상한 몸과 얼굴이 마치 죽음을 바로 앞둔 말기 암환자의 몰골이었다. 내 입에서는 차마 아!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살면서 소위 말하는 ‘중증의 우울증’ 환자를 이렇게 본 적이 없었다. 고작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거나 말로만 들은 게 전부였다.
나보다 근 10년이나 젊고, 꿈터 독서회에서 시작하여 안 지는 30년도 더 되었다. 주위 사람들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그녀는 참 열심히 살아왔다. 지금도 그러하다. 아이들 교육에서부터 짧은 자신의 배움을 한탄하며 방송통신학교로, 사이버로, 심지어 검정고시 후에 전문대 심리학과, 복지학과를 다 함께 공부했고 자격증도 내가 알기로 다섯 개는 넘는다. 아이 둘도, 경험 있는 내 둘째 아들에게 묻고 또 물어 일본의 근로장학생 유학까지 시킨 열혈모친이었다. 게다가 아이들 학비 조달하느라 남자우체부들과 경쟁을 벌이며 계약직 우체부를 힘들게 8년이나 하기도 했다. 와중에 남편은 증권으로 몫돈 날리고 바람까지 피웠다. 그래서 남편과 잠깐 별거도 했다. 그녀도 나도 물렁한 남편 만나 생활전선에 뛰어본 경험과 배움을 적극 사랑하는 공통분모가 있어 더욱 많은 애기를 함께하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 서로 뜸했고 대공원에서 어쩌다 우연히 만나 산책 정도는 더러 하며 서로의 근황은 알고 있었다. 지금은 이기적인 언니가 나몰라라했던 친정어머님도 근처 요양원에 모셔 놓고, 남편도 성실해졌고 아이들 다 결혼해서 손주까지 보면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손자 사진까지 보이며 자랑하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이!
몇 시간 동안 서로 부여잡고 울며불며 속을 털었다. 물론 병원 치료 받고 의사 처방대로 하고 있었다. 완전 탈진되어 무기력하고 먹기를 거부하고 겨우 불면증을 약으로 달래는 처지였다. 아예 먹지를 않고 죽음만을 생각하며 요지부동이었다. 이 증상이 발발하고 어언 두 달이 지나니 남편도 직장 다니랴 집안일 하랴 환자 돌보랴 지쳐 죽을 지경이란다. 아무리 불쌍한 남편과 친정엄마, 이쁜 내 새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손주들 생각하며 이런 흉한 맘 안 가지려 해도 소용이 없단다. 심지어 자살 방법, 자살 장소, 자살 시간들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도 이 우울의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고 했다. 하도 주위 사람 모두에게 폐 끼친다며 자책하기에 나는 그랬다
“개인적으로 그런 취약한 DNA도 있답니다.”
집에 와서도 내내 그녀 생각뿐이었다.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렇게 뭉크의 『절규』 그림처럼 처절하게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도 불쌍하고 안타까워서였으리라.
어쩜 그녀는 쏟아진 옷장 정리가 되지 않은 채로 너무 오래 그냥 쳐덮고 누른 채로 살아온 삶이 아니었을까? 참았던 폭탄이 뒤늦게 드디어 터진 것은 아닐까? 그녀의 삶은 책임만 잔뜩 지고 겉으로 괜찮다고 늘 주위 사람들에게 웃으며 안심시키며 산 삶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하염없이 외로웠을….
내가 그녀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문득 어느 독일 심리학자가 쓴 글《쏟아진 옷장을 정리하며》을 떠올려 본다.
“위기의 삶(옷장의 내용물)이 산산조각 난 듯한 느낌이 난다. 그 때 처음 드는 생각은 이렇다.
어서 주워 담아, 어떻게 해서든! 그리고 얼른 옷장 문을 닫아!”
그러나 내용물로 가득 차 뒤죽박죽된 옷장은 닫아도 닫아도 문이 다시 열린다. 내용물을 꺼내 하나하나 차곡차곡 정리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똑바로 보아야 혼란을 극복할 수 있다.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리가 끝나고 나면, 스스로에게 정말 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기를 견디고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위기 가운데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상처를 오래 두지 않고 그때그때 빨리 소독하는 것이다. 상처를 입었을 때 트라우마가 되지 않도록 신속히 소독을 잘해주어야 한다. 한 방법으로 명상을 권한다. 마음을 잘 다스리면 상처가 내면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녀의 상태가 너무 심각해 명상이니 상처 소독같은 처방이 힘들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알마나 삶의 애착이 깊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집 앞 공원의 햇볕, 바람, 꽃, 나무, 풀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는지 안다. 그녀가 믿는 부처님의 가피와 함께 예전의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돌아 오길 빌고 또 빌어 본다 가만히 가만히!
6. 선물 /문성미
1. 선물을 줄 때와 받을 때, 나는 늘 즐거운 긴장을 느낀다. 누군가에게 전할 선물을 생각하고 고르는 일은 쉽지 않지만, 주는 기쁨과 설렘이 있기에 행복하다. 선물을 받는 순간은 행복하지만, 행복의 표현에는 어설프다. 받은 기쁨과 감사를 온전히 느끼고 표현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선물의 무게에 눌려 어느새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그런 무게를 느낄 새도 없이 놀라운 기쁨으로 남아있는 기억들이 있다.
2. 첫 부임지에서 맞은 스승의 날이었다. 전날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받고 싶은 선물은 너희들의 편지나 카드이니 다른 선물은 하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6학년 아이들이었기에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한 듯 보였다. 책상 위에 선물 대신 아이들의 편지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편지를 챙기고 있을 때였다.
3. 키가 커서 뒷자리에 앉는 성현이가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선생님, 죄송해요. 엄마가 선생님 갖다 드리래요.”
목까지 붉어진 성현이가 내민 것은 종이에 싼 작약 한 송이었다. 엄마가 마당에 가득 핀 작약 중 하나를 꺾어서 선생님께 드리라고 했다며 눈을 떨구었다. 꽃을 싼 종이는 꼬깃꼬깃 접힌 채 선생님과 엄마의 당부 사이에서 곤혹스러웠을 성현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 마음 사이로 고개를 내민 분홍 작약 한 송이는 여태 본 꽃 중에서 가장 예뻤다!
4. 작년 내 생일을 앞둔 주말이었다. 두 아들이 함께 내려왔다. 둘 다 서울에서 생활하지만, 각자 연구실은 멀고 늘 바빠서 함께 온 것만으로 명절 같았다. 한껏 신이 난 남편은 아들에게 고기와 술을 권했다. 하고 싶은 얘기와 나누고 싶은 잔이 편안히 오가는 식탁은 오랜만에 자리가 차서 든든했다.
5. 큰아이가 묵직해 보이는 상자를 꺼냈다. 둘이 준비한 엄마 생신 선물이라고 했다. 함께 고른 선물이 궁금하면서도 감이 오지 않았다. 상자를 열어보니 고급 냄비 세트였다! 아들에게 이런 선물을 받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내가 쓰는 냄비들이 오래되어서 백화점에서 만나 함께 골랐다고 했다. 엄마 취향을 고려해서 기능은 좋고 디자인은 심플한 것을 선택했다는 얘기에 남편이 무릎을 쳤다.
6. 결혼할 때 가져온 솥이며 그릇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대가족 살림으로 삼십 년을 같은 집에 살았기에, 늘어나는 것은 있어도 멀쩡한 것들을 버리지는 못했다. 이제 남편과 둘이서만 밥을 먹으니 그릇이며 냄비를 예쁜 것으로 바꿀까 하고 쇼핑을 간 적도 있다. 남편은 바꾸라고 권했지만, 있던 것들을 내다 버릴 수 없어서 좀 더 쓰기로 했다. 아들 선물로 냄비 교체는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침저녁으로 국을 끓이고 야채를 볶으면서, 자꾸자꾸 웃음이 났다.
7. 지난 연말에 큰 수술을 받았다. 건강검진에서 폐 결절이 발견되어 대학병원에서 여러 차례 추가 검사를 했다. 어느 검사도 쉬운 것은 없었지만, 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 증상이 전혀 없는데도 최종 진단은 폐암으로 수렴되었기 때문이다. 집이나 근무 환경에서도 원인이 짐작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8. 수술하는 날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내려놓고, 나를 위한 도움과 응원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다. 금식과 관장으로 비워진 장만큼 머리는 차분했다. 대기실에서의 긴 기다림이 끝이 났고 수술대에서 잠이 들었다.
9. 소란함에 잠이 깨었을 때는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에 누워서였다. 마취가 깨면 심호흡부터 하라는 교육이 생각나서 깊은숨을 쉬려 했지만, 통증 탓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고통이 있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은 통증을 받아들이고, 가능한 힘껏 숨을 쉬는 것이다. 깨어났으니 수술 전에 보지 못한 아들을 볼 수 있겠다는 안도에 눈물이 흘렀다.
10. 보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를 탔다. 조수석에는 핑크빛 고운 수국꽃다발이 놓여있었다. 평소 색깔 구분도 어려운 남편은 이 고운 꽃다발을 준비하느라 온 기억과 지혜를 짜냈을 것이다. 결혼하고 이렇게 오래 집을 비운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없는 집에서 덩치 큰 남편은 혼자 어떻게 지냈을까.
11. 병원의 맞춤 식단은 늘 감사를 불러일으켰지만, 음식을 밀어내는 알 수 없는 저항이 고민스러웠다. 남편과 마주하는 소박한 밥상, 텃밭에서 갓 따온 상추만 먹어도 힘이 났다. 집으로 돌아왔다! 올해 나는 집에서의 삶, 남편과 가족, 아니 온 세상을 선물로 받았다. 어쩌면 내 안에는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받고도 뜯지 않은 선물상자도 있을 것이다. 이제 하나씩 뚜껑을 열고 선물을 확인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