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항아리
최현아
항아리의 쌀이 거의 바닥이다. 가끔 전기밥솥을 확인 안 하고 반찬을 만들 때도 있다. 며칠 전엔 밥솥을 열어보니 밥이 없어서 마트에 달려가 공깃밥을 사 왔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밥을 제일 마지막에 먹는 사람이 양을 확인하고 하기로 했다.
항아리에 쌀을 채울 땐 기분이 좋다. 아들이 내가 해준 밥을 먹고 쑥쑥 잘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면 먹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삼 년 전까지만 해도 두 아들은 간식을 먹듯 하루에 밥을 세 번 이상 먹어서 쌀 항아리에 벌레가 생길 틈이 없었다. 요즘은 외모와 체중에 신경을 쓰더니 예전처럼 먹지 않는다. 가족이 모두 바쁘다 보니 각자 밥을 먹게 되고 생일이나 명절이 아니면 함께 마주 앉아 밥 먹기조차 힘이 든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쌀 항아리에 벌레와 나방이 생기기 시작했다.
항아리는 숨구멍이 있어서 쌀벌레가 서식하기 딱 좋은 장소인 것 같다. 새까맣고 작은 쌀벌레가 항아리 뚜껑 밖으로 나오면 징그럽고 쌀벌레를 잡아야 하기에 곤혹스럽다. 그런데도 나는 항아리가 주는 느낌이 좋아서 쌀을 그곳에 보관하고 있다.
항아리를 보면 어릴 적 추억이 생각난다. 친정아버지는 간장이나 고추장 된장을 담그기 하루 전에 진안 모래재 약수터에서 약수를 떠 오셨다. 항아리 속 세균을 없애기 위해 볏짚을 넣고 태우셨다. 친정어머니는 장 담그기 몇 달 전부터 메주콩을 삶아 메주를 납작하게 만들어 새끼줄로 꿰어 매달아 두셨다. 천일염의 쓴맛을 없애기 위해 간수 빼기도 해 두셨다.
장 담글 준비가 되면 친정어머니는 항아리에 봄 햇살로 꼬들꼬들하게 잘 마른 메주를 넣고 소금물을 붓고 그 위에 숯과 붉은색 고추를 넣으셨다. 그 이유를 여쭤보니 친정아버지는 항아리 안에 혹시 비나 눈이 와서 물이 들어가면 장이 상할 수 있어서 그렇다고 하시고 친정어머니는 혹시 항아리 안에 잡귀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어찌 되었든 가족이 건강한 음식 먹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만은 틀림이 없다. 장 담그실 땐 가까이 사는 이모님을 부르곤 하셨다. 장이나 김치 담글땐 수육을 만들었고 친정아버지는 막걸리를 사 오셨다. 야들야들하고 담백한 수육과 막걸리 몇 잔이 입에 들어간 후의 느낌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좋았다. 그래서일까 항아리를 보면 옛 추억이 떠오른다.
장 담그는 철이면 텔레비전의 어느 종갓집 전통 장 비법에 관한 방송을 자주본다. 종갓집 마당에는 대개 장 항아리가 즐비해 있다. 종갓집 맏며느리는 항아리에 장을 보관하며 그 집의 장맛을 이어간다. 언제 그 장들을 먹어야 할지 항아리가 분류되어 마당에 가득 채워져 있다.
텔레비전을 본 후 나는 오산 오일장에 가서 항아리를 샀다.
시아버지는 내가 결혼한 첫해부터 내 생일이 돌아오면 직접 손질하신 생선 몇 마리 미역 소고기 청양고추 찹쌀 팥 간장 된장을 보내주셨다.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시아버지는 장을 담아 자식들에게 보내 주셨다. 우리 가족은 미역국과 나물을 좋아해서 나는 장 종류 중 간장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시아버지께서 택배로 보내 주신 간장이 플라스틱 통에 남아 있었다. 시장에서 사 온 항아리를 깨끗이 씻고 말려 간장을 부었다. 그리고 국을 끓이거나 나물을 무칠 때마다 열심히 간장을 퍼다 먹었다.
어느 날 항아리 뚜껑을 열었더니 간장이 거의 바닥을 보였다. 조금밖에 남지 않은 간장을 보니 시아버지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올봄에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이 간장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상실감도 느껴지고 눈물이 났다.
며칠 전에 친정어머니가 전화를 했다. 그저께는 간장을 어제는 고추장을 담그셨다고 했다. 예전엔 친정어머니가 집에 간장이나 고추장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시아버지께서 보내주셔서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말했었다. 이젠 계시지 않으니 거절하지 않고 모두 보내달라 했다.
배부른 항아리 모양은 친정어머니의 넉넉한 마음을 닮았다.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용돈도 넉넉하게 드리지 못하는 딸에게 친정어머니는 항아리에 있는 장을 퍼주고 또 채우느라 바쁘다. 장뿐만 아니라 고춧가루 마늘 고구마 감자 등 온갖 음식의 재료를 보내 주신다. 잘 살아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고 해도 친정어머니의 근심 걱정거리는 끝이 없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은 내리사랑이요 자식 사랑은 치사랑'이라고 하나 보다.
항아리의 꿈 해석은 다양하다. 항아리 속에 거북이나 진주가 가득한 꿈을 꾸면 엄청난 돈이 생기고 집안에 풍요로움과 부가 쌓인다고 하던데 오늘 밤 항아리 꿈을 꾸고 돈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첫댓글 시아버지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네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날씨가 요즘 너무 춥습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