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9일 CCCC : CICA (민립O군사관학교;한국인터넷사이버총합학교;한국민총합학원)
6월 19일
오늘의 말씀
① 시편19편전문【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2)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의미도 있다
(시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19: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렘31:35
(시 19: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시 19:4)
그의 1)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롬10:18
(시 19:5)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왕상18:46, 전1:5
(시 19: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약1:11
(시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시 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 19: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시 19: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 19: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시 19: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 19: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시 19:14)
② 잠언19장 전문
(잠 19:3)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잠 19:4)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약2:2
(잠 19:5)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
(잠 19:6)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잠18:16, 잠21:14
(잠 19:7)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잠18:23
(잠 19:8)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잠 19:9)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잠 19:10)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
(잠 19: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 19:12)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
(잠 19:13)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잠 19: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고후12:14
(잠 19: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잠 19:16)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자기의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
(잠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잠 19:18)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잠 19:19)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네가 그를 건져 주면 다시 그런 일이 생기리라
(잠 19:20)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잠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잠 19:22)
1)사람은 자기의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19:2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
(잠 19:24)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잠 19:25)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으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
(잠 19:26)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
(잠 19:27)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잠10:17
(잠 19:28)
망령된 증인은 정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키느니라
(잠 19:29)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오늘의 역사
① 도솔산 전승 기념일(1951) : '해병대 전승 기념일'이라고도 한다.
6.25 사변 때인 1951년 봄, 북한측의 제3차 공세로 우리측의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을 때, 중동부 전선을 맡고 있던 해병 제1 연대는 도솔산의 험준한 요새를 믿고, 거기에 현대적 요새를 지어 난공 불락을 자랑하던 북한측 12사단과 32사단을 공격, 16일 간에 걸치는 치열한 싸움 끝에 2개 사단을 무찌르고, 최후 목표인 24목표 고지를 1951.6.19 오늘 완전 점령했다.
이 승전으로 우리측은 불리하던 전세를 만회하게 되었다.
② 장서각 설립(1911) : 6월 19일 조선시대 문서를 보관하던 이왕직도서관인 장서각이 설립되었다.
고종 때 규장관․홍문관․집옥재․춘방․4사고 등에 있던 책들을 사간동에 있는 인수관으로 옮기고 서고를 지으려 했으나, 1910년 한일합병으로 중단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새로 이왕직관제를 정하면서, 규장각이나 사고의 서적들을 이왕직도서관에서 관장하게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도서들을 조선총독부 취조국으로 옮겼고, 이왕직에서는 그밖의 서적들만을 보관했다.
여기에 새로 책들을 모아 1911년 이왕직장서각을 설립하고, 1918년에 서고 이름을 '장서각'으로 지었다.
1981년에 장서각 도서 모두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장서각은 여러 차례 보유하고 있던 책들을 정리해 <이왕가도서실장서목록 李王家圖書室臧書目錄>(1914) 등의 도서목록을 편찬했다.
③ 제2대 국회 개원(1950) : 1950년 오늘, 제2대 국회가 개원했다.
국회의장에 신익희씨, 부의장에는 장택상, 조봉암, 김동성씨가 선출됐다.
제2대 국회는 우리 나라 의정 사상 최초로 우리 손으로 만든 국회의원선거법에 의해 구성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제2대 국회의원 210명은 20일 전인 5월 30일 소선거구,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됐다.
무소속이 60%인 126석, 민주국민당과 대한국민당이 각각 24석을 차지했다.
2대 국회는 엿새 뒤 6.25전쟁이 일어나자 수도(首都)와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④ 삼선개헌 반대 데모 시작(1969) : 대통령 중임에 성공한 박정희는 이제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소위 3선 개헌에 착수하였다.
당시 헌법이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1971년에 있을 다음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69년 1월에 공화당이 3선 개헌을 검토하고 있음을 공식 발표하자 당시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우선 공화당 내에서는 박정희의 유력한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김종필이 이에 반발하였고, 신민당은 범국민 투쟁 위원회를 결성하여 대항하였으며, 학생들의 시위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러한 반대 의사를 모두 무시하고 개헌을 강행하였다.
결국 개헌안은 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철야 농성을 벌이는 가운데 국회 별관에서 공화당 의원들에 의해 전격적으로 통과되었고(1969.9), 뒤이은 국민 투표에서 가결됨으로써, 새 헌법으로 확정되었다(1969.10.17).
7월 3일 국회가 개원되었으나 신민당은 부정선거전면무효화 투쟁위원회를 구성해 전국규 모의 규탄대회를 여는 등 원외투쟁을 계속하였고 이에 동조하는 학생들 또한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이에 정부는 30개 대학, 148개 고교에 대한 휴교조치로 맞섰다.
교착상태에 빠진 시국의 수습을 위하여 여야가 전권회담을 개최, 선거관리위원회 위원개선과 선거법․정당법 개정, 부정조사 특위법 제정 등에 합의하고, 신민당은 국회개원 142일만인 11월 29일에 등원하였다.
⑤ 대한 항공 창설(1962) : ⇨ 3월 1일
⑥ 고리 원자력 1호 발전기 최초로 점화(1977) : 부산 기장군 장안읍 고리(古里)에 있는 원자력발전소.
1971년 11월에 착공하여 77년 6월 19일에 초임계(初臨界:원자로의 점화)를 한 다음, 각종 시험을 거쳐 78년 4월부터 본격적인 상업가동에 들어갔다.
이 원자력발전소의 가동으로 한국은 세계에서 20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인도에 이어 3번째의 원자력발전국이 되었다.
1971년 11월 15일에 건설의 첫발을 내디딘 후에 1977년 6월 19일에 최초로 임계에 도달하였으며, 1977년 6월 30일에는 전력계통에 병입, 1978년 4월 29일부터는 본격적인 상업운전을 시작하였다.
⑦ 흥선 대원군 석방(1895) : ⇨ 7월 12일
⑧ 국립서울종합대학교 설립안 발표(1946)(동년 8월22일 신설) : 1946년 오늘!
미 군정청은 국립 서울종합대학교 설립안을 발표한다.
경성대학과 8개 관립전문학교, 사립학교인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통합해 서울대를 설립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설립안이 발표된 지 두 달 만인 8월 22일 9개 단과대학과 한 개의 대학원으로 구성된 우리 나라 최초의 국립종합대학인 서울대가 출범한다.
서울대학교는 1975년 서울 동숭동을 떠나 지금의 관악캠퍼스로 이전했다.
***국대안의 골자는 한마디로 압축하면 ''통폐합안''이었다.
없앨 것 없애고 합칠 것 합치고 전체를 하나로 묶어 중앙사령탑의 통제 하에 들어가는 커다란 조직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문교부가 밝힌 국대안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기존의 경성대학과 서울 근교에 위치한 관립전문학교 등 9개 전문학교를 폐지, 하나의 종합대학으로 개편해 9월 신학기부터 시행한다는 것으로, 학문 자유 보장을 위해 최고정책결정기관인 민선 이사회를 별도로 두는 것 등이었다. 다만 민선 이사회가 조직될 때까지 잠정 조치로 미군과 문교부 간부로 구성된 임시이사회를 둔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통합대상이 된 학교는 당시의 경성대학(법문학부, 이공학부, 의학부)과 경성의학전문, 경성치과전문, 경성법학전문, 경성광산전문, 경성고등공업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여자사범학교, 수원농림전문 등 총 10개에 달했다.
이밖에 예술대학을 신설하며, 이를 9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9개 단과대학은 문리과대학(경성대학 문학부, 이학부), 법과대학(경성대학 법학부, 법학전문학교), 사범대학, 의과대학(경성대학 의학부, 의학전문학교), 상과대학, 공과대학, 치과대학, 농과대학, 예술대학(음악부, 미술부) 등이었다.
⑨ 미대통령 아이젠하워 한국 방문(1960) : 1960년 오늘!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Dwight Eisen-
hower) 미국 대통령이 1박2일 일정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방한한 아이젠하워 !
서울 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정동에 있는 미국대사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아이젠하워는 이튿날 우리 국회에서 두 나라 사이의 협력를 강화하자고 연설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이 공산 세력의 침략에 적극 대응할 것을 약속하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허정 과도정부 수반과 두 차례에 걸쳐 한미 고위회담도 가졌다.
이 회담에서 두 나라는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공동노력하기로 합의했다.
⇨ 10월 14일
⇨ 6월 6일
⑩ 가덕도해전(加德島海戰) : 1597년(선조 30) 6월 19일 원균(元均)이 부산 가덕도 근해에서 왜(倭)의 수군과 벌인 해전.
⑪ 새대서양 헌장 : 1974.6.19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각료 이사회에서 채택한 것으로 NATO 회원국간의 안보, 유대 강화를 위한 정치․경제 협력의 증진이 주요 목표이다.
⑫ 쿠웨이트 독립(1961) : 6월 19일 영국 정부는 보호령이었던 쿠웨이트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했다.
쿠웨이트가 처음으로 유럽 강대국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세기말이다.
독일과 오스만 제국의 영향을 막기 위해 영국과 쿠웨이트는 1899년 영국에 쿠웨이트의 외교권을 넘겨 준다는 내용의 조약을 맺었다.
1914년 영국-터키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은 쿠웨이트에 보호령을 설치했다.
1923년에는 이라크와 북쪽 국경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1961년 쿠웨이트가 독립한 이후 아랍 연맹도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1980년에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쿠웨이트의 안보를 위협했고, 1990년 쿠웨이트가 이라크군에게 점령당하자 미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이라크에 대한 공중폭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⑬ 중동 5원칙 : 중동 문제 평화 해결에 관한 미국 정부의 기본 방침.
존슨 대통령이 1967.6.19 발표.
내용은 1) 각 민족의 생존권 승인
2) 난민 문제 해결의 추진
3) 국제 수로(水路) 무해 항행(無害航行)의 자유
4) 군비 경쟁 제한
5)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존의 존중 등.
⑭ 로젠버그 부부 사형 집행(1953) : 로젠버그 부부의 아이들을 선두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탄원하기 위해 데모행진을 하는 사람들 !
플랭카드에 "아빠와 엄마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라고 쓰여져 있다.
미국 전역이 매카시 선풍으로 이성을 잃고 있던 1953년 6월 19일, 미국의 전기기사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그의 부인 에설 로젠버그가 뉴욕주의 싱싱형무소에서 전기의자에 의한 사형에 처해졌다.
1944년부터 1945년 사이에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비밀을 빼내 소련에 넘겼다는 것이 처형이유였다.
로젠버그는 35세였고 부인은 37세였다.
이들은 1951년 4월 5일 스파이 주모자와 적극적 협력자라는 죄명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었다.
이들 부부는 1950년 여름 간첩활동 혐의로 체포돼 재판을 받아왔다.
공산당원이었던 로젠버그는 재판기간 내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간첩행위에 대한 물증도 없었지만 마녀사냥의 광기는 이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당시의 연방수사국장 에드거 후버는 이 사건을 '세기의 범죄'로 규정했고,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담당 판사 어빙 카우프먼은 "이들이 조국을 배반하고 소련에 원폭 기밀을 넘김으로 인류 역사가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사형선고는 세계의 여론을 들끓게 했다.
수많은 미국 시민을 비롯, 교황과 아인슈타인, 피카소, 사르트르, 러셀 등 세계의 지성들이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며 구명운동을 펼쳤다.
사건의 진실은 이들이 처형된 지 44년이 지난 1997년 '워싱턴 포스트'지에 의해 밝혀졌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1943년부터 1946년까지 로젠버그를 50여차례나 비밀리에 만난 전 KGB 요원 알렉산더 페크리소프의 증언을 통해 로젠버그가 원폭 제조기밀을 소련에 넘기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증언에 따르면 로젠버그는 소련에 고급 산업정보를 제공한 스파이이긴 했지만 원폭 기밀은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로젠버그는 간첩이 아니라는 좌파의 주장도, 원폭기밀을 제공했다는 우파의 주장도 모두 거짓임이 입증된 셈이다.
⑮ 니케아 공의회 개최(A.D 325) : 6월 19일,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서쪽 끝에 있는 니케아에서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초청으로 공의회(기독교 교리 문제 등을 협의 및 결정하는 공식적인 종교회의)가 열렸다.
기독교회의 주교 모임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니케아 공의회는 의미가 특별하다.
여기서 결정된 기독교의 모습은 중세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이었고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기본 교리로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전례 없이 황제가 직접 주교들을 초청한 이유는 한마디로 신과, 신의 아들이라는 예수가 동위(同位)냐 아니냐는 논란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인 아리우스가 신과 예수는 동위가 아니라고 주장한 데서 논란이 시작됐다.
그에 따르면 신은 궁극적이고 영원한, 불가지한 존재지만 예수는 지상에서 태어나고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명확하기 때문에 신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성부(신) 성자(예수) 성령이 동위라는, 당시 기독교의 정통교리인 삼위일체와 배치됐기 때문에 아리우스는 파문과 함께 소속 주교구에서 추방당한다.
그러나 아리우스가 가는 곳마다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급기야 로마제국의 동방에서 기독교 세력이 양분되기에 이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삼위일체를 재확인하고 이를 통해 기독교회 조직의 통일을 이룬다.
그는 왜 그토록 기독교 통일에 열심이었을까. 신의 뜻에 충실했기 때문이라면 더는 말이 필요 없지만 역사가들은 다른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주교가 관장하는 교구 안에서 주교의 세금징수권과 인사, 사법권을 인정했다.
또 성직자의 공무와 납세의무를 면제했다.
그 결과 주교들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열광한 것은 당연하다. 주교들을 장악하는 것은 제국의 통치에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당시 교리에 따르면 일반인은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신의 뜻은 신의 대리인(주교)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주교가 황제 편이면 신의 뜻도 황제 편이기 마련이니 황제는 곧 신의 현세적 대리인이 된다.
이때부터 제위 세습을 둘러싼 갈등과 분란은 신의 뜻이라는 한마디로 종식된다.
통치의 정당성을 신에게서 찾는 이런 방식은 프랑스혁명 때까지 1400여 년간 지속된다.
대관식은 이런 사상의 잔재다. 왕은 신의 뜻을 전하는 주교 앞에 무릎을 꿇고 주교는 지배권의 상징인 왕관을 왕의 머리에 올려놓는 것으로 정당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통치자들은 신의 뜻 대신 국민의 뜻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2006)
⑯ 알제리 쿠데타(1965) : 1965년 오늘!
알제리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 주동자는 국방장관인 후아리 부메디엔(Houari Boume-
dienne) !
아흐메드 벤벨라 대통령을 쫓아내고 실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쿠데타로 실각한 벤벨라는 알제리 독립 1년 뒤인 1963년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돼 범아프리카운동과 반식민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부메디아는 혁명평의회를 구성해 주요 산업과 은행 등을 국유화하면서 급진사회주의 노선을 추진하고 1967년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이후 1978년 12월 숨질 때까지 알제리를 통치했다.
⑰ 프랑스 배우 안전띠 시연(1965) : 1965년 오늘!
프랑스의 한 영화배우가 자동차 안전띠의 안정성을 증명하러 나섰다.
주인공은 질레스 델라메어!
그는 충돌한 자동차 속에서 보란 듯이 걸어 나왔다.
안전띠 덕분에 목숨을 건졌음을 보여 줬다.
배우의 목숨을 건 시연으로 자동차 안전띠의 착용이 법제화된다.
실제로 프랑스는 5년 뒤인 1970년 4월 1일부터 자동차 앞 좌석의 안전띠 착용을 의무화한다.
안전띠는 1959년 스웨덴의 자동차 제조업체인 볼보사에 의해 처음 설치됐었다.
⑱ 필리핀해 해전 : 일본이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적을 먼저 발견했기 때문이다.
1944년 6월19일 오전8시25분, 일본 연합함대는 1차 공격대로 함재기 64대를 발진시켰다.
목표는 약 400㎞ 떨어진 사이판 해역의 미 해군 제5함대.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한 일본은 750여대의 공격기를 날렸다.
사상 최대 규모의 항공모함 간 전투로 꼽히는 필리핀해 해전의 결과는 일본의 처참한 패배. 항공모함 3척과 유조선 2척이 가라앉고 6척의 전투함이 대파되는 피해를 당했다.
항공기도 600대 이상 떨어졌다.
패배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도조 내각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사이판 섬을 확보한 미국은 비행장을 건설해 B-29 장거리 폭격기로 마음 놓고 일본 본토를 공습하기 시작했다.
탐색전에서 밀렸던 미국의 승리에는 기술력과 사람을 중시하는 사고가 깔려 있다.
미 해군은 실전에 막 투입된 신형 레이더 덕분에 일본 공습편대를 함대 전방 240㎞ 지점부터 파악하고 요격기 편대를 매복시킬 수 있었다.
조종사의 기량에서도 미국은 일본을 크게 앞섰다.
일본 함대를 폭격한 미군기들이 연료가 거의 바닥난 가운데 한밤중에 함대로 돌아오자 미 해군은 모든 함정의 서치라이트를 밝혀 안전한 착함을 유도하는 대담한 결정을 내려 조종사들의 생명을 구해냈다.
자칫 적함에 발견되면 함대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황까지 감수하며 인명을 구한 것이다.
전투 중에도 바다에 불시착한 123대의 항공기 승무원을 구출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80명의 조종사를 생환시킨 미국과 대조적으로 일본은 항속거리를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비상용 낙하산을 지급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조국이 자신을 끝까지 지켜준다는 믿음은 강병을 만든다.
우리는 인적 자원을 얼마만큼 소중하게 여기고 있을까.
(서경.2008.인터넷한국일보)
⑲ 국제특허 : 1970년 6월19일, 워싱턴 DC.
미국과 독일ㆍ일본을 비롯한 18개국이 특허협력조약(PCTㆍPatent Cooperation Treaty)을 맺었다.
5월 말부터 시작해 25일간의 회의 끝에 나온 이 조약의 핵심은 선점권 인정.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에 특허를 출원하면 원칙적으로 30개월간 선점권을 보장해 각국을 돌며 특허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졌다.
현재 가입국가는 141개국. 아르헨티나와 정치적 이유로 국제기구 가입이 부자유스러운 대만 등 2개국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전세계가 회원국이다.
기본적으로 1,330스위스프랑(약 156만원)인 출연료를 내면 141개 회원국에 특허를 출원한 효과가 발생한다.
2008년 출원된 16만3,600건의 국제특허 중 최다 출원국은 미국. 5만3,521건(점유율 32.4%)으로 2만8,744건(17.6%)인 일본을 훨씬 앞선다.
국제특허 동향에서 주목되는 것은 한국의 도약. 2007년부터 4위에 올라섰다.
국내총생산(GDP)과 인구비율로 따지면 세계 최고다.
한국어는 국제특허출원의 공식언어로 지정(2007년)돼 한글로 된 특허출원신청서는 세계적으로 통용된다.
특허협력조약에 1984년 가입해 2004년까지 7위권이던 한국의 급성장 비결은 전문인력 확충을 위한 과감한 투자. 세계 최단의 특허심사기간(약 1년)을 자랑하는 한국은 전세계적인 심사 적체 문제 해결을 골자로 하는 특허협력조약 개혁도 주도하고 있다.
특허는 발전의 원동력이다.
오랜 세월 동안 공을 들여야 국왕의 ‘칙허’를 겨우 따낼 수 있었던 영국에서 신생 미국의 간략한 특허제도에 자극 받아 절차를 대폭 간소화한 결과 산업혁명이 꽃피었다는 시각도 있다.
세계 4대 특허강국에 안주하지 않고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인터넷한국일보, 2009/06/18)
⑳ 기타 오늘의 역사㉑㉒㉓
1767 미국 제헌의회, 주연합조항 폐지-새정부구성 의결
1846 미국 뉴저지주 엘리지안구장에서 열린 야구경기, 스퀘어에 의한 최초의 야구경기로 공식 인정
1858 미국-일본 수호 통상 조약 조인
1865 대원군, 삼군부를 설치
1874 조선, 만국우편조약 체결
1905 청나라에서 미국상품 배척운동
1907 미국 뉴스통신사 UP((United Press)(UPI의 전신) 설립
1910 야주현(지금의 신문로)에 구세군영 준공
1912 미국, 공무원의 8시간 노동제 채택
1917 영국하원, 30세이상 부인에 참정권 승인
1918 안중식등 서화협회 창설
1920 평양에 야시 개설
1931 조만식 양주동 등, 한글연구회 조직
1935 국제노동기구, 1주일 40시간 노동제의 원칙을 근본조약으로 채택
1936 <설교> 창간. 기독교 월간지. 김규당 목사 개인발행. 국판 50 면 전후.발행자 김규당.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일제에 의 해 설교 중지당함.
1944 마리아나 해전서 일본군 참패
1948 소련 베를린 봉쇄를 개시
1951 콜롬비아 군대 500명, 유엔군으로 내한
1958 기독교협성단 창립.일본의 기독교단 28개동지교회가 동경 렘 마교회에서 행해진 임시 총회에서 새로운 교단인 '기독성협 단'을 결성함.
1961 이병철, 전재산 바치겠다고 동경에서 최고회의에 편지 보냄
1963 케네디 미국대통령,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특별교서 의회제출
1964 제11회 아시아 영화제서 감독상(신상옥), 남우주연상(신영균) 수상
1968 유엔 안보리, 비핵보유국의 안전보장에 관한 미-영-소 공동결 의안 채택
1975 제1회 세계 여성대회 열려
1981 대한체육회, LA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구성을 북한에 제의
1981 카이로서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유혈충돌
1981 유럽이 공동개발한 우주로켓트 '아리안'호 남미 가이아나에 서 발사
1987 미국 대법원, 학교의 창조론교육 요구하는 루이지애나법 폐지
1990 한국-이스라엘, 학술교류 협력의정서 체결
1991 유엔안보리, 이라크에 군수물자 수출금지안 채택
1994 콜롬비아 대통령선거, 자유당의 삼퍼 피사노 후보 당선
1994 카터 방북 중재
1999 영국의 에드워드 왕자, 소피 라이스 존스와 결혼
2003 중국 양쯔강서 여객선-화물선 충돌 90명 실종
2004 이승복 장학회 설립 창립총회 개최
2005 경기도 연천군 최전방 부대 내무반서 총기난사사건 발생, 8 명 사망
오늘의 인물
① 한흑구(韓黑鷗 ; 1909.6.19 ~ 1979) : 수필가 ․소설가 ․
번역문학가.
본명 세광(世光).
평양 출생.
1935년 미국 템플대학교 신문학과를 수료하였다.
1931년 《동광(東光)》지에 단편소설 《황혼의 비가(悲歌)》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수필 《젊은 시절》과 시 《북미대륙방랑시편》 등을 발표하였다.
1934년에는 월간지 《대평양(大平壤)》, 이듬해에는 문예지 《백광(白光)》을 창간 주재했다.
1945년 월남하여 수필창작에 주력하면서 1948년 서울에서 포항으로 이주, <이마지스트의 시운동> <흑인문학의 지위> 등 미국문학 및 작가론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면서, 1958년부터 1974년까지 포항수산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시적 구성의 아름다움과 작품에 일관하면서 인생을 관조하여 한국 수필문학이 자리를 굳히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저서로 《현대미국시선》, 수필집 《동해산문》과 《인생산문》이 있다.
② 원균(元均 ; 1540.음1.5 - 1597.음6.19) : [요약] 조선시대의 무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합포해전·당포해전·당항포해전·율포해전·한산도대첩·안골포해전·부산포해전 등에서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무찔렀고 이순신이 파직당하자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칠천해전(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의 교란작전에 말려 전사했다.
본관 원주(原州)
별칭 자 평중(平仲), 원릉군(原陵君)
활동분야 군사
[본문]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자는 평중(平仲)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되어 북방에 배치되어 여진족을 토벌하여 부령부사(富寧府使)가 되었다.
전라좌수사에 천거되었으나 평판이 좋지 않다는 탄핵이 있어 부임되지 못했다.
1592년(선조25)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3개월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이 침입하자 경상좌수영의 수사 박홍이 달아나버려 저항도 못해보고 궤멸하고 말았다.
원균도 중과부적으로 맞서 싸우지 못하고 있다가 퇴각했으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순신은 자신의 경계영역을 함부로 넘을 수 없음을 이유로 원군요청에 즉시 응하지 않다가 5월 2일 20일만에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고 지원에 나섰다.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이순신과 합세하여 적선 26척을 격침시켰다.
이후 합포해전·적진포해전·사천포해전·당포해전·당항포해전·율포해전·한산도대첩·안골포해전·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하여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무찔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그의 휘하에서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순신 보다 경력이 높았기 때문에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되었으며 두 장수 사이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이에 원균은 해군을 떠나 육군인 충청절도사로 자리를 옮겨 상당산성을 개축하였고 이후에는 전라좌병사로 옮겼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쳐들어오자 수군이 앞장서 막아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지만 이순신이 이를 반대하여 출병을 거부하자 수군통제사를 파직당하고 투옥되었다.
원균은 이순신의 후임으로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기문포해전에서 승리하였으나 안골포와 가덕도의 왜군 본진을 공격하는 작전을 두고 육군이 먼저 출병해야 수군이 출병하겠다는 건의를 했다가 권율 장군에게 곤장형을 받고 출병을 하게된다.
그해 6월 가덕도해전에서 패하였으며, 7월 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의 교란작전에 말려 참패하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 해전에서 조선의 수군은 재해권을 상실했으며 전라도 해역까지 왜군에게 내어 주게 되었다.
그가 죽은 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다시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3년(선조 36) 이순신·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崇錄大夫議政府左讚成兼判義禁府事原陵君)이 추증되었다.
선조가 그를 선무공신으로 책록한다는 '원릉군 원균 선무공신 교서'는 보물 제1133호로 지정되었다.
이 교서는 왜적을 격퇴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데 대하여 공을 기리고 포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그를 새롭게 평가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에 있다.
(두산백과사전.2009)
⇨6월 2일(원균장군묘)
⇨7월 11일(원균사당)
③ 제임스 와트(James Watt ; 1736.6.19 - 1819.8.25) : 스코틀랜드에서 배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기계를 좋아하였다.
1774년에 버밍검에 증기 기관 제작 공장을 세웠고, 단동 증기 기관, 복동 증기기관과 조석기․압력계 등을 발명하는 등, 영국 산업 혁명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 8월 25일.
④ 로젠버그(Julius Rosenberg ; 1918 - 1953.6.19) : 유대계 미국인.
처제 밀고에 의해 원자 폭탄 설계 비밀을 누설한 스파이 용의자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사랑은 죽음을 넘어서(죽음의 집 편지;Death House Letters)>라는 옥중 서간은 베스트셀러였다.
⑤ 왕심재(王心齋 ; 1483.6.19 - 1540) : 제염 업자(製鹽業者)의 아들로 출생.
이름은 곤(昆).
양명학의 시조.
일평생 서민으로서 강학(講學)하였다.
⑥ 젠틸리 사망(1608) : ⇨ 1월 14일.
⑦ 루이 게릭(Gehrig, Henry Louis ; 1903.6.19 ~ 1941.6.2) : 미국 프로야구선수 헨리 루이 게릭이 뉴욕에서 태어났다.
리버데일에서 몰(沒).
컬럼비아대학 출신의 게릭은 1924년 뉴욕 양키스의 1루수로 메이저리그에 발을 들여놓았고, 1925년 6월부터 1939년 4월까지 2,130게임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다.
이 대기록은 그 뒤 반세기를 넘긴 1995년에야 깨졌다.
철마(鐵馬)(Iron Horse)라는 별명을 지녔던 게릭은 1931년 시즌에 184타점으로 아메리칸리그 타점 신기록을 세웠고, 1934년에는 메이저리그 3관왕(타율.홈런.타점)이 되었다.
그는 양키스의 4번 타자로서, 3번 타자 베이브 루스와 함께 이 팀의 타력 전성기를 구가했다.
1939년 7월4일 양키 스테이디엄에서 열린 게릭의 은퇴식은 관중들의 울음바다가 되었다.
게릭은 16년 간의 선수 생활을 회고하며 동료와 팬과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바로 그들 덕분에 자신은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게릭은 그 때 이미 근위축성 측삭경화증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따 루게릭병(루는 루이의 애칭)이라고도 부르게 된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은 척수신경이나 간뇌의 운동세포가 서서히 파괴되면서 이 세포의 지배를 받는 근육이 위축돼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병이다.
히스테리 연구 분야에서 프로이트의 스승이었던 프랑스의 신경병학자 장마르탱 샤르코도 이 병을 연구한 바 있어서 샤르코병 또는 샤르코증후군이라고도 부른다.
루게릭병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영국의 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이 병을 앓으면서다.
게릭은 은퇴한 지 2년 만에 이 병으로 죽었다.
그 이듬해 게리 쿠퍼가 주연해 게릭의 일생을 그린 영화 양키스의 긍지가 만들어졌고, 1989년에는 게릭의 초상을 담은 우표가 미국에서 발행되었다(고종석,2004).
⑧ 제임스 배리(James Matthew Barrie ; 1860.5.9 ~ 1937.6.19) : 영국의 소설가요 극작가.
피터팬의 저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배리는 에든버리대학을 졸업한 후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소설을 쓰기도 했으나 곧 연극에 흥미를 갖게 돼 이후 많은 희곡을 남겼다.
이런 그를 단연 최고의 극작가 반열에 세운 것이 피터팬이다. 1902년 씌어진 작은 백조라는 소설에 입각해 5막짜리 희곡 피터팬을 썼는데 이것이 1904년 처음 무대에 상연된 후 100년 동안 대중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된 것이다.
아기들이 하나씩 태어날 때마다 요정이 하나씩 태어난다는 깜찍한 발상, 행복한 생각을 하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고 피터 팬처럼 세상의 악을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은 현실의 고통과 하루하루 싸우며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의 어른들에게도 작지 않은 위안을 준다.
그러나 정작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팬은 희망과 즐거움만이 아닌 절망과 슬픔도 상징한다.
피터팬이 영원히 느낄 수 없는 엄마의 품과 가족 간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작가 자신의 어두운 성장 배경이 반영된 것으로 그는 어린시절 죽은 형과 자신을 비교하는 어머니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했다고 한다.
즉, 작가 자신이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팬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그는 키가 150cm도 되지 않는 단신이었다고 하니, 그 자신이 피터팬이 되어 영원히 자라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였을까.
⑨ 드가(Edgan Degas ; 1834.6.19 - 1917.9.26) : 프랑스 화가.
움직임의 순시(瞬時)적인 표현을 좋아하여 종종 경마장의 풍경을 다루었고,「무용의 화가」라고 불렸고, 무희(舞姬)를 모델로 하는 작품이 많다.
만년에 조각을 뜻하였으나, 안질로 고독한 속에 자리에서 죽었다.
<춤추는 소녀> <경마> 등 많은 작품이 있다.
⑩ 아웅산수지(Aung San Suu Kyi ; 1945.6.19 ~ ) : 미얀마의 정치가.
양곤에서 출생했다.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아웅산의 딸로 15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학 등을 공부하였다.
1988년 4월에 귀국하여 국민들의 반독재시위에 참가하였고, 이어 9월에 민족민주연합(NLD)을 결성하여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내란을 선동하였다는 이유로 가택연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을 계속하여 1990년 5월 다당제 선거 실시의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총선거에서 NLD가 친군부세력인 민족통일당(NUP)을 물리치고 압승을 거두었다.
199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1995년 7월 자택연금 해제 이후 NLD의 사무총장으로 복귀하여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⑪ 파스칼(Blaise Pascal ; 1623.6.19 - 1662.8.19) : [요약]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철학자·종교사상가.
'파스칼의 정리'가 포함된 《원뿔곡선 시론》, ‘파스칼의 원리’가 들어있는 《유체의 평형》등 많은 수학·물리학에 대한 글들을 발표하고 연구를 하였다.
또한 활발한 철학적·종교적 활동을 하였으며, 유고집 《팡세》가 있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과학, 철학
출생지 프랑스 오베르뉴 클레르몽페랑
주요저서 《팡세》(1670)
↑ 생자크탑 / 프랑스 파리. 1552년에 건설된 후기 고딕양식의 탑. 1648년 물리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기압실험을 한 곳이다.
[본문] 오베르뉴 지방의 클레르몽페랑에서 태어났다.
3세 때 어머니와 사별하고 소년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왔다.
학교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독학으로 유클리드기하학(幾何學)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16세에 《원뿔곡선 시론(試論)》을 발표하여 당시의 수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에서 나오는 '파스칼의 정리'는 이 시론에 포함되어 있다.
1640년 아버지와 함께 루앙으로 옮겨, 아버지가 하는 세무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계산기를 고안, 1642년 성공하였다.
루앙에 있을 때 얀선주의의 신앙혁신운동(信仰革新運動)에 접하여 최초의 회심을 경험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토리첼리의 실험을 행한 이래, 진공(眞空)에 관한 문제, 유체정역학(流體靜力學)에 관한 문제에 흥미를 가졌고, 마침내 《진공에 관한 신실험(新實驗)》을 발표하였다.
1647년 질병의 진단을 받기 위해 파리로 돌아와, 그 무렵 귀국 중에 있던 R.데카르트의 방문으로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이듬해 처남 페리에에게 부탁한 퓌드돔 산정(山頂)의 실험에 의해 대기의 압력을 확인하였다.
1651년 아버지가 죽은 후 여동생 자클린이 포르 루아얄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과는 달리, 파스칼은 로아네스공(公), 슈발리에 드 메레 등과 친교를 맺고 사교계에 뛰어들어 인생의 기쁨을 추구하였다. 노름에서 딴 돈을 공정하게 분배해주는 문제에서 확률론을 창안하여, 《수삼각형론(數三角形論)》 및 그 《부대논문(附帶論文)》을 썼다.
파스칼은 이 논문으로 수학적 귀납법의 훌륭한 전형(典型)을 구성하였으며, 수의 순열·조합·확률과 이항식(二項式)에 대한 수삼각형의 응용을 설명하였다.
또 물리실험의 결과를 《유체의 평형》 《대기의 무게》라는 두 논문으로 정리하였다.
초등 물리학에서 나오는 ‘파스칼의 원리’는 《유체의 평형》 속에 포함되어 있다.
1654년 여름부터 사교계에 대한 혐오감이 점점 싹텄고, 11월 23일 깊은 밤, 결정적인 회심의 환희를 체험하고 포르 루아얄 수도원의 객원(客員)이 되었다.
이 점은 수녀인 여동생 자클린에게서 입은 감화가 컸다고 한다. 《죄인의 회심에 대하여》 《초기의 그리스도 신자와 오늘의 그리스도 신자의 비교》 《요약(要約) 예수 그리스도전》 등의 소품은 바로 그 무렵의 저작이다.
또 포르 루아얄 데샹에서는 《드 사시씨(氏)와의 대화》를 남겼다.
당시 프랑스의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 있던 예수회와 포르 루아얄에 모인 얀선파 사이에 신학상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파스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논쟁에 말려들었다.
그는 《시골 친구에게 부치는 편지(프로뱅시알)》라는 제목의 서한체(書翰體)의 글을 익명으로 속속 간행하여 예수회 신학의 기만을 폭로하는 한편, 그 오만불손한 윤리를 공격하였다.
1656년 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8편의 서한문을 발표하였다.
파스칼은 이 서한문에서 구사한 경쾌하고 솔직한 표현에 의해 프랑스어에 새로운 문체(文體)를 도입한 결과가 되었다.
1658년 우연한 동기에서 사이클로이드 문제를 해결하고 적분법(積分法)을 창안해 냈다.
《사이클로이드의 역사》 《삼선형론(三線形論)》 《사분원(四分圓)의 사인론[正弦論]》 《원호론(圓弧論)》 《사이클로이드 일반론》 등 일련의 수학논문 속에 그 이론이 나타나 있다.
그 외에도 《기하학적 정신에 대하여》 《설득술(說得術)에 대하여》 《질병의 선용(善用)을 신에게 비는 기도》 등의 소품을 쓴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그리스도교의 변증론(辨證論)》을 집필하기 위하여, 단편적(斷片的)인 초고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병고로 인하여 완성하지 못한 채, 39세로 생애를 마쳤다.
사망 후 그의 근친과 포르 루아얄의 친우들이 그 초고를 정리·간행하였는데, 이것이 《팡세 Pensées》의 초판본(1670)이다.
(두산백과사전.2009)
⑫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 태재치 ; 1909.6.19 ~ 1948.6.13) : [요약] 일본의 소설가.
본명은 쓰시마 슈지[津島修治].
좌익운동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많이 썼다.
주요 저서로는《사양(斜陽)》, 《만년(晩年)》, 《인간실격》 등이 있다.
본명 쓰시마 슈지[津島修治]
국적 일본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일본 아오모리현[靑森縣]
주요저서 《사양(斜陽)》 《만년(晩年)》 《인간실격》 《앵도:버찌》
[본문] 아오모리현[靑森縣] 출신으로 본명은 쓰시마 슈지[津島修治].
도쿄대학 불문과 중퇴. 재학 중에는 좌익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후에 이탈하였으나, 그 좌절감을 평생토록 떨치지 못하여 그의 작품에 영향을 남겼다.
전시에는 일본 낭만파에 속하였으며, 전후 《사양(斜陽)》을 발표하여 청년층의 열렬한 환영을 받음으로써 일약 인기작가가 되었으나 1948년 애인과 정사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만년(晩年)》 《인간실격(人間失格)》 《앵도:버찌》 등이 있다.
(두산백과사전.2009)
⑬ 호세 리살(José Rizal ; 1861.6.19 ~ 1896.12.30) : [요약] 필리핀의 사상가.
⇨12월 30일.
⑭ 기타 오늘의 인물⑮
1566 영국국왕 제임스 1세 출생
1633 림보르흐 출생.네덜란드 항변파 신학자.
1826 브레이스 출생.미국 박애주의자.1853년에 뉴욕의 [아동복리 회]의 수석사무관이자 집행자가 되어 죽을때까지 봉사함.
1834 스퍼젼 출생.영국의 침례교 목사.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독립교회 성직자였다.
1867 멕시코 황제를 지낸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안 사망
1868 페랑 출생.프랑스 출신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일본 선 교활동후 1913년2월14일 내한 대구에서 일본인 상대 선교.
1936 여배우 지나 롤랜드 출생
1940 일본 프로야구 선수 장훈 출생
1943 배우 맬컴 맥도웰 출생
1993 영국의 소설가 골딩 사망 - 1983년 '파리대왕'으로 노벨문학 상 수상
오늘의 샘터
① 파스칼의 말 : 1) 사람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연약한 한 개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다.
이것을 죽이려면 우주 전체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알갱이의 수증기, 한 방울의 물로도 족하다.
그러나 우주가 이것을 부수더라도 인간은 이것을 죽이는 우주보다 더 숭고하리라.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들의 모든 존엄은 사고(思考) 속에 존재한다.
2)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얼굴은 바뀌었을 것이다.
3) 신의(神意) : 참으로 신을 아는 것은 다음의 두 종류의 사람들 뿐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사람은,그의 교양의 고저(高低)를 막론하고 다같이 신을 아는 사람이다.
또한 어떠한 장애물이 있을지라도 그 장애물에 구애됨이 없이, 진리를 탐구하려는 충분한 지혜를 가진 사람들도, 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② 파스칼의 <팡세> : 파스칼은 생전 프랑스 산문(散文)의 걸작으로 꼽히는 18통의「시골 사람에의 편지」를 익명으로 발표했다.
또한 만년에 예수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 신앙심없는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한 저서를 내려고 했으나 건강에서 오는 고통과 쇠약을 무릅쓰고 이를 위한 많은 단편적인 노트만 남긴 채 죽었다.
그 초고(草橋)의 일부가 사후 <파스칼의 사후 유고중에 발견된 종교와 기타 제문제에 관한 사상집(‘팡세’)>이란 표제로 출판돼 이후 파스칼의 유고는 간단히 <팡세>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의 <팡세>는 「파스칼」이 남긴 모든 단장(斷章)을 망라하고 있다.
파스칼은 그의 단장에 기록했다.
「인간」은 「시간」적 「공간」적으로도 한정된 존재이나 사고함으로써 무한의 시간, 광활 무변의 우주를 능가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다.
③ 공동체의 십계명 : 1. 타인을 이해하고 귀여겨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라.
2. 타인에게 친절함과 섬세함으로 대하는 사람이 되라.
3. 타인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라.
4. 타인들과의 충실한 태도를 가질 줄 아는 사람이 되라.
5. 타인을 용서할 줄 알고 원한을 품지 않는 사람이 되라.
6. 자기 주변에 평화를 심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
7. 가난한 이들과 빵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라.
8. 타인을 자기에게 맞추려 들지말고 자신이 남에게 맞추 는 사람이 되라.
9. 타인의 요구에『이만하면 족하다』라고 말하지 않는 사 람이 되라.
10.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사람이 되 라.
④ 도솔산(兜率山) : 강원 양구군 동면(東面) 팔랑리(八郞里)와 해안면(亥安面) 만대리(萬垈里)의 경계
높이 1,148 m
북서쪽의 대우산(大愚山), 동쪽의 수리봉, 남동쪽의 대암산(大巖山), 북쪽의 가칠봉(加七峰) 등과 함께 태백산맥(太白山脈)에 솟아 있는 고봉이다.
산의 북동 사면에서는 소양강(昭陽江)의 상류부가, 남서 사면에서는 파로호(破虜湖)로 흘러드는 북한강(北漢江) 상류의 서천(西川)이, 북서 사면에서는 북한강의 지류인 수입천(水入川)이 각각 발원한다. 산의 동쪽 기슭에는 소양강이 남북으로 흘러내리고 있으며, 약 7.5 km 북쪽을 군사분계선이 통과한다.
북동쪽 기슭에는 만대리를 중심으로 산간분지가 전개되어 논농사가 이루어지며, 남서쪽 기슭에는 서천 골짜기를 따라 팔랑리 ․원당리(元塘里) ․후곡리(後谷里)를 중심으로 한 일대에 산간분지가 발달되어 있다.
⑤ 열 아홉 살 : 아직 성년에는 이르지 못한 나이다.
우선 외양을 보면 자랄 만큼 자라서 어른과 얼른 구분이 어려운 것이 이맘때다.
그러나 막상 자세히 보면 여드름이 듬성듬성하고 코밑의 수염이 거뭇거뭇 하여 어딘지 모르게 풋풋한 싱그러움이 있어 얼른 애티를 볼 수가 있다.
이 나이까지 자라기 위해서는 오랜 배스름이 있고, 또 태통이 있어야 했다.
이렇게 하여 태어나서는 어버이의 거룩한 보살핌이 따라야 한다.
배넘기를 하다가 기어다니다가 걸음마를 배우고 말과 온갖 삶의 지혜를 익히며 성장의 고비를 향해 발돋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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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각인각자 1 : 1 과의 소통이 가장 큰 무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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