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쿠데타와 미국 2 [펌]
- 신군부 뒤의 진정한 흑막, 워메리카(WARmerica)라는 마지막 조각 -
통일시대 / 안광획(통일시대연구원 연구위원) 2023.12.16
.... (전략)
- 과연 전두환과 하나회가 독단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남녘의 작전권은 한국(조선)전쟁 이래로 미국이 좌지우지하며 국군의 작전행위나 병력이동은 모두 한미연합사령관(주한미군 사령관, 이른바 ‘유엔사’ 사령관 겸임)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즉, 국군은 전적으로 주한미군이 통제하고 지휘하는 체계이다. 더군다나, 1979년 당시는 ‘평시작전권’* 마저도 없었던 상황이다.
[*‘평시(DEFCON 상 4~5단계)에도 작전행동과 병력이동을 할 수 있는’ 이른바 ‘평시작전권’은 민주화 이후(1994년 12월)에 국군에 이양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기만적인 것에 불과하다. 1994년 평시작전권 이양 당시 평시 위기관리 권한을 비롯해 작전계획 수립, 합동훈련 계획 및 실시, 정보관리 등으로 이루어진 6개 항의 연합권한위임사항(CODA)을 한미연합사령관(주한미군 사령관)의 권한으로 남겨 두어,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미군이 국군을 통제하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미국이 국군의 작전권을 통제하는 현 군사체계에서는 전두환을 위시한 하나회 일당이 미국의 허가 없이 독단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전두환 개인의 권력의지와 독단적 결단으로 쿠데타가 단행되었다고 보는 것은 ...실제와 거리가 멀다.
“피곤해서 12월 12일 사건을 규정하는데 부주의하게 서술했다... (중략) 나는 조심스럽지 못하게 ‘사실상 쿠데타 (coup in all but name)’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정확한 상황이 무엇이든 간에, 기존 정부조직이 실제 남아있기 때문에 전형적 쿠데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사건이 계획된 것이 아니었으며 쿠데타 시도가 아니라는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이를 믿지는 않지만, 보다 확실한 상황이 파악될 때까지 단정하지 않는 게 우리 이익에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글라이스틴이 당시 미국 국무부에 보낸 전문 중 일부, 1980.12.13.)
“(전두환 하나회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하극상을 일으킨) 그 시각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 워컴 주한미군 사령관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과 함께 용산의 유엔군사령부 벙크에서 새벽까지 군지휘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12.12 군사반란과 관련한 미국 기밀해제 문서)
아니나 다를까, 12.12 당시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묵인・지원이 있다는 것이 이미 사실로 드러난 바 있다.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이던 존 위컴(John Wickham)과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William Gleysteen)이 회고한 바와 같이, 주한미군과 미국은 12·12 이전부터 하나회 일당의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포착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은 쿠데타 음모를 저지하지 않고 ‘북의 남침이 우려된다’는 명목으로 12.12를 묵인해 버렸으며, 쿠데타 방지 또는 진압을 위한 작전 승인이나 하나회 반대세력의 ‘역 쿠데타’ 계획을 모두 거절해 버렸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 회고록에서 “비록 전두환 일당의 쿠데타 계획에 대해서 매우 불쾌했으나, 달리 대안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변명을 내뱉었으나, 어찌 되었든 미국의 한(조선)반도 전략에 따라 전두환과 12.12 쿠데타를 지지한 것이다.*
[*존 위컴 저, 김영희 역, 12.12와 미국의 딜레마(중앙M&B, 1999), 윌리엄 글라이스킨 저, 황정일 역, 알려지지 않은 역사(중앙M&B, 1999) 등]
더군다나,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의 이력을 보면 과연 ‘불쾌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저들의 변명이 통하는지도 의문이다. 존 위컴은 베트남 침략전쟁(1955~1975) 시기 1기병사단 7기병연대 소속 장교로 파병되었는데, 이미 그 때 전두환, 노태우 등 하나회 일당과 깊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베트남전 이후엔 국군 요직에 하나회 일당들이 자리를 차지했고, 특히 위컴이 1979년 5월에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뒤에는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79년 3월 임명)과 자주 접촉하였다.*
[*곽동기, 「제국주의 미국 – 10.미국의 노골적인 한국정치 개입」, 우리사회연구소, 2016.06.08. 참조]
이런 상황 속에서 쿠데타 음모는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고 미국의 지시와 전두환과 위컴의 공모 아래 착착 계획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불쾌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무색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전두환과 하나회 일당을 육성해 온 정황도 잘 드러나 있다. 남녘 육군사관학교가 한국(조선)전쟁 시기인 1950년 6월 1일 정규 4년제 과정으로 자리 잡은 이래로, 미국은 육사 출신 장교들을 미국으로 유학시켜 네바다주 군사훈련소에서 6개월~1년 기간 동안 특별군사훈련을 받게 했다. 이에 따라 육사 정규과정 첫 기수(11기)였던 전두환과 노태우, 정호용 등은 1956년 미국에서 특수군사훈련을 받았다. 또한, 전두환은 1959년 12월에 또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랙(Fort Bragg) 특수전 학교에 입학하여 특수전과 심리전을 공부했고, 1960년에도 조지아주 포트 베닝(Fort Benning) 레인저 학교에서 유학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전두환과 하나회 일당이 미국의 군사지휘체계에 길들여진 것은 물론 숭미주의적 사고관과 사상의식도 뿌리 깊게 형성되었으며, 미국 역시 저들을 깊이 눈여겨 보았으리라. 여기다가 자신들이 5·16쿠데타를 통해 대리인으로 내세운 박정희 역시 전두환과 하나회 일당을 깊게 신뢰하고 전두환을 ‘양아들’로까지 여긴 점도 미국이 전두환을 주목한 한 요인이었다.
여기에다가 베트남전 당시 존 위컴과 전두환 및 하나회 일당 간의 유착관계가 형성되면서, 미국은 전두환, 노태우 등을 박정희를 이을 후계자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처단된 후 거행된 박정희 국장에서의 미국 국무장관 사이러스 밴스(Cyrus Vance)의 기자회견(1979.10.31.) 내용이다.
당시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서울로 떠나던 밴스는 기자들에게
“박정희의 후계자를 선출하는 방법에 대해 미국이 상담할 것을 요청받으면 의견을 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겠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이며, 아마도 그들이 우리와 협의하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들과 의견을 나눌 것이다.”
란 발언을 남겼다.
미국은 이미 박정희 이후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내세울 후계자를 결정했음을 시사한 것이다. 여기에서 ‘후계자’는 ‘그들’로 두루뭉술하게 표현되지만, ...전두환 및 하나회-존 위컴 간 유착관계와 오랫동안 미국이 하나회 일당을 육성해 온 정황을 유추해 보면, 사실상 전두환을 위시한 하나회 일당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12.12는 전두환 개인의 독단적 판단과 정치적 야욕으로 자행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미국의 지시와 지원 속에서 철저히 계획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2.12와 5월 광주학살을 거쳐 전두환이 공식으로 대통령직에 앉은 직후, 존 위컴이 남긴 발언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박정희 피살 이후 가장 성공적인 미국의 한국 정책 가운데 하나는 '전두환 정권'의 수립이다.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그 보람도 크다."
- 왜 미국은 12.12를 일으켰는가?
그렇다면 왜 미국은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전두환과 그 일당을 후계자로 내세웠을까? 이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한(조선)반도 정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79년 당시 국제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서아시아 이란에선 친미 괴뢰정권(팔라비 왕조)이 호메이니를 앞세운 무슬림 세력과 대중들에 의해 이란 이슬람혁명으로 축출되었다. 무슬림 교리와 반제국주의를 전면에 내걸은 호메이니 신정부는 ... 석유산업 국유화를 단행했고, 미국 및 서방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이란 이슬람혁명의 여파는 1979년 제2차 석유파동과 전세계적 경제침체로 이어졌다.
이란 이슬람혁명으로 중동지역에서 패권 매개체를 상실한 미국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란을 시작으로 아시아-아프리카 일대에서 친미 괴뢰정권 붕괴 및 반제자주화 물결이 급속히 퍼져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은 아시아-아프리카에서의 친미 괴뢰국가들의 붕괴를 막고 각 나라들이 연대하지 못하도록 이간책동을 벌이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예: 사우디 아라비아를 통한 시아파-수니파 갈등 극화, 후세인 정권 사주를 통한 이란-이라크 전쟁 유발(1980년) 등.]
특히, 당시 한반도 정세는 미국에게 매우 불리했다. 푸에블로호 사건(1968.01.) - EC-121 사건(1969.03.) - 판문점 도끼사건(1976. 08.) 등 미국은 이미 수차에 걸쳐 북에 대한 군사적 도발을 감행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또 자신들이 5·16쿠데타를 통해 ’대리인‘ 으로 내세운 박정희와의 관계도 점점 틀어지는 상황이었는데, 1969년 베트남전 패배 직후 발표한 ‘닉슨 독트린’의 연장선상으로 미국은 .. 주한미군 철수를 공포했고, 이에 반발한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부르짖으며 핵개발을 추진한 것이다. 그러자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를 내세워 박정희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70년대 말에 오면 박정희 정권과 미국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 우리가 제거하려는 까마귀(박정희)를 대체할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백로를 찾을 수 없을 것”
“전두환의 군부 내 지지세력으로 인해 그의 제거 자체가 힘들 뿐 아니라. 그렇게 된다 해도 누가 그를 대신할 강자가 될 것인지도 문제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알려지지 않은 역사, 1999> 참조)
남녘에서의 반독재 민주화투쟁도 미국의 한반도 전략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1979년 'YH무역 사건 - 김영삼 국회 제명 - 부산-마산 민중항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상황들로 남녘 민중들의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분노는 정점에 달한 상황이었다. ...
당시 미국 기밀문서를 통해 알 수 있지만, 미국은 '김대중-김영삼(兩金)’이나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주도하는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 세력을 ‘믿을 수 없는 세력’ 내지 ‘극좌 혁명세력’으로 여기고 있었다.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세워지게 되면 ... 이는 곧 미국의 동북아 패권 최전선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눈엣가시’인 박정희를 토사구팽시키고*, 그 자리에 민주정부가 아닌 ‘후계자’ 전두환을 세워 군사독재를 이어 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미국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사주해 10.26 사건을 일으켰고, 이어서 ‘후계자’ 전두환을 내세워 12.12 군사반란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즉, 12.12는 당시 전세계적인 정치변동과 맞물려 미국의 동북아 패권전략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 10.26 당시 미국에 의한 박정희 토사구팽 정황은 '제임스 하우스만'의 회고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말미에서 “아무리 그래도 미국이 김재규를 사주할 엄두를 냈겠는가?”고 얼버무리지만, 이승만 하야 직전 상황과 10.26 직전 상황이 비슷하게 돌아갔다는 회고에서 미국이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하고 토사구팽을 기획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물론 (10.26)사건의 전말을 보면 사건의 미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한미 관계는 마치 1954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美 양원 합동회의에 가서 미국 지도자를 훈계하듯 강경 연설을 한 뒤 미국 정부의 이 대통령에 대한 신임이 급격히 떨어진 때와 비슷한 양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 미국 지도자들은 더 이상 이승만과는 얘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결론짓게 됐다.”
(제임스 하우스만 저, 정일화 역,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1995> 19~20쪽)
..... (중략)
- 한국현대사의 진정한 흑막, WARmerica를 넘어
12.12 군사반란은 남녘에 대한 식민지배와 동북아 패권전략을 잃지 않으려던 미제국주의의 의중 아래 철저히 계획되고 실행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사 속 각종 곡절에도 언제나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남녘 식민지배 및 동북아 패권전략에 따라 자신들의 ‘대리인’을 내세워 민중의 반제자주 민주화 투쟁을 탄압해 왔고, 위기에 봉착했을 땐 ‘대리인’을 토사구팽하고 기만적인 ‘새 체제(장면내각, 6.29선언 등)’를 내세워 민중의 변혁 열망을 무마하거나 새 ‘대리인’을 내세워 위기탈출을 시도해 왔다. 즉, 미국이 있는 한 이 땅의 자주독립과 참된 민주주의, 평화통일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은 항상 좌절과 탄압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고 있다. 전세계적 범위에서 미국 중심 일극패권은 날이 갈수록 몰락해 가고 있고, 세계 각지에서 반제자주와 새 세상을 바라는 민중의 투쟁은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이 땅에서도 격변기는 다가오고 있다. 나날이 고도화되는 북의 핵무력과 조-중-러 연대 앞에 미국의 동북아 군사패권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고, 남녘에서도 미국이 ‘대리인’으로 내세운 ‘현대판 신군부’인 윤 검찰파쑈독재에 대한 대중의 분노 저항도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미국의 의중에 따라 우리 민족의 열망이 좌절되는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이다. ....(하략)
글; 안광획, <영화 '서울의 봄'과 역사의 본질 - 신군부 뒤의 진정한 흑막, WARmerica라는 마지막 조각> 중에서
출처 : 통일시대 https://www.tongil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