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왕곡 금사정 금강계 동백나무
영산강이 자기 이름의 영산포를 지나 가야산 앙암바위를 가파른 물결로 돌아서면 저만큼 석관정이다. 이 석관정에 이르기 전 영산강이 물길 한 자락을 빙 돌려 섬 하나를 만든다.
이 길쭉하고 둥근 알 같은 섬을 야트막한 산이 두 날개를 활짝 펴 품고 있으니, 바로 봉의산이다. 또 이 산 생김새가 봉황이고 머리의 자리에 나주 왕곡 금사정이 있다. 그리고 금사정은 조선 중종 시기의 기묘사화에 닿아있다.
중종은 1488년에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이름은 역(懌), 자는 낙천(樂天)이다. 1494년에 진성대군에 봉해졌다.
연산군 12년인 1506년 9월 2일이다. 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중종이다.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였으며 청단(聽斷)을 잘했다’는 실록의 기록처럼 중종은 조광조를 기용하여 개혁정치를 펼쳤다. 이때 조광조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신진 정치인들을 사림(士林)이라 한다.
하지만 중종은 조광조의 개혁정책에 차츰 피곤함을 느꼈다. 이때를 놓칠세라, 조광조와 신진 사림에게 눌려 지내던 훈구 세력이 들고일어났다. 온갖 음해로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고 백여 명의 사림을 제거했다. 이 1519년 기묘사화가 있고 50여 년이 흐른 선조 1년이다. 중종실록의 누락 된 내용이라며 1568년 9월 21일에 덧붙인 당시 상황이다.
‘남곤이 조광조 등에게 교류를 청하였으나 조광조 등이 허락하지 않자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甘汁)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하였다. (중략) 남곤의 집이 백악산(白岳山)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 안의 어구(御溝)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고변(告變)하여 화를 조성하였다. (하략)’
이때 홍경주가 딸인 희빈 홍 씨를 시켜 중종에게 나뭇잎을 줬다고도 하는데, 꿀물을 묻혀 벌레가 파먹게 했다는 것은 신뢰하기 어렵다. 아무튼, 주초위왕은 조 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니, 곧 반역이다. 마침내 훈구 세력은 중종을 움직여 사림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임붕(1486~1553)이 성균관 유생 250여 명을 이끌고 조광조의 억울함을 상소했으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이에 실망한 임붕이 낙향하였고 나주 출신 사림인 나일손, 김두, 김구, 정문손, 김식, 진이손, 진삼손, 진세공, 김안복, 정호 등과 금강계(錦江契)를 조직하였다.
또 나주 왕곡 송죽리 영산강이 내려다보이는 포구 언덕에 금사정을 짓고 꺾여버린 청운의 뜻을 달랬다. 이 금사정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1665년 김만영, 나기, 김이상 등 후손이 재건하였고, 1869년 중수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973년에 세운 것이다.
이 금사정 터를 닦고 심은 동백나무 한 그루가 5백여 년 풍파에 아랑곳없이 해마다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한겨울에 금사정을 찾았다가 꽃을 못 봐서, 봄이 무르익는 4월에 다시 갔더니 가지에도 꽃, 땅에도 꽃이다. 그렇게 동백꽃은 떨어지기 전에도 후드득 떨어져서도 곱다.
당시 금강계를 결의한 11명의 사림은 어떤 맘으로 이 동백을 심었을까? 사철 푸른 동백 잎처럼 뜻을 잃지 말자는 다짐일까? 아님, 꺾이지 않는 기개와 뜨거운 열정이 언젠가는 붉은 꽃처럼 피어나길 바랐을까? 금사정을 지키고 있는 동백나무 앞에서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은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생각한다. 문득 고개를 드니 하늘은 푸르고 영산강은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