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모니, 셀레브레이션?
서 진 웅
지난 8일 밤 빌리어즈TV를 시청하다 나는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아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어떻게 저렇게 말 할 수 있지, 혀를 끌끌 찼다. 국제 행사였을 텐데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부끄러운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저녁 식사를 마친 나는 이날도 평소처럼 TV 앞에 앉아 채널을 154번으로 돌렸다. 국내 6번째 프로스포츠로 출범한 PBA(프로당구) 투어 1차 대회 결승전 생방 중이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흥미 만점의 경기가 펼쳐졌다. 내로라 하는 강적들을 차례로 물리친 그리스 출신 필리포스와 한국의 강민구 선수가 결승전에서 맞붙은 것이다. 4선승제 경기에서 두 선수는 3:3까지 가는 접전을 벌이며 숨막히는 일전을 치르고 있었다. 7세트 후반으로 흐르며 잘 싸우던 강민구 선수가 미스샷을 하자, 필리포스는 기회라는 듯 뱅크샷을 성공시키더니 마지막 한 점도 쉽게 득점함으로써 끝내 1억원 상금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는 승리의 기쁨에 환호했고 챔피언이 결정되자 캐스터는 곧바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세리모니'가 인상적이었는데 미리 준비했었나요?" 우승 소감에 대한 답변이 끝나고 캐스터가 두번째로 던진 질문이다. '세리모니'가 콩글리시라는 걸 웬만한 사람들은 안다. 설마 통역이 '세리모니'라고 하지는 않겠지 하면서도 괜히 내가 긴장이 되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건가. 보란듯이 통역사는 '세리머니'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캐스터의 질문을 전달하지 않은가. 내 귀를 의심하기엔 너무도 분명한 발음이었다.
인터뷰이는 질문을 제대로 이해할까, 그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순간 궁금증이 번개처럼 일어났다. '세리모니'가 콩글리시인지 아닌지 내 이참에 확인해보리라. 나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눈으로는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TV에 바짝 다가갔다.
"영어권 국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의사전달에 어려움이 있어 보입니다." 통역이 인터뷰이의 말을 듣고 나서 한 말이다. 그러니까 필리포스가 영어를 잘 못해서 인터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내가 보기에 우승자는 "당신이 뭘 묻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걸 영악한 통역이 자의적으로 오역하며 자신의 무지를 덮어버린 것이다.
생각해보라. 만약에 통역이 “우승 ‘셀레브레이션’(celebration)’을 준비했었느냐고 물었어도 챔피언이 그렇게 답변했을까. 이건 통역이 아니라 코메디였다. 통역이 한 말을 인터뷰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눈치 빠른 캐스터는 보충 질문을 했다. ”점프도 하고 팔을 번쩍 치켜올리던데....“ 통역이 막바로 이를 충실하게 전달했다. 그래도 인터뷰이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아마도 챔피언은 ‘세리모니’를 애국가 부르고, 묵념도 하는 ”식전행사“로 생각했을 법하다. ‘내가 식전 행사에서 점프했다고?’ ’팔을 높이 올렸다고?’ ‘지금 무슨 소리들 하고 있는 거야!’했을 것이다. 서둘러 캐스터가 어색한 상황 진화에 나섰다. “다음 경기 때는 그리스어 통역사가 필요할 것 같다” 세상에 멀쩡한 사람한테 이렇게도 책임을 전가하는구나 싶어 놀라웠다.
애먼 사람 잡는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필리포스의 영어를 흠잡은 건 한마디로 혹세무민이요, 언어도단이다. 4강전에서 경쟁자를 누르고 결승에 진출했을 때 그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뽐냈다. 나는 그가 말하는 걸 보고 미국이나 영국 출신인가고 생각했다. 남 탓도, 낯 두꺼운 것도 이 정도면 올림픽 금메달감이다. 행사 주최 측도 그렇다. 외국 선수들을 초치해서 대회를 열려면 걸맞는 통역을 써야할 거 아닌가. 정말 가관이 따로 없다. 이런 건 국가 망신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