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
정유재란과 전쟁의 종결
정유재란에서 일본은 총병력 14만의 군세로 다시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에서도 하삼도를 청야하며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고 수군을 보내 배후를 차단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그 때 일어난 것이 칠천량 해전(…). 자세한 건 해당 문서와 원균 참고. 조선 수군이 무너지자 왜군은 바람같이 진격해서 1달만에 전라도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키고 좌군은 전라도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남하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상한다.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코 베기가 시작됐는데, 남원성 전투 전후로 왜군 장수들이 바친 코 숫자가 3,500개가 넘는다. 자세한 건 귀무덤 참조. 장수들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죽이지는 않고 코를 베기도 했고, 할당량(?)을 채운 후에는 식량을 주고 안전을 약속하는 등 백성들에게 유화적인 모습을 보인다. 난중잡록을 보면 이것 때문에 항복한 백성들이 상당히 많았다. 더불어 조선의 백성들이나 관리들을 많이 잡아갔는데, 아무래도 조선에서의 지배가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데다 노예 장사나 착취를 해서라도 전쟁에서 들어간 비용을 벌충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조선군은 흩어지거나 산성에 틀어박혀서 고립되어서 전멸을 당하는 편이고, 명군은 남원, 전주, 충주 등에 분산돼 있다가 각개격파 당하거나 후퇴했다. 이렇게 순조로운 진군이 가능했던 것은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강으로 보급이 가능했기 때문. 이에 맞설 명군은 고작 5천 안팎으로 적이 경기도, 한성을 노리는 상황까지 가자 명군은 기병 4천 명을 출격시키는데 이것이 직산 전투다. 이때 명군이 적을 크게 격퇴했다고 하는데,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로 실록을 보면 그 이후에도 일본군이 직산 근처에 남아 있거나 오히려 진격해 와서 조정이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무튼 직산 전투가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시킨 것은 확실하며 9월 중순에 적이 갑작스럽게 후퇴하자 조정은 유인이 아니냐며 다시 혼란해 할 정도였다.
일본군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후퇴했는지는 논란거리지만, 대체적으로 직산 전투로 인해 다시금 명 기병의 위력을 보았고, 명군이 빠르게 집결하기 시작했으며, 히데요시의 명령에서 한양을 무조건 공격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 등으로 짐작된다.
당시 종군 승려였던 케이넨의 일기에는 '한양을 치기 위한 회의를 했다', '한양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 같은 말이 나오고 9월 중순부터 "항구"로 가기 위한 후퇴를 하는 모습도 나온다. 즉 이 때 일본군의 후퇴에는 해상으로의 보급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보급만 잘 된다면 재차 한양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 때문에 일본 수군은 육군의 진격에 맞추어 서해로의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진격하는데, 바로 이 때 벌어진 전투가 바로 그 명량 해전. 앞선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정예 병력을 궤멸시켰다고 판단한 일본 수군은, 133척의 압도적인 수군 병력의 우세를 믿고 서해 진출을 시도했으나, 단 13척의 병력으로 서해로의 길목을 차단하고 있던 돌아온 성웅에게 다시 한 번 처참하게 박살이 나고 만다. 이걸로 서해로의 보급 가능성은 완전히 끊기고 일본 수군은 전라도 무안까지 살짝 진출했다가 후퇴한다. 육군도 보급 가능성이 완전히 끝났으니 역시 그대로 후퇴한다.
결국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로 퇴각하여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고, 이후로 전쟁은 대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와중에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에서 조명 연합군에 의해 엄청난 손실을 입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일본군이 자기들이 조선 남부에 쌓은 왜성들 속에 농성을 하여 조명 연합군이 공성 과정에서 피해만 크게 보고 함락도 못하였기에 명군도 필사적으로 싸우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결국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이 본국으로 급거 귀국하게 되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철수를 차단하려는 조명 연합 수군과 일본군의 전투인 노량 해전과 일본군이 본국으로 철수 한 후 잔존 일본군을 소탕한 남해도 전투를 끝으로 7년간의 대전쟁이 종결됐다.
4. 임진왜란의 이해
이 일련의 사태를 이해하려면 아래와 같은 지식이 필요하다.
당시 일본의 정부 체제는 조선이나 명나라 같은 중앙 집권식이 아닌, 힘 있는 영주들의 이해 관계가 맞물린 연합 성격이 강하며, 그중 제일 강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군사력 역시 통합 체제로 동원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각자 자신의 영주와 직속 상관에게만 충성했으며, 협력과 협조보다는 서로 반목하는데 더 능했을 정도다. 그로 인해 조선 정벌에 나선 병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속 병력들로 대략 20만 내외로 추산되며, 그나마도 이 20만 선봉조차 1군과 2군으로 나뉘어 서로 협력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는 개무시당하고, 1군 선봉이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2군 선봉이던 가토 기요마사의 반목은 매우 극심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결국 편을 갈라 전쟁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가토 기요마사 등은 서군 실세가 이시다 미츠나리라는 이유로 동군에 참가. 실제 서군의 대장은 흔히 알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아니라 모리 데루모토였다. 그러나 실세가 이시다 미츠나리인 이유는 모리 데루모토는 말 그대로 바지 사장이기 때문. 자세한 내막은 관련 인물들을 볼 것.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그 이후 벌어질 파워 싸움을 예측하고 전 병력을 물린 덕에 조선은 살아난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과적으로 자기 살을 깎아먹은 탓에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를 만들어준 꼴이 돼버린다. 임진왜란의 최종 승자는 다름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
명나라는 조선을 돕느라 막대한 전비와 군사력을 동원해 이후 멸망한 것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으나, 사실 멸망까지는 몇십년의 세월이 더 소요되었다. 물론 수많은 원인 중에 하나이긴 하다.
의병이라고 불리는 민병대가 독자적으로 작전을 입안, 실시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는데 이는 오해. 의병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정부의 명령을 받아 활동했고, 전쟁 초기의 혼란기가 지나간 뒤에는 사실상 관군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상당수의 의병군은 전쟁 초기에 흩어진 관군 병졸들을 모집하는 것으로 기반을 쌓은데다가, 관에서 식량, 무기, 때로는 병력을 지원했기 때문에 사실상 준(準) 관군으로 봐도 무리가 아닐 정도이다. 의병을 일으킨 주체도 의병이 아닌 지방에 있던 전현직 관리와 토호들이었으며 이는 민중 봉기의 측면보다는 기득권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측면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부와 용감하고 굳센 의병이라는 널리 퍼진 통념과도 달리 전쟁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의병 부대의 구조가 그대로 유지된 것은 선조가 의병장들에게 정식으로 벼슬을 주고 지휘권을 인정해주면서 자연스럽게 관의 영향하에 끌어들였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정식 공채로 관직에 있던 무관들과 전란 중에 무공으로 관직을 받은 의병장 출신 무관들의 알력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첨예화되어 폭발한 것이 김덕령 사건.
임진왜란때 정부측(특히 선조)이 잘싸우는 장수들을 갈궜다는 이미지가 있어 왜란 당시 조선 조정에 대한 현대인의 인식은 매우 나쁘다. 심지어 이순신 관련 교육 만화만 보면 류성룡은 왠지 이순신 장군과 친한데 들러리, 윤두수는 지 친척 승진 시키려고 잘싸우는 사람 잡아먹으려는 찌질이 정도로 표현되는 수준이니 말 다했다. 참고로 저 두사람은 다수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무능하거나 탁상공론만 했던 인물들이 절대로 아니다.
전쟁의 원인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히데요시의 정복욕이 주된 요인이지만, 조선과 명이 삼포왜란 이후로 가뜩이나 부족한 면포 수출량을 더욱 통제하자 일본의 면포값이 뛰었고, 그것이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한국 대중들에게 임란 당시 조선 정규군은 이순신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한 것이 없고 육군 중에도 권율과 같은 몇 인물을 제외하고 무능해서 의병으로 때웠다는 인식이 있지만 이는 실제와 다른 것으로 조선 관군은 비록 임란 초기에 상정한 규모를 넘어서는 왜군에 맞서 싸우는 바람에 상당히 무력한 모습을 보였으나 전쟁전 준비한 사항들이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하자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은 전적을 보여주게 된다. 당장 조선 전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소규모의 유격전. 공성전 등의 승리는 관군이 이루어낸 것이며 조선 전기때는 의병과 관군은 자주 힘을 합쳐 활동했고 후기가 될수록 의병은 관군에 흡수됐다. 사실상 이순신이나 권율 같은 눈에 보이는 큰 승리만 없다 뿐이지 일본군과 충돌하며 많은 피해를 입히고 받으며 피를 흘린 것은 조선 정부가 주관하는 관군들이였다.
또한 일본의 대군에 맞서 싸우는 소수의 조선군 이란 이미지 덕분에 조선군의 수는 적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 조선군의 수는 적지 않았다. 당장 나무위키 임진왜란 맨 위의 항목만 봐도 동원병이 무려 18만이 넘는다. 조선의 군 동원 능력은 절대 허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행정 체계는 상당히 우수했다. 다만, 조선군이 약하거나 지휘관의 무능으로 각개격파 당했을 뿐이다.(....)
실제로 고니시가 이끄는 1군 18,700명이 부산을 뚫고, 상주, 탄금대를 뚫고, 임진강 방어선 돌파까지 무려 3만에 가까운 조선군을 연달아 격파하고 한양 찍고 그 뒤로는 타 일본군과 연합하여 평양까지 뚫었다.
가토가 이끄는 22,000명은 경주를 거쳐 한양 입성 뒤, 강원도 - 함경도까지 다 뚫고 두만강 건넜다가 여진족에게 혼났을 정도.
부산 방어시 부산진, 동래성에서 격파된 조선군이 3천명. 상주 전투에서 1천의 손실, 탄금대 8천 이상. 이것만 해도 1만 2천 이상.
임진강 방어선에서 붕괴된 경기도, 황해도 조선군이 1만 3천. 여기까지 2만 5천 이상.
용인 전투로 인해 박살난 경상-충청-전라 3도 근왕군이 5만 ~ 8만. 5만 이상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약 8만 이상.
평양 방어전에서 3천의 조선군 손실. 8만 3천 이상.
이순신이 이끈 3도 수군이 1만 이상. 여기까지 9만 이상.
이후 강원도, 함경도에서 가토에게 박살난 조선군과 진주성을 비롯하여 아직 일본에게 점령되지 않고 남은 남부 지방. 주로, 전라도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 그리고 선조의 호위 부대가 1만 이상.
대충 추려서 합쳐도 10만 이상 대군이 나온다.
실록에 나온 집계로는 임진년 초기에 조선이 동원한 병력이 14만이 넘는다.
조선이 임진강 방어선에 1만 3천명을 투입하고, 후방에서 3도 근왕군 5만 ~ 8만명이 북상하자 일본측에선 크게 긴장했다. 이 당시엔 일본의 1, 2, 3군만 한양에 있어서 병력 상으로는 되려 조선이 더 많았다. 하지만 현실은 조선의 대패. 임진왜란 당시는 이러했으나, 정유재란 때는 대부분의 조선군이 농사 짓기 위해 가는 바람에 육군의 주력은 명군이 된다. 울산성 전투만 봐도 명군이 숫적으로 주력이었다.
5. 전후
임진왜란은 분명 조선이 승리한 전쟁이다. 일본의 전략적 목표는 엄연히 조선을 교두보로 삼은 명 침략 → 조선의 영토 획득이었고, 조선의 전략 목표는 일본군을 자국의 영토에서 격퇴하는 것이기 때문에, 임진왜란은 전략 목표를 전혀 달성하지 못한 일본의 명백한 패배이고, 희생을 치르기는 했으나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하게 격퇴하는 데 성공한 조선의 승리다. 전술적인 싸움에서의 결과가 어떠했든 간에 전쟁은 승패는 결국 전략적 목표의 달성 여부에서 갈릴 수밖에 없다. 전후 처리나 결과 측면에서도 조선은 분명히 일본에게서 침공 행위에 대한 사죄와 포로 쇄환 등을 받으며 국교를 회복하였다.
조선에서 엄청난 수의 포로가 끌려 가 포르투갈의 노예 상인들에게 팔리거나 일본에 정착하는 등 조선은 인적 자원 면에서도 막대한 피해를 보았는데, 일본이 끌고 간 포로들 중에는 이삼평과 심수관으로 대표되는 도자기 장인이 많았고, 덕분에 일본의 도자기 공업이 급성장하여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중국을 밀어내고 1위를 석권했으며, 유럽과 아라비아에서 큰 위세를 떨쳤다. 곧바로 명청 교체기가 도래하면서 유럽인들은 더 이상 전란으로 혼란한 중국에서 도자기를 수입할 수 없었다. 때문에 대체 공급처를 필사적으로 찾았고 여기에 일본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일본 도자기가 유럽에 수출되게 된다.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확실한 개이득을 누렸다. 단, 대륙 정벌이라는 대전략은 커녕 조선 절반 점령조차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나 피해는 당연히 전장이 된 조선이 가장 컸고, 이후 조선은 인구수와 농지가 대폭 감소한다. 특히 농업 국가인 조선은 농지가 무려 66%나 감소했으므로 국력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며, 인적 손실도 몹시 다대했다. 그 결과 나온 정책이 여민휴식. 전쟁 최대의 수혜자는 어부지리를 얻은 후금의 누르하치와 도요토미 정권을 없애고 260년의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 게다가 이에야스는 틈을 노려 사죄 퍼포먼스를 보여줌으로서 조선에서 히데요시보다 약간 나은 평가를 받는다.
대신 조선은 일본과 명분상 비교적 만족할만한 내용으로 국교 회복에 성공하고,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들어서자 여러 사정상 청-일 간의 직접 교역이 이뤄지지 않게 되어 양국 간의 육로 무역 중개를 통해 실로 막대한 무역 흑자를 누리게 되었으며 전란으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파탄이 역으로 대동법 개혁이 추진되는 계기로 작용해서 17세기부터는 가파르게 국력이 성장하게 된다. 조선측이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국가적 재난으로 인해 조선이라는 국가 체제가 재정비되는 계기가 마련된 셈.
이후 조선은 "쇄환사"라하여 포로 귀환에 힘썼으며, 이 과정에서 사명당이 활약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에는 성사되지 않고 쓰시마를 통해 제한적으로 돌려받다, 1609년 기유약조 이후 조선과의 관계 정상화에 힘쓴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본격적인 포로 송환이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1655년 효종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일본 영주들은 미녀나 장인의 경우 쇄환사가 일본에서 조선 백성들을 찾기 위해 찾아오면 고의로 이들을 감추고 조선 포로들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다.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은 아직도 고향을 그리며 바다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지키고 있다. 또한 메이지 유신 전까지도 조선식 성씨를 썼다고 한다.
유명한 인물 중엔 사쓰마 번, 가고시마 현 출신 도고 시게노리라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외무 대신을 지냈던 사람이 있다. 조선식 이름으론 박무덕. 아버지, 어머니 모두 끌려간 도공 집안이었고 박무덕이 도쿄 제국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진 계속 박씨 성을 유지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소수 민족에 대한 병합 정책에 못 이겨 사무라이 가문의 족보를 샀다고 한다. 가고시마 현 뿐만 아니라 가토 기요마사가 번주였던 구마모토 현에는 울산에서 살던 사람들이 끌려와 집성촌을 형성해서 지금도 울산町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런데 일본으로 잡혀간 포로들 중에는 조선에 돌아오기 싫어해 일본에 정착하며 살고싶어 한 사람들도 있었다. 링크 실제로 고향을 그리워한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로 돌아가길 거부한 사람들도 있어서, 조선 통신사들의 기록을 보면 쇄환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현지 정착 포로들을 보며 통신사들이 분개하거나 어이없게 생각한 경우도 많이 보인다. 이삼평 등 도공들 중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하는데, 각 다이묘들은 이들을 장인으로써, 솜씨 좋은 기술자는 사무라이'급'으로 후하게 대접해줬기 때문이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아예 뛰어난 도공에게 자기 딸을 내주며 사위로 삼아 친인척을 만들어버린 경우까지 있었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도 일본 전역에 조선 도공의 후예로 자처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한국 언론에도 소개된 사람으로는 심수관 씨가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령이 내려져 다이묘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된 상황을 맞이했어도 너무 세월이 흐른 탓에 차별은 커녕 그 지역 장인이자 유지로 굳어진 상태라서 계속 대를 이을 수 있었다.
하지만 좋은 취급은 도공 같은 특수 기술자들한테 한정될 뿐, 그 이외의 조선인들이 받은 대우는 당연히 좋지 못했다. 일본이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판 조선인들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 특히나 당시 최고의 해상 네트웍으로 리즈시절을 맞았던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일본 학자들에 따라서는 팔려간 노예의 단위는 만(萬) 단위로 보기도 한다. 선교사들은 이런 비인도적 행동을 몹시 나쁘게 생각해서 파문하겠다 위협하는 등 노예 상인들에게 경고했지만 실효는 미미했다.
일본 학자들의 표현에 의하면, 동아시아의 노비는 일종의 소작인같은 개념으로 결혼, 출산, 일부 재산 소유가 허용되는 지위였지만, 서양에서의 노예는 그냥 물건 취급받아 결혼과 출산은 물론 어떠한 인간 관계도 허락되지 않았고 그냥 죽도록 일시키다 그냥 죽게 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그랬고.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상기했던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노예 무역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던 때가 바로 임진왜란을 전후했던 때였다. 특히 서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나가 유럽, 남미 등으로 팔려나갔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
이 당시 조선인들은 아프리카인들보다 헐값에 판매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쌀 2가마 4말에 해당하는 2.4 스쿠도였으며 참고로 아프리카 노예 가격이 170여 스쿠도에 이르렀다. 이들은 마카오 · 인도 고아항 · 유럽 대륙으로 나갔다.
이러한 조선인 노예에 대한 이야기는 토스카나 공화국의 페르디난도 1세 밑에서 공직을 맡았던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1701년 에 공식 출간한 《동서인도 여행기》이 대표적으로 나온다. 한편,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의 밑그림 중 포함된 동양풍 복식을 한 남자의 그림(한복 입은 남자)을 통해 당시 유럽으로 유입된 조선인의 존재를 엿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소설가 오세영 씨가 이 그림을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해 만든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이 시중에서 큰 인기를 모은 바 있다).
참고로 일본엔 '조선 사라미 타라미'라는 말이 있는데 조선인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조선 사라미 타라미'들을 불르며 사냥했다고 한다 조선인 여자 몸종을 テルマ(테루마), 각시를 カクセイ(카쿠세이), 고운 각시를 コカセイバー(코카쿠세이)라 부르며 무참히 노예로 팔렸다.마치 조선 사람을 출장 간 왜인 무장이 가족에게 선물을 하듯 노예로 보낸 것이 과간.그 선물이 한국인들의 선조인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20세기까지도 조선 시대를 임란을 기점으로 전/후기로 나누었던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의 한국 사학계는 사림이 중앙 정치를 주도했던 16~17세기를 하나의 시기로 간주, 조선 시대를 전/후기의 양분하기보다는 전/중/후기로 나누어 보는 시기 구분론을 채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중기에는 임진왜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변화가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서울 대학교 사학과를 중심으로 조선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후로 나누는 대신 관학파/사림파/일당 독재의 3단계로 구분하는 구분법을 주장하였고, 현재 국사 교과서도 이를 따르고 있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에 의한 전체적인 국력 소모도 명과 조선에 비교해서 적은 편이고, 그냥 히데요시 집권기의 분탕질 정도로 생각하기에 임진왜란, 그러니깐 분로쿠-케이쵸의 역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 작품에서도 이 부분은 이순신만 짧게 언급하고 히데요시의 삽질이라는 것만 언급하고 넘어가는 등, 동아시아의 국제 정치적 측면에서도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갖고, 일본의 정치 사회적 격변의 시점이 되는 사건임에도 인지도가 매우 낮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히데요시가 개인적으로 일으킨 전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며 사실상 이순신 같은 일부 인물들 외에는 조선에서 명의 원군과 싸웠다는 서술이 많다. 의병들의 활약 같은 것들은 일본 기록에 나오지 않은 것들도 있어서 상당히 과장되었을 확률도 있고 사실 수전과 일부 방어전을 제외하고 수월하게 연승하며 점령하다가 중간부터 굵직굵직한 육전은 명군이랑 상당히 많이 싸우면서 진격이 멈추었으니 일본 사람들은 그렇게 볼 수도 있다. 당장 전국시대 관련 드라마만 봐도 명과 싸우러 간다고 하지 조선과 싸우러 간다는 말은 하나도 없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렇게 유명한 전국시대에서 임진왜란은 흑역사급으로 취급받는다. 기껏 얘기를 할 경우에 하는 말은 '필요 없는 전쟁이었다' 정도. 창작물에서도 "히데요시가 명을 치려다가 조선과 전쟁을 했다. 근데 졌다. 끝" 정도. 크고 아름다운(?) 영웅들의 일대기를 그리는데 자세하게 하기도 힘들었을 듯. 가토가 호랑이 잡았다, 고바야가와가 벽제관에서 명군을 조졌다, 시마즈가 사천에서 명군을 조졌다, 노량 해전에서 시마즈가 이순신을 저격했다 정도.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소설)는 무려 32권짜리 역사 소설임에도 임진왜란 부분은 한 페이지 뿐이다. 임진왜란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에서 꽃놀이 하는 부분은 몇십페이지씩 차지함에도. 소설내에서 전쟁에 대한 비중이 매우 높음에도 무려 7년씩 끌었던 임진왜란에 대한 분량이 없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같은 작가의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직전까지만 글을 쓰고 끝내 버린다. 이를 요코야마 미츠테루 7권짜리 만화로 만들었는데 마지막 페이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말년에 노망이 들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끝." 달랑 이 문장 뿐이다. 야마오카 소하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유명한 역사 소설 작가들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기 작품도,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시키면서 끝난다. 전국시대를 배경으로한 무협 소설 작가인 시바타 렌자부로의 "무사"에서 임진왜란 진행 사항이 1페이지 반에 걸쳐 기술되었는데, 고작 무협 소설보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임진왜란을 묘사한 책을 찾아 보기 힘들다.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서애 류성룡이 쓴 징비록이다. 현재까지 일본인들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성호사설에서 저자인 이익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서 번역한 저자 미상의 한 역사 평론에서는 임진왜란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수길 공이 본래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히 할 만한 술법이 없으면서 한갓 쓸데없이 군사를 일으켜 멀리 이웃 나라를 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군량과 무기를 천릿길에 운수하여 우리의 생령을 못살게 한지라, 이 때문에 신명에 죄를 얻어 그 몸이 죽고 3년이 못 되어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으며, 그 아들 수뢰공까지 마침내 원화(元和)의 전역에 죽었다. 그러므로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치는 자는 앙화를 받는다 한다.
이 외에도 강항의 간양록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있는데, 당시 강항과 대화를 했던 일본의 승려 등 몇몇은 조선의 처지를 동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강항도 간양록에서 '일본 애들 중에도 사람 꼴하고 사는 사람들은 꽤 있구나' 하는 견해를 표했다고 한다.
역사저널 그날에서 패널로 나왔던 일본 교수는 색다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며, 일본 본토와 조선에 끼어 있던 대마도주 때문에 전쟁이 확대, 장기화됐다는 주장이다. 애초에 대마도 번주는 대 조선 무역을 위해서도 조선과 관계를 적절히 유지해야 했지만, 그러면서도 일본과의 관계 또한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이 번주가 일본이 조선을 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지 여부를 염탐하기 위해 보낸 통신사를 조선이 일본의 명나라 공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항복 사절로 자기 맘대로 목적을 바꿔 전했다는 것.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자기가 명나라를 치면 온 조선이 자신의 편을 들어 합세할 것이라고 생각한 와중에 조선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반역으로 규정, 코나 귀를 베는 등의 잔인한 진압을 했던 것이라는 것.
일본의 임진왜란 관련 저작을 여러권 본 사람이 말하기를 그 어느 책도 임진왜란을 잘했다고 한 책이 없으며 언제나 무익하고 허무하다고 평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은 적어도 한 줄은 있고 비중이 높아지면 적의 장군이 아니라 "주인공“
도요토미 히데요시빠와 논쟁이 붙을 경우 임진왜란만 거론해도 한방에 데꿀멍시킬 수가 있다. 그만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생 전체에서 최악으로 삽질한 행동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일본에서는 히데요시가 말년에 치매를 앓아서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은게 아니냐는 주장까지도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한국사 전반에 대한 묘사가 그렇긴 하지만, 특히나 임진왜란 부분은 한국과의 사료 해석이 극명하게 갈리며, 조선에 대한 불명확한 묘사가 그득하다. 그 일례로 전쟁 전개 과정 설명 전 양측 전력 비교 문서에선, 조선군의 화포는 초기 사석포 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사거리가 100m도 채 안 되며, 조선의 활은 일본의 하고유미 보다 사거리가 현저하게 떨어지며 조총보다 낮은 수준이라고 수년째 아직도 명기되어 있다. 하지만 징비록에 따르면 신립이 조총을 낮게 평가했는데 임진왜란 직전 당시 고위층은 조총이 뭔지 다 알고 있었다. 소오 요시토시가 조선에 왔다 가면서 조총을 선물로 줬기 때문인데 그런데도 신립이 낮게 평가한 이유는 쏘는대로 다 맞겠냐는건데 실제로 이 시대의 조총은 명중률과 사거리가 활보다도 떨어졌다. 신립이 조총을 우습게 생각한것이 맞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였다. 다만 조총은 활과 달리 군집으로 쏘아대면 활보다 몇 배나 위력이 세다. 즉 당시 조총과 활은 장단점이 다른 무기이고, 당시 조선의 국가 체계로서는 조총 보다는 활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군제에서 조총의 사격 사거리는 활보다 더 먼 거리에서 쏘게 법으로 정했다.
8.1. 조선-일본 내의 적장 인식
조선에서 아는 일본 장수가 수괴인 풍신수길 외에 선봉장이자 외교를 담당했던 '가등청정'과 '소서행장' 딱 2명 뿐이었다. 그외에 몇명이 사서에 이름이 나와 있기는 했는데 일본 장수 이름을 한자 그대로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이라고 적으면 후대의 우리가 "아!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를 뜻하는구나!"라고 알겠지만 당시 우리 조상님들은 일본 장수의 이름을 발음이 들리는 대로 한자로 적었다. 그 바람에 사서에 나온 사람이 누군지 현재까지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서에는 보통 '왜구', '왜적', '적'이라고 표기되었을 뿐이다. 적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이는 일본 측도 마찬가지였다. '징비록'이 일본으로 전래되기 전에는 일본에서 아는 조선 측 장수라고는 '이순신', '균'(원균), '모쿠소 한간'(牧使 判官, 진주 목사 김시민), '세루토스'(함경북도 병마 절도사 한극함) 등 4명 정도이다. 이순신을 제외한 3명은 일본군에게 패전하거나 죽었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일본은 이긴 전투와 이긴 상대방만 유명해졌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그림책이 대유행 하였는데, 이런 책에서는 모쿠소 한간이나 세루토스 등이 최종 보스급으로 나온다. 이순신은 그냥 거북선을 사용한 장수로 나온다. 심지어 '균'보다 비중이 적다. 잘해야 노량 해전에서 패배하여 죽은 장수라는 개소리로 언급되는 정도. 다만 거북선이라는 것이 워낙 충격적이었는지 이순신이 등장하면 조선 수군이 전부 거북선이 되어 나온다.
이순신과 균이 누군지 더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고, 일본 측에서는 뭐가 어떻게 잘못 전달된 것인지 모쿠소 한간은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담당하는 조선 최강의 장수로, 세루토스는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를 담당하는 조선 국방의 책임자로 알고 있었다. 진주 목사 김시민의 경우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지만, 일본 측에서는 이 사실을 모른 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후임자였던 진주 목사 서예원의 목을 베고 이것을 조선 최강의 장수인 모쿠소 한간의 목이라며 일본의 히데요시에게 보냈었다. 세루토스의 경우 더 황당한데 함경도 끝까지 진격했던 가토 기요마사에게 함경 북도 병마 절도사 한극함이 항복하였다. 이를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의 국방 최고 책임자이자 북쪽 4개도를 담당하는 세루토스라고 선전한 것이다. 세루토스는 절도사의 발음이 일본식으로 변한 것인데, 김시민의 일본식 직책인 '모쿠소 한간'처럼, 일본에서는 고유명사화되었다.
이러한 일본 측의 착각은 17세기 말 류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으로 건너가 번역하여 보급됨으로서 대부분의 착오들이 바로 잡혔고 이때서야 이순신의 이름이 일본 측에도 높이 평가되게 되었다. 조선 측 장수들의 정확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으며, 일본 장수들이 활약한 전투가 이때서야 재조명되기도 하였다. 다만 '세루토스'만은 비슷한 글자도 없고 해서 끝까지 세루토스와 한극함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조선에서도 착각하여 세루토스를 조선에 표류한 외국인으로 오해한 조선 시대 기록물도 있을 정도다.
조선, 일본, 명의 3대 대첩
조선의 3대 대첩은 진주 대첩, 행주 대첩, 한산도 대첩이다. 그러나 일본측에서는 이 전투들을 잘 모른다. 모쿠소 한간 때문에 진주성 전투가 좀 유명한 정도. 행주 산성 전투는 조선내 일본군 주요 다이묘들이 초호화 드림팀을 구성해서 10:1이라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공격했다가 대패한 전투이지만 역시 잘 모른다. 17세기 경에 <징비록>이 일본에 유입될 때 까지, 일본인들은 행주 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이긴 것이 명군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조선정벌기> 같은 당시 일본책에서는 이 전투를 안남성 전투라고 부르며, 털옷을 입은 이국적인 병사들이 산위에서 내려와 일본군을 공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일본내 주요 장수들이 다 출전한 진주성 전투, 행주 산성 전투와는 달리 한산도 해전은 일본에서 듣보잡인 와키자카 야스하루 같은 C급 장수들만 출전한 전투라 일본측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반대로 일본 측에서 3대 대첩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벽제관 전투(1593년),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성 전투(1597~8년),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성 전투(1598년) 이다.
벽제관 전투는 명나라 군이 기세좋게 지원 왔다가 벽제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대패하여 평양까지 도망간 전투로 역사책에 반드시 언급되는 중요한 전투이다. 울산성 전투와 사천 전투는 한국에서는 완벽한 듣보잡. 역사 매니아 아니면 도저히 모를만한 전투이다. 울산성 전투와 사천 전투는 조명 연합군이 임진왜란을 끝내기 위한 마지막 대공세인 사로병진 작전의 일환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조명연합군이 4방향으로 병진하여 육상 방향 3군데에서 패했는데 일본은 이를 임진왜란 최대의 대첩으로 보고 있지만, 반대로 우리는 남은 한 방향인 바다에서 진린과 이순신의 조명 연합 수군의 전투 노량 해전만 중요한 전투로 기억하고 있다. 서로 이긴 전투만 기억하는 것이다. 다만 일본은 노량 해전을 이긴 전투로 계산하고 있다.
조선 3대 패전을 쌍령 전투,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으로 보고 있고 그중 두개가 임진왜란 때이지만, 왠일인지 일본은 그 두 전투를 빼놓고 듣도 보지도 못한 전투를 3대 대첩으로 분류하고 있다.
조선의 가장 큰 패배였던 용인 전투와 칠천량 해전이 아닌, 듣도 보지도 못한 전투 3개를 일본이 3대 대첩이라고 한 것은 3대 대첩의 지휘관이 일본 내에서 유명한 장수라는 점과, 조선과 일본의 전투가 아니라 명나라와 일본군 간의 전투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벽제관 전투는 평양성에서 명군에게 패배하여 몰리다가 한방에 뒤집은 중요한 전투였고, 울산성 전투와 사천 전투의 경우 명나라가 패배하기는 했지만 일본군도 처절하게 싸운 전투이다.
일본의 임진왜란 3대 전투로 이치 전투, 평양성 전투, 벽제관 전투로 꼽는 평가도 있다.
명나라에서는 평양성 전투. 행주 대첩, 벽제관 전투를 임진왜란 3대 전투로 치기도 한다.
10. 조선, 명나라, 일본의 전후 상황
10.1. 조선의 전후
조선의 역사는 명백하게 임진왜란 전과 후로 갈린다.
왜란이 일어난지 7년 동안 조선은 전국을 다 합쳐서 막대한 인명 피해와 물자 피해 등을 보았으며 전쟁동안 일본군들이 상륙하여 전국 각지를 공격하며 조선 병사들을 몰살시키고 양민들도 학살하였으며 농토와 농촌 지역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대거 참전을 하였던 영향으로 젊은이들의 피해가 컸으며 미처 피난가지 못한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처녀와 부녀자들도 잇딴 피해를 입었고 여자들은 일본군에 의해 성추행, 성폭행, 임신까지 당하는 등 육체적,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전쟁 범죄의 책임은 물론 조선군과 명군에게도 있는데, 조선군 역시 종종 민간인들의 물자를 털어먹었고 개중에는 조직적인 약탈도 있었다. 명군도 마찬가지. 명군은 남해 지역의 민간인들을 일본군의 앞잡이로 몰아 학살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조선 도적들은 이때다 싶어 힘없는 다른 조선인들을 유린하기도 했다.
문화재도 대거 피해를 입었다. 류성룡의 징비록과 이를 따른 선조 수정 실록에 따르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3궁이 방화로 없어졌고 여러 이설에 대해서는 여기 참고, 그야말로 종묘와 보신각, 사대문을 제외하고는 궁성과 육조가 다 타버렸다. 그나마도 일본군이 입성하면서 한번 더 손실을 입었다. 그 밖에 일부 사찰과 가옥들도 (당연히) 불에 타 없어졌으며 이 중 일부 문화재는 일본군이 약탈하여 일본 열도로 반출되어 버렸고 일부는 파손되었거나 완전히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없어지기도 하였다. 고려 실록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으며 조선 왕조 실록조차 전주사고의 판본 1질만 남기고 다 소실되었다.
농업 및 산업 기반도 대거 파괴 되었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150만결에 달했던 경작지가 임진왜란 후엔 30만결로 대폭 줄어들어버렸다. 이후 잇따른 가뭄과 호란, 몇십년 후 경신대기근등의 천재가 겹쳐 조선이 임란 직전의 경제 규모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은 영조 때 가서였다.
전후 조선의 국민 감정은 때려잡자 풍신수길 즉 반왜(反倭), 척왜(斥倭) 성향 및 호국 의식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전후 복구와 경제 회생 등에 총력을 기울였다.
보통 전쟁, 특히 방어전의 경우 무장들이 전공과 대중의 지지를 얻어 정치계에 큰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의 경우엔 좀 달랐다. 당시로선 고도로 발달한 중앙 집권, 관료제 국가였던 조선은 원래 공직자인 무장들은 물론 향촌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국가의 통제 아래 편입시키려 노력했고 성공했다. 무엇보다 도원수 권율이나 왜란 이후 의병 활동을 명분으로 집권한 북인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지휘관 중에 적지 않은 수가 문신이었기에 무관들이 치고 올라올 여지가 별로 없었다. 굳이 뽑자면 이순신 정도가 치고 올라갈 여지가 있었고, 선조도 이를 알기에 엄청나게 경계했지만, 알다시피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한다. 이순신의 예에서 보듯이 유능한 무장의 상당수가 전쟁에서 전사했기에 고려 말 신흥 무장들의 집권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 힘든 환경이기도 했다.
다만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재난 불구하고 조선은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학계의 주장도 있다. 파병만 했을 뿐인 일본과 명나라도 망했는데, 모든 재난을 뒤집어쓰고 나라가 초토화된 조선은 아무일도 없다는 듯 이후 몇백년을 거뜬히 버텨 나갔다. 모든 책임을 져야할 조선왕 선조가 물러나거나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죽을때 까지 더 강화된 왕권으로 호의호식 하다가 죽었다. 조선의 어떤 정치 체계가 바뀌거나 주자학 사상이 무너지지도 않았다. 워낙 중앙 집권의 관료제가 발달 되어 있어 어떤 재난을 격어도 조선의 통치 체계는 끄떡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보다 국방력이 어느정도 강화된 정도. 다만 조선 초기보다 국방력이 강화되었냐고 보자면 '글쎄올시다'이다. 그냥 사상 최악이였던 선조 초기 보다 괜찮아진 정도이다. 즉 임진왜란을 격고 나서도 바뀐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일부 분야는 조선 초기보다 퇴화되었다.
하지만 조선이 바뀐 것 하나도 없다는 주장은 이제 학계에서는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오히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일대 국란을 격고도 그 체제를 유지한 개혁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더 집중하는 추세. 즉 16세기부터 계속되었던 폐단들이 어떻게 17세기를 거치면서 개혁을 할 수 있었는가에 집중하고 있다. 예를 들면 대동법
10.2. 명과 일본
명나라는 조선에 대군을 파병한 이후로 쇠퇴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조선과 왜에 집중하느라 여진족을 방치한 탓에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청 왕조가 성립되어 심각한 위협을 주게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진년의 대기근까지 겹치며 이자성, 장헌충등 의 농민 반란이 겹쳐서 일어나며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명나라는 이자성의 반군에게 베이징을 함락당하고 숭정제가 자살하였으며, 연달아 일어난 후금의 침략으로 완전히 멸망의 길을 걷고 만다. 하지만 임진왜란 탓에 명나라가 망했다라는 말은 직접적 인과 관계가 없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미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이미 명나라는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는데 만력제가 얼마나 막장 황제였냐 하면 후한의 영제(靈帝)에 비견되는 암군이였다. 따라서 이 당시 명나라는 후한 말에 비견될 정도로 이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결국 임진왜란이 아니었어도 다른 경로로 인해 왕조가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았던 상황이었다. 다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그 시기가 앞당겨졌다고 보면 된다.
일본은 7년에 걸쳐 침공을 반복했으나 당장은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나야 했다. 침공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위신이 심각하게 떨어졌으며, 경제적으로도 도요토미 파는 막대한 물자를 헛되이 써버린 탓(다이묘들은 피해가 적었다.)에 큰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버리자, 히데요시가 억누르고 있었던 전국시대 말기의 라이벌들, 특히 파병을 회피하며 세력을 온존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일본 역사를 크게 본다면 학자와 기술자 납치, 불상과 서적 등 문화재 약탈을 통해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살던 일본 서쪽 다이묘들과 그 백성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상식적으로도 명나라조차 조선 파병으로 재정이 흔들했을 정도인데, 명나라보다 경제력은 떨어지고 병력은 더 보낸 일본이 아무 문제도 없었을 리가 없다.
또한 일본은 병사들만 보낸게 아니라 병량 등 물자의 수송을 맡은 인부들, 왜성의 건축등을 맡은 인부들도 잔뜩 보냈다.(戦夫라고 불렀다) 전후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일본 서부 지방의 백성들은 막대한 병역과 부역으로 인해 피폐해 졌으며, 이걸로 인해 반란이 일어났고, 히데요시 정권이 흔들릴 정도였다. 오죽 일본 백성들의 고생이 심했으면 1594년 서생포왜성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가 자기 영지인 히고의 인부들에게 '지금이라면 집단으로 히고로 돌아가더라도 대관의 단속이 없으니 도망치려면 지금이다"라고 지시를 내린 문서가 발견될 정도였다. 일본측 최고 지휘관 중 하나가 자기 인부들에게 도망치라고 종용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지는 알만하다. 아무튼 이 시대의 기록들을 보면 일본 백성들이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나오는데 일본 사극에서 임진왜란이 묘사될 때 비판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도 이 영향일듯. 다만, 일본에는 조선왕조실록이나 명사(역사책)같은 국가 편찬 정사 역사서가 없고, 정식 사료는 유력 가문들의 행장기 등을 통해 볼 수 밖에 없는지라 일본측이 전체적으로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는 집계하기가 힘들다.
서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일본을 지배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은 모두 이미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탓이며 자신은 오히려 그 도요토미 일족을 몰아냈고 침략에도 나서지 않았다며 전후 조선과 외교 복원을 요청하였다. 현대 시점에서 보면 매우 형식적이고 완전하지도 않았지만 전쟁 당시 일본군이 포로로 붙잡아온 조선 사람들을 어느 정도는 도로 돌려주는 사과 절차도 거쳤다. 그리하여 1609년에 조선과 일본은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화해하고, 양국 간의 통신사 사절단을 파견하게 된다.
11. 기타
• 일본군 사망자 중 군의 수장급 인물은 일본군 9군을 이끌다 거제도에서 병사한 하시바 히데카츠 밖에 없고, 다이묘 급은 당포 해전에서 전사한 도쿠이 미치유키, 명량에서 전사한 구루시마 미치후사 형제와 수원에서 매사냥하다가 조선군의 기습으로 죽은 나카가와 히데마사, 부산에서 전사한 에가미 이에타네로. 총 4명으로 그 외에 다이묘급은 아니지만 야규 가문의 후계자 역 이자 장남이던 柳生久三郞도 전사. 나머지는 모두 병사했다 나머지는 모두 돌아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6군 대장으로 참여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는 휴전 중 일본으로 귀국 후 병사했다). 이렇게 일본 다이묘들은 전투에서 패해 할복하는 경우는 많지만 전투 현장에서 전사하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그 이유는 부하 사무라이들이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필사적으로 영주를 지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인이 유독 충성심이 강해서가 아니다. 이것은 영주가 패해서 죽으면 휘하 무사들은 알거지로 떠돌이 낭인이 되고 비참하게 생활하다 죽게 되기 때문 인데, 조선에 파견된 일본 고위 무장 중에 전사자가 거의 없는 것도 이러한 일본의 사회 체제에 기인한다.
◦물론 일본군의 사단장급 인물 중에 하마터면 죽을 뻔한 인물들이 있긴 했다. 행주 대첩 당시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 사단장 급인 이시다 미츠나리, 참군 안코쿠지 에케이, 연대장 급인 킷카와 히로이에 이들 장수들이 모두 승자총통에 맞고 중상을 입었지만 병사들이 업고 뛴 덕에 다들 목숨은 부지했다. 수군에서는 함대 사령관급 인물인 도도 다카토라가 명량 해전에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 조선의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다시피 했지만 유일하게 제주도만은 전화를 피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왜구가 출몰해서 노략질을 하는 등의 피해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제주도를 공격 점령했다면 고립된 제주도는 일본에게 장기간 점거당했을 수 있었을 것이나 소규모 왜구들의 준동과 대규모 정규군의 상륙전은 엄연히 달라서 일본군은 제주도에 대한 공격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다만 이건 일본의 사정이고, 조선에서는 일본군이 제주도를 침공할 수 있다며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 제주 목사 이경록이 병력을 선발해서 본토에 지원할 것을 건의했지만, 조정에서는 제주도의 방위가 매우 우려스럽다며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대신 제주도에서 가축과 식량 등의 물자 지원을 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제주도에서 소나 돼지 등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몇 차례 나온다.
• 언어면에서는 반치음이 이쯤해서 소멸되며,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나 쓰는지도 모를만큼 많이 쓰는 주격 조사 '-가'도 이쯤해서 유입되었다(같은 역할인 '-ㅣ'는 체언에 받침이 있을 때만 쓰이게 된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으나 적자면 헤아릴 수가 없으니 각설하고, 고등학교 1학년 과정 국어와 국사를 공부하면 많은 내용을 알 수 있다.
◦국어 학계에서는 정철 어머니의 서간문에서 '가'를 발견하고, 이것이 후대의 주격조사 '가'의 전신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여기에서의 '가'는 동사 '가다'의 어간인 '가-'와 명확한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회의론자들 또한 많다. 일부 책에서 인선 왕후가 보낸 서간문에도 주격조사 '가'가 발견되었고 1550년대의 일이라고 말하지만 역사상 인선 왕후는 효종의 비이고 최소 1650년대의 일이다. 위에서 말하는 인선 왕후는 인종의 비인 인성 왕후'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주격조사 '가'가 나타났다는 구절을 보면 조금 재미있는 것이 정철의 어머니의 서간문에는 '찬 구들에서 자니, 배가 세니러서(꼿꼿이 일어나서, 여기에서는 폭풍같은 설사가 일어나서) 자주 (화장실에) 다니니'라는 구절이고 인선왕후 어필에서는 '두드러기가 불의예 도다 오르니'라는 구절로 모두 영 좋지 않은 상황에서 쓰였다는 것.]
•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이 점령한 조선 지역에서 양반 출신으로 추측되는 여자아이를 줏어다 자신의 양녀로 삼고 키웠는데 그녀가 줄리아 오타아(ジュリア おたあ)이다. 그녀는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천주교를 줄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당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 그녀는 자라면서 굉장한 미인으로 성장했는데 이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무척이나 아끼고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 천주교를 탄압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줄리아 오타아에게 천주교를 그만 믿을 것을 권유하지만 줄리아 오타아는 이를 거부하고 끝가지 천주교에 대한 신앙을 지켰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줄리아 오타아를 유배보냈는데 줄리아 오타아는 유배지에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 빵이라는 단어가 국내에 들어오게 된 것도 임진왜란 당시이다. 당시 포르투갈어 pão가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 흑인 용병들이 조선군에 고용되어 참전하기도 했다. 명과 교역하던 포르투갈의 해군에서 용병으로 일하던 흑인 노예들을 참전시킨 것. 이들은 해귀(海鬼)라 불리는 해군 잠수병으로 복무했으며, 이들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고 실록에도 기록이 있다.사실 이들이 특별히 전투 중에 이룬 업적은 없었지만, 국가 권력자가 술까지 주었다는 말이 있는걸 보아 매우 특이한 존재로 인식하긴 한 모양.
• 임진왜란때 일본에서 고추와 담배가 국내에 들어왔다. 조선 시대 이후의 곰방대는 결국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며 지금의 배추절이 김치, 통칭 묵은지 역시 임진왜란 이후부터 먹기 시작했는데 그 전의 조선의 김치는 동치미같은 백김치, 짠지에 가까웠다.
• 워해머 브랜드를 달고 나오는 미니어쳐 게임중 하나인 '워해머 히스토리컬' 시리즈 종족 중에 사무라이 시리즈가 있는데, 그 사무라이의 적 테마인 '일본과 그 적들'에서 등장하게 된 진영중의 하나가 흥미롭게도 '조선군'이다. 제작자는 모델러로 유명한 앨런 페리가 맡았다. 보통 사극에서 나타나는 모습에 따라서 포졸 복장의 안습한 조선군 모델이 출시되었는데, 마침 한국의 미니어쳐 게임 플레이어 한 명이 그 소식을 듣고 모델을 보고서는 조언을 하며 여러가지 자료를 제작자들에게 넘겨 주며 이글루스에서도 이슈화 되었다. 덕분에 제대로 된 완성품이 등장했다. 현재는 쌍검기마병(앨런 페리는 '쌍검 기마병을 실제 편제에 포함한 군대가 있었다니 하악하악'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면서 크게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쌍검이 조선 기병의 보편적인 무기가 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궁병, 신기전(화거라는 이름으로 등장), 심지어 의병이나 승병 등 질 좋은 주석 모델이 계속 출시 중.
• 또다른 보드 게임으로 일본의 워게임 전문 잡지 게임저널 31호로 일본 아마존에 재고가 있으니 일본어가 가능하고 이 게임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구입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겠다. 다만 4만원 가까운 가격은 부담스럽다.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ゲームジャーナル31号'으로 검색하면 구성 및 다양한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 31호 다운로드 주소가 있긴 하나 잡지를 구매해야 활성화시킬 수 있다.
일본에서 만든 게임이라 일본어 판이지만 한글화 자료도 있으니 이걸로 수작업 한글 패치가 가능하다. 플레이해본 일본인들에 따르면 일본군의 난이도가 매우 높다. 초반에 쾌진격을 하지만 역사대로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평안도로 튀고...바로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해 일본군이 2중, 3중으로 포위되버리는데다 일정 턴이 지나면 명군이 인해 전술을 벌이기 때문에 일본군이 각개 격파 당하기 일쑤라고. 의병의 봉기를 막겠다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 대한 점령전을 실시하려 해도 병력이 부족해서 불가능. 여기에 이순신이 보급로를 끊어버리기 때문에 일본군으로 이기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허나 이건 전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서 나온 결과일뿐, 실제로는 고니시, 가토, 구로다의 3개군만 동원해도 초반에 조선 8도를 거의 쓸어버릴 수 있다. 이후 병력을 차근차근 상륙시켜가면서 황해도로 진격하면 선조까지 잡고 일본이 승리할 수 있다. 제대로 플레이한다면 일본이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수준이다.
• 박앵귀 작가의 신작 게임인 십귀의 연에서도 일부 거론된다.
•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망이 나는 시점으로 표현한다/ 본작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많이 띄워주는 편이라 임진왜란을 보고 이에야스가 "저 인간이 미친거 아닌가?"하고 히데요시를 까는 모습을 보여준다.
• 왜란 시기에는 의병들 못지 않게 승병들도 많이 활약하곤 했다. 그 공헌이 너무 지대한 나머지 억불 국가인 조선의 사신들 조차 이들 승려들을 까는 글을 거의 찾기 드물었고 오히려 무신들이나 비불교도들을 디스하는 글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사명대사같은 경우는 일본인들이 중과 친숙하다는 특성 때문에 외교관으로 활동한 정황이 적지 않으며 훗날 선종할 당시 왕이 친히 병세를 살피고 약을 보내줬다고 했다. 이 외에도 전공에 대한 대가로 사찰에 대한 수리 등 각종 혜택이 있었는데 어떤 의미로 임진왜란은 조선 불교가 그나마 사회적 위상을 높인 계기가 되었다 볼 수 있다.
• 일본 학생들이 역사 연표를 외울 때 고로아와세로 연도와 사건을 외우곤 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은 "이국에 침입, 분로쿠의 역(異国に侵入、文禄の役)"이라 외우기도 한다. 1592가 일본어 고로와아세로 '이고쿠니(いごくに)'라고 쓸 수 있는데, 이게 '이국에(異国に, 이고쿠니)'와 동음이의어가 되기 때문. 또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온 전쟁이기 때문에 '침입'만 붙여주면 제대로 외우기 쉽다.
• 공교롭게도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은 조선 건국 200주년이다.
임진왜란? 임진전쟁?
2011년 9월말에 인터넷 상에서는 임진왜란을 2012년부터 교과서에 임진전쟁으로 바꿔서 서술한다는 소식이 확대해석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사실 이것은 2011년 입학한 고교 1학년생이 배우는 커리큘럼(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수능 사탐 과목으로 지정)부터 신설되는 "동아시아사" 과목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동아시아사는 한국사 위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새롭게 동아시아 관계를 들여다보자라는 취지로 한일 관계사 전문 강원대 손승철 교수와 한국 중세사 전문 한신대 안병우 교수가 집필한 교과서다.
"임진왜란"을 "임진전쟁"으로 표기하는 것은 전쟁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희석시킨다는 비판이 있었고, 여기에 기존 교과서에서 '일왕'으로 표기한 것을 '천황'으로 고친 것 등이 합쳐져 반일 감정이 강한 인터넷 상에서는 까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교과서가 기존의 국사를 당장 대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터넷상의 논쟁은 너무 과한 측면이 없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새로운 교과목이 나온것이지 국사를 폐지하고 동아시아사로 대체한것도 아닌데다가, 동아시아사는 통사로서 전 시대를 다루기 보다는 조선시대 위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교수는 "앞으로 한국사 교과서와 동아시아사 교과서의 차이나는 용어의 통일이 과제"라고 언급해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다.
또한 인터넷에서의 임진전쟁에 반대하는 의견 중 일부는 포인트를 잘못 잡고 있는데, 임진전쟁으로 변경하자는 주장을 친일파, 나아가 뉴라이트라는 표현을 쓰며 이명박 정부의 하수인 격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공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임진전쟁을 주장하는 안병우 한신대 교수는 대운하 반대 교수에 이름을 올렸으며 2009년 사학자 시국 선언에도 참여하였을 정도로 親정권 성향과는 거리가 있다. 게다가 1987년 5월에도 시국 선언에 참여했다.
왜란이라는 표현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는데 이는 왜란이라는 표현에 반대하는 진짜 학자들의 주장과는 다르니 인터넷 자료로 참고만 하자. 1.'왜란'이라는 용어로 '일본'을 '왜'로 비하하고 있어서, 객관적이지 못한 역사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사건의 명칭 자체에 가치판단이 개입해 있어서 객관적이거나 새로운 평가를 막고 있는 셈. 2.'왜란'이란 용어는 왜구나 조선 주재 일본인들이 일으킨 일개 '사건'을 일컫는다. 다년간에 걸친 거국적 전쟁 규모의 사건을 다루기에는 부적절하다. 3.'왜란'이라는 단어는 동북아의 균형 관계를 뒤흔드는 대사건이자 국제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의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한국군 측에 따르면 전쟁은 상호 각국간의 전술적인 대립과 선전포고 등 전술적 상황이 오간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을 전쟁으로 규명하기에 당시 조선이 왜측의 십만양병설과 같은 견해에 대개 전술적 대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벌어진 침공 사건을 시작으로 벌어졌던 사건으로 왜란이 아닌 전쟁이 시발점이 아니기에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이는 국내외에서 한국전쟁으로 명명되는 6.25 전쟁 역시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규정하고 있는 부분과 마찬가지이다.
2017년 기준 고등학교 3학년 동아시아사 과목 교과서에선 실제로 '임진왜란'이 아닌 '임진전쟁'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정유재란' 또한 '정유전쟁'으로 표기하고 있다. 앞서 서술되었듯 동아시아사 과목은 기존의 민족주의적 사학관에서 벗어나 한국사를 소개하면서 동시대의 중국과 일본의 상황을 동시에 서술하면서, '비록 역사적 갈등을 빚고 있지만 동아시아는 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함께 나아가는 협력 관계이다'라는 해당 교과목의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
12. 창작물
동아시아 3개국이 모두 참전한 대규모 전쟁이고 조선 시대 자체를 둘로 나누는 중요한 사건이어서 한국에서는 이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 편. 다만 밑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발발 이전 상황부터 발발 및 종전까지 거시적으로 전체를 다룬 작품은 의외로 드물다. 아무래도 성웅 이순신 및 졸장 원균을 위주로 한 수군의 모습이 많고 대체역사물도 많다. 소설뿐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당장 한국인에게 가장 인상 깊은 영상 매체물을 꼽으라면 아마 불멸의 이순신과 명량을 꼽을 것이다. 그나마 최근에 흐름을 탈피한 징비록이 방영되었으나 거시적으로 보자는 초반의 취지를 잃은 채 천편일률적인 선악대결로 찍어 흥행에 실패했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작품 부터가 많지 않다. 대표적인 일본 사극인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에서도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아예 생략하거나, 간접적인 묘사로 넘어가는 사례가 많다. 전국시대(일본)와 겹치고 전국시대의 인물 중 임진왜란에 참전한 인물도 적지 않으나, 일본에서도 전국시대 관련 역사는 관심 있는 사람이나 파는 분야라고 한다. 게다가 일본 입장에서 임진왜란을 다룬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주연, 못해도 중요한 조연급으로 반드시 등장시켜야 하는데,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최악의 실책인 명백한 침략 전쟁이라서 어떻게 미화할 구석이 없다. 외국에 대한 판단력 부족이나 강화 협상에서 드러난 과대 망상 등 히데요시를 긍정적으로 볼 여지가 거의 없다.
인물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벌어진 전투들도 일본에선 그다지 관심 있는 대상이 아니라서 일본 시청자/독자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가 영 어렵다. 지상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해전은 도저히 일본 입장에서 흥미롭게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7년 내내 먼치킨에게 떼죽음을 당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일본 수군의 모습만 묘사하면서 무슨 재미를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임진왜란 자체가 한일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사건이라서 관심도가 매우 크며, 아주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바로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끼치기 쉽다. 이는 창작자들에겐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임진왜란과 한일 관계 문제에 대한 좋은 예가 바로 UN-GO 거북선 논란 사건이다. 물론 이 작품 자체는 일본의 과거사에 날선 비판을 가하는 작품이고 논란이 된 거북선 장면도 결코 역사 왜곡을 위한 장면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히 연출의 실수로 치부될 수도 있었던 일이 이렇게 커졌다는 점만 봐도, 임진왜란과 관련된 소재를 이용한 창작물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간에 관심을 크게 가질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는 앞서 말한 창작의 부담으로 이어진다.
이런 이유로 일본 창작물에서 임진왜란이 등장한다면 100% 히데요시를 까는 내용이다. 만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도 간략하게나마 무의미한 전쟁이라고 거하게 비판한다. 또한 군사 간베에에서도 주인공 간베에의 시선으로 막장 상태인 왜란 도중의 일본군을 보여주며 그의 입으로 이대로는 일본이 망한다고 얘기하는등, 히데요시의 어두운 면을 다룬다면 임진왜란에 대한 비판은 꼭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