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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죽음도 호상(好喪)이 될까?
★ 살아서 천국, 지옥 판별법
산 속 깊은 곳에 토굴(土窟)을 짓고 혼자 수행 (修行)해 온 노 스님이 먼 마을로 겨울 양식을 구하러 탁발을 나섰다.
날이 저물어 무명 촌로의 집에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노승은 우연히 주인 부자지간의 대화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이른다.
" 윗마을에 박 첨지가 어젯밤에 죽었다는데, 지옥(地獄)에 갔는지 천당(天堂)으로 갔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 예"
노 스님은 참으로 알 수 없었다.
자기는 일생을 참선 수행을 하며 살아왔지만, 죽은 사람이 지옥을 가는지 극락으로 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인데, 한 촌부가 어떻게 저런 거침없는 말을 하는지 놀랍기만 했다.
얼마 후 그 아들이 돌아와 자기 아버지께 " 천당으로 갔습니다" 하고 아뢰니 " 그랬을 거야..." 하는 것이다.
노 스님은 더욱 기가 막혔다.
이 노인과 저 젊은이가 죽은 자가 극락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는 무슨 신통력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궁금증 속에 날이 밝았다.
이번에는 주인 노인이 또 아들을 불러
" 이웃 마을 김진사도 죽었다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잠시 후, 이웃 마을을 다녀온 아들이 아버지께 " 김 진사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아뢰었고, "그럼 그렇지!" 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긍금증을 참지 못한 노 스님은 주인을 찾아가 물어보게 된다.
" 노 처사님..! 죽은 사람이 지옥을 가는지 극락을 가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으시오?"
주인은 미소 지으며 " 죽은 사람 마을에 가면 금방 알 수가 있지요"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윗마을 박첨지는 살아생전에 심성이 후덕하고 양심이 고우며 동리의 궂은 일은 도맡아 했으니, 온 동리 사람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극락왕생을 빌고 또 빌었으니 필경 극락에 갔을 것이며, 이웃 마을 김 진사는 평소 얼마나 인정머리 없이 모질고 독하였던지, 김 진사가 죽자 동내 사람들이 모여 수군 대기를..
' 그 많은 재산(財産) 두고 아까워 어찌 죽었을 고? 저승사자가 어긋 만나 오래도 살았지...'
이렇게 악담(惡談)을 퍼부었으니, 지옥(地獄)밖에 더 갈 데가 어디 있겠소?"
화향천리(花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
꽃의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고 한다.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 했듯이 민심(民心)이 곧 하늘의 심판(審判)이요, 염라대왕(閻羅大王)의 판결문이며 업경대(業鏡臺)인 것이다.
★잠깐 살다 가는 인생, 보람되게 살다 가자
2018년 현재 우리나라의 평균 연령이 80세로 보고 있지만, 연령별 생존율로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100명 중 30명만 남고, 90세가 되면 5명만 생존한다는 통계가 나온다.
연령별 평균 생존자 수
☆76세~80세 : 평균 14만명 ☆85세 : 5만2천명 ☆ 90세 : 1만6천명,
연령별 생존 확률
🔼80세까지 30% 🔼85세까지 15% 🔼90세까지 5%. 확률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나이는 75세~78세이다.
개인별로 다 다르겠지만, 80세를 기준으로 보면 90이란 나이는 우리 앞에 길어야 겨우 10여 년 남짓하다.
10년 뒤에 우리는 죽고 없다는 사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미 죽었을 것이고, 살아있는 5%도 거의 정상적인 활동을 할수 없는 상태 일 것이다. 더욱 슬픈 사실은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우린 어차피 죽는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10년 후, 2034년 쯤에는 우리는 거의 모두 죽고 없을 것이다. 내 가족, 친구도 죽고 없죠.
내가 가진 것은 누가 가져갔거나 없어졌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열심히 마련한 집에서 살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이 내가 소유했던 것을 가지고 있겠죠.
내가 거금을 들인 비싼 차는 고철이 되어 있을 것이고...
후손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잘 모를 거고 기억도 못 할 것이다.
우리도 사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모르잖아요?
우리가 죽은 후 몇 년은 누군가 우리를 기억하겠죠.
그리고 몇십 년이 더 지나면, 우리 존재, 사진, 업적 등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기억되지도 않을 것이다.
★ 서로 다른 두 사람- 슈바이처와 카뮈
1957년에 노벨상을 받은 두 명의 알베르트가 있었다.
한 사람은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의사이자 선교사인 알베르트 슈바이처이고, 다른 한 사람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알베르트 카뮈이다.
노벨상의 상금으로 두 사람은 각각 10만 불씩 받았다.
카뮈는 상금으로 파리 근교에 성 같은 별장을 사고 평소 가지고 싶었던 스포츠카도 사서 여유롭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반면 슈바이처는 그 상금으로 아프리카 가봉 랑바레네에 병원을 지었다.
어느 날 카뮈는 자신이 꿈꿔오던 그 멋진 차를 타고 별장으로 가다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러나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 세운 병원은 지금도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고 있다.
한 나라의 역사나, 혹은 개인의 삶이나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사람이 이 땅에 머물다 떠나면 크게 두 가지로 흔적이 남게 된다.
첫째는,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행한 행실이 흔적으로 남는다
어떤 이는 악하고 추한 행실의 흔적이 남고, 또 다른 이는 자랑스럽고 고귀한 흔적이 남습니다.
구한말의 매국노 이완용은 지금까지 비참하고 더러운 이름으로 남아 있지만, 조국을 위해 제 한 몸 초개같이 불살랐던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는 찬란하고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남아 있다.
둘째로, 사람은 자손을 흔적으로 남긴다.
‘한평생’이란 반칠환 시인(1964. 4. 28~)의 시를 보면, 재미있고 해학적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큰 詩다.
하루를 살았건 천 년을 살았건 한평생이다.
하루살이는 시궁창에서 태어나 하루를 살았지만,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니, 즐겁고 행복한 삶이었을 것이다.
매미는 7년을 넘게 땅 속에서 굼벵이로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7일을 살고 가는 짧은 生을 살고 가지만, 후손을 남기고 간다.
그런데 사람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맹목적으로 허둥대며 살다가 후회만 남기고 간다는 것이다.
★人生의 6대 잔고(殘高)
인생의 잔고 중에는 남길수록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떠나기 전에 깨끗이 비워야하는 것도 있다.
🧶 남겨야 할 3가지
첫째 : 가족에게는 <그리움>을 남겨야 한다.
그리움은 곧 보고 싶은 마음을 말하므로 생전에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때 자연스럽게 우러 나오는 감정이다.
즉, 나에 대한 그리움이 클수록 잘 살았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둘째 : 친구에게는 <웃음>을 남겨야 한다.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이 나를 떠올릴 때, 항상 즐거울 수 있다면 나는 죽어서도 그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셋째: 세상에는 <감동>을 남겨야 한다.
죽어서도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들이 많은데, 만약 죽은 후에 자신이 그걸 본다면 그만큼 비참한 일도 없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았던 세상살이를 마치면서 감동 하나쯤 남기고 떠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할 수 있다.
🧶 비워야 3가지'
첫째 : <마음의 빚>이다.
나로 인해 눈물을 흘린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용서를 구해 마음의 빚을 깨끗이 비우고 떠나야 한다. 그래야만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다.
둘째: <마음의 응어리>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 중에는 죽을때 까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세상까지 그 응어리를 가져간다면, 가는 길이 편할 리 없다.
그것은 마음에 뜨거운 불덩이를 안고 먼 길을 떠날 채비를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갈 때는 마음에 쌓아둔 응어리의 잔고를 모두 비우고 마음을 가볍게 해야 여정이 즐거운 법이다.
셋째 : <정(情)>이다.
친구에게는 우정의 잔고, 반쪽에겐 애정의 잔고를 남김없이 주고, 세상에겐 인정의 잔고를 바닥까지 긁어 아낌없이 나눠줘야 죽을 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자세가 잔고를 남기는 것이다.
★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가자!
해질녘 강(江)가에 서서 그것이 낙조(落照)인 줄 모르고 노을이 너무 고와
보였고, 가을 고운 낙엽이 있어 그것을 오래도록 보고 싶어 책갈피에 끼워두고 오래오래 보고 싶지 않았던가?
언젠가 우리는 보고 싶어도 못 보지 않겠는가?
시인은 詩로 말하고, 음악가는 오선지로, 화가는 그림으로 흔적을 남긴다.
우리도 언젠가는 떠날 텐데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듯이, 짧은 인생! 의미 있는 삶을 살다 가야 할 것이다.
나이 들어갈수록 내가 나를 보는 혜안(慧眼)과 나를 깨끗이 손질하고 닦는 습관 특히 외모(外貌)도 가꾸고 내면도 닦아, 품위(品位)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으로 남을 때 삶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사는 동안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한 세상을 어떻게 살고, 죽음 뒤에 나는 어떻게 될까"를
스스로 묻고 답을 찾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통계상 생존확률은 80세 30%, 85세 15%, 90세 5%라고 한다.
75세까지 사망확률 46% 범위를 넘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나는 예전부터 연명치료는 환자와 가족의 고통만 연장되는 거로 생각해, '연명치료 거부의향서'를 등록해 놨다.
이는 환자가 임종과정이 되었을 때 임종기간을 연장하는 연명의료 시술인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체외생명유지술, 수혈, 혈압상승제 투여] 등을 유보 또는 중단하는 행위로 이를 본인의 뜻에 의해 미리 등록을 해 두는 제도이다.
웰 다잉(Well dying)이란 품위 있고 존엄하게 생을 마감함을 말한다.
노환(老患) 또는 숙환(宿患)으로 고인(故人)이 되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간혹 호상(好喪)이란 말을 쓴다.
죽음이란 이승과의 슬픈 이별인데 좋은 죽음이나 멋진 죽음이 있을까?
호상이란 말은 국회의원을 몇번이나 하고 체육부 장관과 대한 체육회장을 지내신 민관식 장관이 전날까지도 테니스를 치고 샤워 후 잠들고 아침에 보니 영면에 든 예를 보고 호상이란 신문기사를 본적이 있다.
우리 육군3사관학교 생도시절 때 1중대장이셨던 故이도원 준장께서 몇년 전 심장에 스텐스1개 삽입 하신게 있었고지만, 2024.5.1 전날까지 골프치시고 점심도 잘드시고(저녁생략)기분좋게 지내시다 주무신후, 아침 07:00시 화장실 가셔서 쿵소리가 들려 사모님이 가보니 소천하셨다고 한다.
나의 큰아버지는 90세가 넘어서 지게질을 하고 집에 들어와서 "내가 죽을 때가 되었는데~" 말씀 하시고 바로 그날 별세를 하였다.
휴대폰에 매일 자주 부고(訃告)가 뜬다.
아직 내가 직접 불행을 당한 건 아니지만 가족과 친구, 지인의 불행과 생로병사(生老病死)로 괴로울 때가 점점 늘어난다.
내 나름대로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지려, 두 번째 버킷리스트인 '사전연명 의료의향서'를 등록하고자
건강보험 사무실을 방문한다.
담당 직원은 약 30여분 정도 상담사와 상담을 하고 결심이 서면 사전연명 의료의향서를 등록 하라고 설명한다.
모든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왔으니 상담을 생략하자는 나의 제의를 담당 직원이 흔쾌히 받아들여 5분 만에 등록이
완료되고, 호스피스 병동 이용마저 거절을 하니 비로소 마음이 후련해진다.
때마침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와 지금 '사전연명 치료의향서'를 등록했다고 하니 성질 참 급하다고 나무란다.
다행히 현재는 아픈 곳이나 암세포가 없고, 방사선치료와 항암치료도 필요 없으며, 항우울증 약도 처방되지 않았으니 지금이 사전연명 치료의향서를 등록하기엔 좋은 기회로 판단한 거다.
생명이 있는 모든 생명체의 인연과 수명은 영속(永續)되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사랑을 하며 남은 생 살면 된다.
‘호상’(好喪)이란 없다 남영진 논설고문/행정학 박사
지난 여름은 114년만의 호된 더위와 가뭄, 그리고 태풍, 호우 등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번 더위를 못 이기고 돌아가신 주위의 지인들이 10분이 넘었다.
보통 노인들은 환절기에 많이 돌아가셨는데 이번에는 어르신들이 버티기엔 더위가 너무 심해 여름 한창 철에 돌아가셨다.
‘100세 시대’가 실감났다. 풍요를 구가하던 로마시대나 가난과 질병, 전쟁으로 점철된 조선시대에는 평균 수명이 40세 초반이었지만 지금은 80세로 2배 이상 수명이 늘어났다.
우리 나이가 60대 중반이니 친구, 친지의 친부모 빙부모의 부음은 거의 90세를 넘긴 분들이다. 이젠 간간이 친구들 본인이나 부인의 상에 다녀올 정도다.
대학 동기가 이번 여름 마지막까지 버티다 죽었다. 지난 4월에 상처한 뒤 대장암이 발병돼 저 세상으로 갔다.
늦게 장가가 이제 대학생인 아들과 두 살 위의 누나, 남매가 상가를 지키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면서 친구 부부가 눈을 감기 힘들었으리라 생각했다.
이번 여름에 돌아가신 처의 대고모가 100세였고 대학친구의 아버지가 99세(白壽)였다.
90수 이상의 상가에서는 그동안 병치레나 오래 모신 상가 분위기라 그런지 침통하거나 슬픈 분위기가 아니다.
어릴 때 시골에서는 상가가 생기면 집안 조문 방에 빈소를 차렸다. 문상을 마친 조문객들은 멍석 깔린 마당에서 법석였다. 낮에는 천막과 차양을 치고 먹고 마시면서 3일장을 진하게 치렀다. 향냄새가 진동하지만 동네전체로 보면 ‘잔치’에 가까웠다.
나는 18년 전 부친, 12년 전 모친 그리고 10여 년 전 장인 장모까지 보낸 ‘고아’다. 그때 오신 조문객에 대한 답례로 다른 상가에 가는 것이 익숙하다.
관혼상제(冠婚喪祭)라고 하듯 모든 인간이나 가정이 겪는 의례적인 일이다. 어릴 때 생로병사(生老病死)라기에 “왜 생병로사인가? 왜 병을 늙은 후에 겪는 것으로 했을까”라고 의문이 들었다.
살다보니 부음에 숙환(宿患), 노환(老患)으로 나오듯이 노화(老化)가 병이란다. 암이 아니더라도 병으로 죽는 것이다.
요즘은 곡(哭)하는 것을 보기 어렵다. 고향에서는 상을 당한 가족, 친척들이 모시 상복을 입고 머리에 갈건(葛巾)에다 새끼줄을 동여매고 허리도 같이 묶었다.
▲ 강원 영월군 지역 주민들이 전통 장례절차인 상여를 메고 곡소리를 내며 운구하는 민속예술시연을 진행하고 있다./뉴시스
상주는 물푸레나무나 미루나무 등 가벼운 나무막대기를 짚고 허리를 숙여 조문객을 맞았다.
지금은 병원 장례식장이나 전문 장례식장에서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조문객들이 영정 앞에서 너무 오래 통곡하거나 오열하는 것이 오히려 실례란다.
조선시대에는 상주들이 힘들어 목청 좋은 친지에게 대곡(代哭)을 부탁해 ‘곡소리가 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대곡이 민간에서 행해진 것과 달리 궁중과 귀족들은 장례 때 곡성(哭聲)이 끊어지지 않도록 곡비(哭婢)를 쓰기도 했다. 곡을 하는 여자 머슴인 비자(婢子). 왕실에선 궁인(宮人)을, 사대부는 여자 노비(婢)를 시켰으나 여의치 않을 때는 민가의 여자를 고용하기도 했다.
전에는 망자가 80세만 넘겨도 조문객들은 ‘호상’(好喪)이라는 말을 썼다.
18년 전 아버지는 고향인 충북 영동의 직지사 앞 식당에서 큰어머니(형수)의 8순 잔치를 하고 쓰러지셨다. 50여명의 가족, 친지들이 같이 식사를 하고 나와 개울 앞 벤치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셔 119차로 김천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돌아가셨다.
서울로 모시기가 어려웠다. 고향 성당 신부님께 부탁해 지하실에 빈소를 차렸다.
성당 생긴지 50년간 3번째 장례식이었다. 고향은 물론 서울에서 친척 친지들이 몰려와 조의를 표했다.
그때 가장 귀에 거슬리는 말이 ‘호상’이란 말이었다.
고생만 하고 제대로 호강 한번 못시켜 드린 아버지에게 죄송스런 마음에 사진만 쳐다보면 눈물이 났다.
그런데 조문을 오셔서 “이게 호상이야. 이 분은 죽을 복을 타고 났네. 가족 친척들 다 모아놓고 갔으니 이런 복이 어디 있나?”라며 우리들을 위로했다.
나이 80세면 그 당시에는 어느 정도 수를 누렸다지만 건강하시던 분이 졸지에 돌아가셔서 아쉬움이 많은데 주위에서는 호상이라며 위로했다. 그 뜻이야 알겠지만... 앞으로 어느 상가에서든 가족들에게 ‘호상’이란 말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 상이야 친구들끼리 몰려가면 조문하고 바로 쏘주잔을 나누며 동창회 분위기가 된다.
지금은 ‘병원 순위가 병을 잘 고치는 게 아니라 깨끗하고 다니기 편한 장례식장 순’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학병원 장례식장이 잘 되어 있다.
보통 자식들 직장의 상조회나 미리 들어둔 상조회사 등에서 나온 전문가들이 제복을 입고 빈틈없이 진행한다.
8월 중순 고향 친구의 병원장례식장에서 어릴 때 같이 자랐던 선후배들을 만났다. 이들은 오랫동안 ‘상조계’를 해온 계꾼들이었다. 부모님들의 연세가 높을수록 열심히 다녀야 한단다. 아직도 선산에 매장을 하는 자식들은 관을 운구해야할 상여꾼이 필요해 서로 ‘품앗이’를 하는 거란다.
이제는 매장이 많이 줄었다. 집성촌의 선산도 많이 없어져 묘를 만들 장소가 마땅찮다. 자식들이 거의 도시 생활을 하니 성묘, 벌초하기도 힘들다. 두 자녀나 한 자녀이니 다음 세대는 거의 성묘가 힘들 거다.
그래서 공원묘지나 가족 납골당을 만들고 화장을 해서 ‘수목장’까지 늘어났다. 설날, 추석 등 명절 외에는 친척들이 모여 제사를 드리는 것도 우리세대가 거의 끝물일 거다.
기독교인들은 추도예배나 미사로 대체하고 있다. 병원 장례식장에 십자가가 보이면 영정사진을 보고 절을 하는 것이 전부다. 대곡이나 호상이란 말이 사라지고 있다.
성경에 “웃는 자가 울게 될 것이며 우는 자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구절이 사람의 삶이 거의 행복과 불행의 반반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이코노뉴스]
🔷️ 치매 어머니의 자식 사랑 ~!!
사업을 하는 지인의 어머니는 98세에 돌아 가셨는데, 물론 모두들 장수하셔 호상이라고 하였지만, 몇 백년을 사신들 자식에게 어찌 장수이며, 호상이라고 여길까요?
그 분의 어머니는 근10년을 치매를 앓으셨는데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그 분의 형님 내외가 모셨다.
치매환자가 늘 그렇듯이 어머니는 집을 나가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였고, 알 수 없는 이상한 행동들을 해서 그 분 형님 내외가 무척 힘들어 했었다고 하였다.
어머니의 병이 점점 깊어 갈 즈음 둘째 아들인 그 분은 사업의 부도로 집도 잃고 아내와도 이혼을 하게 되었기에, 세상이 싫어져 노숙인 처지로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이 허무하고 더 이상 연명할 희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그는 이제 그만 생을 마감할 생각을 한 뒤, 마지막으로 어머니나 뵙고 갈 요량으로 형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를 뵈러 간다"고 전했다.
형은 어머니에게 그 말을 전했고, 둘째 아들이 온다는 말에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예전의 맑은 눈망울로 들뜨셔서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
그 날, 저녁 시간이 되어도 둘째 아들이 도착하지 않자 형 내외는 할 수 없이 어머니의 식사를 먼저 차려 드렸는데 어머니는 식사를 하는 척 하면서 식구들 눈치를 보더니 밥상 위의 음식들을 몰래 주머니에 챙겨 넣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그걸 보고 놀라서 말렸지만 어머니는 큰 소리로 악을 쓰며 맨 손으로
뜨거운 찌개 속의 건더기들까지 주머니에 마구 마구 넣더니만 혹 누구에게 빼앗기기라도 할까 봐 바로 안 방으로 들어가 문을 꽝 소리가 나도록 닫더니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늦은 밤이 되어서야 둘째 아들이 왔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하는 둘째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어느 누가 불러도 나오지 않던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방 문을 박차고 나오시더니 형 내외가 상을 차리기도 전에 어머니는 주머니에서 함께 뒤섞인 음식들을 꺼내 놓으며 말했다.
"아가, 배 고프지? 식기전에 어서 먹으렴"
둘째 아들이 어머니의 손을 보니 뜨거운데 대여 군데 군데 물집이 돋아 있었는데, 형 내외에게 좀 전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둘째 아들은 명치를 못에 찔린 듯 가슴이 아파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저 어머니를 부여 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하였다.
어머니는 다른 것은 다 몰라도, 둘째 아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는거로 보였다...
어머니는 자식 입에 밥이 들어 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서는 내 한 몸 부스러지는 것 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식에겐 바보, 천치, 멍청이다.
아무 희망 없이 살아 왔던 지인은, 어머니의 그 물집 잡힌 손을 항상 떠올리며 그가 생각했던 생의 포기를 접고 다시 사회로 나갔고 그는 죽을 고생으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 번듯한 중소 기업을 창업해 다시 당당히 일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 가신지 한참이 되었지만, 지금도 힘든 시기에 처하면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애 타는 목소리를 떠올린다고 하였다.
"아가, 배 고프지? 식기 전에 어서 먹으렴."
내겐 늘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이제는 결코 현명하지 못하시지만 그래도 어머니 모습은 아직도 내 삶의 지침이며 처방입니다.
우리 삶을 항상 지켜 봐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부모님이 계셨기에 하루 하루가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의 릴레이입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from LSM peoples
담주8일 어버이 날이 다가옵니다♡
[컬럼] 당신은 돌아갈 곳이 있습니까?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애면글면해도
정작 그 후에 돌아갈 곳이 없다면,
나를 반겨주는 이가 없다면
아니 나를 찾아주는 이가 없다면
이 얼마나 슬프고 불행한 인생입니까?
한 시인은
인생의 행복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녁때
돌아갈 가정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는 것"
(나태주 시인)
인생의 여정을 다 마치고
어둠이 깃드는 저녁에
내 영혼이 돌아갈 집이 있습니까?
인생의 막다른 문제 앞에서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습니까?
슬픔에 짓눌려 어찌할 바 모를 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습니까?
있다면 그는 진정 성공한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가복음 15 : 20)
나를 진정으로 생각하고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 주며
힘이 되어주는 사람,
또 내가 힘이 되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이루기 위해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 인생의 해답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강석준 목사의 목회컬럼 중에서 ❤
☆ 내 人生 내가 스스로 찾아서 살자 !!
여든 줄 人生은
百戰老將.
山戰水戰 다 겪고 이제는 黃昏을 맞았다.
깃발 펄럭이던
靑春은 追憶.
가슴에는 悔恨과 아픔만 남았다.
아무리 老年의 즐거움과 餘裕를
强調해도 우리들 가슴에는 어쩔 수 없이 落照의 쓸쓸함이 깃들어 있다.
더구나 自然스런
老化現像으로
身體의 어느 部分 또는 모두가 옛날 같지가 않다.
三三五五 허물없이 모인 자리에선
話題가 健康이다.
나의 靑春만은
永遠하리라 믿었는데
어느새 고개 숙인
男子의 隊列에 끼이게 된다.
老年은
快樂(貪慾)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惡德의
根源인 그로부터 解放되는 것이다.
이것은 古代 로마의
大哲學者 키케로가 죽기 전에 쓴
'노년에 대하여'에 나오는 말이다.
지난 세월, 긴 인생여정을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던 돈, 名譽, 술, 女子, 奢侈 등의 誘惑에서 이제는 우리 노인들이 소외된 것일까?
해방된 것일까?
사람에 따라, 그 觀點에 따라 解答은 다르겠지만 다만
生老病死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임은 자명한 사실이 아니던가
이제 마음가는 대로 행동해도 부끄럽지 않다는 인생 완숙의 나이,
남의 눈치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이 境地에서 더 이상 잘 난 체, 아는 체, 가진 체 할 必要도 없이 마음 편히, 내 마음 가는대로 즐겁게 살아가면 되는 것을...!
어느 한 곳이
불편해도 다른 곳 다 健康하니 祝福, 恩惠라 여기며 살자!
스스로 絶望과
無氣力의 틀 속에 가두어 두지 말고,
어느 곳에 있을지도 모를 自身의 用度, 즐거움을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
人生은 80부터라 여기며,
古木에도 꽃이 핀다 했는데 그까짓 回春이라고 안 된다는 법도 없는 것,
먼저 마음부터 젊게 가지고 자신의 체력에 알맞게 걷고 뛰고 山도 오르면서 활기차게 산다면 인생 80에는 延長戰 20年이 있음을 알게 된다.
自由롭고 여유있고 슬기로운 해방의 時期를 즐기며 사느냐,
찡그리고 사느냐는
당신의 몫이고 당신의 選擇입니다.
박경리, 박완서의 노년관, 귀천, 방하착, 꽃길 노래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박경리 선생님과 박완서 선생님. 내 어머니와 똑같은 암을 앓으시기도 했던 박경리 선생님과, 한국문학의 대모 박완서 선생님은 제가 정말 존경하는 여류작가 입니다 두 분이 노년에 쓰신 글에는 깊은 울림을 남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박경리와 박완서의 노년관(老年觀)* 그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에서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선생님, 이승의 세월이 그렇게 모질었던가요! 선생님은 돌아갈 날들을 눈앞에 두고 편안하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하셨다 합니다. ♤산다는 것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 찔러서 피 내고 감기 들면 바쁜 듯이 뜰 안을 왔다 갔다 상처 나면 소독하고 밴드 하나 붙이고 정말 병원에는 가기 싫었다 약도 죽어라고 안 먹었다 인명재천 나를 달래는 데 그보다 생광스런 말이 또 있었을까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나는 혈압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쪽은 치유가 안 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니 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 박경리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 다음은 따뜻하고 겸손한, 수줍고 맑았던, 한국문단의 어머니 박완서 선생님이 노년에 쓰신 산문집에 수록된 글입니다. ".............그래도 나는 이 나이가 좋다.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도 않다. 안 하고 싶은 걸 안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다시 태어나고 싶지도 않다. 난 살아오면서 볼 꼴, 못 볼꼴 충분히 봤다. 한 번 본 거 두 번 보고 싶지 않다. 한 겹 두 겹 어떤 책임을 벗고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 박경리 선생은 '토지'의 작가입니다. '토지'는 긴강과 같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대하소설이요,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한국인의 삶을 규정한 파란과 격동의 역사를 담아 빚은 멍품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나는 슬프고 괴로웠기 때문에 문학을 했으며 훌륭한 작가가 되느니 차라리 인간으로서 행복하고 싶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아버지와의 불화, 편모슬하에서의 불우한 성장기, 한국전쟁 중 남편의 죽음, 어린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 군사독재 시대의 폭력, 고독과 가난............ 결코 지워지지 않는 피멍 같은 것, 인간의 존엄과 소외, 이것이 박경리 문학의 기저를 이루는 것들입니다. 박완서 선생님 역시 한국전쟁으로 숙부와 오빠를 잃었던 아픈 기억들이 있었고, 1988년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사별한 후 큰 충격을 받은 선생님은 카톨릭에 귀의하였고, 지병인 담낭암으로 투병하다가 향년81세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개인적인 이런 아픔들은 그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고 그 경험들은 소설과 수필에 활용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글이 생각납니다. 고통의 골짜기에서는 절망과 쓰라림이 양조된다. 그러나 또한 품격도 제조된다. 고통의 골짜기는 영혼을 빚어내는 계곡이다. - 월터스토프- 작가는 자신의 고통과 불행을 자양분으로 삼아 자라는 존재인가요. 어쩌면 고통과 불행에 대한 자의식 없이 대작가가 되었다면 그것은 기적일 것입니다. 말년에는 두 분 모두 전원생활을 하셨는데, 박경리씨는 원주의 산골에서 박완서씨는 구리의 어느 시골 동네에서 흙을 파고 나무를 가꾸면서 빛나는 노년의 침묵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최근 '호미'를 읽었는데 텃밭을 일구며 흙과 꽃과 풀과 대화하셨을 박완서 선생님의 모습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했습니다. 두 분, 모진 세월은 다 흘려 보내셨으니, 이제 무거운 짐도 내려놓고 편안하시기를.............. 저도 더 나이가 들어 돌아갈 때가 되면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 이 노년이 너무 좋습니다. 내게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제 뾰족했던 성격은 고난의 길을 통하여 유연해졌으며, 지식만 많았던 저에게 어느새 지혜가 쌓이게 되었습니다. 집착하지 않고 하나하나 내려 놓을 수 있는 여유로움과, 사람만 아름답게 보였던 젊은 시절과 달리, 이제는 꽃과 나무, 강과 바다, 산과 하늘, 계절의 변화도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편안한 마음도 갖게 되었습니다. " 라구요. [출처] 여류작가, 박경리와 박완서|작성자 진이의 허그실천 중국 어느 노인의글 중국 어느 노인의글 나는 늙은 것을 참 행복 하다고 느낀다. 어떤 사람은 소년시절에 요절했고 어떤 사람은 청년시절에 일찍 갔고 어떤 사람은 문지방에 넘어지면서 살 수 없어 퇴직하였고 나는 하늘이 준 천수를 누리며 무사하게 살아 왔으니 이는 행운이 나 를 돌봄이니 이에 감사하고 만족함을 느낀다. 오늘 나는 늙었지만 오늘이야 말로 앞으로의 인생 중에 가장 젊은 날이다. 오늘을 꽉 붙들고 오늘을 건강하게 살고, 즐겁게 살고, 값어치 있게 살고, 멋있게 우아하게 여유롭게 살다가 예기치 않은 어느날 죽음을 맞이하여 자연으로 돌아가 흙이 되리라. 나는 늙어 지난날을 느낀다. 우울했던 소년시절이 더는 없고 기세등등하던 젊은 시절 더는 없고 세상의 많고 많은 일들 다 겪었으니 인간의 쓴맛 단맛 다 보았고 시비곡직의 마음 깨달은 바 있어 다시는 어리석게 모든 것을 맹종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일은 비람결에 날려 보내고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 것이다. 정신과 기운을 편히 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마음은 고요한 물과 같이 요동치지 않을 것이다. 해마다 지진으로 죽고 혹한으로 죽고, 혹서로 죽고, 홍수로 죽고, 병으로 죽고 폭우로 죽고,지구의 이런 사고들이 당신을 일깨워준다. 생활은 간단해야 한다. 배고프면~~먹고 졸리면 ~~자고 생각나면~~ 전화하고 보고 싶으면~~ 약속하고 좋아 하면~~ 사고 어디 가고 싶으면~~달려가고, 놀고 싶으면~~놀고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말고 어떤 때는 정말 시간이 길다 오직 기억과 생각을 친구의 마음속에 남겨두라. 여보게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값진 삶일세. 나는 늙어 자연을 느낀다. 인생은 자연 과정이다 태어나는 것도 자연이고 늙는 것도 자연이고 죽는 것도 또한 자연이다. 자연과정에서 자연을 따라야 마음이 평안하다. [출처] 중국 어느 노인의글 |작성자 스타 귀천 (歸天) - 천상병 귀천(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박선희 시인의 <아름다운 편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 오늘은... 이 말이 왠지 가슴이 아프게 와닿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에 대해서... 살아가야 할 사람의 길과 이 세상이 아닌 어디론가 떠나야 할 그들의 길에 대해서... .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죽음을 맞기 위해... 아름다운 소풍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그냥 그저 살아가는 것이 아닌 날마다 더 열심히 더 아름답게...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세상을 떠난 그들의 세상살이가 모두 아름다운 소풍이었을까요? 어떤 태도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았느냐에 따라서 천차만별 다르겠죠. 당신에게도, 마지막 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과연 당신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런지요? .내 삶은 아름다웠노라...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아름다웠다...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소중한 오늘의 삶이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꿈을 갖고 살아갑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리고 또 내일도 그 꿈을 이루고자 모두 다 애 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꿈은 무었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는것 입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꿈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되는것 입니다 작아지고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드래도 세상의 허욕 다 버리고 자기의 주어진 자리에서 겸손과 사랑으로 자기직분 다하며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해서 말이 없어도 마음을 전하고 한알의 밀알되어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 맺는다면 이 세상 소풍끝나는 날 내 삶이 아름다웠다고 말 할수 있을겁니다 오늘도 작은꿈으로 큰 사랑 이루는 소중한 하루 되시기 소망 합니다 천국의 계단은 당신앞에 열려 있습니다 작은꿈 작은 실천으로 천국의 계단 한계단씩 오르시기 빕니다 / 청석 엔스트롬의 기도하는 노인위의 그림은 원래 사진이었습니다. 미국 Minnesota 주 작은 탄광촌 Bovey에 있는 사진 작가 Eric Enstrom의 작업실에 신발흙털개를 팔러 온 Charles Wilden이라는 사람의 실제 인물을 찍은 사진인데 그의 딸 Rhoda Nyberg 가 나중에 유화로 그린 그림입니다. 로다 부인은 평생 이 그림 하나만 남겼습니다. 작은 테이블 위에 가정용 성경, 안경, 오트밀 죽, 식빵 등이 있고 그 앞에서 기도를 하는 노인의 모습인데 기도의 왕, 죠지 뮬러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제목은 Grace '감사' 입니다. Eric Enstrom은 이 노인을 처음 만났을 때 이 노인은 세상 財物은 많이 갖지 못했지만 그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졌구나. 라고 생각 했답니다. 이 사진 속에 작가는 전쟁 때문에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여전히 감사할 것이 많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自足의 감사 기도말입니다. 歸天의 祈禱초대 없이 온 이세상 정주고 받으며 더불어 살다가 내 세월 다하는 날 슬픔 없이 가게 하여 주소서 귀천의 그 날은 모두 다 버리고 빈손과 빈 마음으로 떠나기를 약속하고 왔나니 내 시간 멈추거든 그림자 사라지듯 그렇게 가게 하여 주소서 한 세상 한 세월 사랑하고 즐겁고 괴로웠던 생애였나니 이 세상 모든 인연들과 맺어 온 그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들이 허락 없이 떠나는 그 날의 외로움으로 슬프게 지워지지 않게 하여 주소서 다만 어제 밤 잠자리에 들듯 그렇게 가고 보내는 이별이 되게 하여 주소서 아울러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이 슬픔과 외로움을 잊고 세상의 삶을 더욱 알고 깨달아 굳건히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아름다운 이 세상 마지막 소망을 아름답게 이루고 아름답게 떠나가게 하여 주소서 -어느 무명 시인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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