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라이딩 여행기
산이 높을수록 물은 은밀해지고
섬진강은 국내 4대강 중에서 가장 수질이 맑고 계곡의 경관이 아름답다고 한다.
강의 길이는 전북 진안군 팔공산 아래 데미샘에서부터 광양만까지 약 225 km 로서 국내 네 번째로 긴 강이다. 진안군 진암리 계곡에서 흘러든 물이 갈담저수지(옥정호)에 모였다가 흘러내리며 여러 지천을 만나 하류로 갈수록 물이 불어난다. 이 섬진강 자전거길은 임실군 강진면의 강진교 건너 인증센터가 있는 회문리 434-6 지점에서 본격적인 자전거길이 시작된다.
2018년 5월, 남해안 자전거 여행길에 광양에서 경남 하동 방향으로 건너가기 위해 망덕포구에서 섬진강대교 쪽으로 가는 섬진강 자전거길을 조금 달렸다. 남해안으로 부산에 가느라고 상류로 달려보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서 다음에는 꼭 섬진강 자전거길을 종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섬진강변에 살던 김용택 시인은 강진면 덕치마을에 살며 ‘섬진강’의 연작시를 썼다. 광양에는 홍쌍리의 매화마을이 있으며, 광양에는 30년 넘도록 만나는 친구가 살고 있어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다.
올 5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자전거로 달리려고 6명이 동행하기로 하여 체력도 길러야 하기 때문에 먼저 섬진강으로 라이딩을 계획했다. 섬진강의 경관은 매화꽃과 벚꽃이 필 때가 가장 아름답기 때문에 매화꽃이 피는 시기를 선택, 3월 10일(화)~12일, 2박 3일의 일정으로 출발했다.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자전거는 어떻게 가지고 가는지 고심했는데 자전거 여행의 밴드회원인 이대규 선생님께서 교통편과 길을 자세히 알려주시어 수월하게 출발했다.
부슬비가 내리는 10일 아침, 7시 50분에 수원터미널에서 전주행 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출발했다. 전주에 10시 30분 도착, 11시 버스로 강진에 12시쯤 도착, 터미널 옆 식당에서 다슬기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지만 다행히 비가 멎어 기분 좋은 출발을 했다. 길을 물으니 왼쪽 길로 조금 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다리 밑으로 자전거길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다리를 건넜으나 자전거길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다리였다. 개천을 따라 시멘트 포장길이 있어 그 길로 가다가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다시 길을 물었다. 조금 더 개천을 따라 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그곳에 자전거길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길이 끝나는 곳은 다리목이었다. 다리를 건너려면 길 위로 자전거를 들고 올라가야 했다. 다리를 건너는데 개천을 따라 자전거길이 보였지만 인증센터가 보이지 않아 차도의 삼거리로 가니 인증센터가 나왔다. 바로 옆에 카페가 있어 들어가 길을 물었더니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개천으로 내려가 오른쪽 길로 강을 따라가니 섬진강종주 자전거길 표지판이 나왔다. 섬진강 자전거길 출발점이라는 표지가 다리목에 있었다면 얼마나 쉽게 찾았으랴.
가다가 네비에 김용택 시인의 이름을 올리니 김 시인의 생가가 있는 ‘덕치면 장암리 진메마을’이 나왔다. 네비를 보며 강을 끼고 휘돌아 달리다 보니 ‘김용택 시인의 집’ 표지판이 나왔다.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정자나무와 정자가 있다. 그 옆에는 ‘시 쓰는 느티나무’ 라는 게시판에 김옥희의 ‘초겨울 밤’ 이라는 시가 걸려있다. 시인의 마을다웠다.
30년 전 김 시인의 시집 ‘섬진강’을 읽었다. 그는 풋풋한 시골말로 농촌과 강마을의 삶을 매우 곡진하게 표현하여 크게 감동했다. 많은 독자들이 그의 시를 좋아했다. 그 후 김 시인은 TV에도 여러 차례 나왔고 영화 “시”에도 출연했다. 시골 오지 학교에서 학생들과 생활하는 모습이 순수하고 천진해 보여 매우 신선했다. 그 뒤 그는 한국 유명 시인이 되었고 명강사가 되어 전국에 강의를 다녔다.
누군가의 글에서 김 시인의 집을 사진으로 보았다. 지금 새로 짓고 있는 한옥이 바로 김 시인의 생가였다. 그 한옥, 그 옆과 뒤에 있는 매끈한 양옥. 그 양옥집이 김용택 문학관일 거라고 여겨 가까이 갔으나 아무런 간판이나 현판, 또는 문패도 없다. 지나가는 동네 사람이 있으면 물어보고 싶었으나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이 여행길에서 김 시인의 마을에 들리면, 김 시인을 뵙게 되면 차 한 잔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만날 생각하지 마세요. 실망할지 모릅니다.”라는 말을 해 준 이가 있었다. 그래서 뵙고 싶은 마음을 접고 집만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자전거 길로 돌아 나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쉽고, 기대와 환상이 깨질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김 시인을 찾아올 건데 찾아오는 사람들을 모두 반갑게 맞이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날씨마저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바람이 드세 차갑고 음울했다. 그분의 문학관이 있다면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발 하나 들여 놓을 곳을 찾지 못해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다. 마을 앞을 반원으로 휘돌아간 강물, 그 강물 앞에 정자나무가 좌우에 하나씩 우람하게 서있다. 유서 깊은 마을이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더니 결국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다보니 개방된 비닐하우스가 나왔다. 그 안에서 우비를 꺼내 입었다. 자전거 짐바에 얹은 배낭도 덮개를 빼, 감쌌다. 다행히 가는 비가 몇 방울씩 떨어지는 정도여서 자전거를 타는데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있었지만 날짜를 바꾸기 어려워 비 맞을 각오로 출발했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또 ‘내일은 맑을 거라니 하루만 참자.’ 하고 감내하며 달렸다. 코로나 때문인지, 비가 오기 때문인지 순창까지 가는 동안 한 사람의 라이더도 만나지 못했다.
장군목에서 다리를 건너 조금 내려오니 마실오토캠핑장이 나왔다. 자전거인증부스에서 메모 수첩에 도장을 찍고 나와 화장실을 이용했다. 울창한 산 속에 예상 외로 곱게 꾸민 숙박시설이 있다니 놀랍다. 시간만 있다면 하루 자고 가면 좋겠다 싶었다. 장군목 부근에는 우람한 산이 하늘을 가리고 물이 많이 불어 있다. 높은 산이 가려주기 때문인지 강물이 은밀하게 흘렀다. 산에 갇힌 호수처럼 강폭이 넓었다. 깊은 계곡을 지나야만 물이 맑아지는지, 아늑한 숲이 있고 강물이 풍부해 여유로워지는 공간이었다.
강변을 따라 달리다 좌측으로 구미교를 건너 밭 옆의 좁은 시멘트길을 달리는데 강가의 밭에 두릅나무가 잘 가꾸어져 있다. 컨테이너 농막이 있는데 마침 밭일을 하는 분이 있어 자전거에서 내려 인사를 했다. 순창으로 가는 길도 여쭙고, 두릅나무 재배에 대해 여쭈어 보고 싶어 인사를 드렸다. 교직에서 퇴직하고 자전거 여행을 하는 중이라 하니 반가워하시며 자신도 교직에서 은퇴했다고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제안하셨다. 농막 안으로 들어가니 세면실, 침대 등 간단한 살림살이와 보면대와 색소폰이 있었다. 전주에 살면서 주말농장처럼 다니며 농사를 짓고, 취미로 악기 연주도 한다는 것이다. 은퇴 후, 여유롭게 사시는 것 같았다. 코로나가 사람들을 기피하게 하는 즈음이라 낯 선 사람을 꺼릴 시기인데 친히 방에서 커피를 끓여 주시어 고마웠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나와 자전거길을 따라가며 순창 금산여관으로 달렸다.
채계산을 지나 적성면 운림리에서 유화로의 낮은 다리로 섬진강을 건너려다 네비를 확인했다. 하천변 자전거길에서 지방도로로 올라가니 지북사거리였다. 지북교를 건너 순창읍을 향하여 오르막을 올랐다. 1 km 정도를 올라가니 내리막이 나오는데 상당히 힘이 들었다.
한두 달 전, TV의 어느 프로에서 금산여관을 소개하는 방송을 보았다. 이 여관은 보통의 시골집 같다. 여기에 투숙한 여행자들이 서로 어울려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매우 서민적인 여관이었다. 그런 장면이 매우 휴머니틱해서 기회가 나면 가보고 싶었다. 누가, 어떻게, 왜 그렇게 운영하는지 취재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자전거길에서 벗어나 순창읍내로 들어가 이 여관을 찾아간 것이다. 순창군청 쪽에 있어 이정표를 보고 찾아가니 순창 도서관이 먼저 나왔다. 네비로 찾으려 했으나 방향이 잘 잡히지 않아 여관 주변에서 조금 헤맸다. 길을 물어 찾다보니 골목 안에 허술한 기와집, 금산여관 간판이 보였다.
들어가니 마당 가운데를 화단으로 꾸민 시골집이었다. 30대의 여자가 나와 안내를 해주었다. TV에서 본 사람이 아닌 것 같아, TV에 나온 분이냐고 물으니 그 분은 1년 전의 주인이라 했다. 자신이 이 집을 인수한 것은 1년이 되었다며 내가 본 방송은 아마 재방송한 것을 보았을 거라 했다. 김이 빠졌다. 만나지도 못할 사람인데 섬진강을 벗어나 산 고개를 힘겹게 넘어온 것이다. 방송에서는 이 집에서 식사도 가능한 것으로 보았는데, 여기서는 사 먹을 수도 없다니 잘못 왔다 싶었다. 방도 오래된 시골집이라 방안에 TV, 컴퓨터, 테이블도 없었다. 여인숙 수준이었다. 게스트하우스처럼 운영했던가 보다. 다른 여관을 찾아갈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자전거를 끌고 다시 숙소를 찾아가는 게 번거로워 방값을 주었다. 방으로 여주인을 따라 들어가 설명을 들었다. 순간온수기를 틀면 물이 금방 뜨겁게 나오니 데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과 온수 사용법을 알려주고 나갔다.
배낭을 방에 두고 옷을 갈아입고 저녁을 먹으려고 여관을 나와 식당을 찾아갔다. 매운탕을 주문하니 2인분 이상만 해준다고 다른 걸 주문하라 했다. 무엇이 있느냐고 물으니 청국장이 있다고 했다. 청국장을 기다렸다. 방이 여러 개인 꽤 큰 식당인데도 방 하나에만 손님이 몇 명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식당 영업이 한산해진 것이다.
밥을 먹고 시내를 산책하고자 큰 길로 나오니 7080 주점들이 여러 개가 보였다. 왜 군청, 시청 주변에 유흥 주점이 번성하는가? 업자와 공무원의 향응 관련은 아닌지 모르겠다. 조금 더 하천변으로 걸어가니 경천교가 나왔다. 경천교 아치 난간이 빨갛고 파란 조명으로 불이 켜져 쌍무지개가 뜬 것처럼 아름다웠다. 천변에는 정자나무와 정자가 있어 운치가 있었다. 하지만 흐리고 차가운 날씨라 더 걷고 싶지 않았다. 아침 일찍 식당이 문을 열 것 같지 않아 조그만 구멍가게에 들어가 빵을 사려니 빵이 없다. 구운 계란과 사발면을 샀다. 하천변을 돌아가는데 좀 큰 마트가 또 나와 들어가 빵을 찾으니 요즘에는 빵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조그만 비스켓 같은 과자를 권했다. 그거라도 간식이 될 것 같아 사 들고 여관으로 들어오는데 주인 여자 둘이 식사하러 간다고 외출을 했다. 둘이 공동으로 운영하는가 보다.
방으로 들어와 몸을 씻고, 여행하며 메모한 수첩의 내용을 보았다. 다음날 섬진강 자전거길을 찾아가기 위해 순창군 지도를 보았다. 향가유원지로 가는 길이 여관에서 가까웠다. 코로나 때문인지 여관에는 숙박자가 나 혼자뿐이었다.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적막했다. 이 조용한 고요로 마음이 푸근해져 잠도 편안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여관의 주방에 들어가 포트에 물을 끓여 사발면에 부어 방으로 와서 계란과 함께 아침을 간단히 해결했다. 몸을 씻고 짐을 챙겨 자전거에 싣고 8시 20분에 출발했다.
경천교를 건너 개울을 따라가다가 상촌리, 대가리를 지나니 향가터널이 나왔다. 자동차 네비를 보니 향가터널을 스쳐 지나치도록 안내했으나 향가터널을 지나면 섬진강 자전거길로 연결되는 것을 지도에서 보았기에 과감히 터널로 들어갔다. 자동차는 다니지 못할 만큼 좁은 터널이지만 다행히 전등을 달아 그리 어둡지 않았다. 터널을 통과하니 바로 다리로 이어져 섬진강을 넘어갔다. 향가교였다. 다리는 주황색으로 새롭게 도색되어 산뜻했고, 투명한 아침 햇살이 바쳐 강 위에서 강줄기를 내려다 보니 기분이 매우 상쾌했다. 정자와 벤치도 있어 잠시 쉬어 가기 좋은 공간이 있었지만 사진만 몇 장 찍고 달렸다. 날씨도 어제와는 확연히 다르게 매우 청명했다. 화창한 햇살이 어제의 음울한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참 기분 좋은 주행이었다.
섬진강 본류가 어미 강처럼 흐른다면 여러 개의 지천은 새끼 강 같다. 어미가 새끼를 거느린 것 같다. 남원에서 흘러드는 요천과 만나는 섬진강, 그 휘돌아간 넓은 강가에 횡탄정이 있다. 횡탄정이 나오기 직전에 보인정이 있고 보인정에서 네시 방향의 한쪽에 인증센터가 있다. 보인정에서 잠시 쉬고자 자전거를 세워놓고 어제 식당에서 준 부침개를 먹었다. 잠시 뒤에 한라봉과 비스켓을 먹으려고 꺼내놓았다가 사진 몇 장 촬영하고는 한라봉을 잊고 정자의 마루에 두고 왔다. 건망증 증세가 심해 걱정이다.
섬진강을 따라 굽이굽이 달리는데 물이 많은 곳, 시야가 좀 괜찮다 싶은 곳에는 전원주택이 들어섰거나 팬션으로 개발되어 모양 좋은 집들이 곳곳에 있었다. 횡탄정부터 가정역과 은곡마을, 곡성천문대를 지나 압록교를 건너기까지 여러 곳에 예쁜 집들이 있었다. 누가 이렇게 좋은 자리에 집들을 지어 놓았을까. 몇 년 전 노르웨이 여행을 할 때 강변이나 해변에 있는 별장들을 보며 부러워했는데 우리나라도 그렇게 부러운 집들이 많아졌다. 국민소득이 높아져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삶의 질은 소득과 관련이 깊다.
자전거로 달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뜻밖에도 자전거 밴드 회원인 이대규 선생님의 전화였다. 오늘 남원에 일이 있어 왔는데 구례구역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 하자고 했다. 고마운 일이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을 따라 달리는데 강 위로 높게 현수교가 공중에 걸쳐 놓은듯이 가로 놓여있다. 산중턱에 있는 가정역에 연결되었는데 지금은 폐역이고 레일바이크의 종착지이다. 그곳엔 카페도 있고, 섬진강 기차마을 펜션이 조그만 기와집으로 운치 있게 자리잡고 있다. 가정역이나 카페에서 섬진강을 내려다보는 전망도 멋진 장면이 될 것 같았다. 5 km 상류인 침곡역에서 레일바이크를 타면 바로 이 가정역에서 내리게 되는 종점이었다. 자연도 저렇게 인공을 만나야 클라이 막스가 된다.
잠시 달려가니 한옥을 잘 짓고 정원을 잘 꾸며놓은 전망 좋은 한옥 두 채가 나왔다. 잠시 멈추어 사진을 촬영하고 자전거로 출발하는 순간 한 라이더가 다가왔다. 출발을 하지 않았으면 이야기를 걸어볼 건데 이미 출발했기에 그냥 달렸다. 그 라이더도 내가 머물렀던 자리에 멈추어 사진을 촬영했다.
강변길을 달리다 구례구역으로 가기 위해 네비를 보고 섬진강을 건너는 예성교로 섬진강을 건너 좌회전하면서 바로 보성강을 건넜다. 이어서 압록교를 건너 17번 섬진강로를 달려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잠시 후에 도착한 이대규 선생님과 친구 분인 노원채 선생님을 만났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느라 전화와 문자는 주고받았지만 처음으로 만났다. 인사를 나누고 역의 바로 옆, 섬진맛집 식당에서 메기 매운탕으로 점심을 했다. 이 선생님이 사주신 푸짐한 메기 고기와 시래기의 맛이 좋아 매우 고마웠다. 이 선생님은 사진촬영에도 일가견이 있어 사진을 몇 장 촬영해주었는데,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뒷모습도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보내주셨다.
이 선생님의 소개로 구례군 토지면에 있는 운조루를 가기 위해 섬진강 자전거길을 벗어나 구례교를 건넜다. 19번 섬진강대로를 따라가다 길을 건너 조그만 연못에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 운조루 앞에 도착했다. 90세 전후로 보이는 할머니가 대문 앞에서 의자에 앉아 입장료를 1,000원씩 받았다. 그 가계의 종부(宗婦)라 했다. 허가된 요금은 아니겠지만 따질 일도 아니어서 곱게 드리고 들어갔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전형적인 고택이다. 지금은 불편해서 어떻게 살까 싶을 정도로 허술하지만 당시에는 대부호의 집이었으리라. 쌀 두 가마 반이나 들어가는 아름드리 나무 뒤주다. 이 쌀통 아래에 명함 크기의 구멍을 내놓은 사각 조각문이 있다. 먹을 게 없는 사람들이 그 구멍 문을 열어 쌀을 꺼내다 끼니를 이었다고 전해오는 뒤주다. 이 뒤주의 사각 문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사자성어가 쓰여 있다. 그렇게 덕을 베풀어 민란, 동학, 여순사건, 6. 25 전쟁 등의 환란을 겪었지만 이 집이 건재할 수 있었다고 씌어 있다. 이런 고택을 보는 것은 다른 곳에서도 가능하나 이 타인능해라는 교훈은 이 집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일 것이다.
운조루를 나오려는데 자전거를 타고 온 30대 여성이 혼자 들어왔다. 순천에서 광양을 거쳐 매화마을에서 왔다하여 그곳으로 가려 한다니 서둘러 가야 볼 수 있겠다고 했다.
운조루를 나와 500m쯤 떨어진 이 마을의 곡전재로 갔다. 높은 돌담 사이로 대문을 낸 이 집도 대문에 요금 상자를 놓고 1,000원이라 써 놓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2m 정도의 소나무가 정원 가운데 있고 마당 가운데로 조그만 물고랑에 맑은 물이 흘렀다.
집의 오른쪽에는 조그만 못이 있고 못 가장자리에는 대나무가 촘촘히 자라있다. 대청마루에는 묵직한 원목 상 두 개가 놓여있다. 행랑채를 지나 안채로 들어가니 마당이 나오고 안채의 양 옆으로는 정원수가 크지 않지만 안정감 있게 자라있다.
운조루보다는 규모가 작아 금방 보고 19번 도로로 네비에 화개장터를 목적지로 설정하고 달렸다. 강변길로 자동차들이 빠르게 지나가 갓길로 주의해서 달렸다. 화개장터가 나와 잠시 내려갔지만 화개장터에는 세 번째 온 터라 기대감이 없어 바로 나와 섬진강 자전거길을 찾았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매화마을인데 해가 기울기 시작했기 때문에 길을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섬진강자전거길이 보이지 않아 네비에 목적지를 매화마을 축제장으로 설정하고 19번 도로로 달렸다. 역시 일반 도로라서 옆으로 자동차들이 쉭쉭 지나가 긴장을 하고 달렸다. 화개장터에서 남도대교로 섬진강을 건너 좌회전하면 자전거길이 나온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달리다가 강 건너를 보니 하얀 꽃들이 많은 산이 보여 그곳이 매화마을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그런데 강폭은 넓고 다리가 멀리 있어 섬진교까지 약 3 km를 달려가 섬진교를 건너 다시 3 km를 거슬러 올라가 매화마을에 도착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경사가 심해 자전거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오르는 길가에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지금 막 피어나는 신선한 꽃이었다. 그런데 해는 기울어 산그늘이 산마을로 내려왔다. 커다란 눈송이가 나뭇가지에 매달린 것처럼 꽃들이 피어나 산마을을 하얗게 덮었다.
오르다 보니 매화문화관이 나왔다. 시간이 6시가 넘어 매화문화관에는 문이 닫혔을 거라 여기고 들어갈 생각을 안 했다. 잠시 후면 어두워지기 때문에 꽃을 보기도 바쁜 시간이었다. 산마루에서 산기슭에 피어 있는 매화와 섬진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여러 장 촬영했다. 관광객들에게 사진 촬영의 봉사를 해 주고, 나도 촬영을 의뢰하여 몇 장 찍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하고 있다. 사진 촬영을 위해 휴대폰을 주고받는 일도 주의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사진 촬영 의뢰했을 때 거절하는 이는 없었다.
매화 밭길은 대부분 오르막이었다. 자전거를 끌고 가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들었지만 오르막으로 오를수록 매화꽃은 더욱 푸지게 피어있다. 해는 서산에 넘어갔지만 여명이 있어 어둡지 않았고, 하얀 매화꽃으로 덮인 마을은 꽃등이 켜져 세상이 밝아진 것 같았다. 참으로 그윽한 해질 무렵의 강마을, 드러누운 섬진강이 알몸으로 드러나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Z자 모양으로 오르는 길, 많은 사람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멋진 장면을 촬영하여 간직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조지훈의 “매화송‘ 시가 둥근 바위에 새겨져 있다. 광양매화문화관 옆에는 옥매화의 배경에 홍매화가 몇 그루가 피어 부끄러워하는 색시의 볼처럼 붉다. 아니 사랑으로 뜨거워진 화끈한 가슴 같다. 눈송이가 쏟아진 것 같이 넓게 퍼진 옥매화, 그 사이에 붉게 핀 홍매화가 어우러져 흰색을 바탕으로 붉은색이 돋보였다.
매화밭을 돌아드는 산기슭에 멋진 정자가 있다. 정자 옆 둥근 돌을 쌓아 만든 돌담길, 지나가면 다시 못 볼 귀한 장면이라서, 지나치기 아까워서 잠시 정자에 올라 매화 꽃밭과 섬진강을 조망하며 머물렀다.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가운데에 조그만 기와집 한 채가 새침하게 놓여있다. 정말 꽃대궐 속의 그림 같은 집이다.
15년 전 쯤, 매화가 절정일 무렵, 이 마을에 왔었는데 그때는 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여서 매화의 화려함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매화나무가 지금보다 훨씬 컸 던 것 같은데, 길과 주변 조경이 훨씬 잘 되어 있어 옛 기억과 일치하는 장면이 별로 없었다. 마을길도, 꽃밭의 조경도 새로 조성했나 보다.
날이 어두워져 잠자리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민박집에 전화를 하니 코로나 때문에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114에 여관을 문의하니 광양 시내에 있는 여관을 알려주어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자동차로 30분을 가야 한다니 자전거로는 더 긴 시간을 달려야 한다. 오늘 매화마을에 늦게 도착해 꽃을 제대로 보지 못해 이 마을에서 자고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다시 꽃구경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 문의하여 마을에 있는 민박집을 찾아냈다.
매화사랑식당 바로 2층이 매화사랑펜션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방이 딱 하나가 남아 있었다. 4만원에 방을 얻었다. 방을 얻고 나니 바로 방을 찾는 이가 또 둘이나 있었다. 이곳에서 700 m 내려가면 모텔이 있다지만 이 민박집이 깨끗해서 혼자 자는 데는 이곳이 나을 것 같았다.
방에 배낭을 놓고 내려와 1층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려는데 마땅한 음식이 없어 올갱이 비빔밥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건너 자리에서 혼자 식사하는 남자 분이 있어 인사를 드렸다. 식사를 마친 것 같아 내 자리로 모셨다. 상명대에 근무하다 퇴직하신 분이었는데 이 분 역시 혼자 여행을 오셨다. 오늘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자전거로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화개장터를 보고 점심때까지 올라간 후, 점심을 먹고 내려와 자동차로 천안에 돌아갈 계획이라 했다. 술도 드시지 않으면서 내가 술과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말벗이 돼주어 고마웠다.
방으로 돌아와 가족에게 전화로 안부를 전했다. 수첩을 꺼내 메모한 내용을 보면서 글을 정리하다 자리에 누웠다. 편하고 깊은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아침 7시에 밖으로 나왔다. 민박집 길 건너의 동산에 수월정이 있다. 섬진강을 조망하기 좋은 자리였다. 아침 식사를 하러 1 km 떨어진 식당으로 자전거를 타고 갔다. 어제 민박집의 식당에서 메뉴를 보니 고기류의 메뉴와 매운탕 등, 혼자 먹기에 과분한 음식들이었다. 국밥이나 한 그릇 먹고 싶어 다른 식당을 찾아가며 섬진강도 구경할 겸 상류 쪽으로 조금 달렸다. 날은 화창했지만 봄은 아직 이른지 아침 공기가 싸늘했다.
식당으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다. 마침 쇠고기 국밥이 있어서 혼자 한 그릇을 시켜 먹었다. 식사 후에 매화꽃이 만발한 매화 꽃밭으로 올라갔다. 잠시 오르는데 하얀 점퍼와 흰 모자를 쓴 여자가 혼자서 올라오며 셀카를 하고 있다. 사진을 촬영해주겠다고 했더니 휴대폰을 주었다. 몇 장 찍어주고 나도 사진 촬영을 의뢰하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을 했다. 어제 포항에서 왔는데 차에서 자고 아침에 나왔다고 했다. 예상 밖으로 추워서 히타를 틀고 잤다는 것이다. 밤에는 많이 추웠을 텐데, 또 의자에 기대고 잠을 이루느라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녀는 오늘 이 매화마을을 구경하고 여수로 가려 한다고 했다. 산으로 점점 오르며 커다란 고사목이 있는 산 중턱까지 올라가 섬진강을 조망하고 내려왔다. 이제 나는 라이딩을 시작해야겠다고 포항 댁에게 인사하니 그녀는 혼자서 좀더 구경하겠다고 하여 매화문화관 앞에서 작별했다. 민박집으로 돌아와 몸을 씻고 짐을 챙겨 자전거에 오른 시간은 10시였다.
섬진강 매화마을을 등지고 경서대로에 있는 섬진교를 지나는데 강폭이 매우 넓어져 강변 경관이 좋았다. 잠시 내려 사진을 촬영하고, 또 달리다가 거북등터널 앞에서 내려 사진을 촬영하고 매화마을, 운치 있는 섬진교와 석별하였다.
달리다보니 재작년 남해안 라이딩 때 본 망덕포구가 나왔다. 광양에서 이 길을 달리다 자전거를 들고 남해고속도로를 일반 도로로 잘못 알고 들어가 달린 것이다. 지나가는 차들이 자꾸 크락션을 울려 기분이 언짢았는데 고속도로였기 때문이었나 보다. 섬진강교를 넘고 하동IC도 통과한 채 달리고 있는데 경찰 순찰차가 다가와 정지하라고 했다. 누군가가 경찰서에 신고했던 모양이다. 내 자전거는 고속도로 순찰차에 싣고, 나는 경찰 순찰차를 타고 진월 IC로 나왔다. 정말 섬뜩한 일이었다.
그때는 윤동주 시를 보관했던 정병욱 박사 생가를 찾지 못하고 지나치게 되어 매우 서운했었다. 오늘은 마침 시간이 넉넉하여 정병욱 박사의 생가를 찾아가고자 네비로 목적지를 정하니 조금 전 지나쳐 왔는지 조금 뒤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바로 인근이었다. 네비가 도착지라고 하는데 정병욱 씨 집은 보이지 않았다. 높은 철제 판넬로 벽을 만들어 놓아 공사장 출입을 막기 위한 담장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집이 정병욱 생가였다. 왜 그렇게 판넬로 막아 놓았을까? 주변에 사람이 없어 물어볼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어, 주변을 새롭게 조성하기 위해 공사를 하느라 사람들의 출입을 막아 놓은 것 같았다.
판넬 담장을 자세히 보니, 철제 판넬 벽에 학생복 차림의 윤동주와 정병욱 씨의 사진이 게시 되어 있다. 높은 판넬 사이에 투명 비닐로 막은 곳이 있어 안을 들여다보니 그게 바로 정병욱 박사의 집이었다. 옛날 가게처럼 조그만 한옥에 여러 개 좁은 밀창으로 닫혀 있는 옛날 하꼬방 같은 집이었다. 맞다, 이곳이 정병욱 생가다.
윤동주가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시집을 내려 했으나 이양하 선생님이 일본 경찰의 검열에 걸릴까 염려하여 출판을 보류 시켰다. 그래서 윤동주는 공책에 세 권을 필사하여 한 권은 선생님께, 한 권은 자신이 갖고, 한 권은 후배인 정병욱씨에게 주었다. 그가 그 공책을 소중히 보관했다가 해방된 후인 1948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윤동주의 시집을 발간하여 빛을 본 것이다. 그 시집의 서문격인 ‘서시’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다. 그런 곡절을 거쳐 알려진 ‘서시’와 윤동주는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 중국인들까지 좋아하고 있다. 정병욱 씨가 그 공책을 잘 간수하지 못 했거나 그 공책의 시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윤동주라는 시인은 우리 역사에서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참 아슬아슬한 장면이다. 그야말로 천행이었다. 윤동주는 해방을 조금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렇지만 그의 후배인 정병욱에 의해 그의 시가 한국인의 명시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그런 사연을 간직했기에 정병욱 씨의 생가가 광양시의 명소가 된 것이다.
정병욱 씨의 생가를 벗어나 조금 더 달리자 배알도로 건너가는 태인대교가 나왔다. 망덕포구에서 바로 대교에 올라 좌측 인도로 다리를 건널 수도 있었으나 우측통행이 일반적이어서 다리 밑을 통과하여 우측 인도교로 다리를 건넜다. 네비가 배알도수변인증센터를 다리 우측으로 안내하여 배알도를 반 바퀴 돌아가느라 시간도 더 걸리고 길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태인대교를 건너 다리 밑으로 우회전 하면 바로 배알도수변공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모르고, 네비를 따라 배알도를 반이나 돌아서 겨우 찾은 것이다.
자전거 네비인 오픈라이더는 달리는 중 화면이 자꾸 꺼져 네이버 자동차 네비를 주로 이용하니 자동차길로 안내하여 자전거길과 어긋나기 일쑤였다. 배알도인증센터에 가니 넓은 섬진강이 둘러 싼 섬이요 공원이었다. 캠핑카도 있고 텐트를 친 이도 있는데 화장실도 잘 만들어 놓았다. 시간을 보니 1시 30분이었다.
인증센터에서 수첩에 도장을 찍고, 구운 계란과 비스켓을 먹었다. 광양중마버스터미널에서 수원행 버스가 5시 30분에 있다니 시간이 여유로웠다. 배알도수변공원 앞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조그만 무인도가 있고 섬의 정상에 정자가 있었다. 그 섬까지는 아치교로 연결되어 있다.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너 자전거를 데크 난간에 묶어두고 정자에 올라갔다. 산의 정상에 있는 멋진 정자는 해운정(海雲亭)이었다. 산 위에 자란 소나무가 시야를 가려 망덕포구는 거의 볼 수 없었고, 동쪽과 남쪽의 바다만 약간 보였다. 정자가 아름다웠지만 나무가 시야를 가려 전망은 좋지 않았다. 섬에서 내려와 중마버스터미널을 네비로 찍고 배알도 안쪽으로 들어가 차도의 가장자리를 달렸다. 해변길이 나와 해변을 따라 달리는데 배알도에서 광양시로 이어진 높은 고가교가 나왔다. 자전거로 그 길을 넘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여 해변에 있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뒤로 돌아가 뒤쪽에 보이는 낮은 다리로 건너가라고 했다. 그러나, 네비를 보니 앞으로 조금 가면 다리를 건너게 나와 있어 그 높은 다리 아래를 지나니 조금 낮은 다리가 나왔다. 그 고가교로 건너갈 수 있었다. 다리로 올라가 바다를 건넜다.
중마버스터미널에 가서 수원행 버스표를 사려니 오늘 5시 버스는 코로나로 승객이 줄어 운행을 안 한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행 우등버스표를 샀다. 센트럴터미널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 검색해보니 반포 고속터미널이었다. 서울에 가면 수원이 가까우니 다행이었다.
시간이 10분쯤 남아 있어 점심 해결을 위해 마트로 갔다. 역시 구운 계란과 우유, 빵을 사, 서둘러 터미널로 와서 버스의 트렁크에 자전거를 실었다. 맨 앞자리에 앉았더니 검표하는 기사님이 번호를 찾아 앉으라고 지시했다. 번호가 있다는 걸 생각지 못했다. 달리는 버스에서 빵과 계란, 우유로 배를 채웠다.
버스가 달리다가 중간 휴게소에서 쉬었다. 식당에 가서 어묵 우동을 한 그릇 먹었다. 쉬는 시간 15분이라는데 음식 나오는 걸 5분을 기다려 시간이 촉박해 우동을 제대로 씹지 못하고 삼켰다. 뜨거운 우동을 급히 먹고 버스로 오르니 기사는 아직 오지 않았다. 여유를 가지고 우동을 먹었어도 될 걸 그랬다.
버스 좌석에 앉으니 서울에 가서 대중교통으로 수원에 갈 일이 걱정이었다. 평일에는 지하철에 자전거를 가지고 탈 수 없다니 그게 고민이었다. 서울에 도착하는 시각이 오후 7시. 일반적인 퇴근 시간대여서 더 걱정이 되었다. 가족에게 차를 가지고 고속터미널로 오라고 할 수 있지만 수원에서 오려면 상당히 불편할 것이다. 일단 지하철을 탈 때 제지당하면 그때 또 방법을 찾기로 하고 걱정을 껐다.
서울 고속터미널에서 내려 지하도를 건너기 위해 자전거를 끌고 내려가니 지하철역이었다. 아무도 제지하지 않아 맨 앞에 탔다. 다행히 승객이 붐비지 않았다. 이수역에 와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금정역에서 또 1호선으로 갈아탔다. 자전거를 붙잡고 가느라 앉지는 못했지만 자전거의 브레이크를 꼭 잡으면 지하철의 손잡이를 잡은 것처럼 몸을 지탱할 수가 있다. 사람들에게 자전거 바퀴가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화서역까지 왔다. 집에 도착한 것은 밤 9시였다. 큰 어려움 없이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마음이 뿌듯했다.
이번 사흘의 여행을 회상해 보았다. 첫날 비가 내려 추웠고 재미가 덜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섬진강가에 농막을 짓고 색소폰을 연습하는 복 선생님께서 주신 커피 한 잔도 추운 날씨에 가슴 후둣한 일이었다. 그러나, 순창의 금산여관의 주인이 바뀌어 취재를 하지 못하고 공연히 순창까지 들어갔다 나오느라 시간과 에너지만 축냈다. 그러나, 이튿날에는 날이 맑아 섬진강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뜻밖에 이대규 선생님도 만났다. 저녁에 도착한 매화마을에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절정이어서 가슴이 벅찼다. 오늘은 아침 일찍 매화 마을에서 잔잔하고 곱상한 포항 여인을 만나 사진촬영을 품앗이 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하게 되어 즐거웠다. 그 중에 제일 뿌듯한 것은 오랫동안 벼르던 섬진강길을 자전거로 완주한 성취감이었다. 한강, 영산강, 금강길도 달려보았지만 이번 섬진강길이 가장 잘 닦여 있고, 첩첩의 산세를 굽이굽이 흐르는 물 흐름이 고왔다. 다음에 라이딩을 좋아하는 이와 명소에서 쉬어가며 다시 한 번 달리고 싶다.
첫댓글 시기적절하지 않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운 섬진강...
섬세한 표현!
대리 만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긴 글 읽으시고 그리 댓글 주시니 감사합니다. 코로나가 전국, 아니 온 세계가 비상인데 저의 무심한 여행과 글쓰기로 불편을 드린 것 같아 송구스러웠습니다. 저 역시 여행 중 줄곧 마스크를 썼고 사람들과의 만남에 주의를 하였습니다. 매화 꽃 철이면 많은 인파가 몰려오는 매화마을에서 단체 관광버스는 보지 못했습니다. 썰렁한 식당가, 개학의 연기 등 정상적이지 못한 지금의 시국이 안타깝습니다. 빨리 이 코로나가 잦아들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