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1541 2월6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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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혼의 담긴 율법의 준수>
청춘은 물론 목숨까지 바쳐 제주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남겼던 김영갑 사진가께서 고달팠던 젊은 시절을 이렇게 추억했습니다.
“섬에는 어느 마을을 가나 외로운 노인들이 많기에 가는 곳마다 내 잠자리가 있었다. 언제 찾아가도 반겨주는 노인들의 말동무가 되어주면 끼니는 해결되었다. 외로운 노인들의 넋두리를 들으며 중간 중간 추임새를 넣어주면 신이 나서 좋아했다.”
저도 그런 체험을 자주 합니다. 누군가의 말을 잘 경청해주는 것도 아주 좋은 사목활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의없이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상대방의 아픈 사연과 지난 상처를 경청할 때, 그 경청은 그 자체로 치유와 위로의 힘을 지니게 됩니다.
가끔씩 마음과 정성이 담긴 리액션은 금상첨화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저런 저런!” “얼마나 힘드셨어요?”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건성 건성 듣습니다. 영혼이 없는 리액션으로 상대방의 맥을 빠지게 만듭니다. 그로 인해 말하는 사람은 실망에 빠지게 되고, 말문을 닫고 맙니다. 따지고 보니 마음과 영혼이 깃든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상대방을 향한 진심어린 걱정과 배려가 담긴 경청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율법의 준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의 정신이나 핵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뒷전이고, 그저 오랜 세월 내려오는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실행하고 있는 피상적인 율법의 준수는 참다운 봉헌이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의 제정자이신 주님을 향한 사랑, 율법의 핵심인 이웃 사랑을 실천할 마음이 조금도 없으면서, 율법의 세부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따지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주님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코 복음 7장 6~8절)
주님께서 수많은 율법 조항을 아주 간략히 요약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사랑의 계명’을 기쁜 마음으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자세로, 혼신의 힘을 다해, 오로지 주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충실히 실천하는 오늘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깊숙이 숨겨 놓은 내적 지향을 꿰뚫어 보십니다.”(로마의 클레멘스)
“성경에서 말하는 공경이란 인사 잘하고 경의를 표하는 일뿐 아니라, 자선과 선물의 봉헌을 가르킵니다.”(존자·尊者 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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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마르코 7,1-13)
<자아와 책임전가>
사람의 사회적 영향력에 꾸준한 관심을 보인 저자 로버트 치알디니 박사는 자신의 책 ‘설득의 심리학’에서 사람마다 자신의 선택을 최고라고 믿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즉 구매자는 일단 한 제품을 선택하게 되면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끝까지 믿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폰을 산 사람은 아이폰을 산 사람대로, 갤럭시를 산 사람은 또 그 사람 나름대로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주장합니다.
선거가 끝나도 박근혜씨를 뽑은 사람은 그 사람을, 문재인씨를 뽑았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외국에 나가 언어를 배우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배운 영어를 거의 쓸 수 없었습니다. 10년 이상을 배웠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틀릴까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방법은 그 의미전달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문법을 틀리지 않는 위주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으려는 마음 때문에 온갖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자기합리화는 나에게 고통이 닥칠 때 그것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 외부의 탓이라고 핑계를 대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느님과 서로의 탓을 하게 된 것처럼, 핑계나 책임회피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 안에 자아가 일으키는 죄가 많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한 번은 로마에서 공부할 때 기숙사로 돌아오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저의 직업을 묻기에 사제이고 로마에서 공부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사제들도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니 세계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는 성직자 아동 성추행 문제나 동성애 문제 등을 예로 들면서 사제들이 결혼하면 그런 문제가 없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왠지 그분이 ‘일부 사제들의 문제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생활에 대해 물었더니 역시나 좀 문란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다시 질문했습니다.
“기사님도 결혼 해놓고도 그렇게 외도를 하시면서, 왜 사제들은 결혼을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처럼 말씀하시죠? 사제가 결혼해도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고 싶었습니다.
“기사님이 누구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다 자신의 문제입니다. 기사님은 ‘사제들도 그러는데 네가 뭐 어때서?’라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었고, 그래서 고통 속에 있더라도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설득시키려 합니다.
이는 오랫동안 고해성사를 안 한 신자들이 오랫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은 것 외에 고백할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정말로 고해성사를 듣다보면 자주 고해하는 사람들은 이것저것 많은 죄의 고백을 하지만, 몇 년 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은 분들은 냉담했다는 것 외에 더 덧붙이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오랜 냉담으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도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느냐고 따지기까지 합니다. 그분들이 실제로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을 이미 마음 안에서 다 합리화 해 놓았기 때문에 죄라고 생각되는 것이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꼬집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의 전통대로 자신의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는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것도 ‘자기합리화’입니다. 남들의 잘못을 더 크게 보게 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부터 자신의 죄책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남의 탓으로 돌리게 된 이후로 모든 죄인들의 전유물이 되었습니다.
남의 잘못을 크게 보면서 자신의 잘못을 잊어버리고 합리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모에게 드릴 공양도 하느님께 바칠 예물이라는 뜻으로 ‘코르반’이라고만 하면 더 이상 부모에게 해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 또한 자신들이 부모를 공경하기 싫은 것을 전통이라는 핑계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느님 법을 어기는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세계적인 부호이자 사업가인 ‘내쇼날’ 상표의 창업자 마쓰시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흔 넷의 나이로 운명할 때까지 산하 570개 기업에 종업원 13만 명을 거느린 대기업의 총수자리에 있었는데 사실 그는 아버지의 파산으로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자전거 점포의 점원이 되어 밤이면 어머니가 그리워 눈물을 흘리던 울보였답니다. 그러던 그가 85년이 지난 후 일본 굴지의 기업의 총수가 되었는데 어느 날 한 직원이 마쓰시다 회장에게 물었습니다.
“회장님은 어떻게 하여 이처럼 큰 성공을 하셨습니까?” 마쓰시다 회장은 자신이 세 가지 하늘의 큰 은혜를 입고 태어났다고 대답 했습니다. 그 세 가지 큰 은혜란, ‘가난한 것’, ‘허약한 것’, ‘못 배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직원이 “이 세상의 불행을 모두 갖고 태어나셨는데도 오히려 하늘의 은혜라고 하시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마쓰시다 회장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나는 가난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서는 잘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네. 또 약하게 태어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도 일찍이 깨달아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써 지금 90살이 넘었어도 30대의 건강으로 겨울철 냉수마찰을 한다네.
또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했기 때문에 항상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나의 스승으로 받들어 배우는데 노력하여 많은 지식과 상식을 얻었다네.
이러한 불행한 환경이 나를 이만큼 성장시켜주기 위해 하늘이 준 시련이라 생각되어 감사하고 있다네.”
성인들은 아무리 억울한 상황이 오더라도 핑계를 대지 않았습니다. 결국 핑계는 자아가 책임회피를 위해 자기합리화를 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가끔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부모님의 싸움에서도 자신의 탓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싸우시는 가운데 자신이 잘 할 테니 싸우지 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깨끗함은 이렇게 아무런 탓도 없는데 자신의 탓을 찾아내게 하지만, 더러움은 전부 자신의 탓임에도 수많은 핑계거리를 찾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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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1-13 : 조상들의 전통
바리사이는 ‘분리된 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완전하다고 여기는 생활 방식을 따랐고,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된다고 즉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는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루카 18,12 참조), 의례적으로 놋그릇과 접시와 잔을 닦고(참조: 마태 23,25; 마르 7,4), 십일조를 바치고 맏물을 봉헌했으며(참조: 마태 23,23; 루카 11,42), 많은 기도문을 바쳤다(루카 5,33 참조). 그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6절; 이사 29,13)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 롯의 아내는 어땠는가? 그 여자가 한 것이라고는 세상 부패를 향하여 의지적으로 머리를 돌린 것이 전부인데, 감각 없는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창세 19,26 참조) 그 마음이 하느님과 거리가 먼 죄악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신다. 즉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관습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하느님과는 멀다는 의미이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이 관습을 따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을 하느님의 계명인양 가르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을 들어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 행위를 질책하고 계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제4계명, 신명 5,16).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탈출 21,17; 레위 20,9)고 하면서 가난한 부모는 자녀에게서 부양받아야 하고, 자녀들은 연로한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코르반”이라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아무 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고 하신다.
코르반 서약문은 물건을 하느님께 바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서약문이다. 그 의미는 “제가 제대에서 약속하고 성전에 봉헌하기로 서약한 선물이 당신 영혼에 힘을 불어넣어 줄 터이니 제가 당신을 공양할 필요는 없습니다.”(11절 참조)라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부모와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코르반 서약문을 이용해서 부모의 봉양을 저버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부모가 굶주리는 데도 그 자녀는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게걸스레 먹어 치울 제물을 봉헌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하느님께 바쳤다는 핑계로 부모께 대한 의무를 쉽게 저버리는 썩은 서약이 되어 버렸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것을 지적하시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이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 외적인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본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율법주의적인 모습을 떨어내고 참된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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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이름을 빛내는 삶>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다며 따집니다.(7,2.5) 조상들의 전통에 따르면 반드시 손을 씻고 나서 음식을 먹어야 했고, 장터에 다녀왔다면 몸도 씻고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7,8) 하시며 그들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이 계명의 정신이 아니라 문자화 한 율법에 조상들의 전통을 덧붙여, 그것을 하느님의 뜻인양 백성들을 오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자신들의 해석으로 대체하려는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물품을 하느님께 바쳐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크르반 서원’을 악용하여 부모 봉양을 저버리는 그들의 행동을 지적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수많은 전통과 관습으로 사람들을 옭죄는 그들의 교활함과 탐욕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몫을 챙겼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려 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전통과 형식에는 몰두하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태도,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기 기준을 앞세우고,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 이익을 챙기려 했기에 예수님의 질책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 이름을 팔아 자기 뜻을 실현하고 권력을 행사하며 사익을 챙기려는 행위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끄떡하면 하느님의 뜻이라며 신자들에게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사목자나 영성가는 사이비 교주나 다름없습니다. 성경말씀을 악용해 돈을 모으려는 사람은 주님을 모독하는 사기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전통과 외적인 예배행위, 규범과 교리와 계명의 형식적인 준수에 몰두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잊고 사는 것도 문제입니다. 정작 중요하고도 우선적인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지요. 오늘날 교회마저도 하느님을 잊은 채, 외형적이고 비본질적인데 몰두하는 듯합니다. 대형화 사업화 하려는 망령에서 벗어나 더 작아지고 가난해져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 곁에 머무는 제 소명을 회복할 때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보다 자기 뜻과 가치기준, 자기 욕구와 경험을 앞세우는 처신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무관한 그 어떤 것도 추구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기준과 세상의 가치를 우선시하지도 절대시하지도 말아야겠지요. 오늘도 주님을 관상하며, 서로에게 자신을 내놓고 주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되도록 함께 힘씀으로써, 주님의 이름을 빛내는 복된 날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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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코르반은 하느님께 봉헌한 예물이기에 다른 용도로 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코르반 제도가 악용됩니다. 복음에서처럼 부모를 공경하고 싶지 않으면, 자기 재산을 코르반이라고 선언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재산은 하느님께 바친 것이기에, 이제는 부모를 위해 재산을 쓸 수 없다는 뜻이지요. 이는 사실상 부모 공경을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는 결국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계명을 악용하여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의무를 교묘하게 피해 가는 것이지요.
또한, 빚을 진 사람이 빚을 갚지 않으면 채권자는 그에게 “네가 빌린 돈이 바로 코르반이다.”라고 다그칩니다. 이는 하느님께 봉헌한 돈을 빌려주었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채무자는 하느님께 빚진 셈이 되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빚을 갚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받아 낸 것을 실제로 하느님을 위해 쓰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코르반 제도처럼 하느님 계명의 본질을 왜곡하고, 자신이 편리한 대로 악용하는 경향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하느님 계명의 참된 정신을 파악하고, 그 실천적 방법을 찾고자 한층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사무처장/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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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밤송이 김기현 요한 신부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깁시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어떻게 성인이 된 후의 행동 방법을 결정하는지에 대하여, 로버트 존슨 박사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유아기에 다양한 상황에 따른 행동 방법을 배웁니다. 걸음마를 배우고 말하기를 배웁니다. 스스로 옷 입는 법을 배웁니다. 자기와 성이 같은 사람과 다른 사람을 다르게 대하는 법도 배웁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에게서 이 모든 것들을 배우고 경험한다는 겁니다. 대개는 부모나 형제자매들이죠.
부모들과 면담할 때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녀가 성인이 됐을 때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행동을 분명하게 보여주라는 겁니다. 아이는 그 부모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두 살 때 봤던 부모의 행동은 그들이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하는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반복의 심리학’ 참조)
자신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보고 배울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부모님들의 부담감이 크겠죠. 그런데 그러한 부담감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도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주목하고, 우리의 신앙적인 모습에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직 신자가 아닌 배우자, 어린 자녀들, 주일학교 학생들, 가까운 친구들, 그리고 같은 단체의 구성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깝고 자주 만나고 친한 신앙인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해 나가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리사이들처럼 ‘입술 따로 마음 따로’의 신앙생활을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묵주 기도를 하면서 입술은 자동으로 기도문을 외고 마음은 술집에 가 있거나, 미사 중에 응답을 하면서 마음은 내일 출근 할 걱정에 사로잡혀 있거나, 또는 성가를 부르면서 입술로는 노래하는데 마음으로는 직장이나 가정 일을 걱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배운 사람도 기도하면서 오락 생각하고, 성가 부르면서 술 생각하고, 미사 드리면서 집안일과 직장일 걱정에 사로잡혀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입술 따로 마음 따로’ 인 신앙인들이 많아지면, 이 천년 전에 바리사이들이 들었던 말을 다시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나의 신앙생활과 나에게 영향을 받을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생각한다면, ‘입술 따로 마음 따로’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섬겨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할 때는 기도에 집중하고 미사할 때는 미사에 집중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또 성가를 부를 때는 성가 부르는 것에 생각과 마음을 다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야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성실한 신앙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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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1-5)”
예루살렘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온 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율법을 잘 지키는지 조사하려고 왔을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면 고발하려고 왔을 것입니다.) 여기서 ‘더러운 손으로’ 라는 말은,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고서” 라는 뜻입니다. ‘조상들의 전통’은 옛날의 유명한 랍비들이 만들어 놓은 실천 지침들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방법들입니다.)
‘모든 유다인’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킨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모든 사람이 지킨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서민들은 바리사이들의 정결 예식 규정을 무시했습니다. 물이 부족한 그 지역에서는 그런 규정을 지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와 대립 관계에 있던 사두가이파 사람들도 그 규정을 안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여기서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잘못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형식적인 신앙생활. 둘째는 사람의 전통만 중시하고 하느님의 계명은 지키지 않는 것.
1) 겉으로만 보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신앙생활은 대단히 철저하고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이 들어 있지 않은 ‘위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는 계명’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사랑’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모습은 철저하고 엄격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없었으니 그들의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2)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대단히 까다로운 정결 예식 규정을 만들어 놓고선 그 규정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전통으로, 또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법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일이었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가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정결 예식 규정들은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일인 것 같아도, 사실은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 즉 계명의 반대쪽에 있는 일이었고, 죄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5-26).”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9-41).”
이 말씀들은 “껍데기만 깨끗이 하지 말고, 마음속부터 먼저 깨끗이 하여라.”, 즉 “위선을 버리고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세부적인 실천 지침 자체가 나쁜 것인가? 실제 생활에서 마주치는 구체적인 상황들에 대한 지침은 필요 없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실천 지침들은 신앙생활에 도움을 줍니다. 좋은 예가 예루살렘 사도 회의입니다. 초대 교회 때에 할례 문제와 구약 율법 문제로 논쟁이 생겼을 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출신 신자들도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또 유대교의 관습들을 그리스도교에서도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 에 관한 문제...) 사도들은 오랫동안 회의를 했고, 다음과 같이 결정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사도 15,28-29).”
사도들의 결정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할례가 공식 폐지되었고, 유대인들만의 관습들과 전통들도 모두 폐지되었습니다. 이렇게 세부적인 실천 지침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전례 지침’ 등이 좋은 예입니다. (그리고 이런 지침들은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만, 즉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는 방법일 때에만 유효합니다. 아무도 그 범위를 벗어나는 지침이나 규칙을 만들 수 없습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처음에는 하느님의 계명들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한 의도로 구체적인 세부 지침들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형식적인 실천으로 변질되었고, 결국에는 위선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그런 지침들은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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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2018. 02. 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마르코 7,1-13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자동차 사고로 죽은 세 사람이 하늘나라로 가는 길에 천사로부터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장례식을 하면서 당신이 관속에 들어 있을 때, 친구나 가족들이 애도하면서 당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소?” 이에 첫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주 유능한 의사였으며 훌륭한 아빠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저는 아주 좋은 남편이었으며, 훌륭한 선생님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마지막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가 꼭 듣고 싶습니다. 앗! 저 사람 살아 움직인다!!!”
결국 무슨 뜻일까요? "죽지 않고 다시 살고 싶다."라는 말이겠지요. 맞습니다. 사람들은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을 더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아니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오늘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읽으십니다.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는 제자들의 모습에 따집니다. 즉, 제자들이 조상님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이는 사람의 전통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안에 영원히 간직해야 할 하느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겉으로는 전통을 지키는 척 하면서, 안 보이는 곳에서 온갖 나쁜 짓과 사악한 짓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 이 위선자들아, 이 독사의 족속들아...”
물론 사람의 전통을 무조건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계명)이 먼저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야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로 들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11장 25-2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저 두레박 신부는 ‘미사 파견’ 때에 인사말을 이렇게 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기쁘게 살아갑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지금 이 순간 고운님 자신의 얼굴을 보시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은 내 얼굴이...참참참?? 특히,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랜 시간이 흘렀는 대도 내 얼굴 표정이 사나우면 안 됩니다. 찌그러지면 안 됩니다. 수심가득하면 안됩니다. 정말 아니~ 아니됩니다요???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꽃 같은 향기가 나고, 부드러운 미소가 있고, 사랑스런 말이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은(믿음, 순명) 내려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꾸 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저는 항상 부족함을 많이 느끼는 사제로 살고, 또한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살지 못하는 사제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먼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하느님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니 내려갑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이 세상을 살다가 하느님 곁으로 갈 때까지...“저는 하느님으로 만족했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영원한 생명에 길에 들어설 수 있기를...
자, 고운님들! 우리 모두 기쁘게 큰소리로 외쳐볼까요? “저는 하느님으로 만족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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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부산본원 김종오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의말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마르코.7.6-8)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어떠한 규정도 사랑을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공경하는 것도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주님을 공경하는 것은 주님을 ‘헛되이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린다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이입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처럼 우리도 이웃을 위해 하는 희생적 사랑이 곧 주님께 드리는 감사요 공경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만큼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향한 진정한 우리의 찬양은 사랑하는 삶으로 드러나고, 사랑하는 삶은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공경이요 찬양이 됩니다.
주님께 드리는 진정한 공경은 사랑의 삶입니다. 부모님께 아무리 듣기 좋은 말씀을 드리더라도 우리의 삶이 부모님의 뜻에 어긋나면 부모님은 슬퍼하십니다. 사랑이나 정의를 거스르는 우리의 삶은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공경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공경하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멀리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공경이 필요치 않으시기에, 우리의 공경은 이웃을 위한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입술로만 주님을 공경하더라도, 주님께 대한 공경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메마른 우리의 공경도 주님께서는 끈기로 들으시며, 우리가 사랑스러운 삶을 살 때까지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에 기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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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서품식은 3가지 면에서 진한 감동을 줍니다. 첫 번째는 성인호칭기도입니다. 서품을 받을 젊은이들은 바닥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교회는 모든 성인들의 도움을 청합니다. 젊은이들이 겸손하게 주님만을 바라며 살 수 있도록,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도록,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사제가 되는 것은 본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인들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바닥에 엎드린 젊은이들은 ‘주님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성인호칭기도를 듣게 됩니다.
두 번째는 선배 사제들의 안수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청하며 선배들은 이제 사제가 되려는 젊은이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무릎을 꿇고서 안수를 받는 새 사제들은 진한 눈물을 흘립니다. 사제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제단의 일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품식에 참석한 모든 사제들이 새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새 사제들을 환영하면서 반갑게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주교님께서는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안수기도를 마치십니다. 저 역시도 선배 사제들의 안수를 받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선배 사제들이 보여준 길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새 사제들의 첫 강복입니다. 사제직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주교님들께서도,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께서도, 부모님께서도 새 사제의 첫 강복을 받습니다. 오늘 강복을 주는 그 순수한 마음으로 사제의 길을 가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하는 모든 직무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첫 강복을 주는 새 사제들의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순수했습니다. 그 마음으로 신자들을 사랑하고, 복음을 선포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솔로몬은 성전을 이야기합니다. 화려한 건물, 아름다운 장식, 웅장한 규모를 지닌 성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생각하는 성전은 외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마구간이 성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거친 풍랑에 흔들리는 나룻배이지만 예수님께서 계시기에 성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성전으로 만드는 길은 무엇일까요? 언제나 어디서나 통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주는 것입니다. 먼저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충실하게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둘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필요해서 만나는 사람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분들을 더 자주 찾아뵙고 만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도와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조직, 법, 규정, 제도, 계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물론 그런 것들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믿음, 희망,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사제는 교회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규정과 법을 잘 지키고 따라야 합니다. 독신을 서약하고, 교회에 순명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성인호칭기도의 뜨거움과 안수기도의 엄숙함과 첫 강복의 순수함을 가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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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반려자>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
나라가 평창겨울올림픽 개최로 인해 온통 축제 분위기입니다. 올림픽에 관한 몇 일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올림픽을 나흘 앞둔 5일 강릉아트센터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 연설에 나선 문대통령의 감동적 연설의 일부입니다.
“불과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여러나라에서 평창올림픽의 안전을 염려했습니다. 북한이 평창올림픽에 참가하고 남북이 단일팀을 구성하는 평화올림픽도 많은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상상처럼 여겨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염려는 사라졌고 상상은 현실이 됐습니다.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상상은 현실이 됐습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정말 멋진 일입니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분명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길 희망하며 또 그리 되리라 믿고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들입니다.
지난 4일 오후 남북 단일팀과 스웨덴과의 연습경기중 철벽방어 골리 신소정의 일화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시속 100km가 넘는 퍽, 유효스팅 35개중 32개를 막아내는 눈부신 선방으로 온몸이 멍이 들 정도로 실점을 최소화했다는 것입니다.
신 선수의 좌우명, “No pain, No gain”이 참 깊은 울림을 줬습니다. 고통이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는 좌우명입니다. 마치 추운 겨울 없이는 따뜻한 봄도 없다는, 고난과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다는 파스카 진리처럼 느껴지는 좌우명입니다. 우연이나 요행의 성공은 없다는 것입니다. 머리 감독은 “얼마나 뛰어난 선수인지 설명이 필요없다.”고 그를 칭찬했다 합니다. 이렇듯 각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감동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오늘의 일본의 순교성인들 축일이 참 각별합하게 느껴집니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박해 때 바오로 미키 수사는 33세 나이에 25명의 동료들과 함께 붙잡혀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셨습니다. 일본인들과 유럽인들, 예수회수도자들, 프란치스코회수도자들, 평신도들로 이루어진 25명 순교자들은 1862년 시성되었습니다. 순교자들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한 현재’를 살면서 영원한 감동을 줍니다.
평창올림픽의 성공적 진행과 일본 순교성인들의 전구로 전운이 감도는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에 평화가 정착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은 분명 도와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반려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 임마누엘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 1독서의 솔로몬의 기도가 참 진실하고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이 진리를 몰랐습니다. 후반부 기도가 이를 입증합니다.
“당신 종과 당신 백성이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간청을 들어 주십시오. 부디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 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하늘에 계신 초월자 하느님이 여기 함께 우리와 함께 내재하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랍고 위로가 되는 지요. 바로 이런 하느님이신 주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이 아닙니까? 열왕기 상권 제1독서에서 솔로몬은 하느님께 묻습니다.
“그러나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이에 대해 창세기가 멋진 답을 줍니다. 바로 여기 땅 위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이기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사십니다. 그러니 솔로몬의 성전같은 거룩한 장소들, 오늘 복음의 몇몇 바리사이들 손을 씻는 거룩한 수행들 모두는 인간의 거룩한 존엄과 비교할 때는 참으로 초라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무적인 진리인지요.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우리가 살아있는 주님의 성전이요 살아있는 주님의 감실이자 성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제 강론에 인용했던 ‘홈 쉬트 홈!’입니다. 주님의 집은, 주님의 가정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집이자 주님의 가정이 됩니다.
비록 우리가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홈, 쉬트 홈’인 파스카의 예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보다 더 우리 가까이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귀한 품위의 인간인지요.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법이 선포하고 방어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먼저입니다. 이런 사실을 통찰한 복음의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인 바리사이들에 대해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따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면 나를 헛되이 섬긴다.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버린다.”
이런 예수님을, 살아있는 사람을, 하느님의 계명인 사랑을 잣대로 분별할 때 삶은 단순해집니다. 주님을 헛되이가 아닌 참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가까이에서 본질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계명 앞에서 사람의 전통은 모두 상대화됩니다. 그러니 절대적인 것은 하느님의 사랑 하나뿐입니다.
어제 읽은 신선한 기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문대통령은 5일 청와대 각 비서관들에게 초심을 잃지 말자는 취지에서 신영복 선생의 글인 ‘춘풍추상春風秋霜’을 선물했다 합니다. 신영복 선생이 참여정부시절 노대통령에게 선물한 것으로 그 때의 기억을 살려 그 글을 찾아 낸 것입니다.
춘풍추상은 채근담에 나오는 문구로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과 같이 부드럽고 대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대해야 한다.”는 뜻으로 공직자로서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이 보다 더 훌륭한 좌우명도 없을 것입니다. 영원한 반려자,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삶 또한 이래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함께 ‘홈 쉬트 홈home! sweet home!’ 인생을, 춘풍추상春風秋霜의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시편84,5). 화답송 시편, 그대로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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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서 옛날 같이 놀던 동네에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이 동네에 대해 아주 작은 것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함께 야구를 했던 공터, 이것저것 놀이를 하던 골목길, 또한 “여기에 문구점이 있었는데, 여기에 조그마한 가게가 있었는데....”라고 말하면서 옛날에 대해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40년 전의 일인데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신기해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정말로 머리 좋다. 그런데 너 초등학교 때의 모습은 그렇게 똑똑하지 못했는데....”
그러자 이 친구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해요. “사실 내가 좋아하던 아이가 이 동네에 살았거든. 그러다 보니 다 기억이 나네. 심지어 그 아이 집 앞에 피고 있었던 작은 들꽃까지도 다 기억난다."
사랑은 이렇게 세세한 것까지도 기억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랑을 하면서 함께 했던 기억들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으며, 그 사랑의 주위에 있었던 것까지도 잊지 않게 합니다.
사랑은 이렇게 나쁜 머리까지 좋게 만드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네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한 번 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기억은 어떠한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하느님께 대한 기억 역시 가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작은 물건을 통해서도 또 어떤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더욱 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억이 없다면 어떨까요? 입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의 종교지도자들은 형식적인 율법을 강조했습니다. 세세한 것도 철저히 지켜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율법이 사람보다 더 윗자리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기 위한 것인데, 사랑에 대한 기억은 ,. 사라지고 율법 하나만 남아서 사람들을 옭아매는 하나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빌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은 우리를 옭아매는 도구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그래서 더욱 더 이 세상을 기쁘게 살아가며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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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야 할 사람}
만날수록 해가 되는 사람, 우리가 피해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상대방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쏟아버립니다. 온갖 부정적인 말로써 다른 이들에 대해서 또 세상에 대해서 불평불만을 이야기하지요.
이러한 말을 계속 듣게 되면 어떨까요? 쓰레기통에 쓰레기가 가득하면 지저분해지는 것 역시 이러한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영적으로 피폐해집니다.
둘째는 “난 원래 이래.”라고 말하는 사람 역시 피해야 할 사람입니다. 이 말의 뒤에는 이런 말이 생략된 것이라고 하네요. “난 원래 이래. 그러니 네가 이해해야 해.” 결국 상대방에게 무조건 이해하라는 것, 아주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난 뒤끝이 없잖아. 내가 좀 사차원이잖아.”라고 말하는 사람 역시 이로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생각하는 대로 내뱉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사람을 가까이 하면 너무나 힘들고 피곤해집니다. 이 말은 곧 무엇일까요? 내가 피해야 할 사람은 다른 이들 역시 피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 따라서 내가 이런 모습으로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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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로부터 어디서나 ‘먹는 문제’가 항상 제일 예민합니다. 싸움 중에서도 밥그릇 싸움이 가장 치열합니다. 공동체에서도 가장 말 많고 힘든 소임지가 바로 주방입니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주방에서 많은 성인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도 예수님께 먹는 것을 가지고 많은 시비를 겁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벼이삭을 따먹었다고 문제 삼는가 하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문제 삼고, 또 단식하지 않는다고 문제 삼기도 하고,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시비를 겁니다. 소위 정결법에 대한 논쟁입니다.
그런데 손 씻는 정결법은 율법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시비의 준거로 내세운 것은 “조상들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 신앙의 핵심과는 상관없는 일로 당시의 이스라엘 전통으로 당시의 사회를 이끌어가던 방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호도하여 종교적 권위를 덧붙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로는 하느님을 공경하나 마음으로는 경건치 못한 이스라엘을 꾸짖으십니다.
이는 <레위기> 11장의 정결법에 따라, 정한 음식물만 깨끗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잘못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곧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하여야한다는 것은 몸의 깨끗함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입으로만 공경하고 마음은 떠나있음을 말합니다. 곧 밖으로는 드러나는 것보다 속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또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면서, 오히려 하느님을 헛되이 섬긴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들은 ‘하느님의 계명’ 외에 인위적으로 ‘사람의 전통에 따른 규정‘을 만들어 순종을 요구하지만, 그럴만한 권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규범들이 하느님의 계명에서 벗어나 있고 맹목적인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결국,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그 예를 실제로 들어 설명해주십니다. 곧 “코르반”이란 조상의 전통으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오히려 파기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도 ‘사람의 규정’을 지키려다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을 수 있습니다. 서로가 자기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하느님 방식인 복음의 정신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화해하라는 하느님의 계명보다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대립하고 그의 것을 빼앗으려 하기도 합니다. 아니, 그것이 가르침으로 강요되기도 하고, 법 규정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형제와 화해하고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법으로 제한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죄라고 규정하는 법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갈라진 형제를 칭찬하고 고무 찬양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고, 아니 군대라는 이름으로 형제를 죽이는 연습을 하며 살아가는 황당한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러고 있지 않나요? 북녘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
그러니, 먼저 우리 몸에 배어 있는 잘못된 관습이나 전통들, 그리고 잘못 배운 교리나 가르침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세운 전통을 지키려다 하느님의 계명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나는 그를 사랑하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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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신부의 복음 묵상
<알맹이가 중요하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의 전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왜 손을 씻게 되었는가는 관심이 없고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에만 마음을 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사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육적인 생명양식으로써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합당한 마음으로 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위생적인 의미도 있지만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미사전례 때에 참회예절이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의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내용은 잊은 채 전통을 고집하면서 알맹이를 소홀히 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지켜야 할 전통과 관습이 있지만 그것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하고 쇄신할 수 있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의 전통은 사람의 전통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을 대신 하거나 거기에 맞설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법이 훼손된다면 그 전통은 마땅히 쇄신되거나 부정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7,6-7).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맹이보다도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여전히 같은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내용보다도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며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우리의 예배는 헛되고 헛된 행위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중요시 하되 그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알고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전통과 관습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부득이 주일미사 참례를 못하여 주님의 기도 33번을 하였는데 고해성사를 봐야 되느냐?” “몸이 불편한데 미사전례 때 앉고, 일어서고, 꿇는 것을 따라 해야 하느냐?” “얼마 전에 고해 성사를 봤는데 판공성사를 또 봐야 하느냐?” 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을 일일이 해 드려야 합니까? 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에 따라 움직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 입니다. 법은 함부로 무시하여서도 안 되고 내 입맛에 맞게 합리화시켜서도 안 되느니 만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전통과 관습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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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7,5)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7,6b)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7,6b)이 뜨끔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왜일까?
예수님은 자비의 얼굴이십니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시고, 자비자체이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위선 앞에서는 매우 엄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
위선은 믿음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기도하지만 삶으로는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계명의 본질인 사랑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25명은 일본 박해시대 때 나가사키에서 순교하신 분들이십니다. 성인들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셨습니다.
이들 중에는 스페인 선교사 작은형제회 수사님들이 여섯 분 계십니다. 나머지 분들은 일본인들인데, 예수회 수사님들도 세 분 계시고,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원들도 계십니다.
순교자들은 끝까지 믿은 분들입니다.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삶으로 진실되게 믿은 분들이고, 이 진실된 믿음 안에서 기쁘게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신 분들입니다.
나의 위선! 그리고 우리의 위선!
위선은 우리가 자비로우신 주님께 우선적으로 용서를 청해야 할 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작은 아들처럼 이렇게 고백해야하지 않을까요?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15,21)
솔직하게 고백하고, 기쁘게 즐거운 잔치(구원) 속으로 들어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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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만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느님의 계명에 반대되는 인간의 전통>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책망하십니다. 위선자는 배우처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 당시 겉으로는 엄격하게 규율을 지켰지만, 내면적으로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진실을 외면한 채 인생을 연극을 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인습에 사로잡혀,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잘못 중 대표적인 것이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듯, 하느님의 계명에 반대되는 인간의 전통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인간의 전통인 ‘코르반’이란 말로 무시하는 경우를 오늘 지적하십니다. 히브리말로 ‘코르반’은 선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코르반’은 유다인들의 관습 안에서 돈이나 물건 등의 재물을 하느님께 바쳐 속인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서약문을 말합니다. 따라서 코르반으로 봉헌된 것은 세속적인 것에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긴박한 처지에서 자식에게 도움을 청해 왔을 때에도,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이라며 ‘코르반’이라고 말하면서, 부모에게 줄 것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부모에 대한 공경을 회피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법이라도 좋은 뜻에서 타인을 돕는 것을 방해한다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자비와 사랑의 실천을 방해하는 율법은 아무런 가치와 구속력이 없으며, 모든 행동 전에 그리고 모든 규율을 생각하기 전에,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맞는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들은, 크고 작은 일에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하는,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의 식별이 요구되는 때가 많습니다. 무엇이 나의 욕심에서 나오는 내 뜻이고, 무엇이 주님의 뜻인가를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인간들이 구성원이 된 주님의 교회 안에는 크고 작은 신심단체와 활동단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단체들은 모두 주님의 지체로서,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의 팔과 다리가 되기도 하고, 심장이 되기도 하며, 또 교회를 이끌어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지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는 단체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느라,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래서 새롭게 전입해 온 신자들이 한 공동체의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느낌을 받기가 어려운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하시고는, 당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온갖 축복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창조된 세상의 모습을 보시고는 “모든 것이 참 좋았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도 참 좋았던 이 세상을,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축복으로 맡겨주신 이 세상을, 계속해서 보기 좋은 세상으로 가꾸어 가는 일은, 매일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창조의 신비를 이웃에게서 발견하고,
또 그 새로움을 찬미하는 일이며, 이웃 안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좋으신 흔적을 알아보고, 그것을 존중하는 일일 것입니다.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정작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일에 더디다면,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질책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신앙인의 눈으로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이웃을 향해 더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때, 우리는 이웃에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을 보여주는 참 신앙인이 될 것이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하느님의 뜻에 맞는 주님의 공동체로 이끄는데 그 역할을 다하는 소중한 일원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의 관습보다는 주님의 사랑의 법을 먼저 생각하고 실천함으로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신 이 세상을 참 보기 좋은 그리고 살맛나는 세상을 만드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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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계명>
복음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따지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는 구실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며 반박합니다.
그 근거를 “부모를 존경하라”는 계명이 있음에도 이를 잘 지키지 않고 대신 ‘코로반’ 이라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혼란스러운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삶에 어떻게 잘 조화시키느냐 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삶에서 잘 드러내느냐 입니다.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평범하게 살다가 어느 날 소위 사이비종교 단체에 빠지게 됩니다. 가정에만 충실하던 자매는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삶의 중심이 깨져버립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며... 교회의 가르침이라며... 없는 재산을 조금씩 교회에 갖다 바칩니다. 봉사와 전교활동 시간이 늘어감에 따라 그 만큼 가정에 소홀하게 되고, 아이들은 거의 무관심속에 지내는 날이 잦아졌습니다. 가족간에 웃음이 피어나던 대화는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대신 싸움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가정이 엉망이 되자, 참다못한 남편이 ‘왜 당신은 교회에 돈을 다 갖다 바치냐? 가정은 이렇게 엉망인데, 교회에만 가냐? 가정이 중요하냐? 교회가 중요하냐?’고 묻자, 아내는 ‘교회가 중요하다. 내가 하는 일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가족이 자기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화의 여인의 말이 맞았습니까? 틀렸습니까? 신학적으로는 맞습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모임, 전체를 의미하고, 가정은 작은 교회이기에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신학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신앙적으로는 틀린 대답이요,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거스르고 부정하는 모습이요, 행동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진 것을 다 팔아, 나를 따라라”고 하셨습니다. “가정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당신만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자신의 의지, 뜻을 버리라는 말씀이지, 사랑하는 가족을 버리거나, 재산을 없애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은 이웃을 도와주고 적절한 곳에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사람들에게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교회를 살찌려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이속을 챙기려는 행위일 뿐입니다.
모 교회에서 있던 일입니다. 한 자매가 교회에서 받은 사랑과 감동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진정 기꺼운 마음으로 전 재산인 소중한 집을 교회에서 뜻있는데 사용하라며 봉헌합니다.
그 자매의 형편을 잘 아는 목사님은 순간 고민에 빠집니다. 교회의 재정 운영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믿음으로, 교회 통장에 200만원만 남겨두고, 나머지 돈은 여기저기 뜻있는데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살아가는 교회였습니다.
재정위원회분들과 만난 후에, 목사님은 집을 봉헌한 자매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매님, 교회는 자매님의 아름다운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원칙상 바로 재물을 사용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전에는 자매님의 집이었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집이 된 이 집을 교회는 자매님께 무상으로 주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사용하든,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든 처분을 하던 이제는 자매님의 것입니다.’ 참 멋있는... 진정 깨어있고 살아있는 목사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이름을 이용하는 성직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으로 자신을 살찌우는 성직자가 아니라... 진정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교회의 가르침과 전통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모습이기 때문에 신자분들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매 순간 감동이 끊이지 않았고, 자연스럽고 기쁘게 자신의 전 재산을 봉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나와 함께 살아가는 소중한 가족, 그 가족을 엮어주는 가정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웃사랑도... 사랑의 실천, 나눔도 제일 먼저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구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이를 알았지만, 여인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잘 몰랐던 것이고... 그에 따라, 교회의 모습, 전통도 몰랐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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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관습의 틀 속에 갇힌 진실>
사람들은 살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사람들 모두가 잘 지내기 위해 만든 공동의 약속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대를 이어 계속 지켜질 때 우리는 그것을 관습이라 부르곤 합니다.
사람들은 이 관습의 틀을 벗어나는 것을 파격이다, 파행이다, 혹은 개혁이다라는 등의 표현을 써서 나타내곤 합니다. 그러나 파격이 아무리 사람들의 눈을 끌어도 그것이 또 다른 관습이 되기 전에는 그런 일은 아주 작은 부분일 뿐, 사람들은 그동안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관습을 따라 살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 우리는 이천 년 전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관습 하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오랜 관습으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예절에 관한 내용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좋은 습관으로 불리는 이 관습은 그 자체로 나무랄 데 없는 내용입니다.
먼지가 많은 지역일수록 이렇게 손을 씻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건강에도 필수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습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겼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빠뜨렸기에 그것을 잘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지적을 받는다면 분명 그것은 부끄러운 일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부끄러운 일을 했으니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공격을 받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또 곤란을 겪게 되십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그들의 이런 이야기는 내용 자체로 틀린 말이 없습니다. 분명 오랜 전통에는 손을 깨끗이 씻는 것은 예의이자 모든 이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들의 따져 물음이 들으시는 예수님의 화를 돋우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사야가 무어라고 예언했느냐?'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했는데 이것은 바로 너희와 같은 위선자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예수님 제자들의 잘못된 행동 하나를 트집 잡으려던 바리사이파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들의 행동이 가식적이라는 모욕에 가까운 이야기를 예수님께 도리어 듣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신들에게 관대하게 결정하여 하느님의 것인 양 떠들던 이들이 심지어 자신들의 부모조차 업신여기게 된다는 사실을 들며 주님은 그들을 부끄럽게 만드십니다.
우리에겐 아직도 무수한 관습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관습들을 지킴으로써 세상을 더 편안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그러나 가끔은 그 관습이 생겨난 근본을 아는 부분도 잘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관습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잘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 이유로 가끔 관습을 뛰어 넘는 일탈적인 일들도 모두 이 기준에서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는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관습은 그 본 의미를 알 때 빛이 나고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결코 형식이 진리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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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 8)
시작은 늘 불완전하고 불안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불안한 우리에게 내려주셨습니다.
계명을 받아든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계명을 통해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전통보다 계명을 따랐던 순교자들의 뜨거운 삶이었습니다.
순교의 자리에서 우리자신을 만나게됩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리지 않았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삶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한 자유로운 삶입니다.
너무나 쉽게 배신하고 변질하는 이 세상을 향해 순교의 영성은 참된 삶이 무언지를 가르쳐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