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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구관조(앵무새)를 올리는 것은 사람이 어떤 말을 가르쳐 주느냐에 따라 그대로 따라하기 때문이다~~>
"나의 형제 여러분, 많은 사람이 교사가 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
야고보서 3장 1-12절은 올바른 신앙생활에 필수적인 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집중적으로 진술한다.
야고보는 1장 26절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제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 에서 짧게 언급하였던 성도의 바른 언어 생활에 대한 주제를, 이제 본 장에서 구체적으로 새롭게 전개시켜 나간다.
먼저, 야고보는 언어 생활에 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충고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하는데, 우선적으로 <교회안의 교사>에게 적용시킨다.
'교사'로 번역된 '디다스칼로이'(didaskaloi)의 기본형은 '디다스칼로스'(didaskalos)인데, '가르치다'(마태4,25)란 뜻의 동사 '디다스코'(didasko)의 명사형으로, 글자 뜻 대로 '가르치는 자'를 의미한다.
아마도, 당시에는 교사 직분을 많은 사람들이 선호했으며, 따라서 교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가르치는 자로서 소양과 자질이 부족한 교사가 됨으로써,교회 안에 잘못된 가르침이 많아지고, 가르치는 자가 모범이 되지 못하는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야고보는 가르치는 직분을 가진 자들 및 그 직분을 탐내는 자들에게 주의깊은 경고를 주고 있는 것이다.
가르치는 자(교사)는 하느님께서 교회안에 세우신 이들 중에 사도들과 예언자들 다음, 세번째 위치에 놓여진 사람들이다.(1코린12,28) 교회의 모든 직분, 예컨대 사도, 예언자, 복음 선포자, 목자, 교사들은 모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를 실천하는 통로이다.(에페4,11)
따라서 교회의 모든 직분이 다 그렇듯이, 가르치는 직분 역시 그 자리에 세워진 사람이 그 직분에 적절한 자격을 갖추었는지가 중요하지, 그 자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교사가 비록 바로 가르치더라도, 자신이 그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으면, 배우는 자보다 훨씬 더 큰 심판을 당하게 된다.
야고보는 교사가 되는 것을 신중을 기하여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또 구원의 진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확신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가르치는 은사를 부여받아, 그 직분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면, 애초부터 교사가 되려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
교사로서의 가르침은 다른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교사가 만약 그 책임을 충실히 실행하지 못했을 때는, 하느님의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알다시피'로 번역된 '에이도테스'(eidotes)는 '오이다'(oida)의 완료 분사로서 이러한 교사의 막중한 책임을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특히 '우리는 ~ 받을' 로 번역된 '렘프소메다'(lempsometha)는 '람바노'(lambano)의 일인칭 복수형으로서, 야고보 자신도 심판을 받게 될 교사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를 보십시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도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지만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 (2-6)
말이란 의사 전달의 수단이다. 그러나 이 말이라는 것은 항상 실수가 뒤따를 수 밖에 없다. 야고보는 만약 혀로 범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가리켜 '완전한 사람' (텔레이오스 아네르 ; teleios aner)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실수를'로 번역된 '프타이오멘'(ptaiomen)의 원형 '프타이오'(ptaio)는 '걸려서 비틀거리다', '걸려서 넘어지다'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잘못하다','죄를 짓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혀로 실수(범죄)를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거니와, 여기서 '완전한 사람'이란 표현도, 절대로 완전하여 죄가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그가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야고보는 이같이 말의 실수를 하지 않는 완전한 사람은 자신의 온몸, 즉 모든 행동을 스스로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가축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3-8절에서도, 이 비유와 의미가 동일한 일련의 비유를 들어, 혀의 큰 영향력과 그 혀가 잘못 사용될 때의 심각한 결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3)
'재갈을 물려'의 '재갈'로 번역된 '칼리누스'(chalinus)의 원형 '칼리노스'(chalinos)는 말의 입에 가로 물리는 쇠토막을 가리키며, 이곳에 고삐를 맨다. 고삐를 매면, 말은 사람이 움직이고자 하는 방향을 따라 복종할 수 밖에 없다. 성질이 사나운 야생마라 할지라도 고삐를 사용해 다스릴 수 있다.
야고보가 이 비유를 말하는 이유는 혀의 기능 때문이다. 사람의 몸은 큰 데 비해, 혀는 그 크기가 매우 작다. 그럼에도 혀는 통제하기가 매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야고보의 비유는 말의 재갈처럼 혀를 통제하는 사람이 허물을 감출 수 있으며 성숙한 인격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말이 많은 데는 허물이 있기 마련 입술을 조심하는 이는 사려 깊은 사람이다." (잠언10,19)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4)
3절에서는 힘이 센 가축을 통제하는 재갈의 비유를 사용한 바 있는 야고보는 몸 전체를 조절하는 혀의 능력을 재강조하며, 두번째 비유로 배의 크기와 키의 크기를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배는 바람에 밀려 움직이는 매우 큰 범선을 가리킨다.
배의 크기에 대해서 야고보는 '아무리 크고'란 뜻을 가진 지시사 '텔리카우토스'(telikautos)를 사용하여 표현하였고, 키의 크기는'아주 작은'이란 뜻을 가진 '엘라키스토스'(elachistos)를 사용하여 표현했다.
이 두번째 비유에서 앞의 비유보다 더 직접적으로 크기의 대조적인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지극히 작은 것으로도 큰 것을 조절할 수 있다는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사공(키잡이)에 의해 키가 조종될 수 있다면, 배가 거센 바람(광풍)에 밀리지 않을 것이다. 배는 외부적인 광풍이 아닌 내부의 작은 키에 의해 진로가 결정된다.
야고보가 본문에서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라는 외부 환경과 관련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독자들에게 배의 키와 인간의 혀는 외부적인 환경을 거슬러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 덕에 좋은 것으로 배부르고 인간은 제 손이 한 행실에 따라 되돌려 받는다." (잠언12,14)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5)는 '메갈라 아우케이'(megala auchei)의 번역인데, 이것은 '메갈라우케오'(megalacheo)와 같은 뜻으로, '과장하다', '호언장담하다', '언행에 있어서 거만하게 처신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오만불손한 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간사한 모든 입술과 허황된 것을 말하는 혀를 잘라 버리시리라." (시편12,4)
"하늘을 향해 자기네 입을 열어 젖히고 그들의 혀는 땅을 휩쓸고 다니네." (시편73,9)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5-6)
야고보는 혀를 불의 이미지로 묘사하며 작은 것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아주 작은'(헬리콘 ; helikon)과 '얼마나 큰'(헬리켄 ; heliken)으로 번역된 단어가 원형으로 볼 때 동일한 단어라는 점이다. 야고보는 이 두 상반된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로서 '헬리코스'(helikos)라는 한 단어를 사용한다.
수십만 헥타르의 광대한 숲이 작은 담배 꽁초 하나 혹은 작은 성냥불 하나로 다 타버리는 일이 있다. 처음에는 아주 작게 시작된 불이 바람을 타고 번지면서 삽시간에 산 전체를 다 삼켜 버리는 것이다.
야고보는 일상적 삶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화를 가지고, 작은 혀의 엄청난 파괴력을 극적으로 제시한다. 불과 같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혀를 잘못 사용하면, 누구라도 인생을 망칠 수 있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 (잠언18,21)
혀는 '불'(퓌르 ; pyr)이란 은유법에 이어, 혀는 '불의의 세계'란 또 다른 은유법을 사용한다. 여기서 '세계'에 해당하는 '코스모스'(kosmos)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계시는(마태23,22) '하늘'을 가리키는 '우라노스'(uranos)와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서, 죄악으로 타락한 상태의 세상을 의미한다.
특히 이 단어와 더불어,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다키아오스'(dikaios ; 요한17,25 ; 2티모 4,8 ; 묵시 16,5)에 부정 불변사 '아'(a)가 결합되어 의로움이 전혀 없음을 나타내는 '아디키아'(adikia)란 단어가 사용되어, '불의의 세계'는 곧 '악의 세계', '사악한 세상'을 의미한다.
야고보는 지금 혀, 곧 말의 파괴성을 고발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이 세상의 모든 악이 마치 악한 혀에서 비롯된 것임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혀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악한 특성을 드러내며, 실제 그런 혀는 결과적으로 우리 몸의 지체 전부를 더럽히고, 우리 삶의 바퀴를 태워 버린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는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6)
여기서 '더럽히고'에 해당하는 '스필루사'(spilusa)는 '오염시키다'란 뜻을 지닌 동사 '스필로오'(spilow)의 현재 분사로서, 혀를 통해 내뱉는 말이 전인격을 오염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 오염은 일시적이지 않고, '인생행로'를 망쳐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생행로'에 해당하는 '톤 트로콘 테스 게네세오스'(ton trochon tes geneseos)는 '인간 존재의 과정', '우리 생의 과정' 이란 의미로, 길흉화복이 교차하는 인생, 또는 흥망성쇠가 반복되는 변화무쌍한 인생 노정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
이제, 인간의 전인격을 부패시켜 인생 전체를 태워버리는 혀의 해악성을 지옥 아래에서 타오르는 불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지옥불'로 번역된 '게엔네스'(geenes)의 원형 '게엔나'(geenna)는 본래 예루살렘 남쪽의 좁은 골짜기인 '힌놈의 골짜기'(게 힌놈)을 말한다. 이 골짜기는 흔히 지옥, 또는 악마가 거주하는 곳으로 비유되었다. 또한 그곳은 최후의 심판 후 악인이 들어가는 곳으로 비유되었다. (마르9,43)
여기서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는 지옥의 이미지로 쓰였으며, 특히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사악한 독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과 길짐승과 바다 생물이 인류의 손에 길들여질 수 있으며 또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쉴 사이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7-8)
인간은 창세 후에 하느님께로부터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의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리도록'(창세1,28)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인간이 동물의 세계를 인간의 통치권 아래에 두고 지배해 오고 있지만, 정작 혀는 길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대조시켜, 후자의 안타까움을 강조하고 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8)
동물이나 새는 우리나 새장에 안전하게 가두어 둘 수 있지만, 혀를 활동하지 못하게 가둘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혀를 쉬지 아니하는 악이라고 하는 의미는, 혀가 언제나 쉬지 않고, 악을 내뱉는 불안정한 존재라는 것이다.(야고4,8)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는 것은 '죽음을 초래하는', '치명적인'이란 의미이다. 마치 강한 독을 가진 독사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혀는, 선한 말을 하기 보다는 오히려 불의하고 더럽고 독기 가득한 말들만 뿜어내기를 더 좋아한다.
"거짓을 일삼는 자야 너는 파멸을 꾸미고 네 혀는 날카로운 칼과 같구나. 너는 선보다 악을 의로움울 말하기보다 속임수를 더 사랑하는구나 거짓을 꾸미는 혀야 너는 온갖 멸망의 언사를 사랑하는구나." (시편52,6)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됩니다." (9)
야고보는 이제 한 입으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고', 동시에 그 입으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저주' 하는 모순된 삶을 사는 자들을 책망조로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선과 악, 둘 다를 말할 수 있는 혀의 이중성과(마태12,34-37) 더불어 혀를 악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모순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혀의 가장 아름다운 기능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것은 창조주 하느님께 찬양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다.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 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전하리라." (이사43,21)
그런데 하느님을 찬양하는 그 입으로 형제를 저주한다. 이것처럼 심각한 자가당착이며 모순도 없다. 하느님을 찬양한 입으로,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된다.(루카6,28 ; 로마12,14) 왜냐하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그 사람을 창조한 하느님을 저주하는 것과도 같은 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찬미하기도 하고 ~저주하기도 하니'에서 쓰인 '율로구멘'(eulogumen)과 '카타로메다'(katarometha)는 '율로게오'(eulogeo;찬양하다)와 '카타라오마이'(kataraomai;저주하다)의 현재 시제가 쓰임으로써, 교회 안에서 한 입으로 두가지 말을 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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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아멘
"완전한사람은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성숙한 믿음의 사람 "
혀의 이미지와 파괴력으로 나의 인생이 결정 지어짐을 배웁니다
만나는 사람앞에서 늘 말조심 !
명심하며 살겠습니다 아멘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과 길짐승과 바다 생물이 인류의 손에 길들여질 수 있으며 또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쉴 사이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7-8)
그렇다고 말을 안하고 살 수도 없고..
하자니 내 말에 독이 있을까 염려가 되고..
하지만 말은 해야한다. 단 말을 많이하는게 아니라 잘 해야한다고 본다.
말이 많다보면 내 세치에 혀로 하느님께 영광보다는 하느님을 욕되게 할 수 있을테니까..그러면 안되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그 사람을 창조한 하느님을 저주하는 것과도 같은 악이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기에
한 혀로 두가지 노릇을 한다는 말씀이 얼마나 실감이 나는지요.
하느님을 찬미 찬양하면서 경건한척 하다가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남편을 혼자서 욕할때 보면요..ㅎㅎ
서로 조금씩 바뀌면 쉬우련만..
말씀 듣는 제가 먼저 180도 바뀌는게 더 쉬운 일이겠지요. 90도씩 바뀌길 바랄게 아니라..
90도 바뀌는것도 어려운 일인데..180도까지 갈려니 더 길이 멀기만...
그러나 주님..도와주십시요. 회개의 은혜를 내려주셔서 병든 이마음을 치유시켜주시고.
이 혀로 욕이나 험담은 말고..주님께 찬미와 감사만 드리게 하소서.
요즘 신부님께서 주님의 말씀과 말의 중요성을 일깨어 주심에 자신을 뒤돌아 보며 많은 묵상합니다.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답에 이왕이면 같은 입으로 당신을 찬미, 찬양하며 진실한 아름다운 말을 하도록 같이 하여 주소서 !
한입으로두가지 말을 하는..제얘기네요..문제점을 잘 알고있지만 늘 되풀이되는 모습이 더문제입니다.이번사순시기에 교회 안과 밖의 모습이 조금 더 일치되가는 모습이 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