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본2 - 부르고뉴의 와인 산지 본에 도착해서 구시가지 성으로 들어가다!
우리 부부는 프랑스 동부의 리옹 파르 디외역 Lyon Part Dieu 역에서 화이트 와인의 고장
부르고뉴의 본 Beaune 으로 가기 위해 디종 Dijon Ville 행 15시 16분 기차를 탑니다.
기차는 화이트 와인 의 산지를 지나 오후 5시에 본 Beaune (Chagny) 역에 도착하는데
Chagny 지역의 본 Beaune 이라는 뜻인가 봅니다? 하기사 서독에도 도시 본이 있으니...
배낭을 메고 역을 나오니 길 건너에 우리가 인터넷으로 예약한 호텔 드 프랑스 레스토랑
타스트'뱅 이 보이는데... 호텔 영업 보다도 레스토랑 영업이 더 중요한지 호텔 이름
에도 레스토랑이라는 말이 들어가는데 나중에 보니 부르고뉴산 와인 을 마시는 식당입니다?
역 앞에 호텔 드 프랑스 레스토랑 타스트'뱅 Hôtel De France Restaurant Le Tast'Vin
은 클래식 더불룸이 도시세 와 아침을 포함해 € 90(119,000 원) 인데.....
4개월 전인 1월달에 예약하자마자 내 신용카드에서 호텔비를 미리 인출해간 곳입니다.
호텔 주인이 아침 식사를 말하기에 마눌이 늘 휴대한 전기남비로 밥을 하는지라 습관적으로
NO! 라고 했더니, Free ? 라기에 아차! 싶어서 Include in Breakfast ? 라고 되물으니
그렇다기에 식사 시간을 메모하고 장소를 물으니 여기 호텔 내의 레스토랑에서 한다네요?
그런데 호텔비에 포함되었으니 당연히 주는 아침에 대해 호텔 주인이 말을 꺼낸 이유는....
저녁 Dinner 을 먹지 않겠느냐고 권유하기 위함인데, 가격을 물어보니 식사에 와인을
들면 1인당 30유로 정도 한다니까 마눌은 놀라서 바로 거절하기에 한명분만 예약 합니다.
호텔 방으로 들어와 여행계획서와 또 인터넷에서 인쇄한 호텔 바우처를 보니 아침이 포함
이라고 나와 있는데.... 우리가 들러는 곳은 중급 호텔이라 열군데 중에서 아홉군데는
아침이 별도 이다 보니 그게 습관이 된지라 미처 확인을 하지 못해 일어난 해프닝입니다?
벌써 오후 5시가 넘었으니 시간이 없는지라 샤워도 하지 못하고 배낭만 던져놓고 바로
나와서는 역을 등지고 큰 길인 위트 셉탕브르 대로 Ave. du 8 Sept 를 걷습니다.
3~4 분쯤 걸으니 큰 도로를 만나 건너니 구시가지 전체를 두른 견고한 성벽 이 보이는데...
이 도시 본 Beaune 은 이런 성벽이 아직도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게 인상적입니다.
옛날 본 Beaune 성의 동문 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 아주 오래 된
Rue des Tonneliers 거리를 걸으니 구시가지 Old Town 입니다.
거리 양쪽으로 담쟁이 넝쿨이 우거진 돌로 된 엄청 큰 옛날 저택이 보이길래.....
뭣하는 곳인가 해서 살펴보니 와인 제조공장이자 와인 시음장 인 모양입니다?
이윽고 벽에 그림 이 그려져 있는데 지붕이 채색 타일로 만들어진 예쁜 집 앞에서 사람들이
둘러서서 무슨 영상 촬영을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그림이니, 그럼 여기가 라알 광장
Pl. de la Halle 인가 본데... 관광용 미니 전차 비지오트랭 이 여기서 출발하는 모양입니다?
본 Beaune 은 화이트 와인인 부르고뉴 와인 의 중심 도시로 구시가지는 성벽 으로 둘러
쌓여있는데 아직도 4분지 3정도가 존재하며.... 성 내부는 차가 적어 산책하기 좋으니
위트 셉탕브르 대로를 걸어 5분만에 성내로 진입하는데 구시가지 중심은 라알 광장 입니다.
라알 광장 Pl. de la Halle 에서 관광용 미니 전차 비지오트랭 을 타고 거리와 포도밭을
둘러볼수 있으며 와인셀러에서는 유료로 와인을 시음 할수 있다고 들었기로 10분
가량 서서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으니 포기하고는 시내지도를 보며 시료원 부터 찾아갑니다.
본 Beaune 은 옛날 게르만 부르군트족 이 세운 부르고뉴 왕국의 수도 디종에서 아주
가까우니 그럼 부르고뉴의 중심 지역인데..... 부르고뉴왕국은 계절 별자리,
날짜, 해와 달의 변하는 모습 등을 표현하고 채색 삽화를 담은 달력 을
만들었으니..... 표정훈의 호모부커스 칼럼에 “책이된 달력” 이란 글이 나옵니다.
“해마다 설 즈음 사람들이 많이 찾던 옅은 주홍색 장정의 얇은 책이
있다. 올해라면 ‘무술년 대한민력’ 이다. 그게 책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엄연히 국제 표준 도서번호(ISBN) 가 부여된 단행본이다.”
“1990년대 까지만 해도 ‘운전면허학과 시험문제집’ 과 함께 숨은 베스트셀러
였지만 지금은 판매가 신통치 않다. 대한민력은 책력(冊曆), 즉
음력 기준으로 한 해의 육십갑자 월일과 절기 등을 정리한 달력의 일종 이다.”
“책력은 음양오행과 풍수 방위 에 따른 간단한 길흉 지침도 담고 있어 점치는 책 역할도
했다. ‘토정비결’ 과 함께 갖추는 이가 많았다. 국권을 빼앗긴뒤 1911년 부터는
일제 당국이 일본의 축일(祝日) 과 농사 절기 등을 추가한 ‘조선민력’ 을 펴냈다. ”
“조선의 마지막 달력은 1910년 ‘융희 4년 명시력(明時曆)’ 이다. 달력을 통제하는 이가
시간과 삶을 지배 한다는 것을 ‘달력과 권력’ (이정모) 이라는 책 제목이 말해준다.”
“거슬러 올라가면 사마천의 ‘사기’ 에 ‘역서(曆書)’ 가 있고 반고의 ‘한서’
에는 ‘율력지(律曆志)’ 가 있다. 역사서에 달력이 포함된
이유는 하늘의 일과 인간의 일 이 서로 응하여 통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달력 은 조선 세종 때인 1444년에 정인지가 만든 七政算(칠정산) 으로 칠요(七曜 : 해ㆍ
달ㆍ수성ㆍ금성ㆍ화성ㆍ목성ㆍ토성) 의 운행을 계산하는 방법이라 하여 칠정산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고려시대 문종때인 1052년 에 당나라 선명력 을 가져와 사용하면서 1030년 일식 날자가 틀린것을 계기로
견행력 등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실제로는 계속 당나라 선명력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100년 상나라시대에 달력 이 만들어졌다지만..... 우리나라에서 달력이 이처럼 늦게 된
이유는 먼저 우리 민족은 문자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글자나 책 이 없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중국에서 간헐적으로 한자가 들어오지만 천문관측과 기록도 힘든데다가 하늘과 통하는 이는 오직 중국
천자 뿐이라는 중화사상으로 인해 제후국은 중국의 연호와 달력을 써야지 만드는건 불경 이었기 때문 입니다.
고려 문종 이 저런 달력을 만든건 당나라 말기에 중국이 '안사의난' 으로 대혼란에 빠져 이웃
제후국에 신경을 쓸수 없는 내란 상황에서 "외왕내제" 할수 있었기 때문이며.... 선조는
임진왜란때 온 명군이 조선이 자체 달력을 쓰는걸 알까 겁을내서 달력 제작을 금지 하게 됩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책력으로 보물 ‘류성룡 비망기입대통력 (柳成龍備忘記入大統曆)’ 이 있으니,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전투등 중요한 사실들을 명나라의 달력인 ‘대통력’ 이라는
책력에 적어 둔 것이니 계속 명나라 달력을 쓴걸 알수 있으며 구한말 고종때에 만세력 을 만들게 됩니다.
“서양의 대표적인 달력 문화유산은 15세기 초 부르고뉴 공국의 랭부르 형제가
만든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기도서’ 다. 계절 별자리, 날짜, 해와 달 의
변하는 모습 등과 함께 시간과 계절에 맞는 기도문을 싣고 채색 삽화를 담았다.”
“벤저민 프랭클린 이 1732∼1757년에 펴낸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 에는 여백에
금언이 실려 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책임을 져야 하듯이, 불필요한
침묵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 자신을 가장 많이 속인 사람은 자기 자신 이다.'“
“시인 조지훈 의 수필 ‘원단(元旦) 유감, 캘린더의 첫 장을 바라보며’ 가
세월과 세상사에 관한 큰 울림을 준다. ‘동지는 가고 새해는
왔으나 겨울은 아직 다 가지 않았고 봄은 먼 곳에서 보일 듯 말 듯 모르겠다.”
“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 흙덩이 밑의 새싹 을 느껴서 알 뿐이다. (중략) 낡은 것과
싸우는 동안에 새것도 그대로 낡아 간다. 의(義) 도 권력과 결부되면 불의 를 닮아 간다 ”
이런저런 생각 끝에 우리는 옛날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렙에서 보았던 성 스테판 교회
St. Stephen 처럼 지붕에 붉고 초록의 채색 타일 이 예쁜 큰 건물에 도착했는데
여기가 호텔 주인이 반드시 보아야 한다고 일러준 바로 그 시료원 Hotel Dieu 입니다.
울긋불긋한 체크무늬를 보니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인 동정민씨의 글 “프랑스 50여년만에 교복
부활 움직임, 휴대전화 금지 이어 자율성 제한 논란” 이 떠오르는데 프랑스는 교복도
화려한 무늬를 쓸른지 궁금 합니다. “유니폼은 공동체 정신과 학교 정체성 을 상징 합니다.”
“프랑스 파리 7구 소르본 대학 근처 생트 클로틸드 초등학교 는 내년부터 교복을 착용
하기로 최근 결정한 뒤 학부모에게 이런 유인물을 배포했다. 내년부터 이 학교
학생들은 파란색 블라우스와 네이비블루 코트에 하얀색 혹은 파란색 양말,
구두만 신어야 한다. 아이들이 입는 블라우스에는 학생의 이름을 자수로 새겨야 한다.”
“21일 오후 생트 클로틸드 학교 앞에서 만난 학부모 델핀 씨는 “교복 부활에 대찬성”
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복은 아이들을 아이들 자아 외에 다른 것으로
구분할 수 없게 한다” 며 “아침에 학교 갈 준비도 빨리 할 수 있다” 고 매우 반겼다."
"그러나 엄마 손을 잡고 있던 아들 호망(9)은 “매일 아침마다 같은
옷을 입는 것이 좀 마음에 걸린다며 썩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학교 스스로 교복 도입 여부를 결정할 수 있지만 프랑스에서 교복을 입는 학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가 50년만에 교복 부활에 시동을 걸 조짐을
보이자 프랑스 사회가 시끌시끌하다. 장미셸 블랑케르 교육장관은 최근 르피가로
인터뷰에서 “교복을 입고 싶어 하는 학교가 많다.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고 밝혔다“
“마크롱 대통령도 대선에서 “국가와 유니폼 같은 상징성은 집단의 동질성 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고 말했다. 하원에는 “선생님의 권위 회복과 학생들 간의 존중의 뜻을
나타내고 차별에 맞서기 위해 초중고에 교복을 도입한다” 는 내용의 법안이 발의돼 있다“
“프랑스에서는 1960년대 후반 까지 잉크 자국을 막기 위해 가운 을 입었고, 여고생들은
깨끗함의 상징으로 블라우스 를 입었다. 그러다 볼펜 이 개발되면서 가운이 사라지고,
68 혁명 등으로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점점 사라졌다. 그러나 8월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3% 가 교복 부활에 찬성하는 등 찬성 여론은 늘어나는 추세다.”
“마크롱 정부는 교복도입 외에도 자유롭게 놔뒀던 학생들의 복장과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조치들을 교육 개혁으로 발표하고 있다 . 9월부터 초중생 휴대전화 학교 소지를
전면 금지 했고 이달에는 16세 미만 청소년의 경우 부모의 허락 없이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할수 없도록 제한하는 법안 초안을 마련했다.”
“블랑케르 장관은 “학생들이 하루종일 컴퓨터나 휴대전화 화면만 보고 있는건 ‘공공
건강’ 차원에서 다뤄야 할 문제” 라며 대응을 예고했다. 프랑스 사회학자 파스칼
라르들리에는 “학생들의 사이버 접촉 연령은 낮아지는데 부모와 정부가 사용을
관리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 이라며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프랑스 교육 관련 종사자들의 협회의 국가교육 담당자 리지안 제르베
는 “교육 개혁은 교복 부활이나 휴대전화 금지 같은 게 아니라
우리 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 하는게 우선돼야 한다” 고 꼬집었다."
"교복이 교육 시스템을 발전시킨다는 과학적 증거는 없다” 며 “학교 교육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는게 훨씬 더 중요한 문제” 라고 비판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접고는 드디어 6.5 유로 입장료를 내고 시료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보이는게 약초를 갖고 약을 만드는 곳 입니다.
병원인 시료원 Hotel Dieu 은 "신의 처소“ 라는 뜻으로.... 르네상스 시기
인 1443년 본의 대법관 니콜라 롤랭 부부가 가난한 사람들 을
위한 병원으로 지었다고 하는데현재는 가톨릭 교회 에서 운영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