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십자가를 지신 왕(2)
4개의 십자가
요 19:17-22 / 최성규 목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고난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이고, 신앙의 출발점입니다(고전 2:2; 갈 2:20).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로 알 때, 우리의 신앙이 바로 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바른길을 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인생은 ‘20부터’라고 말합니다. 젊었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인생은 ‘40부터’라고 말합니다. 경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은 ‘60부터’라고 말합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어봐야 인생을 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모두가 맞는 말 같지만, 다 틀린 말입니다. 인생은 ‘십자가부터’입니다. 십자가 밑에 가봐야 인생을 알고, 십자가 아래에 서봐야 인생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십자가 아래에 나아가,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2천 년 전에는 그곳에 3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4개의 십자가가 세워진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4개의 십자가에 대해서 알아봄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바로 알 뿐만 아니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깨닫는 고난주간이 됩시다.
첫째, 좌편 강도가 진 십자가
좌편 강도는 범죄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린 것을 보면, 중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십자가형은 법정 최고형이었습니다. 가장 치욕스럽고 잔인한 형벌입니다. 성경도 그들을 “강도”요, “행악자”라고 증언합니다(눅 23:33). 그들은 스스로가 인정할 만큼 흉악범입니다(눅 24:41). 성경의 어디를 봐도 좌편 강도는 참회하지 않았습니다. 참회하기는커녕, 죄 없으신 예수님을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
흉악범인 주제에 예수님께 욕설을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마 27:44). 결국, 편 강도는 구원받을 기회를 놓쳤습니다. 바로 옆에 예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을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그 결과, 좌편 강도는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육체만 처참하게 죽은 것이 아닙니다. 지옥 불에 떨어지
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영원한 불못에 던져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최후입니다.
둘째, 우편 강도가 진 십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무엇일까요?”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돌을 깨는 것은 쇠입니다. 또 쇠를 녹이는 것은 불입니다. 불을 끄는 것은 물입니다. 물은 구름에 흡수됩니다. 구름은 바람에 날려갑니다. 바람은 사람을 어찌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가장 강합니다. 그런데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편 강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인 ‘십자가’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도 좌편 강도처럼 죄와 죽음의 십자가를 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데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그가 그대로 있었다면, 좌편 강도와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인정했습니다(눅 23:41). 우편 강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라고 간구했습니다. 그 결과, 우편 강도는 죄와 죽음의 십자가에서 벗어났습니다. 한량없는 용서와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눅 23:43).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강도가 예수님을 인정하고 구원받은 것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예수님은 벌거벗겨진 채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성경은 "저희가 예수를 맡 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요 19:17-18)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나무에 따라 최소 70kg 정도에서 최대 135kg이나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십자가의 무게도, 양손과 양발에 박힌 대못도,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바로 ‘나를 지신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양손과 양발을 못 박고 있었던 것은 바로 나의 죄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고통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의 무게에 눌려 숨조차 쉴 수 없으셨습니다. 보통 죄수들은 3일 내지 4일을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죄가 얼마나 컸던지, 6시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벧전 2:24). 우리가 알고 지은 죄뿐만 아니라, 모르고 지은 죄도 담당하셨습니다. 과거의 죄도, 현재의 죄도, 미래의 죄까지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으십니다(사 43:25). 그러므로 죄책감이나, 징계는 더 이상 나와 상관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의인입니다(롬 3:24). 예수님은 죄만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단의 권세를 꺾어버리셨습니다(골 2:15).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신 왕입니다(요16:33). 이제 우리는 저주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절망과 실패는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각종 질병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갑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승리자입니다(요일 5:4).
넷째, 내가 질 십자가
인간의 눈으로 보면, 골고다에는 3개의 십자가만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4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뒤에는 또 하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바로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삶입니다(마 10:38).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는 삶입니다(갈 2:20). 감사한 것은, 내가 질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무겁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고 가다가 쓰러질 염려도 없습니다(마 11:30). 예수님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 것은 복 주시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살면, 퇴보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삶이 나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과거를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묵묵히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면, 한 방향만 바라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못합니다. 우리 앞에 계신 예수님만 바라봅니다. 예수로 옷 입습니다(롬 13:14). 보혈의 능력이 내 안에 충만하게 임합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행함이 있는 신앙인이 됩니다(약 1:25).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가 십자가만큼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없는 십자가는 값싼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날마다 십자가 아래로 나아갑시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읍시다. 그 은혜에 감사합시다. 십자가의 사랑을 땅 끝까지 전합시다. 십자가가 세워지는 곳에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화해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2006년도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아 내 모든 죄와 짐을 십자가 앞에 모두 내려놓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의인된 삶을 살며, 세상을 이기신 권세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또한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의 십자가
요 19:17-22 / 김태복 목사
요19:17-22, 28-30
(설교 전에 영화 예고편을 잠깐 보겠습니다. 이 영화는 지금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예수님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입니다. 맬 깁슨이라는 감독이 자기 사재 2500달러(한국 돈으로 300억)을 털어서 제작한 영화인데 예수님의 처형장면이 너무나 끔찍할 정도로 생생하게 촬영했다고 합니다. 개봉하자마자 엄청난 인파가 몰려서 수입만도 12일 만에 2억 달러(한국 돈으로 2400억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12일 만에 제작비에 8배를 거둬들인 영화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는 4월 2일에 개봉한다고 합니다. 부활절 전에 여러분들도 꼭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가장 큰 죄인을 처형하는 최악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죄의 그림자도 없으신 예수님이 왜 그런 무서운 형벌을 받아야 했을까? 그것이 인류 역사상 가장 난해한 사실이요, 역설(逆說)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시오, 지극히 선하시고 의로우신 예수님이 가장 악한 죄인만이 지는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은 너무나 모순되고 터무니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지시고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것만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런 잔인한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까? 그 이유가 오늘 본문 17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란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예수님만이 져야할 십자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질 수 있는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만이 저야 할 십자가, 예수님 만이 지실 수 있는 십자가는 어떠한 십자가입니까?
1.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의 죄짐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너무 기뻤다"고 하실 정도로 인간을 참으로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 편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너무나 상하셨고 마침내 분노하셨습니다. 엄위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자기가 창조하시고 그처럼 사랑하시던 인간이 배신하고 자기의 원수 편으로 넘어갔을지라도 잊을수가 없으셨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간절한 권유에도 재산을 뺐다 싶이 한 후 세상으로 나가는 배신행위를 했을지라도 끝까지 기다린 것처럼 인간을 회복하기를 진심으로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창조주요, 영적 부모이십니다.
진정한 부모는 자녀를 낳고 기르는 일 뿐 아니라 모든 교육, 모든 보호 등, 그들의 일생을 책임지려고 하는 분입니다. 때로 자녀들이 실패의 길을 갈 때라도 끝까지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하는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집의 귀여운 딸이 중3이 되더니 어느 날 나쁜 친구의 꾀임에 넘어가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그날부터 아빠 엄마는 딸을 찾아 헤맵니다. 나중에는 그 아빠가 직장도 사표를 내고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며 찾아다닙니다.
그러다가 1년만에 학교 친구들을 통해서 수소문한 결과 사창가(私娼街)에 팔려가 있더랍니다. 그렇게 예쁘고 귀엽던 딸이 짙은 화장을 하고 몸을 파는 모습을 보는 순간, 엄마는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이제 포기하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은 얼마나 깊은지, 모든 빚을 다 갚아주고 딸을 찾은 동시에 딸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류의 생명의 주시요, 자비하신 영적 부모이십니다. 구약에 보면 호세아라는 선지자가 나오는데 그 부인 호멜이 다른 남자와 음란에 빠졌습니다. 그럼에도 비싼 대가를 치르고 그 음란한 여인을 다시 데려와 자기 아내로 맞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기를 반역하고 날마다 마귀와 함께 죄를 짓는 인간들을 무조건 벌만 주기를 원치 않으시고 그들의 죄까지 책임지시고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지은 영적인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서 영적으로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하셨을 뿐 아니라, 육신의 죄를 대신 하여 무서운 형벌을 그 몸에 받으심으로 상하시고 찢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도 만족하시고 사랑도 충족하게 되었습니다. 무조건 용서하는 것은 사랑의 입장에서는 만족한 일이지만, 공의의 입장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죄 값은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받아야 할 죄 값을 아무 죄도 없으신 대속제물인 어린양 예수님 위에 지우신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유일하게 죄 없으신 예수님만 지실 수 있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이루게 하신 유일한 것입니다. 여러 번 말씀 드린 이야기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이만한 적절한 예화가 없기에 다시 말씀 드립니다. 옛날에 아소카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 나라에 음란이 가득함으로 법령을 내리기를 '이제부터 누구든지 음란을 저지르는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두 눈을 뽑겠다.'고 공포했습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음란죄를 저지르다 붙잡혀 온 자가 바로 자기의 아들 왕자였습니다.
왕은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만약 왕이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그냥 용서해 준다면 온 백성은 왕의 공정치 못함을 비웃을 것이요, 동시에 어느 누구도 왕의 명령을 듣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법령대로 한다면 아들의 두 눈을 뽑아야 하는 것이니 사랑의 아버지의 입장에서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왕은 많은 고민 끝에 마침내 공과 사를 분명히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왕자를 끌어오게 하고 두 눈을 뽑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들은 울면서 "아버지,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할 터이니 용서해 달라"고 아우성쳤습니다. 부하들도 간곡히 건의했으나 왕은 단호히 뽑으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신하들은 시퍼런 칼을 들고 한 눈을 뽑았습니다. 아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며 피가 낭자하게 뿌려집니다. 이번에는 다른 눈을 뽑으려고 합니다. 그 때 왕은 "칼을 이리 내라. 내가 뽑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이렇게 잔인할 수 있습니까? 왕의 공의도 중요하지만, 아버지의 사랑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왕은 예리한 칼을 들고 아들의 눈을 뽑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한 눈을 뽑았습니다. 그 자리에는 두 눈알과 함께 피가 낭자하게 뿌려졌습니다. 그 왕의 공의도 살고 아버지의 사랑도 살게된 것입니다. 그 뒤부터는 온 나라가 음란이 사라지고 바로 잡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은 자기의 눈동자와 같은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의 모진 형벌을 받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영적 아버지의 사랑을 동시에 이루게 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를 통해서 죄 값이 얼마나 무섭다는 사실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랍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로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의 고통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죄는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에덴동산은 기쁨과 평안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가 끼여들므로 그 때부터 인간에게 고통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되고 여인은 아이를 낳는 고통을 당하게 되고 식물도 가시나 엉컹퀴를 내게 되고 짐승도 사나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죄가 인간에게 병이나 기근과 전쟁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어느 분은 묻기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이런 병과 기근과 전쟁을 주시는가?'라고 합니다. 이러한 고통은 인간이 죄를 지은 탓에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 형벌을 대신 받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 수제자 베드로의 세 번씩의 부인, 거짓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와 흉계, 빌라도의 무능하고 마비된 양심, 군중의 무지와 살인적인 고함들, 로마병정의 잔인함과 강포 등이 독한 살이 되어 예수님을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게 했습니다. 또한 멸시와 학대를 당하게 할 뿐 아니라 채찍으로 태장을 맞으시고 무지스러운 주먹으로 뺨을 맞으셨으며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마침내는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두 손과 두 발에 날카로운 못이 박혀서 6시간 매달려 있는 동안에 온 몸의 물과 피를 다 흘리신 후에 운명하셨습니다. 이처럼 참담한 고통을 당하신 것은 온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내리시는 진노와 저주와 심판과 형벌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대신 마음의 평안을 얻고 고난을 이길 능력을 얻으며 병으로부터 고침 받게 하기 위하심인 것입니다.
사53:3 하반절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했습니다.
더 나가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 때문에 우리가 영원한 고난의 불인 지옥의 형벌로부터 벗어나 기쁨의 나라 천국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당하신 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죄와 고통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큰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한 십자가 은혜는 우리 눈에는 아무리 악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모두 주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미국 시카고의 한 작은 예배당에서 다섯 살 된 어린 소녀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아파하며 마지막 순서로 관 앞을 지나면서 아이와 작별할 때였습니다. 매우 초라하고 더러운 옷차림의 한 남자가 일어나 앞으로 나갔습니다. 찢어지고 때묻은 옷에 바지는 질질 끌리고, 눈은 술기운으로 충혈되었으며, 몸은 알콜에 찌든 냄새로 썩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이 남자가 죽은 소녀의 아버지로 알콜중독 주정뱅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딸의 관 앞으로 가서는 아무도 모르게 살짝 죽은 딸이 신고 있던 신발을 벗겨 자기 옷 속에 감추고는 얼른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훔친 신발을 가지고 그 길로 술을 사서 마시려고 죽은 딸의 신발을 35센트에 팔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전혀 변화 받을 수 없는 인간 말종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선 그에게 복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러 해가 흐른 후에 그는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시카고의 복음 전도자 멜 트래더였다. 알콜 중독으로 쓰레기같이 된 인간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임하자 이런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 구원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가 판단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는 십자가 은혜를 받지 못할 자가 없는 줄 믿으시고 모든 자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인류의 죽음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인간이 범죄 함으로 죄가 되었고 죄가 고통을 가져왔고 마침내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함으로 영이나 육이나 죽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우주와 인간에게 가장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영원히 사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모리아산에서 대신 양이 죽음으로 이삭이 살았고, 구약에서는 짐승이 인간 대신 제물이 됨으로 인간이 용서받는 길이 열리게 되었지만 이러한 제사는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영원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달려 계시는 동안만은 인류의 죄짐을 진 가장 추악한 죄인이었으므로 하나님으로 외면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죽음의 고통, 죽음의 처절한 고독, 죽음의 권세가 너무나 두려워서 외치시기를 "엘리 엘리 라마 사바다니" 즉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처럼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의 죄와 고통의 짐을 지고 죽으신 후에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인간들에게 영원히 사는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1)십자가의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면서까지 우리의 죄 문제, 고통문제, 구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랑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거절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저 희생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런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전혀 불쌍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믿음으로 받는 자마다 누구든지 하나님은 기뻐하셔서 무슨 죄든지 사해주십니다.
고통 가운데 기쁨을 주시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더 나가서는 잠깐 육신으로는 죽음을 맛볼지라도 마침내 영원한 생명의 길을 통해서 천국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놀라운 은혜의 선물을 주시려고 애를 쓰시는 분이십니다. 마틴 루터는 어느 날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한 고학생이 어느 집 문턱에 서서 행인들에게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 집에서 체격이 큰 사나이가 무엇인가 큼직한 물건을 들고 나왔습니다. 고학생은 자기를 쫓아내기 위하여 몽둥이를 들고 나온 것으로 알고 도망쳤습니다 그 사나이는 물건을 흔들며 학생의 뒤를 계속 쫓았습니다. 그럴수록 학생은 더 빨리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행인들은 이 모습을 보고 웃었습니다. 사나이가 들고 있는 것은 큰 치즈 뭉치였던 것입니다. 고학생이 불쌍해서 치즈를 주려고 나왔는데 겁에 질린 학생은 자기를 때리려고 따라오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루터는 그의 명저 「탁상어록」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예로 들었습니다. 학생은 도망치기 전에, 그 사나이가 체격이 크긴 하지만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잡힌 인자한 얼굴이며 손에 든 것이 치즈임을 먼저 보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따라오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서운 존재도 거북한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을 주시려고, 우리를 구원의 선물을 주시려고 따라오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처럼 자기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베푸신 이 놀라운 은혜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으심으로 여러분의 생애가 놀라운 축복으로 변화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고통,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자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는 육신을 입고 이 낮고 천한 땅에 오셔서 그처럼 그 모진 고통을 당하셨다면 이제는 다시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약한 존재인지라 다시 넘어져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 때마다 즉시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고 죄를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죄는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품을 떠나가는 것입니다. 아니 됩니다. 오직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처럼 주님의 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주님도 자기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자기의 십자가를 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님 만이 지실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거꾸로된 십자가는 그 만이 질 수 있고 바울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바울 만이 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지체된 우리 성도들에게도 각자의 자기 십자가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각자의 무기를 지급합니다. 그 무기를 가지고 훈련이나 전쟁에 임할 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군사인 우리 성도들의 가장 큰 무기는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야 주님을 따를 수가 있는 것이요, 영적인 승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은 채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것이 가장 답답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조그마한 고난도 받지 않으려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다가 조그마한 고난만 와도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면서 하나님을 떠나려고 합니다.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만이 죄사함이 넘치고 고난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칩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능력, 부활의 능력으로 나타남으로 죽음의 권세를 꺾고 승리하게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받고 낱낱이 회개하심으로 중생을 받고 자기에게 맡겨주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므로 더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는 승리적인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 십자가의 의미
요 19:17-22 / 윤창용 목사
오늘부터 한 주간은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을 묵상하며 보내는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입니다. 오늘 주님은 예루살렘의 시민들의 환호속에서 입성하시어 성전을 청결하게 만드셨습니다. 저는 오늘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진 세 명의 죄수가 달린 십자가의 의미를 하나씩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는 세 개의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4복음서에는 비교적 자세하게 주님의 수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만,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은 유달리 다른 복음서에 비해 비교적 자세히 주님의 수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먼저 동화같은 이야기 하나를 먼저 들려 드리겠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핀란드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의 왕은 정치를 잘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부유하고 평강속에 지내고 있었습니다. 물론 백성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에게는 왕위를 이을 왕자가 없었습니다. 자식이라곤 무남독녀 공주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 공주의 신랑감을 잘 뽑아서 왕위를 잇게 해야 겠다는 생각에 핀란드 전국에 사윗감을 구한다는 공고를 내었습니다.
드디어 공주의 신랑감을 뽑는 날이 되자, 전국에서 수천 명의 건장하고 똑똑한 청년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런 시험은 언제나 말타기, 활쏘기 시합이 있고, 그 시합에서 우수한 성적이 나온 친구들을 데리고 두 번째 시험을 치루게 되는데, 그 두 번째 시험이라는 것이 지혜의 시험입니다.
두번째 시험인 지혜의 시험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즉 하늘과 땅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나무를 구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시험에 통과한 청년들이 두 번째 시험인 지혜의 시험에 들기 위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이 하늘과 땅을 잇는,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나무를 구해오기 위해 떠났습니다.
어떤 청년은 가지가 많고 보기 좋은 나무를 구하러 다니고, 어떤 청년은 긴 나무를, 또 어떤 청년은 굵은 나무를 구하려 다녔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한 사람, 한 사람 나무를 가지고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들 중에는 고아로 자란 존 페로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녀원에서 고아로 자랐기 때문에 먼저 성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이 하늘과 땅을 잇는 나무가, 사람과 사람을 잇는 나무가 생각나질 않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앞에 이 존 페로라는 청년은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응답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당 앞자리에 앉아서 하나님께 빨리 응답해 달라고 고개를 쳐드니까 십자가가 보이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십자가야!’
그는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가지고 왕 앞에 갔습니다. 다른 청년들은 긴나무, 굵은 나무, 좋은 나무들을 가지고 왔지만 존페로라는 청년은 나무 십자가를 들고 왕 앞에 섰습니다.
“너는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
그러자 그는 나무 십자가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느냐?”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나무입니다. 세로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것이고, 가로는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왕은 무릎을 탁 치며 말했습니다.
“자네야말로 내 사윗감이네. 왕이 될 자격이 있네.”
그래서 그 청년을 공주와 결혼시켜서 사위를 삼고 왕의 자리도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잇는 나무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해골 곳이란 언덕에 세 십자가가 세워졌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운데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똑같은 십자가인데, 그 세 십자가가 각각 우리에게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줍니까?
1. 첫째 왼쪽 강도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십자가 형틀에 달려 죽게 하는 죄인은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반란자나, 노예들을 처형시킬 때 사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로마시민들이라고 하면 아무리 무거운 죄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이 십자가형은 면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십가가 형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최고의 형틀로서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친구나, 포악무도한 살인마와 같은 사람을 죽일 때나 사용하는 것이 십자가 형틀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에서 집행된 사형 건수만 해도 연평균 18명, 총 9백2명이 법정을 거쳐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사형수들 가운데에는 흉악범과 함께 정치적 살인자, 순수 정치범, 그리고 억울한 희생자도 있엇습니다. 최근 10년간만 해도 96명이 사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사형제도라는 것은 몇 가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오판하게 된다면 사형당한 죄수의 생명을 돌이킬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 치과의사의 모녀 살해 사건이 있었는데 1심에서는 사형판결이 선고되었다가 항소심에서 무죄로 번복된 예도 있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생명까지 빼앗는 사형제도는 기본적으로 기독교계에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박탈할 권리는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처형은 결국 인간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처형제도입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옆의 왼편 강도는 죄의 종류가 어떠하든 결국 인간은 죄 값으로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십자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회개할 기회마저도 놓치고 죽으면서까지 예수를 조롱하고 불신했던 멸망의 표상(表象)으로서의 십자가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죄를 범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죽은 후에 영원한 지옥의 세계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자들의 완악함을 보여준 십자가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막가는 인생종착을 보는 십자가란 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는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회개하지 않고 가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태도는 냉소적인 태도입니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예수 한번 잘 믿어 보아라"는 식입니다. 그리고 은근히 예수 믿는 것 자체를 별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비하합니다. 바로 십자가 왼편 강도의 십자가의 모습이 이런 모습입니다. 죽으면서도 왼편 강도처럼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 내려와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자기도 죽어가는 입장입니다. 자기 코가 석자입니다. 자기가 지금 남 걱정할 판이 아닙니다. 자기도 죽어가고, 남에게 자랑스러운 십자가도 아닌데, 그 상황에서도 남을 조롱합니다. 이렇게 남의 것을 무조건 비하하고 남의 이야기는 무조건 나쁘게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왼편 강도의 십자가 모습을 갖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같은 죽음을 당하면서도 오른편 강도는 완전히 그와는 달랐습니다.
2. 둘째로, 오른편 강도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른편 강도는 같은 죄를 범했으나, 회개한 자의 십자가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란 엄연한 사실 앞에서 그래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준 십자가란 말입니다. 즉 죄의 값은 죽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그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을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 십자가입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행위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로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란 것입니다.
이 선물이 너무나 값이 비싸 도무지 값을 매길 수 없는 은혜란 것입니다. 값이 너무 비싸면 가격을 매길 수가 없습니다.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은 화랑에서 고가로 값을 매겨 놓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1500년경에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그림은 값을 매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그림에는 '프라이슬레스'(Priceless)라고 써 놓았다고 합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것이니까 값으로 따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쓸모 없는 무가치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고귀한 은혜의 선물이란 것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나타내 보여준 것이 바로 오른편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그것도 죽는 순간에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놀라운 비밀을 보여준 것이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211장을 보면 "그 흉악한 한 강도는 제 죄를 깨달아, 죄 없으신 주 예수를 구주로 믿었네, 내 지은 죄 흉악하나 주 예수 믿으면 용서받은 강도같이 곧 용서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며 강도 짓을 하다 잡힌 사람에게까지 용서받지 못할 죄인도 구원을 얻었는데, 그렇다면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확신을 보여준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죄도 다 사함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 십자가가 오른편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3. 셋째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마디로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대신해 죽은 속죄(贖罪)의 십자가입니다. 지금까지는 죄수의 십자가였지만, 이제는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후부터 십자가는 이제 흉악한 죄인을 죽이는 형틀이 아니라 의(義)를 위한 희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주의 십자가가 아니라 존경과 영광과 찬양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가 희생, 봉사,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나를 죽여야 합니다. 아직도 내가 살아있으면 안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를 매일 매일 죽이고, 살아야 참 성도입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십자가와 부활과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바라봅니다. 세상은 어둡지만 십자가를 쳐다보면 십자가 뒤에 부활과 영생의 길이 환하게 관조됩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번에 드린 희생 제물로서의 십자가입니다. 모든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이 주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놓은 감격의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10: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름을 확인시켜 준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고 운명하였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겠습니까? 죄의 세력을 다 이기고 승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불의한 총검의 세력을 사랑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우리는
① 그의 사랑의 완성을 보고
② 우리 주님이 인류 구원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시고
③ 죄인의 구속 사역의 완성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는 죄의 값인 사망이 물러가고 온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지신 십자가를 쳐다 볼 때,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요한1서 3장 16절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말과 이론이 아니라, 희생 제물이 되어 줌으로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을 죄인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름 없이 그야말로 빛도 없이 음지에서 묵묵히 희생하는 많은 봉사자들이 어디에서 나오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표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포악한 죄인이라도 저 십자가를 볼 때 마음이 녹아집니다. 아무리 패륜아들도 저 주님의 십자가를 대할 때 눈물로 되돌아서게 됩니다. 제아무리 술주정뱅이도, 그리고 탕자들도 저 십자가 앞에서 결단하고 새 사람이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니라 <승리>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십자가(十字架)의 도(道)가 멸망(滅亡)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救援)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能力)이라”(고전 1:18)
이제 주님의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형틀이 아니라 살리는 요람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저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감격의 목이 메는 죄인들이 얼마나 많이 돌아오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신앙의 양상이 달라집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못박혀 죽었다고 하는 신비로운 체험의 신앙이 될 때 참 제자가 되고, 우리의 신앙이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한 주간 동안 묵상하면서 새로운 주님과의 사랑을 이어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양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는 왕
요 19:17-22 / 박경수 목사
대화는 쉽지 않다. 정말 쉽지 않다. “나 행복해.”라고 이야기했다 치자. 정말로 행복할까? 그 사람의 말의 내용은 30%만 들으면 된다. 그리고 나머지 70%는 그 사람의 얼굴 표정이나 몸짓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얼굴을 찡그리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불행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따뜻한 미소로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정말 행복한 것이다.
대화 중 말의 내용보다는 몸짓이 훨씬 더 중요하다. 방법도 중요하다. 시기도 중요하다. 장소도 중요하다. 다이어트로 고민하는 아내에게 좋아하는 케이크라며 사다주면 어떻게 될까?
목사님 가정에 오랜만에 친구가 찾아오기로 했다. 다음 날 설교해주실 목사님인데, 가족관계를 전공하여 꽤나 유명세를 타고 있는 교수님이기도 하다. 혹시라도 책잡힐 일이 있을까 싶어 목사님 부부는 아주 바쁘게 움직였다. 손님을 맞이할 때는 목사님보다 사모님의 손이 더 바쁜 법이다.
첫 번째는 말로 신호가 왔다. “집 좀 치워야겠어요.” 얼마 후에 두 번째 신호가 왔다. 사모님이 말없이 무릎을 꿇고 걸레를 훔치기 시작한 것이다. 목사님은 사모님의 말을 듣고, 무슨 말인지 나름대로 해석했다. 사모님이 걸레 청소를 한다면 먼지 털기나 진공청소기가 어울릴 것이다. 다른 것이 없을까? 그때 큰 액자가 보였다. 가족사진을 찍은 것이 있는데, 그걸 넣으면 될 것 같다.
곧 일을 시작했다. 여전히 사모님은 걸레 청소를 한다. 목사님은 구두 상자에 든 사진을 전부 바닥에 쏟았다. 그리고 어느 사진이 어느 액자에 어울릴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때 사모님의 차가운 세 번째 메시지가 들렸다. “뭐하는 거예요?” 목사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주 즐겁게 대답했다. “사진 끼우는 중이야.” 그리고는 혼자 흐뭇해한다. 해야 할 일을 알아서 척척 잘하는 목사님의 모습이 스스로도 대견한 것이다.
네 번째 사모님의 차가운 메시지가 들렸다. “나 먼저 잘게요. 화가 치밀어 오르는군요. 이유는 내일 아침에 말할게요.” 그제야 목사님은 상황 판단이 되었다. 차가운 사모님의 한 마디를 듣고 나서야 사모님의 계속된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때때로 신호를 놓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때때로 신호를 놓친다는 것을 아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신호를 주신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홍수 후의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준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민임을 보여준다. 별들은 하나님의 집 크기를 보여준다. 성찬식은 예수님 죽음의 신호요, 세례는 우리의 영적 출생의 신호이다. 각 신호마다 깊은 영적 진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신호는 십자가 위에 써있다. 빌라도의 명령에 따라 3개 국어로 쓰여진 죄패이다. 이것은 직접 손으로 쓰여진 신호이다. “⑲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⑳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㉑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㉒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요 19:19~22)
예수님과 함께 두 강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때 한 강도는 운명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 말한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눅 23:42)
강도는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내 영혼에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구하지도 않았다. 강도는 지금 똑같은 강도의 위치가 아닌, 종이 왕에게 올리는 호소를 한다. 물론 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주장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 머리 위에 있는 죄패를 읽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이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을.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눅 23:38). 누가는 이 구절을 기록한 후 넉 줄 후에 강도의 간구를 기록한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눅 23:42). 누가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강도가 예수님 머리 위에 있는 죄패를 읽었다는 말이다.
강도는 자신이 큰(royal) 곤경에 처한 것을 알았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왕의(royal) 선포를 읽고는 왕의 도움을 청했다. 큰(royal) 곤경에 처한 자신을 구할 사람은 왕(royal)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예수님의 죄패로 인해 한 영혼이 구원받았다. 이 모든 것이 누군가 십자가 위에 죄패를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실 때 떨기나무를 사용하셨고, 발람 선지자를 책망하실 때 나귀를 사용하셨다. 요나의 시선을 끄실 때는 큰 물고기를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빌라도를 사용하셔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죄패를 붙여놓게 하셨다. 알던 모르던 빌라도 역시도 하나님의 도구가 된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죄패를 쓴 것이 아닐까?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자가 고작 이렇게밖에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반항하면 누구나 다 이렇게 죽이겠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빌라도의 의중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복음 전파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셨다. 자신도 모르게 천국의 서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죄패에 받아 적었다. 그리고 그 죄패를 읽은 한 사람,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자기 힘으로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의 운명을 바꿔 놓는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지 못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나귀의 새 턱뼈를 집어 들고 삼손은 블레셋 사람 천 명과 싸워 이겼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나귀 턱뼈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토록 귀하게 사용되어질지 누가 알았겠는가? 소년의 5병2어도 마찬가지이다. 한 번 먹고 없어질 양이다. 그런데 삼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양식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 알았겠는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지 못할 도구는 이 세상에 없다.
C. S. 루이스가 없었다면 20세기의 신학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루이스 옥스퍼드 대학 교수는 성인이 되어 그리스도께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펜을 통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왔다. 루이스보다 독자층이 넓고 영적 통찰력이 깊은 작가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더 특이함은 루이스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전도자이다.
그 사람은 루이스를 그리스도께 인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T. D. 웰던이다. 웰던도 루이스도 불가지론자였다. 웰던에 대한 기록이 있다. “모든 신앙 고백문과 그에 관한 거의 모든 긍정적 주장을 비웃었다.” 루이스는 이렇게 썼다. “웰던은 자기가 모든 것을 간파했으며, 가장 든든한 기초 위에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다.” 웰던은 지적이고 냉소적인 불신자였다.
웰던이 어느 날, 루이스의 인생 행로를 뒤바꿔 놓는 발언을 한다. 웰던은 마침 복음서를 변호하는 한 신학자의 글을 연구하던 중이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허튼소리”라고 주석을 달았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죽으신다는…… 또 그 이야기. 꼭 진짜 있었던 일처럼 말하고 있군.”이라고 말했다. 루이스는 이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웰던이 술 취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말이 귀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그리고 예수님의 자기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기독교인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지 못할 사람은 없으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 그 죄패를 읽을 수 있었다. 얼마나 죄가 중하였는지 당대 3대 언어인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로 기록하였다. 서로 다른 언어로 기록되었다. “그리스도는 왕이다!” 지금도 이 메시지는 각기 다른 언어로 세계 끝까지, 모든 백성들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풍요의 언어’로 말씀하실 때도 있다. 지금 배부른가? 빚을 다 갚았는가? 주머니가 제법 두둑한가? 좀 가졌다고 너무 뽐내면 안 된다. 꼭 들어야 할 말을 놓치면 안 된다. 내가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많이 나누어주라는 뜻이다. 그 음성을 듣지 못하면 다른 음성도 들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궁핍의 언어’로 말씀하실 때도 있다. 우리야 하나님께서 풍요의 언어로 말씀하시기를 원하지만, 언제나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1955년 가을 미국 오레곤주 유게네라는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마을회관에서 종교영화를 상영한다는 광고가 났다. 그 영화는 한국전쟁에서 생긴 고아들의 참상을 소개하며 이들을 돌보는 손길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그 영화를 보았던 한 농부 부부의 가슴 속에 잔잔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 고아들이 불쌍하기는 하나 가난한 농부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마음 아픈 영화의 장면들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들 부부는 이 일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됐다.
그것은 농장의 일부를 팔아 직접 한국에 가서 8명의 고아들을 양자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이 마을 신문에 기사로 나가자, 여기저기서 이들을 돕겠다는 편지가 왔고, 어떤 가정에서는 고아를 양자로 삼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이 농부는 전적으로 이 일에 매달리게 됐는데, 그들이 바로 유명한 홀트 양자회의 주인공인 해리 홀트 부부이다.
‘아픔의 언어’로 말씀하실 때도 있다. 다윗이 기도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시 23:2). 몸이 아파본 사람은 이 기도가 얼마나 간절한지 안다. 부부지간이라 하더라도 내 아픔을 배우자가 다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나와 대화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화의 상대자로 선택하셨다. 얼마나 다행인가! 얼마나 감사한가!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하나님께서 나와 대화하시며, 약속의 비밀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신다.
13세기 남유럽을 지배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레더릭 2세(1211~1250)는 ‘아기 실험’으로 유명하다. 그는 주변 환경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을 때 인간이 어떤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갓난아기들을 모아 놓고 먹이고 씻기되, 말을 건네거나, 안고 만지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다. 성장한 아기들은 최초로 무슨 말을 했을까? 라틴어? 히브리어? 원시의 언어는 무엇이었을까? 아이들은 결국 한 마디도 할 수 없었고, 말을 할 나이가 되기도 전에 모두 죽었다.
1248년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였던 살림베네 디 아담은 “황제 프레더릭 2세의 12가지 재난 기행”이라는 책에서 이 실패한 실험을 언급한 뒤 스킨십에 관한 최초의 결론에 이르렀다. “아이들은 따뜻한 손길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어렸을 때 홍역으로 청각과 언어 기능을 상실한 사람이 있다. 그래서 60년이 넘도록 거의 한평생 철저한 침묵 속에 살았다. 이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그의 형이다. 그의 형은 아버지가 일찍 죽자,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을 가졌다. 동생과 대화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수화를 배웠다. 고등학교도 못 갔고, 뭘 배우기 위해 열심을 품어본 적도 없다. 그런데 동생하고 대화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을 들여 동생의 언어를 배운 것이다.
형만 보면 동생은 형의 손을 잡고 구석으로, 방으로 찾아간다. 얼굴이 환해진다.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동생의 입술을 통하여 “고맙다.”고 형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모두가 다 안다.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재미교포 부부가 사업 계약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때마침 비바람이 몰아쳤다. 낯선 길에서 부부는 당황해서 아는 길을 찾았지만, 표지판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침 앞에 ‘부두’라는 표지판이 있었는데도, 미처 읽지 못해서 그만 강에 빠지고 말았다. 부부는 얼른 911에 신고했다. 911에서는 부부의 말을 알아듣지를 못했다. 미국 생활이 20여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영어로 자기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결국 911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이틀 후에 그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오마이뉴스 20070618).
언어가, 말이 통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람이 살기도, 죽기도 한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마 13:11). 하나님께서는 내가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원해서이다. 그래서 죽으셨다. 사랑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있는가?
이건희 회장이 열심히 일해서 삼성그룹의 신화를 이뤄냈다. 그리고 그걸 누구에게 주었는가? 아들에게 주었다. 잘난 사람이 그 주변에 많이 있었지만, 이건희 회장이 선택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들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셔서 누구에게 주시겠는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고난을 통해 영광의 문으로 우리를 이끄시고자 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가?
십자가 위의 명패
요 19:17-22 / 홍문수 목사
사순절을 보내면서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연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말씀으로 ‘십자가 위의 명패’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혹시 러시아 정교회의 십자가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십자가(라틴 십자가)와 다른 모양입니다. 잘 보시면, 십자가 위쪽에 가로 막대가 달려 있고 아래쪽으로 비스듬하게 또 한 개가 달려 있습니다. 가지가 8개라 ‘8단 십자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같은 기독교라도 교파마다 다양한 모양의 십자가를 갖고 있고, 그 나름대로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러시아 정교회의 십자가는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초대교회에서 이런 십자가 모양이 많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맨 꼭대기의 가로 막대는 십자가에 부착되었던 ‘명패’를 상징합니다. 또 아래쪽에 비스듬한 가로 막대는 십자가의 ‘발받침’인 동시에 ‘구원의 방향’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처형될 때 그 양쪽에 강도 둘이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는데, 그 중의 한 명(오른쪽으로 추정)은 회개하고 천국에 갔습니다. 회개한 강도만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래쪽 가로 막대의 오른쪽(우리가 보기에는 왼쪽)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내용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17절~19절을 보시죠. “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힌 곳은 ‘해골’(skull)이라 불리는 언덕입니다. 멀리서 보면 그 모양이 마치 해골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또 그곳에 해골이 많아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해골이란 말이 히브리어로는 ‘골고다’입니다. 그래서 흔히 골고다 언덕이라 부르죠. 로마어(라틴어)로는 ‘갈바리아’(Calvaria)인데, 이 말에서 영어의 ‘갈보리’(Calvary)가 유래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비참한 곳에서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 좌우편에 강도 두 사람이 못 박혔는데,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 중 한 명만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갔습니다.(눅23:39~43 참조)
그런데 여기서 놓치기 쉬운 한 가지는 십자가 위에 패를 써서 붙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패(Sign, Title, Notice)는 쉽게 생각하면 ‘간판’입니다. 그 위에 십자가형에 처해진 죄수의 이름을 적고 죄명을 적어 넣습니다. 그래서 ‘명패’(名牌) 혹은 ‘죄패’(罪牌)라고 부릅니다.
[1] 십자가 위의 명패 : 십자가 복음의 선포
이 명패는 당시 관습대로 부착한 죄패였지만, 역설적으로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는 귀중한 방편이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의 고소로 예수님을 심문했지만, 무죄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수차례 풀어주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기어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데모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민란이 일어나겠고, 자기의 권좌까지 흔들릴 것 같은 압박을 느낀 빌라도는 마침내 타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목입니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고 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이 맞지만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분개했고 신성모독죄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들의 정죄에 의하면 사형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 정부는 다른 것을 몰라도 사형에 관한 문제는 자치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관계로 유대인들은 부득불 로마 총독에게 예수님을 끌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로마법으로는 신성모독죄가 성립되지 않고 사형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다른 죄목으로 고소합니다. 백성들을 충동질해서 민란을 꾸몄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반역죄를 지었다고 뒤집어 씌웠습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로마 정부 차원에서도 중대 사안이요 사형에 해당됩니다. 빌라도는 사실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혐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자 무죄 석방을 하려는 빌라도와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빌라도가 타협했고 사형선고를 내렸는데, 그 죄목을 ‘유대인의 왕’이라 적었습니다. 자기로서는 당연한 조치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법을 존중하던 로마의 통치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명패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이 기록되었습니다. 참으로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들의 궤계를 역전시켜서 당신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바꾸시기도 합니다. 잠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흰 도화지에 장난꾸러기가 낙서를 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화가는 그 위에다 그림을 그려서 명화로 만들었습니다. 낙서 자체는 잘못이지만 그것을 멋지게 바꿔 놓은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빌라도와 유대인의 갈등으로 빚어진 일을 변화시켜 십자가 복음의 도구로 사용한 겁니다.
그 과정이 성경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한번 확인해 보죠. 먼저 요18:38~40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 사실을 확인하고 석방하려고 애를 씁니다. “38 빌라도가 ...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유월절 명절에 특별사면 제도를 통해서라도 석방하려고 유도한 겁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저항합니다. 정 그럴 거면 강도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요구합니다.
당황한 빌라도는 혹시 다른 죄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해서 예수님을 다시 심문합니다. 그래도 역시 무죄였습니다. 요19: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그가 얼마나 곤혹스러웠을지 짐작이 됩니다. 다시 석방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어떻게 나오죠? 요19: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의 총독 자리를 위협하면서까지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빌라도에게 더 깊은 갈등이 생겼습니다. 한참 재판을 하고 있는데 그의 아내로부터 전갈이 온 겁니다. 마27: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빌라도의 아내는 꿈자리가 뒤숭숭했으니 예수의 일에 절대 상관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손을 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자기 권좌와 바꿔야 할 처지입니다. 갈등 끝에 그는 자기 합리화를 시도합니다. 손을 씻는 제스처를 합니다. 자기는 잘못이 없다는 겁니다. 마27: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그렇다고 그에게 죄가 없는 게 아니죠. 자기 자리 때문에 무죄한 사람에게 사형 성고를 내리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결국 사도신경에 기록되어 대대로 정죄되고 있습니다.
이래서 빌라도가 자기 합리화를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에게 항의하는 뜻으로 예수님의 죄목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은 겁니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죄목을 갖고 시비를 겁니다. 본문 21절~22절을 보시죠.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보란 듯이 그대로 적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명패가 부착되었습니다. 본래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관습이었지만,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때는 유월절이라 많은 순례객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왔습니다. 골고다 언덕을 성문 밖 바로 앞에 있는 언덕이라 잘 보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까요? 유동 인구가 2백~3백만은 됐을 겁니다. 지방이나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돌아가 전파하기도 했을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사방에 전파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 셈입니다.
[2] 명패에 새겨진 복음 :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그러면 그 명패에 새겨진 복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시죠.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 말 자체가 십자가 복음의 내용입니다.
① 나사렛 :
나사렛은 예수님의 출신지를 표시한 겁니다. 나사렛은 변두리 산골 동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으로, 그것도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베들레헴 마구간에 오셨고, 어릴 적부터 나사렛 동리에서 자라셨습니다. 인간으로서 더 이상 낮아지기 어려울 정도로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 사형 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빌2:6~8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렇게 예수님이 낮아지심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줍니까?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중에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보다 높아질 수 없습니다. 또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 달린 그 분보다 낮아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녀노소 빈부귀천 하 것 없이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겁니다.
십자가 위의 명패가 3개국어로 기록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20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히브리어, 로마어(라틴어), 헬라어 등으로 기록했는데, 당시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전 세계인이 볼 수 있도록 섭리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간이 아무리 다양한 조건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스스로 높다고 생각해서 체면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스스로 낮다고 생각해서 소외감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합니다. 모두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오신 분입니다.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내 모습 이대로 예수님께서 받아주십니다. 그러므로 나 같은 사람도 예수님이 받아주시고 구원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먼저 믿는 우리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② 예수 :
다음으로, 예수라는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그 이름은 어떤 의미입니까? 마1:21에 예수님의 이름의 뜻이 나오죠. 예수님이 잉태되었을 천사가 와서 전해준 이름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Savior)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은 한 마디로 인간을 죄와 사명에서 구원하는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지만 실제로 구원받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3:16~18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오직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믿지 않으면 이미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뜻에서 이미 심판받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선언합니다. 무조건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만인 구원이 아니라, 선택된 자만이 믿는 자만이 구원받는 제한속죄(制限贖罪, Limited Atonement)가 맞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습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세에 들어갑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지옥은 가만히 있어도 누구나 들어가는 곳입니다. 노비자(No Visa)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살 동안 믿음으로 미리 예약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천국 비자인 셈입니다.
우리가 외국 여행할 때 입국하려면 입국 심사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국 문에서 입국 심사가 이뤄집니다. 계21:12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천국의 새 예루살렘 성의 광경입니다. 그 성곽이 크고 높다고 했습니다.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외부 세력이 침투할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그 성에 문이 12개 있는데, 그 위에 12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12지파는 혈통적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예수 믿고 ‘새 이스라엘’ ‘영적인 이스라엘’이 된 성도들 전체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 백성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천사들이 천국 문에서 그 사실을 일일이 확인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론상으로는 예수님이 모든 인간을 위해 피 흘려 죽었지만, 실제로는 십자가 대속을 믿는 개개인에게만 구원의 은총이 임하는 것입니다. 옛날 학창 시절 극장 문 앞에 ‘미성년자 입장 불가’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무슨 프로인가 궁금해서 사복 입고 가발 쓰고 드나든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천국 문 앞에는 ‘죄인 입장 불가’라는 간판이 붙어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십자가 피로 씻음 받은 성도들은 당당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개개인이 믿음을 준비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서 매 주일 아침 이런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교회 가자고 권하는 부인에게 남편이 늘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당신 혼자 갔다 와! 우리 집 대표로 당신만 가면 되지, 뭐!”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꿈을 꾸었습니다. 죽어서 아내와 함께 천국을 향해 갑니다. 드디어 천국 문 앞인데, 천사가 검문을 합니다. “당신들 부부 맞나요?” 남편은 득의양양하게 대답했습니다. “예! 맞습니다.” “그런데 부인 이름만 있네요.” “우리 집은 이 사람이 대표로 예수 믿었거든요!” 천사가 대답합니다. “아! 그랬군요! 어쩐지 ... 그러면 부인만 대표로 들어가세요!” 믿음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차원임을 설명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천국 비자 준비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습니까? 여러분 각자의 마음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이 사순절이 다시 한번 점검하시고, 구원의 확신 가운데 늘 당당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③ 유대인의 왕 :
맨 마지막으로,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유대인의 왕이실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왕이십니다. 빌2:9~11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주와 모든 인간의 왕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왕!” “나의 주!” 이렇게 부르는 겁니다. 이게 곧 예수님의 왕권(Kingship)이요 주권(Lordship)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왕이시면 나는 무엇입니까? 백성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시면 나는 무엇입니까? 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과연 어떤 겁니까? 눅9:23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부인(自己否認 Self-Denial)이라 함은 주인 노릇 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 십자가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하면서도 때때로 주종전도(主從顚倒) 현상이 일어납니다.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내 욕심대로 살다가 아쉬울 때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주인을 종 취급하는 겁니다. 내가 종인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인정하고 그 뜻을 헤아리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합니다. 모든 일을 우리가 스스로 하려고 하니까 꼬이는 겁니다. 그리고 어려울 때나 주님을 찾는 얄팍한 신앙에 머무는 겁니다.
어느 선교사의 간증입니다. 선교지에 처음 갔을 때 너무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아침 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모든 것을 주님께 물어보고 움직였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과 승리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한국에 있을 때는 모든 게 익숙하니까 주님을 제쳐 놓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게 깨달아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갇혀져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구나 하는 회한이 뒤늦게 생겼다는 겁니다.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주님으로 모시고 그 뜻대로 살면, 그 영광을 위해 살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고전6:19~20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십자가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으므로 우리 각자는 주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장 잘 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건축회사 사장이 있었습니다. 창업 초기부터 함께 일하던 직원이 자기 사업을 하겠다고 통보합니다.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던 직원이라 몹시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집 한 채만 최고로 지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이미 마음이 떠난 그 직원은 마지못해 대답하고 대충 대충 집을 지었습니다. 예상 기한보다 한 달이나 빨리 완공했습니다. 그는 사장을 찾아와 열쇠를 주며 떠나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사장이 손을 덥석 잡으며 말합니다. “자네, 그동안 너무 수고했네. 이 집은 자네 몫이야. 내 성의로 알고 받게!” 그 직원의 얼굴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겁니다. 주님만을 위한 게 아니라, 결국은 내 인생의 집을 짓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십자가 위의 명패에 적힌 말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을 꼭 기억하시고 이 사순절에 십자가 신앙을 다시 한번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쪼록 구원을 확신하시고, 주님을 왕으로 모심으로 항상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골고다 위에 선 십자가
요 19:17-22 / 이중표 목사
예수님은 성경대로 나시고 성경대로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나실 곳도 미리 성경이 예언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은 우연히 난 것이 아니고 수백년 전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실 것을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셨고 그대로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그리고 골고다에서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성경이 예언해 주었습니다.
골고다는 해골(굴갈타)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입니다. 라틴어로는 '갈보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갈보리 언덕이라는 말과 골고다 언덕이라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이곳을 '골고다'라고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곳 지형이 두개골 형상과 같은 뾰족한 바위에서 지명의 유래가 있다고 말합니다. 두번째는 예로부터 죄수들의 사형 집행장으로 사용된 까닭에 해골들이 널려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해골들이 굴러 있는 무덤과 같다고 해서 골고다라고 불렀습니다. 세번째는 유대인의 전승에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아담의 무덤이 그곳에 있다고 하는 오리겐의 주장에 따라서 '인류의 조상적부터 무덤이었던 곳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골고다의 유래는 어느 것이 정확한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해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세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골고다에 십자가가 세워지고 예수님께서 거기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무덤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의 죽은 해골들 위에 십자가가 서 있다는 것입니다.
골고다는 인간의 죽음이 있는 곳이요, 수많은 사람들의 한이 담긴 곳입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죽으시러 가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죽음을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마지막 죽음까지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으로 골고다에 가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양쪽에 죄인들의 십자가 두 개가 서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을 수치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양쪽에 강도의 십자가를 세웠지만 사실은 그 강도와 함께 죽으시려고 골고다로 가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신비한 비밀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 말로 골고다) 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17절)
해골이라는 곳으로 이끌려 갔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여기는 '해골이라는 곳에 나오시니'라고 했습니다. '나온다'는 말은 자원해서 그곳으로 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으로 끌려간 것입니다. 죽으러 간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로마의 백부장의 채찍에 맞으면서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해골이라는 곳에 나오셨다'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가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강도의 곁에서 죽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인류와 함께 죽음을 같이 했고 죄인과 함께 죽으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사랑은 함께 죽는 사랑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장애자에게 도움을 베풀 수 있습니다. 자기를 핍박하는 원수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 함께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함께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는 것은 주님만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자녀와 함께 죽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남편을 사랑해서 함께 죽는 아내도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해서 나라가 망할 때 망하는 나라와 함께 자살한 애국자도 있습니다. 또 자기 짐승의 새끼들이 화염에 불타 둥지가 타오를 때 어미 새가 그 새끼들을 날개로 덮고 함께 죽는 모성애적 사건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들과 함께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해서 함께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강도와 함께 죽은 것은 깊은 의미를 남겨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사랑은 대신해서 죽는 사랑도 있지만 함께 죽었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인류의 죽음이 있는, 해골이 널려있는 골고다의 현장, 이는 인류의 심판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의 심판의 현장이며, 절망의 현장이며, 죽음의 현장인데 그 자리에 주님께서 모든 인류의 심판의 죽음을 친히 담당하기 위해서 골고다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즐거움에 함께 하고 예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기적을 보고 부요를 누리면서 영광에 참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참여하거나 가난에 함께 참여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한 사람은 얼마나 적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가난과 함께 하시려고, 모든 질고와 함께 하시려고, 그리고 마지막 죽음까지도 함께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죽음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골고다의 메세지가 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믿어왔습니다. 주님께서 나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골고다 현장에서 깨닫게 하십니다. 나는 죽음의 해골들과 함께 죽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으시고 나만 살겠다는 것은 이기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주님은 죽었고 나는 살았다' 그렇게는 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죽으려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나와 함께 살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한가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나는 너와 함께 죽었는데 너는 나와 함께 죽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와 함께 죽어다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해서 나와 함께 살기 위해서 골고다 오셨기 때문에 나도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에 오신 것처럼 나도 주님과 함께 골고다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 예수님이 죽는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나도 거기에 매달려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골고다의 주님을 만나는 비밀입니다.
주님이 나의 최고의 사랑하는 대상으로 나와 함께 살기 위해서 하늘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남녀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다 부모를 떠나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살기 위해서 하늘 아버지를 떠나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육신의 부모를 떠나야 되는데 육신의 부모가 누구입니까? 우리의 육신의 부모는 내 아버지, 어머니가 아니고 우리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받은 육신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죽는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도 죽으러 왔습니다. 그래서 둘이 함께 죽는 현장이 골고다입니다. 골고다에서 함께 죽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해서 죽는데 나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죽는다는 말을 수십년 하지 않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허상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서 나도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 자리에서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로 같이 살아야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아니하면 예수님과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함께 죽어야 함께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골고다에 함께 죽습니다.
십자가가 어디에 꽂혀 있습니까 해골들 위에 꽂혀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죽은 해골들 속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골고다는 땅도 아니요, 동산도 아니요, 바위도 아니요, 어느 지역이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이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심판받은 죽음의 현장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꽂으시고 그 피를 흘려서 우리에게 흘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골고다에서 나의 죽음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독일의 신학자요, 설교가였던 크롬마하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거기'가 둘이 있다. 가봐야 하는 거기와 앞으로 가야 하는 거기다. 가봐야 하는 거기는 어둠과 피와 죽음의 골고다다. 가야 할 그 길은 빛과, 희락과, 평강과, 영광의 거기이다. 가봐야 할 거기는 시간과 역사의 현장이었고 가야 할 그곳은 영원한 천국의 처소다. 거기 골고다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골고다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은 사람은 하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골고다에 달리셨던 그리스도가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 오늘 우리는 자신의 골고다 위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골고다는 2천년전 유대 땅 예루살렘 성밖에 있는 한 지형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어느 의미에서 골고다입니다. 이 지구는 무덤의 현장입니다. 바다에도 빠져 죽었고, 산에서도 죽었고, 사막에서도 죽었으며 이 지구 어느 곳 하나 인류의 무덤 아닌 곳이 없습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사업의 현장도 내가 죽을 자리지 내가 사는 자리가 아닙니다. 냉정히 생각하면 내 가정도 골고다입니다. 내 직장도 골고다입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다 골고다로 죽음이 덮쳐오는 자리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모두 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그리스도를 해골들이 보고 있습니다.
골고다 현장에는 울며 따랐던 여인들도 돌아갔고, 그 어머니 마리아도 울며 돌아갔고, 제자들도 도망쳐 아무도 없고,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울다가 돌아갔습니다. 남아있는 존재는 해골들뿐이고 해골들만 예수님을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날마다 살아가면서 골고다에 우뚝 서 있는 그리스도가 나의 유일한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생명의 주가 되어야 합니다. 살았으나 우리는 이미 골고다의 존재입니다. 심판받은 아담의 후예들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가야 할 곳은 골고다밖에 없습니다. 이미 이 몸은 골고다입니다. 그래서 이 골고다 같은 나의 위에 우뚝 서서 나를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골고다 없이 믿기 때문에 그의 삶이 모두 다 허무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다 자기 삶의 현장에서, 사업 현장에서 십자가를 보지 아니하면 골고다 사업으로 끝납니다. 그 사업은 자기를 죽이는 것 뿐이지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으니까 골고다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 위에 있는 십자가의 주님을 보면 그 사업은 가치있는 사업이 됩니다. 내가 아무리 뛰고 달린다 해도 그것은 골고다일 뿐입니다. 결국 해골입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달려 피흘리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나에게는 영광과 죄사함의 은총이 있습니다. 내가 땅에 아무리 금은보화를 쌓아놓아도 그것은 이미 골고다일 뿐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 이래 자기 삶 속에서 골고다를 보면서 그리스도를 본 자만이,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모든 소망을 건 자만이 그의 삶은 위대했고, 영생을 얻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보화로 빛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 골고다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 피의 능력으로, 그 피의 구속함으로, 그 피의 위대한 죄사함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운데 서 있는 십자가
이상규 목사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기 위하여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해서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을 묵상하며 특히 가운데 서 있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신앙고백(사도신경)을 통해서 주님이 어떻게 죽으셨는가를 우리의 입술로 고백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로마의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분명히 주님께서 죄가 없으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놓아주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양심의 소리를 듣기보다는 군중들의 소리에 압도되어 엄청난 잘못된 판결을 내립니다.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이 질문은 성난 군중들을 자극하는 질문이요, 자신이 살길을 찾는 질문입니다. 빌라도의 질문을 받은 대제사장들이 뭐라고 대답하였습니까?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이 말을 듣고 빌라도는 이제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순간부터 이 시간까지 주님은 줄곧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 오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참으로 고귀한 생애였습니다. 흠도 티도 없는 순결한 생애였습니다. 주님의 삶은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왕이시지만 종으로 친히 제자들의 발까지 씻겨 주시는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1.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를 봅시다(17-18절).
우리 주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라는 곳으로 나오셨습니다. 골고다는 지형이 해골과 같은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거기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좌 우편에는 강도들이 못 박혔고 가운데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좌 우편에 서 있는 십자가는 자신들이 강도 짓을 했기 때문에 법에 따라 마땅히 집행되어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가운데 서 있는 십자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은 헤롯이나 빌라도나 공히 인정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죄를 찾고자 혈안이 되었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유대인들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무리를 선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군중들의 소리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마 27:40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 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마 27:42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43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 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눅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막 15: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좌 우편에 못 박힌 강도들은 무리들이 퍼부어 대는 이러한 욕설들을 들으면서 예수님께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들도 함께 조롱에 가담합니다.
마 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막 15: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그런 가운데 갑자기 기인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상에서 나타난 하나의 이적입니다. 함께 예수님을 욕하며 조롱하였던 우편 강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신 것입니다. 저주하고 조롱하던 그 강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니 그는 예수님의 진실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함께 저주하고 조롱하였던 그가 좌편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눅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그의 마음속에 불같은 성령의 역사가 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시고 죄 없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주님이 우편 강도에게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가 주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셨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분수령이 되십니다. 같은 죄 때문에 똑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명의 강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한 강도는 가운데 서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좌편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멸망 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가운데 서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는 사람은 구원의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운데 서 있는 십자가는 구원의 시금석과 같습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을 축복된 백성들이 있는가 하면 이 십자가 때문에 걸려 넘어질 사람들도 있습니다.
2.가운데 서 있는 십자가에 붙여진 죄패를 봅시다(19-22절).
로마의 사형 법에 따르면 십자가에는 죄목을 붙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뭐라고 쓰인 죄패가 붙었습니까?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입니다.
(요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요 19:19) 『Pilate had a notice prepared and fastened to the cross. It read: JESUS OF NAZARETH, THE KING OF THE JEWS.』
이것은 어떻게 보면 죄패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빌라도에게 항의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의 이러한 항의를 묵살하였습니다. 빌라도가 뭐라고 대답하였습니까? "나의 쓸 것을 썼다" 이것이 바로 유대 종교 체계에 대항하는 그의 마지막 반발이었습니다. 그는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죽이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 27:18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빌라도같이 세태에 민감한 정치인이 유대인 종교 체제의 활동에 대해 모르고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는 이 명패가 그들을 모욕하고 곤궁에 처하게 할 줄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원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죄패가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 주님이 수많은 사람들과 민족들이 포함하는 전세계적인 배경가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는 종교와 도덕성의 언어입니다. 물론 헬라와 로마에도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탁월하게 종교적 믿음의 언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약을 히브리어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유대나라가 멸망하고 나라 없이 2000여년 동안 방황할 때도 히브리어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신앙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예수님을 왕이라고 선포하였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종교의 왕이시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헬라어는 두 번째 언어입니다. 그 말은 과학과 교양과 철학의 언어입니다. 그 말은 미(美)의 언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영역에서 주님이시라면 예수님의 사고방식은 문화의 영역에 있어서도 주를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의 문화관과 인생관이 예수님의 관점과 같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편에서야 합니다.
끝으로 라틴어는 법과 선한 정부의 언어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최상의 법 제정자요 운영자이심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법은 여러분의 행실을 주관해야 하고, 여러분은 예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명령이 국가나 다른 어떤 인간의 명령과 서로 상충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빌라도가 십자가 위에 명패를 써 놓은 것은 일차적으로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조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주님의 왕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명패의 내용은 그들의 본성을 그대로 들추어내었습니다. 십자가는 언제난 사람들의 본성을 들추어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히브리인도 헬라인도 로마인도 자신들의 모습을 숨길 수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일은, 온 세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온 세상을 위한 것임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런 것에 대해 인식하지도 못한 채, 명패를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주님의 죄패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복음이 최초로 문자로 쓰여지는 장면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얼마나 아이러니컬합니까? 복음이 원수인 빌라도에 의해서 쓰여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기록한 대로 예수님은 왕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여러분은 우편에 있는 강도처럼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시렵니까? 아니면 좌편에 있는 강도처럼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주님을 거부하시렵니까? 주님은 모든 사람의 왕이시며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만 은혜를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가운데 서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개의 십자가
이상규 목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길바닥에 겉옷을 펴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찬양을 하였습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함과 동시에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주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오르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고 주님의 십자가는 가운데 세워졌습니다. 세 개의 십자가가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왼편의 십자가
예수님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십자가 형틀에 달려 죽게 하는 죄인은 반란자나 노예들의 극형을 처할 때였습니다. 특히 로마 시민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가해지는 중형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로마 시민들에게는 아무리 무거운 죄를 범했다 해도 이 십자가 형틀에 못 박아 죽이지는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베드로도 이방인이었기에 때문에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단두대에서 처형을 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왼편 강도는 그야말로 이방인일 뿐 아니라 반인륜적 포악무도한 죄인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고의 형인 십자가 형틀에 달린 것이었습니다. 이 왼편 강도의 십자가는 죄의 마지막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십자가였습니다. 모든 죄는 이렇게 죽음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의 종류가 어떠하든 결국 인간은 죄 값으로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십자가가 이 왼편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회개할 기회마저도 놓치고 죽으면서까지 예수를 조롱하고 불신했던 멸망의 표상(表象)으로서의 정죄의 십자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죄를 범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죽은 후에 영원한 지옥의 세계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자들의 완악함을 보여준 십자가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막가는 인생종착을 보는 십자가란 말입니다.
구원은 누구나 다 받는 것이 아니라, 택함 받은 자들의 한정된 구원(Limited Salvation)이란 것을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끝까지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회개하지 못하고 가는 인생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왼편 강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죽음 앞에 서 있는 인간은 약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강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지막에는 누군가를 의지하려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애굽의 바로 왕처럼 끝까지 강퍅한 마음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분명히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악을 쓰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좌편 강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똑 같은 죄를 짓고 똑 같은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하나는 구원을 받고 하나는 멸망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는 다 회개한다는 말이 옳은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 아니면 죽으면서도 왼편 강도처럼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죽어갑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그런데 같은 죽음을 하면서도 오른편 강도는 완전히 그와는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왼편의 십자가는 정죄의 의미가 있습니다. 죄인들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심판 받고 지옥 불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2. 오른편의 십자가
오른편에 세워진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왼편에 세워진 십자가와 동일하게 강도짓 하다가 십자가 형벌을 받게 된 사람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왼편 강도와 같이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막 15: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막 15: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막 15: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막 15: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그런데 그가 어느 순간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왼편 강도와 함께 욕하였던 사람이 나중에는 왼편 강도를 꾸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오른편 강도는 자기가 십자가를 진 것에 대해서 ‘마땅한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죄하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오른편 강도는 같은 죄를 범했으나 회개한 것입니다. 결국에 그는 주님으로부터 낙원을 허락받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던 것을 봅니다. 오른편의 십자가가 무엇을 보여줍니까? 죄의 값은 사망이란 엄연한 사실 앞에서 그래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준 십자가란 말입니다. 즉 죄의 값은 죽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그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을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 십자가입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행위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로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란 것입니다.
이 선물이 너무나 값이 비싸 도무지 값을 매길 수 없는 은혜란 것입니다. 값이 너무 비싸면 가격을 매길 수가 없습니다.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은 화랑에서 고가로 값을 매겨 놓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1500년경에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그림은 값을 매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그림에는 '프라이슬레스'(Priceless)라고 써 놓았다고 합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것이니까 값으로 따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무가치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고귀한 은혜의 선물이란 것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나타내 보여준 것이 바로 오른편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그것도 죽는 순간에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놀라운 비밀을 보여준 것이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저는 목회 하면서 그런 분을 여러분 보았습니다. 청석에 김순덕 집사님 남편이셨던 노수근 성도님은 교회 출석하거나 등록한 일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실 무렵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고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우편 강도처럼 마지막에 구원을 받으신 것입니다.
찬송가 211장을 보면 "그 흉악한 한 강도는 제 죄를 깨달아, 죄 없으신 주 예수를 구주로 믿었네, 내 지은 죄 흉악하나 주 예수 믿으면 용서받은 강도같이 곧 용서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며 강도짓을 하다 잡힌 사람, 용서받지 못할 죄인도 구원을 얻었는데 그렇다면 우리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확신을 보여준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가 즐길 것 다 즐기고 마지막에 우편 강도처럼 그렇게 구원받으리라는 생각은 얄팍한 생각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편 강도는 그가 구원받을 수 있는 시간이 바로 그때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비록 세례도 받지 않고 예수님도 오래 따라 다닌 적도 없으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간구 한마디로 낙원을 허락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편의 십자가는 어떤 죄인도 회개하면 용서받고 구원받는 다는 것을 보여 주는 십자가입니다. 여러분들도 죄를 회개하고 가운데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3. 가운데 서 있는 십자가
골고다 언덕에는 세 개의 십자가 세워졌습니다. 좌편과 우편에는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것도 주님의 십자가는 가운데 세워졌습니다.
외경인 도마복음에 의하면 왼편의 강도는 “게스타이”라는 사람이고, 우편의 강도는 “데스마이”라고 합니다. 강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영광이었겠지만 예수님은 더 비참해졌습니다. 예수님을 이 흉악한 두 강도 틈에 끼워 죽인 것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예수님의 죽음을 더 욕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들은 끝까지 예수를 욕되게 하려고 모든 모욕스런 방법을 총동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가 가운데 세워졌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성막은 항상 백성들의 중앙에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 성막을 바라보면서 인도를 받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가운데 세워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로마군병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욕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바꾸어 죄인들을 구원하는 구원의 십자가, 속죄의 십자가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하면서 길 때문에 불평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어 물어 죽게 하였습니다. 모세가 기도하니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불뱀에 물렸다 할지라도 그 놋뱀을 쳐다본즉 살아났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가운데 세워진 십자가는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바라보기만 하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이제부터 십자가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후부터 십자가는 흉악한 죄인을 죽이는 형틀이 아니라 의(義)를 위한 희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주의 십자가가 아니라 존경과 영광과 찬양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가 희생, 봉사,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모든 십자가는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병원과, 희생 봉사 활동을 하는 적십자사의 활동이 모두 십자가를 달고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번에 드린 희생 제물로서의 십자가입니다. 모든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이 주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놓은 감격의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10: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름을 확인시켜 준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고 운명하였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겠습니까? 죄의 세력을 다 이기고 승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불의한 총검의 세력을 사랑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까?
① 그의 사랑의 완성을 보게 됩니다.
② 순종의 제물로서의 사명 완수를 보게 됩니다.
③ 죄인의 구속 사역의 완성을 보게 됩니다.
즉 죄의 값인 사망의 대가를 온전히 지불하고 우리를 해방시키었음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신 십자가를 쳐다 볼 때,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말과 이론이 아니라, 희생 제물이 되어 줌으로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을 죄인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름 없이 그야말로 빛도 없이 음지에서 묵묵히 희생하는 많은 봉사자들이 어디에서 나오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작 왓쯔(Isaac Watts;1674-1748)는 찬송가 141장에서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라고 눈물의 찬송 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이제 아무리 포악한 죄인이라도 저 십자가를 볼 때 마음이 녹아집니다. 아무리 패륜아라 할지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대할 때 눈물로 되돌아서게 됩니다. 제아무리 술주정뱅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탕자들도 저 십자가 앞에서 결단하고 새 사람이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니라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형틀이 아니라 살리는 요람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저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감격의 목이 메는 죄인들이 얼마나 많이 돌아오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세 십자가에서 우리는 각각 다른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주님의 십자가가 가운데 세워지지 아니했더라면 나 같은 죄인이 어디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분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유대인의 왕만이 아니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왕이 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래서 피 묻은 손으로 지금도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주셨습니다. 그분은 지금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좌정하셔서 여러분의 왕이 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 위의 죄 패
요 19:19-22 / 출애굽기 28:36-38 / 이성희 목사
출애굽기 28:36-38, 요한복음 19:19-22
서론
서로 주고받는 명함의 역사는 프랑스의 루이 14세 때에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루이 15세 때에 와서 현재와 같은 동판으로 인쇄한 명함을 사교에 사용하였습니다. 명함 사용의 시초는 중국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명함 사용의 용도가 조금 다릅니다. 친구의 집을 방문했는데 친구가 없는 경우에 자기 이름을 쓴 명함을 두고 가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명함은 최초의 유학생이던 유길준이 사용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처음 만난 사람과 명함을 주고받는 일은 자기를 알리는 교제의 첫 걸음입니다.
명함은 자기를 알리는 방편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명함을 주고받는 매너가 중요합니다. 명함을 교환할 때는 반드시 일어서서 받으라고 합니다. 상대가 명함을 주면 두 손으로 받으라고 합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먼저 명함을 주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매너 없이 주고받으면 오히려 첫 인상을 완전히 구깁니다. 그래서 명함을 돌리고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죄인들에게 죄 패를 목에 걸었습니다. 죄인들을 완전히 창피를 주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죄인은 목에 죄 패를 걸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죄인을 욕하고, 돌팔매질을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죄인들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하여 어림도 없는 이야기이지만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불멸의 이노베이터 덩샤오핑’이란 책에는 ‘덩샤오핑을 보면 미래가 보인다’는 부제가 있습니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정치인입니다. 그가 1969년 두 번째 실각하여 트랙터 공장에서 직공으로 3년 4개월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습니다. 홍위병의 고문에 못 이겨 큰 아들이 북경대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하여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큰 딸은 죄 패를 목에 걸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 때는 홍위병의 힘이 가장 셀 때였습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재기하는 오뚜기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는 작은 거인이었습니다.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지식인들은 ‘혁명의 반동분자’로 낙인이 찍혀 죄 패를 목에 걸고 다녀야 했고, 홍위병들로부터 모진 고통을 받았습니다. 죄 패를 목에 건다는 것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5.16 혁명 후 깡패들이 “나는 깡패입니다”라는 죄 패를 목에 걸고 조리돌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흔히 정치깡패라고 하는 이정재, 임화수 등의 주먹패들이 있었는데 이들에게 이런 벌을 주었던 것입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죄인들에게는 이마에 먹물로 죄인임을 표시하여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마에 먹물로 죄인임을 표시하는 것을 ‘경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경칠 놈’이란 욕이 있었습니다. 이 욕은 아주 나쁜 욕입니다. 죄인들은 인권도 무시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요즘에는 이런 인권을 무시한 비인도적인 벌은 절대로 주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성경시대에 이름이 등장하는 그 사람들만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역사 기록이란 중요한 사람들만 기록하는 것이 역사 기록법입니다. 그 사람들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사람의 이름은 없습니까? 이름을 기록할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이름이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패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양편 죄수의 십자가에는 패가 있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가문이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존재와 죽음과 십자가는 우리와 관계없는 말입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필요도, 알 가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패가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구원에 가치가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패는 예수님의 신분과 존재 의미를 알리는 명함이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패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묵상하면서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의 십자가의 패는 예수님이 누군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19에는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유대의 총독으로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재판장으로서 예수님을 만나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으로 쓴 패를 십자가 위에 붙였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처형될 아주 특별한 죄수는 처형장소로 가는 동안 죄 패를 목에 걸고 가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처형 장소로 가는 도중에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어떤 죄인인가를 알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목에 걸었던 바로 그 패를 십자자 위에 붙인 것 같습니다.
십자가 위의 패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경멸하기 위하여 쓴 패이고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 이름이 예수님을 증명하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조롱하려고 하던 패가 예수님을 증명하는 패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마태복음 2:23에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는 말씀을 이루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탄생 후에 헤롯이 죽이려고 하여 애급에 피난 가셨습니다. 헤롯이 죽고 다시 유대로 돌아오시는데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셔서 정착하십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주된 중심지였고,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예수란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 예수님 말고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른 예수와 구분하기 위하여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많은 유다 가운데 구별하기 위하여 가룟 유다라고 부릅니다. 많은 시몬 가운데 구별하기 위하여 구레네 시몬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요셉 가운데 구별하기 위하여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마리아 가운데 구별하기 위하여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에 이미 두루 알려진 소문난 이름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나사렛이란 동네는 갈릴리의 시골이었으므로 경멸받던 성읍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6에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나사렛은 선지자가 날 만한 동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7:52에는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비하하는 말로 사도행전 24:5에는 “나사렛 이단”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라는 놀림을 받으며 성장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말이 ‘나사렛 예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로 당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귀신 들린 자가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합니다. 귀신 들린 자도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로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에 대제사장 집에서 어린 여종이 베드로에게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예수님도 자신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 베드로는 예루살렘 미문 곁에 앉아 있던 걸인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여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이미 널리 알려지고 사용된 이름이었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은행에 돈을 찾으러 갔습니다. 통장과 도장을 가지고 갔는데 통장의 도장이 아니었습니다. 은행에 가니 은행원 아가씨가 “할머니, 도장이 달라요. 통장도장을 가져와야해요 가셔서 통장도장을 가지고 오세요”. 할머니는 “응 알았어”하고는 나갔습니다. 한참 후에 할머니가 돌아와서 “아가씨, 반장 도장으로는 안 돼? 동네 아무리 돌아도 통장님이 없어”라고 하시더랍니다. 은행에 돈을 찾으려면 통장과 인감이라고 하는 통장도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문에 들어가려면 한 가지만 필요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꼭 필요합니다. 그 이름만 유효합니다. 그 외의 다른 이름은 다 필요 없습니다. 그 이름을 바꿔도, 그 이름이 없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조롱하는 말이었지만 조롱이 아니라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인 것은 동방박사들도 알고 있던 사실입니다. 신령한 지혜를 가진 자는 누구나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고 경배할 왕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이 우리와 무슨 관계입니까?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가 찬송합니다.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셔서 우리가 왕께 드리는 영광을 받아주소서”. 찬송 80장 2절에는 “주 십자가에 달릴 때 명패에 쓰인 대로 저 유대인의 왕이요 곧 우리 왕이시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경멸하려던 이름 ‘나사렛 예수’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 이름에 치유의 기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려던 ‘유대인의 왕’은 예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인도하실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십자가 위의 패의 의미를 잘 알고 예수님을 우리를 고치시는 나사렛 예수로, 우리의 왕으로 인정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의 패는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20에는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인 사실이 당시에 가장 강력한 역사적 검증인 세 나라 말로 증명되는 십자가의 패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고대 역사는 세 줄기가 있다고 합니다. 히브리의 종교, 로마의 법과 정치, 헬라 문화와 문학이 세 줄기입니다. 히브리, 로마, 헬라만 통하면 고대역사는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고대역사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증명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히브리, 로마, 헬라만 통하면 당시의 지중해 중심의 세계에서는 다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썼을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사건을 역사적 사건이라고 증명합니다. 특히 누가는 역사가로서 역사적 기술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에는 “유대왕 헤롯 때에”라고 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역사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1에는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라고 하여 예수님 탄생의 배경을 역사적으로 설명합니다. 누가복음 3:1-2 상반절에는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라고 하여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를 역사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역사가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19세기의 저명한 역사가인 고고학자 윌리엄 램지 경은 누가의 역사 기록이 오류투성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작업을 착수하였습니다. 하지만 평생에 걸친 각고의 노력과 연구를 끝낸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누가의 역사 기록은 그 어떤 다른 역사 기록보다도 더 신빙성이 있다”. 역사가인 누가의 기록이 신빙성이 있는 기록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증거입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라는 책에는 주후 64년 7월 19일 로마의 대화재를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빌미를 찾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은 티베리우스 황제기간에 유대총독이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했던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역사적 사건임을 말하고 있으며 성경의 기록과 역사적으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바리새인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예수 그는 그리스도였고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 형을 선고하여 죽었고, 죽은 후 3일에 그는 다시 살아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일반 역사는 한 결 같이 그리스도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미국 CNN 방송의 유명한 토크쇼 진행자였던 래리 킹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터뷰 대상자를 한 사람 고른다면 누구로 정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인 킹은 “나는 그분이 정말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는지 묻고 싶군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내게 역사를 정의해 줄 겁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래도 그가 예수님을 역사적 인물로 인정하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죄 패가 히브리말, 로마말, 헬라말로 기록되어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로마도 헬라도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라가 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하여 로마 선교의 열정을 알렸습니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자로서 로마황제에게 상소하여 로마로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큰 태풍을 만나 멜리데라는 작은 섬에 잠시 머물러 배를 갈아타고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기록은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였지만 금하는 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은 진행 중입니다. 로마의 선교는 진행 중입니다.
바울은 당시에 문화와 철학의 중심지인 헬라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에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라고 합니다. 당시에 철학자들이 모여 변론하는 장소인 아레오바고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철학자들과 토론을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바울은 헬라의 고린도에서 북부 데살로니가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이 유대에서 로마로, 헬라로 전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왕이시며 또 우리의 왕이심이 불처럼 번졌습니다. 이제는 세계 방방곡곡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19세기 프랑스 화가인 구스타프 도레는 성경 삽화를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합니다. 지금도 그의 성경 삽화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유럽을 여행하던 중 여권을 분실하였습니다. 출입국을 관리하는 관리인이 신분증명서를 요구하였습니다. 도레는 자신이 구스타프 도레인데 여권을 분실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관리인은 그에게 자신이 도레인 것을 증명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도레는 연필과 종이를 가지고 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관리인은 “이렇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구스타프 도레뿐이다”라고 하면서 통과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증명하는 증명서가 따로 필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실력과 인품이 증명서였습니다. 대통령의 명함을 받아보면 아주 간단합니다. 아무 글도 없이 대통령 휘장이 있고 ‘대통령 박근혜’라는 글밖에 없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은 우리에게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부입니다. 이 이름만 있으면 언제나 치유의 기적이 있습니다. 죽음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풍성한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가야할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지 못하고 조롱합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자들은 우리도 조롱합니다. 우리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합니다. 목사를 ‘먹사’라고 합니다. 집사를 ‘잡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명함이며 신분증명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롱거리로 삼지만 우리가 참 기독교인, 참 목사, 참 예수님의 제자로 삽시다. 예수님의 죄 패가 예수님의 명함이었던 것처럼 이런 세상의 조롱이 우리의 자랑스런 신분증명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참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드러내는 패를 가지고 떳떳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주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