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소(無名簫)] 나란히 가지 않아도...(23)
사마웅이 잔을 들어 들이켰다. 그런 둘을 황보미완이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잔을 내려놓으며 사마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도 인간은 모두가 짐승으로 태어날 거요.
짐승으로 태어났으니 짐승으로 살아갈 거고. 옷을 입고,
집을 짓고, 제도를 만들어 산다고 해서, '
그러지 않는 다른 짐승들과 인간을 구별짓는 게 더 무리(無理) 아니겠소?
살아가는 방식이 같은데 말이오. 아니 같다고 말한 건
어쩌면 다른 짐승들에게 모욕이 될는지도 모르겠소.
보통의 짐승들은 배고파야 먹이를 찾아 나서는데
인간이란 짐승은 배고플 때를 미리 대비해서 먹이를 찾아 나서니까
말이오. 게다가 그 대비라는 것도 참으로 원대해서
자기뿐 아니라 자자손손(子子孫孫) 먹을 것을 비축하지요.
그러면서도 가장 짐승 같지 않았다는 평판을 원하지요.
탐욕에 찬 눈초리로 미인을 바라보면서 혓바닥 위에는 군자의
도리를 얹는 거…
인간은 짐승 중에서도 최악의 짐승이란 게 다른 짐승들을 덜
모욕하는 일이 될 거요.
아마도 수라마인은 그런 세상이, 그런 세상의 짐승들이 싫었나 보오.
그래서 그 세상 자체를 없애거나,
아니면 최소한 깨닫게라도 해 주고 싶었던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사마웅이 술잔을 집어 들었다. 잔이 비어 있었다.
사마웅이 술 주전자를 잡으려하자,
황보미완의 섬섬옥수가 먼저 주전자를 집었다.
빈 잔에 술을 따르며 그녀가 말했다.
"언제나 궁금했던 것은 진우명 한 사람이었어요.
생각은 언제나 한 점, 그 사람에게 모아졌죠.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혹시 지금 내가 보고 싶을까?
누구를 만나고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
지나가던 여인들이 혹 그의 모습을 보며 한숨짓지는 않을까?
그 여인의 한숨을 보며 한숨짓던 내 모습을 혹시 기억하지는 않을까…."
잔에 술이 넘칠 듯 차올랐다. 주전자를 내려놓으며
황보미완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때 알았죠.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각은 고통일 뿐이란 걸.
더욱이 해결되지 않는 끝없는 고통은 지옥불과 같다는 것을.
그래서 차라리 그 생각의 근원을 없애려고 했던 거죠
. 그리고 그 일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용사공자라고
불리는 사마웅 공자 한 사람뿐 일거라고 저는 믿었던 거고요."
"사실 그때 묻지는 않았지만 궁금하긴 했더랬소.
어째서 그대는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지가 말이오."
"작년 이맘 때쯤부터 공자님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지만,
저는 공자님이 동정루에 출입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주목했었죠.
오라버니가 혹시 놓칠지 모르는 허점을 챙기는 것이 제 할
일이었으니까요
. 공자님을 주목하기 시작하고 보니 보이더군요.
그 용사공자라는 조롱 속에 감춰진 진정한 풍모(風貌)가. 그래서 알았죠
. 내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지옥(地獄)의 화염(火炎)을
끌 수 있는 사람은 저 사람이다, 라고요. 그런데 거절당했죠."
사마웅이 끄덕이며 대답했다.
"할 수 없다라고 대답했었지요.
그리고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어차피 그 일은
그대도 나도 원치 않는 일이란 걸."
"맞아요. 설혹 내가 그를 죽여 당장의 지옥불을 끈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더 큰 지옥이 날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요."
말을 하던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꼿꼿이 치켜세우고 사마웅을
똑바로 쳐다봤다.
사마웅도 그런 그녀를 마주 쳐다봤다. 그녀가 쳐다보는 눈길
그대로 말했다.
"요즘의 저는 흐릿해진 모습의 진우명을 봐요.
그 차가웠던 표정이, 그래서 그렇게 뚜렷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얼굴이 흐릿해져 있어요."
그녀가 말을 멈추고 손을 내밀어
사마웅의 손을 잡았다. 잡으며 말했다.
"생각의 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왔고…
그건 공자님이었어요!!”
[무명소(無名簫)]256-나란히 가지 않아도...(24)
사마웅이 처음엔 자신의 손을 잡은 황보미완의 손을,
다음엔 황보미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사이에 언뜻언뜻
비치는 쓸쓸함을 황보미완은 읽을 수 있었다. 황보미완이 손을 풀었다.
"그저 공자님의 손을 한 번 잡아보고 싶었어요.
잡아보면 지금 내게 찾아오는 이 변화의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황보미완이 사마웅을 바라봤다. 사마웅도 그녀를 바라봤다.
사마웅의 눈이 묻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알았소? 그 변화의 정체를."
정말 사마웅이 그렇게 물은 듯 황보미완이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다만 공자님의 손이 참 따뜻하다고 느꼈어요.
그의 손은 늘 차가운 듯 싶었는데…."
고개 숙인 그녀의 귓가에 사마웅의 목소리가 환청(幻聽)처럼 들려왔다.
"그대는 길을 잃은 듯싶소.
아마도 그대의 길은 참으로 크고 뚜렷한 길이었던 것 같소.
그저 걷기만 해도 되는.
그 길엔 갈림길조차도 없었던 것도 같구료.
어느 쪽을 택할까를 고민할 필요도 없게끔 말이오.
그런데 지금 그대는 길을 잃은 듯싶소
. 끝이 보이지 않는 길. 그대는 지쳤을 게요.
어쩌면 당신은 너무 지쳐서 쓰러졌을는지도 모르겠소.
다시 걸으려고 일어서보니 길이 안 보이는 거요.
이 모든 것은 그대가 너무 지쳤기에
일시적으로 생긴 현상일는지도 모르오.
서두르지 말고 조금 쉬시는 게 좋을 듯싶소.
지금 그대의 눈에 보이는 길은 그대가 걸어왔고,
걸어가려는 그 길이 아니오.
지친 눈에 착시(錯視)처럼 보이는 사잇길이거나 오솔길일 따름이지요."
황보미완이 잠시 사마웅을 말없이 쳐다봤다.
그 눈길을 사마웅이 말없이 받았다.
서로의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영겁(永劫)처럼 혹은 찰나(刹那)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두 사람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황보미완이 입을 열었다.
"그 사잇길은 또는 그 오솔길은 제가
그 길에 들어서는 걸 원치 않는 건가요?"
사마웅의 입은 잠시 열리지 않았다.
가만히 황보미완을 바라보던 사마웅은 대답 대신 한 잔 금아청을 들이켰다.
빈 잔을 황보미완에게 내밀며 사마웅이 말했다.
"생각해보니 당신이 말하는 그 길은 길이 아니오.
얼핏 사잇길이나 오솔길처럼 보일 뿐 길이 아닌 것이오.
아예 들어서지도 마시구료."
"제가 물은 것은 그 길 아닌 길이 제가
그 길에 들어서는 것을 원하는가 않는가예요."
"내 대답은 길이 아닌 것에는 들어서질 말아야 한다는 거요."
황보미완의 허무로운 표정에 반짝 햇빛처럼 웃음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알겠어요. 공자님의 말씀. 고맙게, 그 말씀 받겠어요."
황보미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봄이 오면 많은 것이 바뀌겠죠. 동정루에도 변화가 올 테고요.
그 변화 후에도 제가 공자님을 뵐 수 있다면…
그때는 운명이란 것을 믿어보려 합니다."
사마웅이 앉은 자리에서 그녀를 올려다봤다.
문득 도홍이 대신 자리에 앉던 그녀를 보며
묘하게 설레던 순간이 기억남과 동시에 지금 무언가
허전해 하는 자신을 사마웅은 느꼈다..
"아마도 그대의 오라비 황보산은 뜻을 버리느니 삶을 버릴 사람일 것이오
. 그래서 봄이 오면 그는 그 삶을 버리게 될 것이오.
뜻을 이루기에 그 가진 바 재능은 충분치 않기 때문이오.
허나 그 뜻 때문에 그 삶이 행복할 수 있었을테니 그건 그냥 그렇게 둡시다."
사마웅이 말을 멈추고 황보미완을 쳐다봤다.
황보미완도 사마웅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대는 그대의 삶을 살 수 있길 바라오.
봄이 지나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거요."
황보미완의 얼굴에 아까보다 더욱 빛나는 햇빛 한 점과
그 햇빛 아래 반짝이는 이슬 하나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