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를 운동 삼아
최 영 미
벚꽃이 진다.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우편을 받았다. '아,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나 보네.' 생각하며 급한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검진을 받은 병원에서 내원해 달라는 전화를 먼저 주었는데, 우편물이 도착하기 전 그런 연락을 받은 경우는 처음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 고지혈증 전 단계. 고혈압 전 단계. 그래도 전 단계라고 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께서 "육류를 줄이고 야채 위주로 드시는 게 좋겠어요." 하신다. 여기서 더? 난 고기를 즐겨 먹지 않는다. 지금보다 고기를 덜 먹으려면 아예 채소만 먹어야 한다. 내 이야기를 들은 의사 선생님은 "그럼 운동을 좀 더 하셔야겠어요."라고 했다. 그래. 난 운동과는 담을 쌓고 지내고 있으니까. 그쪽이라면 바로 납득이 간다.
운동을 하기로 했다. 사실 운동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한, 제대로 된 운동을 해야 할 것 같지만, 내가 생각해 낸 건 '걷기'였다. 이것저것 고민해 봐도 선뜻 마음이 내키는 운동이 없었다. 아파트에 헬스장도 있고, 요가, 라인댄스 같은 프로그램도 있지만, 고개를 저었다. 거창한 운동을 하려는 마음은 늘 오래가지 못한다. 차라리 평소에도 즐기던 걷기를, 시간과 거리를 늘려 운동으로 삼기로 했다. 누군가 걷기는 가장 완벽한 운동이라고도 하지 않았는가.
걷기를 운동 삼기로 한 첫날,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았더니 오천 보 정도가 되었다. 차츰 걸음 수를 늘려 하루 만 보를 채우기로 했다. 집 근처 공원인 문성지를 두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오면 만 보가 채워진다. 매일매일 만 보 채우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휴대폰에 걷기 앱을 받았다. 하루 만 보를 걸으면 매일 백 원을 받을 수 있다. 적은 돈이지만 무언가를 해냈었다는 성취감이 다음 날 걷기에 동력을 더해주었다.
햇볕을 받으며, 그날의 기분에 따른 음악을 들으며 걷다 보면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이야기 봉사활동을 하는 유치원 아이들에게 들려줄 옛이야기를 외우기도 한다. 한 문장을 머릿속에 넣고 중얼중얼 외다 보면 다음 문장, 그리고 또 다음 문장을 외울 수가 있다. 일주일에 한 편의 이야기를 외워야 한다는 것이 걱정됐었는데. 걸으면서 외우다 보니 금요일쯤이면 구연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처음엔 혼자 문장을 중얼거리며 걷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이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주말엔 옆지기와 함께 아파트 뒷산을 오르기도 한다. 늘 비슷한 시간에 오르다 보니 종종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그저 보이는 것만으로도 반가움을 주는 사람들. 그 중엔 맨발로 걷는 노부부도 있다. 산 입구에 신발을 벗어두고, 그 옆엔 발 씻을 물 한 통을 두고 낮은 산을 걷는다. 그 모습을 보다 보면 저런 준비가 귀찮지는 않을까, 싶으면서도 한 번쯤 따라 맨발로 걸어보고 싶어진다.
산을 오르다 만나는 반가운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계절을 알리는 꽃들을 누구보다 먼저 만나볼 수 있다. 작고 노란 애기똥풀, 계란 프라이를 닮은 개망초. 익히 알고 있는 반가운 아이들과 함께 이름 모를 들꽃들도 나를 반겨준다. 한 번씩 휴대폰으로 몰랐던 들꽃들의 이름을 찾아보고, 사진도 찍어둔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다정한 인사도 건네본다. 걷기를 시작하고, 산을 오르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나칠 것들이다.
하루하루 그냥 흘려보냈던 시간들을, 이제는 새로운 것을 찾아보는 호기심의 시간들로 보낸다.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 아래, 꽃비를 맞으며 벚꽃길을 걷는다. 상상만으로도 포근하고 따뜻한 일을 지금의 내가 하고 있다. 일 년 남짓, 잘 걸어온 나 자신에게 격려와 칭찬을 보내 본다.
다시 건강검진을 할 시기가 돌아온다. 지나온 걸음들이 쌓여 분명 나를 더 건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또다시, 벚꽃이 진다. 꽃비가 되어 꽃길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