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2/03 소비자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7 - 우리나라 첫 쇄빙연구선 이름 '아라온'으로 아라온호, 남·북극 얼음바다 누빈다 남·북극해를 누빌 우리나라의 첫 쇄빙연구선 이름이 ‘아라온’으로 정해졌다 해양수산부는 2009년 9월 진수될 국내 최초의 쇄빙연구선의 이름을 공모한 결과, 바다를 뜻하는 순우리말 ‘아라’에 전부 또는 모두를 나타내는 ‘온’을 붙인 ‘아라온’이 선정됐다고 3 일 밝혔다. 아라온이라는 명칭에는 전 세계 모든 해역을 누비라는 의미와 어떤 상황에서도 역동적으 로 활약하기를 바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1000억원을 들여 6950t급으로 건조되는 아라온은 최대 85명을 태우고 1m 두께의 얼음을 깨면서 시속 3노트의 속도로 2만해리를 운항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아라온은 남극 세종기지에 물품을 보급하고 그동안 얼음 때문에 일반 연구선이 접근할 수 없었던 남·북극해를 누비며 이들 지역의 생물 자원, 기후 변화 등에 대한 연구를 맡게 된다. /한국환경운동본부 07-12-27 13:43 http://www.knature.or.kr/bbs/board.php?bo_table=econews&wr_id=58&page=53
2007 - UN Climate Change Conference & COP 13, UN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 UNFCCC, Indonesia, 3-14 Dec 2007 http://www.unpi.com/projects_un_conference_stamp_listing_2009.asp
한국 천주교회가 200년 역사에서 저지른 잘못을 민족 앞에 고백하고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는 공식문건을 2000년 12월 3일 발표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이름으로 발표된 `쇄신과 화해`라는 문건을 통해 천주교회는 구체적인 개별사건을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조상제사 금지, 병인양요, 안중근의사 의거의 `살인` 규정, 권위주의와 외적 성장에의 지나친 관심 등의 내용이 사실상 함축된 일련의 잘못을 포괄적으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 이같은 참회는 2000년 3월 교황 요한 바로오2세가 지나간 2000년 역사를 통해 가톨릭 교회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 `교황청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참회`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이같은 참회 문건은 비록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고 일부 마땅히 언급해야 할 내용이 빠져있다`는 종교학계 등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교회사적으로나 민족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 중대 결단이었다. /조선 2000 - 미국의 시인 괜돌린 브룩스(Brooks, Gwendolyn) 사망 브룩스 [Brooks, Gwendolyn Elizabeth, 1917.6.7~2000.12.3] 미국의 시인. 도시에 사는 흑인들의 일상생활을 다룬 작품들을 썼다. 흑인 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1969년 일리노이 주의 계관시인 칭호를 받았다. 1936년 윌슨전문대학을 졸업했다. 초기 시들은 주로 시카고 흑인사회를 대변하는 일간지 〈시카고 디펜더 Chicago Defender〉에 발표했다. 처녀시집 〈브론즈빌의 거리 A Street in Bronzeville〉(1945)에서는 이웃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삶을, 평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재능을 보여준다. 퓰리처상을 안겨준 〈애니 앨런 Annie Allen〉(1949)은 한 흑인 소녀가 시카고에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린 연작시이다. 소설 〈모드 마사 Maud Martha〉(1953)에서도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보스턴 사람들 The Bean Eaters〉(1960)에는 뛰어난 시 몇 편이 실려 있다. 〈시선집 Selected Poems〉(1963)을 발표한 뒤 1968년에는 〈메카에서 In the Mecca〉를 출판했는데, 이 책의 전반부는 1891년 시카고의 사우스사이드에 세워졌다가 점차 빈민가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된 크고 요새같이 생긴 아파트, 메카에 사는 사람들에 관한 긴 이야기체 시이다. 그러나 후반부는 이와는 다른 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주목을 끈 것은 〈유리를 깨는 소년 Boy Breaking Glass〉·〈말콤 엑스 Malcolm X〉이다. 어린이를 위한 책 〈브론즈빌의 소년소녀들 Bronzeville Boys and Girls〉(1956)도 썼으며, 자전적인 작품 〈제1부의 보고 Report from Part one〉(1972)는 개인적인 회고담·인터뷰·편지를 모아놓은 것이다. 그뒤에 발표한 작품으로는 〈흑인들을 위한 초급 독본 Primer for Blacks〉(1980)·〈젊은 시인들을 위한 입문서 Young Poets' Primer〉(1981)·〈상륙 To Disembark〉(1981)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997 - IMF 구제금융 합의 정부와 IMF, 자금지원 양해각서에 서명 이철 동아닷컴 기자 kino27@donga.com /동아닷컴TV 2009-12-02 17:56:57 http://etv.donga.com/view.php?code=&idxno= 200912020028009&category=002013&page=10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 차장)는 2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검찰 소 환에 불응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이날 오후 전씨에 대해 군형법상의 반란수괴 등 혐의로 법원에 구속 영장을 청구했다. 전씨에 대한 구속영장은 서울지법 형사3부 신흥철 판사에 의해 이날 밤 11시 23분에 발 부됐다. 검찰은 영장발부 직후 영장집행을 위해 서울지검 수사1과장 지휘로 9명의 수사관을 경남 합천으로 내려보냈다. 이에 따라 전씨는 이날 새벽 합천에서 구속이 집행돼 구 치장소인 안양교도소로 압송돼 수감됐다. 전씨에게 적용된 혐의는 이밖에도 불법진퇴, 지휘관 계엄지역 수소 이탈, 상관살해, 상관 살해 미수, 초병살해 등 모두 6가지다.검찰은 "전씨가 공개적으로 소환 불응 의사를 밝힌 만 큼 더이상 소환 통보를 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신병을 확보해 조사하기 로 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날 또 채동욱 검사 등 특수부 소속 검사 3명을 노태우 전 대통 령이 갇혀 있는 서울구치소로 보내 12·12와 관련해 조사를 벌였다. 검찰은 노씨를 상대로 12· 12 당시 전씨와의 사전모의 여부 및 경복궁 모임 참석 경위, 상부 허가없이 병력을 동원한 경위 등을 집중 조사했다. 이종찬 본부장은 이와 함께 “최규하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출두 여부를 협의중”이라고 말해 최씨에 대해서도 곧 조사가 이뤄질 것임을 내비쳤다. <김인현 김종태 기자> /한겨레그림판 1995년 12월 08일자 http://www.hani.co.kr/parkjd/951208.html
기아에 허덕이는 소말리아에 미군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투입됐다. 1991년 1월 바레 독재정권이 무너진 후 시작된 내전속에서 지금까지 35만명이 기아와 질병, 전쟁으로 죽어갔고 2백만명이 아사직전에 놓여있었다. 유엔 안보리가 1992년 12월 3일 소말리아에 대한 병력파견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이어 9일 미해병대가 수도 모가디슈에 상륙하면서 `희망회복` 작전이 시작됐다. 다국적군의 주 임무는 구호물자의 안전한 수송, 구호반원 및 민간인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로, 인도적 차원에서의 군사개입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군사개입과는 차별성을 두었다. /조선
- 데이콤 국제전화 002 개통기념 (1991.12.3.발행) 1991 - 데이콤 국제전화 002 개통, 국제전화 경쟁 시작 1991년 12월 3일 미국, 일본, 홍콩 3개국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개시한 이래 개통 10주년을 맞은 국제전화 002는 '2001년 3월말 현재 직접연결을 포함, 전세계 총 189개국 233지역에 서비스를제공하고 있습니다. 국제전화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들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주력해온 데이콤은 기존에 제공 중이던 『IDD(국제전화 자동통화서비스)』, 『D/D(Direct DACOM)』등 기본상품 이외에도 역과금시장 주 공략 상품인 『HCD(home Country Direct)』와 『콜링카드』, 『선불카드』등 지능망 서비스 계열서비스 등을 제공하여 왔으며, '99년부터는 중소기업대상 국제전화 특별할인상품인 『002 파워 DC』등 특화시장 상품을 위주로 신상품을 출시하였고, 2000년에는 해외여행자의 편리를 위해 『Auto-HCD서비스』를 출시하였다. 또한 2001년에는 항공사와 연계한 『Air-HCD서비스』 및 이동전화사용자대상 국제전화 할인상품 『무선 파워 DC』를 출시하는 등 고객 만족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주식회사 데이콤-전화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efabupupu&logNo=90043450020&widgetTypeCall=true
1987 - 중부고속도로 개통 국내 최초 철근콘크리트 시공 중부고속도로 개통 이철 동아닷컴 기자 kino27@donga.com /동아닷컴TV 2009-12-02 17:56:57 http://etv.donga.com/view.php?code=&idxno= 200912020028009&category=002013&page=10
1973 - 파이오니어 10호 최초로 목성 탐사 [책갈피 속의 오늘]宇宙로 쏜 편지…파이어니어 목성 통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올해 2월 목성 무인탐사선 파이어니어 10호가 실종(失踪)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탐사선이 한 달 전쯤 희미한 신호를 보내온 뒤 통신이 완전히 끊겼다”는 것. 까마득한 우주의 한 점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sec&sid1=102&oid=020&aid=0000216953
1967 - 남아공 버나드 박사, 세계최초로 심장이식수술 성공 [오늘속으로(12월3일)] 심장 이식 1967년 12월3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외과의사 크리스티안 바너드가 케이프타운의 흐로테 스후르 병원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심장이식 수술을 시행했다. 바너드는 교통사고로 숨진 20대 여성의 심장을 심부전으로 죽음을앞두고 있던 55세의 루이 와샨스키에게 옮겨 심었다. 고종석 /한국일보 2003-12-02 17:0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3&oid=038&aid=0000209756
자유센터 서산부인과와 경동교회 그리고 웰컴시티를 거쳐서 장충단길을 걷는다. 길옆으로 장충단 공원과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와 수표교가 보인다. 그리고 멀리 서울타워가 시선에 들어온다. 10여분 걸었을까 나무들 사이로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무언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곳은 바로 김수근의 자유센터다. 자유센터 앞에 서면 그 거대한 처마의 규모에 압도당하기 십상이다. 남산자락을 향해 혀를 내밀듯이 부유하는 거대한 콘크리트 처마는 정말이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자유센터가 완공된 1963년 이후 40여년을 지나오면서 수많은 건축물들이 지어졌지만 자유센터만큼 장대한 규모의 느낌을 가진 건물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것 같다. 남산자락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중앙계단과 현관의 묵직한 캐노피, 그리고 계단을 따라 오를 수 있는 옥상정원과 내부로 빛을 끌어들이는 빛의 대포... 마치 르 꼬르뷔지에의 챤디가르 의사당을 보는듯한 느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챤디가르에서의 의사당은 그 장소가 가지는 풍토와 기후등을 고려하여 만들어졌다. 하지만 자유센터에서는 다소 과도하게 그 요소들을 끼어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비록 지금은 낡고 허름하지만 분명 자유센터는 서울의 보물이다. [서울의 건축을 찾아서... 남산, 장충동지역] http://www.architour.net/atn/read.cgi?board=bbs_korea&y_number=119 1952 - 한국의 배우, 연극 연출가 김명곤(金明坤) 출생 김명곤 [金明坤, 1952.12.3~ ] 김명곤(金明坤, 1952년 12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성우이고 연극 연출가이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출생하였다. 1983년 영화 바보 선언으로 데뷔, 서편제, 태백산맥 등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특히 서편제에서는 각본을 쓰기도 했다. 서편제로 1993년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6년 극단 <아리랑>을 창단하였으며, 2000년에는 국립중앙극장장을 맡았고 2006년 문화관광부 장관에 취임했다. 학력 /위키백과
1947 - 테너시 윌리엄스의 3막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초연 [오늘<1280>(12월3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사라져가는 남부의 문화전통과 강렬한 성적 욕망 사이에서 분열하는 여성의 이야기인 이 연극의 제목은 뉴올리언스에 실제로 있었던 ‘욕망의 거리’라는 전차 노선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작품의 주인공은 미국 남부 몰락한 지주 집안 출신의 블랑슈 뒤부아다. 신경증 기질과 창부적 성격을 함께 지닌 그녀는 빛 바랜 과거의 전통과 교양으로 욕망을 억누르며 외롭게 살아가다가, 뉴올리언스에 사는 동생 스텔러를 방문한다. 그녀는 거기서 동생 남편 스탠리 코월스키에게 겁탈당하면서 억제했던 욕망을 분출시키지만, 결국 미쳐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네 해 뒤인 1951년 엘리아 카잔 감독의 손을 거쳐 영화로 만들어졌다. 비비언 리가 블랑슈 역을 맡고 말런 브랜도와 킴 헌터가 스탠리 역과 스텔러 역을 각각 맡은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돼 주연여우상 등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국내 극단들에 의해서도 여러 차례 공연되었다. 기자가 이 연극을 처음 본 것은 1977년이다. 극단이 어디였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김애경씨가 블랑슈 역을 맡았다는 사실은 또렷이 남아있다. 최근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약간 주책스러운 ‘아줌마’ 역을 곧잘 맡곤 하는 김애경씨 모습을 보노라면, 한 세대 저편의 젊은 김애경씨가 그 위에 포개지며 기분이 묘해진다. 시간과 싸워 이기는 것은 없다. 욕망도 이름도 전차도. 서울 거리에 전차가 다니던 시절이 문득 그립다.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 life/200412/h2004120214582525340.htm&ver=v002
요제프 [József, Attila, 1905.4.11~1937.12.3] 헝가리의 시인. 20세기의 위대한 헝가리 시인으로 17세 때 첫번째 시집을 출판했으나 죽은 뒤에야 참다운 명성을 얻었다. 그는 마르크스 사상에 마음이 끌려 당시 비합법 단체였던 공산당에 입당했다. 1932년 문학잡지 〈볼로샤크 Valóság〉를 공동창간했으나 얼마가지 않아 중단되었고 1936년에는 평론지 〈세프 소 Szép Szó〉를 공동 창간했다.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을 정감있게 그렸으며 가난한 세탁부였던 자신의 어머니를 노동계급의 상징으로 제시해 불멸하게 만들었다. 또한 부조리가 배어나는 애수적 사실주의라는 새로운 사조를 창조했고 이를 통해 현대인의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고 삶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조화를 믿는 자신의 신념을 나타냈다. /브리태니커
1932 -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 발행 셔우드 홀(Hall, Sherwood, 1893~1991) ◇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실 발행(1932) 셔우드 홀은 결핵치료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크리스마스-실(Seal)” 운동을 계획하고 1932년 12월 3일 남대문을 그린 ‘실’을 한국 최초로 발행했다. (자료 : 대한결핵협회, 한국결핵사, 1998.2.28) /한국컴퓨터선교회-기독정보검색-인명사전 http://kcm.kr/dic_view.php?nid=22426&key=8&kword=&page=
1931년 오늘 런던의 빈민가를 방문했다. 영국 국민들로부터는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YTN
고다르 [Godard, Jean-Luc, 1930.12.3~ ] [역사 속의 인물] '영화의 예술화' 주창한 고다르 솔직히 프랑스 영화는 재미없다. 박진감이 떨어지고 뭔가 모르게 어설프다.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지나치게 많고 상투적이라 짜증스럽다.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에 길들여져 있기도 하지만, 수다스럽고도 심난한 프랑스인의 특질이 눈에 거슬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빼놓을 수 없는 프랑스 감독이 있다. 흔히 영화사를 논할 때 '고다르 전(前)과 후(後)'라는 말이 나오게 한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다. 1960년대 현대영화의 출발점이라는 누벨바그(새 물결) 운동의 기수다. 1930년 오늘, 파리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소르본 대학에 다니면서 영화를 공부했다. 찍어내기식 영화를 배격하고 감독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지금까지 시종일관 실험적인 영화에 매달리고 있다. 대표작 '네멋대로 해라'(1960년)를 발표하고는 "이제 영화가 예술적 반열에 올라섰다"고 자평했다. 1960년대 후반 마오쩌둥을 숭배해 좌파 색채의 영화를 만들면서 상업적인 배급망과도 절연한다. 그의 영화는 영화사적으로 중요한지 모르지만, 대중의 눈높이와는 맞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고다르의 작가주의 영향 때문에 프랑스 영화가 더 재미없어졌다는 말은 그리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박병선 논설위원 /매일신문 2009년 12월 03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1992&yy=2009
"영화란 삶을 담아내는 예술이 아니다. 영화는 삶과 예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영화는 그림이나 문학과는 달리 삶과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 나는 영화에 이 개념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문학이나 그림은 시작부터 예술로 존재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 장 뤼크 고다르
1921 - 조선어연구회 조직 (후에 한글학회로 개칭) [오늘속으로(12월3일)] 한글학회 1921년 12월3일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가 서울 휘문의숙에서 결성됐다. 한국 최초의 민간 학술단체인 조선어 연구회를 만든 이는 임경재최두선 권덕규 장지영 등 한힌샘 주시경의 제자들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10&oid=038&aid=0000113859
- Auguste Renoir - 'Self-portrait'
- 'Nude' - 'The Bathers'
- 'Portrait of the Model' - 'The Swing'
- 'The Box' - 'Young Girl with Flower'
르누아르 [Renoir, Auguste, 1841.2.25~1919.12.3] 반짝이는 색채와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림, 우아하고 부드러운 필치... 근대최대의 색채 화가이자 인상파의 대가였던 르누아르가 1919년 12월 3일 프랑스 남부 카뉴에서 78세로 눈을 감았다.
- Gary Cooper & Anna Sten
1908 - 러시아 출신의 배우 안나 스텐(Sten, Anna) 출생 스텐 [Sten, Anna, 1908.12.3~1993.11.12] Anna Sten-Mini Biography Born in Russia to a Ukrainian father and a Swedish mother, Anna Sten studied at the Russian Film Academy and joined the Moscow Art Theater. Strikingly beautiful, she went on to appear in a number of Russian silent films, but it was in the German film Der Mörder Dimitri Karamasoff (1931) that Anna gained notice. Samuel Goldwyn saw a picture of Anna in the paper and rushed to view the film. After the first reel he sent word to sign her, hoping to develop her into a star of the magnitude of Greta Garbo or Marlene Dietrich. His agent did sign Anna to a contract but forgot to mention the fact that Anna didn't speak a word of English, which made her appearance in sound pictures questionable. She spent a year studying English every day and working out makeup and acting. Goldwyn publicity called her "The Passionate Peasant" and sold her image to papers all over America. However, her first picture, Nana (1934), even though almost completely rewritten and reshot from the original, didn't bring audiences into the theaters. While Anna was looked great, the script and picture were average. Her second film, We Live Again (1934), marginally better suited to her style, also died within weeks at the box office. After her third film for Goldwyn, The Wedding Night (1935), also flopped, she and Goldwyn parted company after it became known around Hollywood as "Goldwyn's Last Sten." Anna made a few more movies, but by the end of the decade she was forgotten. http://www.imdb.com/name/nm0826479/bio
쿤 [Kuhn, Richard, 1900.12.3~1967.8.1] 독일의 생화학자. 1938년 카로티노이드와 비타민을 연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으나, 나치의 방해로 상장과 금메달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받았다. 1922년 뮌헨대학교의 리하르트 빌슈태터 밑에서 효소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6~29년 취리히공과대학에 있었으며, 그뒤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교수와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의학연구소(나중에 막스 플랑크 의학연구소가 됨) 소장이 되었다. 쿤은 천연에 널리 분포하며, 지용성 황색색소인 카로티노이드에 관련된 화합물들의 구조를 연구했다. 그결과 적어도 8개 이상의 카로티노이드를 발견해 순수한 형태의 카로티노이드를 만들었으며, 그들의 조성(組成)을 밝혔다. 그는 또 특정 조류(藻類)를 수정시키기 위해서는 카로티노이드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파울 카러와 동시에 비타민 B2의 조성을 밝혔으며, 최초로 1g의 비타민 B2를 분리했고, 동료와 함께 비타민 B6도 분리했다. 1948년부터 〈유스투스 리비히 화학연보 Justus Liebigs Annalen der Chemie〉의 편집자를 지냈다. /브리태니커
스티븐슨 [Stevenson, Robert Louis (Balfour), 1850.11.13~1894.12.3] [역사속의 오늘] 작가 스티븐슨 사망 모험소설 ‘보물섬’을 쓴 영국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1894년 12월 3일 남태평양의 사모아섬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185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스티븐슨은 에든버러대학 공과에 입학했으나 1875년 변호사가 되었다. 어릴때부터 허약한 체질과 폐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지로 요양을 위한 여행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문필 활동에 뛰어든 것은 서른이 넘어서였다. 1881년 여러 잡지에 기고하였던 자서전·단편소설·여행기의 단편들을 묶은 ‘젊은이를 위하여’를 시작으로 10여년 동안 시, 소설, 평론 등 문학사에 기억될 만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특히 1881년부터 이듬해까지 청소년 잡지에 연재된 소설 ‘보물섬’이 1883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자 어린이 뿐만아니라 성인 독자들에게도 큰 호평을 얻었다. 이 소설은 짐 호킨스라는 소년이 해적으로부터 보물섬 지도를 얻어 보물섬을 찾아 떠나면서 겪는 파란만장한 모험을 그렸다. 이 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만화, 영화 등으로도 만들어지면서 전세계로 퍼져 아동문학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또 인간의 이중인격을 다룬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도 그의 대표작이다. 정보관리부 성일권 /매일신문 2008년 12월 03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5142&yy=2008
1889 - 인도의 10대 독립 투사 쿠디람 보세(Bose, Khudiram) 출생 보세 [Bose, Khudiram, 1889.12.3~1908.8.11] (참고) [역사 속의 인물] 인도의 10대 독립 투사 쿠디람 보세 1889년 인도의 벵갈 지역에서 태어난 쿠디람 보세는 두려움을 모르는 강인한 소년이었다. 13세 무렵, 대중 강연을 듣고 영국의 지배를 받던 조국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학교의 비밀 클럽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6살 때부터 경찰서에 폭탄을 설치하는 등 무장 투쟁에 뛰어들었다. 만 18세이던 1908년 4월에 그는 동료 프라풀라 차키와 함께 무자파르푸르의 유럽인 클럽 문 앞에서 마차에 폭탄을 던져 3명을 숨지게 했다. 그러나 숨진 사람은 그가 노리던 영국 관리가 아니라 그의 아내와 딸, 변호사였다. 그 직후 도주했지만 차키는 발각되자 권총으로 자살하고 보세는 체포되고 말았다. 죄없는 아들이 숨진 데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그에게 사형이 선고됐고 그는 항소하지 않았다. 사형을 선고 받는 순간 그가 미소 짓자 당황한 영국인 판사는 선고 의미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안다는 대답을 들은 그에게 판사가 진술을 허용하자 시간이 더 있다면 재판관들에게 폭탄 제조법을 가르쳐 주겠다며 여유를 보였다. 두 달 보름 후인 1908년 오늘, 교수형 당하는 자리에서도 미소를 띠며 최후를 맞았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08월 1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4586&yy=2011
프라사드 [Prasad, Rajendra, 1884.12.3~1963.2.28] 인도의 초대 대통령. 비하르주(州) 출생. 소지주(小地主)의 아들로 태어나 캘커타대학을 졸업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17년 참파란의 인디고 재배 노동자사건을 계기로 M.간디를 알게 되어 그의 사상에 이끌려서 민족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이후 간디의 참모로서 국민회의파의 운동에 전렴하였다. 1934년부터 국민회의파 의장에 3선 되었으며, 독립 인도의 헌법기초를 위한 제헌회의의 의장도 지냈다. 독립 후에는 연방의 농업장관, 1950년 대통령이 되었고, 1952년 5월부터 신헌법하의 인도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1962년까지 재임하였다. 국민회의파에서는 항상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naver
베베른 [Webern, Anton (Friedrich Ernst) von, 1883.12.3~1945.9.15]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빈 출생. 빈대학 철학과에서 음악학을 전공하고 1904년 이후는 A.쇤베르크 밑에서 작곡을 공부했으며, 1908년을 끝으로 스승과 함께 조성(調性)을 버리는 방향으로 나갔다. 그 무렵부터 지휘자로 활동하는 한편, 독자적인 작풍을 추구하여 무조적(無調的)인 작품을 발표하고, 1924년부터는 12음기법을 쓰기 시작하였다. 1939년 오스트리아에 나치스정권이 생긴 뒤로는 공적 활동을 못하고, 1945년 잘츠부르크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점령군인 미국 병사의 오해를 받아 사살되었다. 12음기법의 확립자인 스승 쇤베르크 및 동문 A.베르크와 함께 그가 이룬 업적은 20세기 최대의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음악적 의식은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진보적이었으며, 본질만을 말하려는 정밀한 기법은 전자음악의 탄생을 촉진하는 등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작품으로는 현악 4중주곡 《바가텔》(작품 9) 《작품 28》, 관현악곡 《교향곡》(작품 21) 《변주곡》(작품 30), 칸타타 《작품 29》 《작품 31》 등이 있다. /naver
1879 - 에디슨 '백열전구 발명' 공개 [책갈피 속의 오늘]1879년 에디슨 '백열전구 발명' 공개 “천재란 99%가 땀이며, 나머지 1%가 영감이다.”
* 1879년 10월 21일 탄소 필라멘트 전등 발명, 12월 3일 공개 발표.
1877 - 뉴질랜드의 비행기 발명가 리처드 피어스(Pearse, Richard) 출생 피어스 [Pearse, Richard William, 1877.12.3~1953.7.29] (참고) [역사속의 인물] 발명가 리처드 피어스 1903년 오늘 뉴질랜드 티마루에서 '세계 최초' 기록이 하나 만들어졌다. 농부 발명가인 리처드 피어스(Richard William Pierse·1877~1953)가 휘발유 엔진을 장착한 비행기를 띄웠다. 집에서 혼자 만든 비행기는 강변에서 28m까지 상승, 수백m 거리를 날았다. 그 유명한 미국의 라이트 형제보다 9개월 앞선 일이다. 그러나 '최초'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었다. 목격자만 있을 뿐, 신문에 나지도 않았다. 피어스가 자신의 발명품을 돈벌이에 쓰지 않고 개인적인 취미로 끝낸 것도 또 다른 이유다. 피어스의 비행기는 현대의 비행기 디자인과 무척 닮았다. 라이트형제는 複葉機(복엽기·2장의 날개를 상하로 배치한 비행기)였지만 피어스는 單葉機(단엽기·주날개가 하나인 비행기)였다. 이·착륙용 바퀴는 삼각형 자전거 바퀴를 썼고 날개는 대나무 뼈대와 아마포로 만들었다. 엔진은 15마력 정도였다. 생전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사후에 뉴질랜드 정부에 의해 최초 발명자로 인정받았다. 고향인 테무카에 그의 기념관이 있다. 박병선 사회1부장 lala@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3월 3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4442&yy=2009
- Heijermans and 'The Fisher Woman' 헤이예르만스 [Heijermans, Herman, 1864.12.3~1924.11.22] 네덜란드의 작가·극작가. 자연주의적이고 교훈적인 작품에서 모든 측면의 부르주아의 위선을 비난했다. 사업에 실패한 뒤 암스테르담에서 언론인이 되었다. 코스 하베마란 가명으로 출간한 소설 〈작은 죄 Kamertjeszonde〉(1898)에서는 사회에 만연된 성풍조를 공격했고, 희곡 〈모든 영혼 Allerzielen〉(1905)에서는 '타락한' 여인의 거절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베를린에서 일하는 동안 연극의 잠재적 가치를 처음 깨닫고 네덜란드로 돌아와 자신의 극단을 세웠다. 좀더 정치성을 지닌 희곡 중 〈좋은 희망 Op hoop van zegen〉(1901)은 어부들의 착취가 주제이며, 〈행운 Glück auf〉(1911)은 광부들의 착취를 주제로 삼고 있다. 소설 〈다이아몬드 마을 Diamantstad〉(1904)은 암스테르담의 다이아몬드 가공사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그는 사무엘 팔크란트라는 이름으로 풍자적인 단편도 썼고, 그의 능숙한 반어법 구사는 희곡 〈현명한 수고양이 De wijze kater〉에도 명확히 나타난다. /브리태니커
무어 [Moore, John Bassett, 1860.12.3~1947.11.12] 미국의 법학자. 국제법의 법전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미국 정부는 국제재판에 관계된 문제들에 관해 자주 그의 조언을 구했다. 무어는 1883년 델라웨어 주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뒤 1885년 국무부에 들어가 1891년까지 재직했다. 그뒤 컬럼비아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1924년 해밀턴 피시 좌(座) 국제법 및 외교학 교수로 동(同)대학에서 은퇴했다. 1912~38년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의 일원으로 있었다. 무어의 국제법에 관한 연구 가운데 〈국제법 개요 Digest of International Law〉(8권, 1906)는 불멸의 작품이다. 1929~33년에는 8권으로 된 해설집 〈고대와 현대의 국제 재판들 International Adjudications, Ancient and Modern〉을 펴냈다. /브리태니커
가타야마 센 [片山潛, Katayama Sen, 1859.12.3~1933.11.5] 일본의 노동운동 지도자, 사회주의자. 1859년 오카야마현[岡山縣]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사, 인쇄공 등으로 일하며 고학을 하였다. 1884년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존스홉킨스대학교, 예일대학교 신학부를 마쳤다. 미국에 있는 동안 미국노동총동맹(AFL)이 결성되고 발전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또 독일의 사회주의자 F.라살의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콘래드 [Conrad, Joseph, 1857.12.3~1924.8.3] 영국 소설가. 폴란드 베르디체프 출생. 본명은 요제프 테오도르 콘래드 코르제니오프스키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16세 때 프랑스 마르세유로 가서 선원이 되었으며 그 뒤 선장 자격을 얻고 영국에 귀화하였다. 1894년까지 서인도제도·동남아시아·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하여 아프리카의 오지 콩고강 상류 등을 여행하였으며 그때의 체험과 견문은 뒤에 많은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해상생활중 쓰기 시작한 《올메이어의 아방궁》은 5년이 걸려 탈고되어 1895년 출판되었다. 1897년 제3작 《나시서스호의 흑인》은 비평가의 인정을 받아 출세작이 되었으며 그 뒤 약 15년 동안 문제작을 많이 써냈다. 1912년 《운명》을 발표,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인간의 마음 속 깊이 다가오는 윤리적 작가로서 문명의 그늘에 가려진 죄악과 물욕이 가져오는 정신적 황폐, 사회적 책임과 배반 등 윤리적 주제에 날카로운 감각을 보여주었다. 저서로 장편소설 《로드 짐(1900)》 《노스트로모(1904)》 《밀정(密偵, 1906)》 《유럽의 눈아래에서(1909)》, 중·단편으로 《청춘(1898)》 《어두운 구석(1899)》 《태풍(1901)》 《비밀의 공유자(1909)》 등 외에 산문시적인 회상시 《바다의 거울(1906)》이 있다. /yahoo 1854 - 유레카 방책 봉기 [Eureka Stockade] [오늘의 경제소사/12월3일] <1258> 유레카 방책 봉기 유레카 타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주거용 건축물(높이 297.3m)이다. 위치는 호주 멜버른. 해마다 이맘 때면 초고층빌딩 주변에서는 축제가 행해지고 화려한 불꽃놀이가 밤을 수놓는다. 호주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라는 1854년 유레카 방책 봉기(Eureka Stockade)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8/12/02 18:30:31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812/e2008120218303097490.htm
핀레이(핀라이) [Finlay, Carlos J(uan), 1833.12.3~1915.8.20] 쿠바의 의사·역학자. 그는 황열병의 매개체가 모기라는 것을 발견하고, 1886년 이 발견의 실험적 증거를 출판했지만 거의 20년 동안 무시되었다. 필라델피아의 제퍼슨의과대학을 졸업(1855)하고 쿠바로 돌아가 아바나와 마탄사스에서 개업했다. 핀라이는 1879년 황열병을 연구하는 북미위원회의 위원으로 쿠바 정부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2년 후에는 워싱턴 D. C. 에서 열린 제5차 국제위생회의에 쿠바 대표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황열병 매개동물을 연구하도록 촉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매개체가 지금은 열대숲모기(Aëdes aegypti)라고 알려진 쿨렉스모기(Culex fasciatus)라고 밝혔다. 1900년 월터 리드가 회장으로 있던 미군 황열병위원회가 쿠바에 도착했을 때, 핀라이는 리드에게 자신의 모기 매개체 이론을 설득시키려고 노력했다. 회의적이던 리드는 이 이론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여 핀라이의 실험과정을 재규명할 수 있었다. 리드는 황열병이 모기에 의해 전파된다는 증거를 얻었으며 윌리엄 고거스는 쿠바와 파나마에서 황열병을 퇴치했다. 그후 핀라이는 쿠바의 수석 위생관리로 임명되었으며(1902~09), 그가 사망한 후에 쿠바 정부는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핀라이 열대의학연구소를 설립했다. /브리태니커
1828 -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미국 7대 대통령에 당선 [오늘의 경제소사/12월3일] 앤드루 잭슨 1828년 12월3일.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이 미국 7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10&oid=011&aid=0000060948
콩시앙스 [Conscience, Hendrik, 1812.12.3~1883.9.10] 벨기에의 낭만주의 소설가. 플랑드르 소설의 탄생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그의 국민들을 읽을 수 있게 가르쳤다'는 평을 받았다. 아버지는 프랑스인이었고 어머니는 플랑드르인이었다. 어머니가 죽은(1820) 후, 그와 그의 아버지는 도시의 성곽 밖으로 이주해 살았다. 이때 어린 소년은 자연을 알게 되었고, 자연은 그에게 변함없는 위안을 주었으며 훌륭한 작품 〈자연의 책에서 따온 몇 페이지 Enige bladzijden uit het boek der natuur〉(1846)를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 조교로 몇 년을 보낸 후 1831년 육군에 입대했다. 그는 곧 상록수와 관목들이 우거진 조용한 지역인 캠파인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즈음 그는 프랑스 낭만주의를 알게 되었으며 프랑스어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그당시 플랑드르어는 문학 도구로 사용되기에는 너무 속되다고 여겨졌음). 1836년 부대가 해산되자 그는 안트웨르펜에서 문학 및 예술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조국의 과거에 매료되어 플랑드르어로 〈기적의 해에 In't wonderjaar〉(1837)라는 16세기를 배경으로 한 일련의 역사물을 썼다. 프랑스에 대항하는 플랑드르 자치구에서의 반란과 골든스퍼스 전투에서 플랑드르 민병대의 승리를 그린 서사시 〈플랑드르의 사자 De leeuw van Vlaanderen〉(1853~57)를 발표해 플랑드르어 소설의 창시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유럽 낭만주의의 뛰어난 역사소설가가 되었다. 그는 사무원, 정원사 조수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고 지역 정치에서 적극적인 활동도 했다. 1840년이후에는 점점 더 목가적 사실주의에 빠져들었으며 도시와 시골 생활에 대한 장편·단편 소설을 썼다. 이러한 작품들은 일부 비평가들에 의해 너무 감상적이라는 공격을 받아왔지만 교훈을 주려고 노력한 작품들이었다. 이러한 류에 속하는 작품들로는 〈어머니를 아프게 하는 것 Wat een moeder lijden kan〉(1844)·〈목석 같은 클라라 Houten Clara〉(1850)·〈불쌍한 신사 De arme edelman〉(1851) 이외에도 시골의 전원을 그린 〈블린데 로사 Blinde Rosa〉(1850)·〈징집병 De Loteling〉(1850)·〈리케티케타크 Rikke-tikke-tak〉(1845 연재물로 발표됨, 1851 출판) 등이 있다. 이와 동시에 그의 역사소설(예를 들면 〈야코브 반 아르테벨데 Jacob van Artevelde〉, 1849)들은 점점 확고한 형태를 다져갔다. 그의 천재성은 절정기에 달했고 그의 작품들은 번역되어 널리 알려졌다. 1856년 그는 코르트리크의 지방행정관이 되었고, 1868년 브뤼셀에 있는 비르츠 박물관 관장이 되었다. 그러나 씀씀이가 헤픈데다 사치스러운 집안 살림의 부담 때문에 때로는 자신의 문체를 손상시키면서까지 많은 작품을 썼다. 이런 말년의 많은 작품들 가운데에는 플랑드르 최초의 모험소설 〈황금의 땅 Het Goudland〉(1862)과 역사소설 〈De Kerels van Vlaanderen〉(1871)이 있다. 1881년 그의 100번째 저서 출판은 브뤼셀에서 전례 없는 반향을 일으켰으며 1883년에는 안트웨르펜에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졌다. 그는 19세기 문예부흥 및 민족어인 플랑드르어의 부흥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기술, 상상력, 사람이나 사건의 실감나는 묘사 및 풍부한 감수성은 그의 언어의 비순수성과 제한된 표현수단 등을 보상했다. /브리태니커
프레셰렌 [Preseren, France, 1800.12.3~1849.2.8] 슬로베니아의 시인. 슬로베니아 낭만주의 시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빈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유럽 사상의 주류와 유럽식 문학적 표현에 친숙해졌으며 그를 통해 슬로베니아 문학이 활기를 되찾았다. 나중에는 류블랴나와 크라니에서 공무원·변호사로서 직책을 맡았다. 역경과 실망으로 점철된 삶을 산 그는 1835년 절친했던 친구 마티야 초프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불행한 연애로 자살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는 비록 많은 작품을 쓰지는 않았지만, 정치적·사회적 상황으로 발전할 수 없었던 슬로베니아 문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가 즐겨 다룬 시의 주제와 작시법은 슬로베니아 작가들에게 새로운 규범을 제시했으며, 특히 서정시는 슬로베니아 문학에서 가장 섬세하고 독창적이며 감동적인 작품에 속한다. 후기 서정시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불행했던 사랑에서 영감을 얻어 쓴 〈소네트의 화환 Sonetni venec〉(1834)은 동포들에게 고취시키고자 했던 민족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당시 슬로베니아 문단을 다룬 일련의 풍자시(1845)를 쓰기도 했다. 서사시 〈사비차의 세례 Krst pri Savici〉(1836)는 이교신앙과 일찍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슬로베니아인들과의 갈등을 다룬 것으로, 작가의 애국심·염세주의·체념 등이 드러나 있다. /브리태니커
힐 [Hill, Rowland, 1795.12.3~1879.8.27] 영국의 행정가·교육가이며, 1페니 우편제도의 창시자. 현대 우편제도를 창안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힐이 개발한 우편제도는 이후 세계 전역에서 채택되었다. 아버지가 중학교 교장이었던 힐은 교육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5년간 학교를 운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엄격한 자기수양, 철저한 학습 등을 강조했다. 그는 인쇄·천문학·수학·수송문제 등 실로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35~37년에 작성된 우편제도에 관해 힐이 내놓은 개혁안은 "국가의 조세수익은 인구의 증가와 국가의 경제적 번영과 더불어 반드시 증가하게 된다"는 원칙에 근거한 것이었다. 힐은 우편물에 대한 높은 과세는 결과적으로 전체 우편물의 양을 감소시켜 국가의 조세수익을 감소시키므로 우편에 대해 낮게 과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배달 거리에 따라 지나치게 다양한 비율의 요금을 부과하는 것은 우편요금 계산에 지나친 인적·물적 경비를 낭비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더 많은 경비를 지출하게 되므로, 배달 거리에 관계없이 동일한 비율의 우편요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모든 우편물의 우편요금을 선불하는 방식을 채택할 것을 덧붙였는데, 이 마지막 제안사항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그는 후에 '우표'라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힐은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40년 자신의 계획안을 실행시키는 데 성공했다. 힐은 1860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 Gilbert Stuart - 'James Monroe'
- 'Lord Sydney' - 'George Washington'
- 'Matilde Stoughton de Jaudenes' - 'Josef de Jaudenes y Nebot' 스튜어트 [Stuart, Gilbert Charles, 1755.12.3~1828.7.9] 미국의 초상화가. 독특한 미국적 초상화 양식을 창시했다. 스튜어트는 로드아일랜드 주의 뉴포트에서 자라면서 회화의 기초를 익혔다. 1771년경에 뉴포트를 방문한 스코틀랜드의 화가 코스모 앨릭잰더와 함께 에든버러로 갔다가 1년 후에 로드아일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1775년에 런던으로 가서 미국인 화가 벤저민 웨스트의 화실에서 약 6년 동안 함께 작업했다. 그러나 그의 원숙한 화풍은 웨스트보다 토머스 게인즈버러와 조슈아 레이놀즈 경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다. 1782년에 런던에 자신의 독자적인 화실을 열고 5년에 걸쳐 커다란 성공을 이루었으나 1787년에 빚쟁이들을 피해 더블린으로 달아났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6년을 보낸 뒤 미국으로 돌아가 곧 으뜸가는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잠시 뉴욕에서 살다가 필라델피아로 옮겨가 그곳에서 약 12년 동안 살았으며, 1805년에 마침내 보스턴에 정착했다. 스튜어트의 작품은 당대인들의 찬양을 받았으며, 후세의 비평가들도 그의 작품을 인정하고 특히 그 회화적 필치와 명료한 색채, 심리적 통찰력을 높이 평가했다. 거의 1,000점에 달하는 그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보스턴 아테나움에 있는 미완성의 조지 워싱턴 두상(1796)이다. 그밖의 걸작으로는 워싱턴의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리처드 예이츠 부인의 초상화와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 미술관 소장의 피어즈 머턴 부인 초상화, 그리고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존 애덤스 초상화 등이 있다. 스튜어트는 공식적으로 제자를 두지는 않았지만 존 밴덜린과 토머스 설리, 존 니글을 비롯한 많은 젊은 미술가들이 그의 조언을 받았다. 그의 딸 제인을 비롯한 여러 미술가들은 그의 화풍을 하나의 공식으로 삼았으며, 이로 인하여 뒤이은 세대의 미국 초상화 양식에서는 스튜어트풍이 지배적이었다. /브리태니커
솔레르 [Soler, Antonio, 1729.12.3~1783.12.20] 스페인의 작곡가. 18세기말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기악음악과 교회음악을 작곡했다. 솔레르는 몬세르라트 합창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약관의 나이에 레리다 성당 성가대 지휘자가 되었다. 1752년 성예레미아 교단에 들어갔으며, 에스코리알 수도원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당대에 가장 주목받았던 건반악기 연주자의 한 사람으로서 왕실 가족들에게 오르간과 하프시코드를 가르쳤다. 아울러 그 자신도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에게 배우기도 했으며, 스카를라티의 영향은 그의 많은 하프시코드 소나타와 몇몇 오르간 작품에서의 활기찬 건반의 기교와 형식, 빈번하게 나타나는 예기치 못한 화성 진행을 통해 나타난다. 그는 많은 교회음악을 작곡했으며, 그중에서도 복잡한 카논을 즐겨 썼다. 그밖에 칼데론과 다른 이들의 연극을 위한 부수음악도 썼으며, 오르간과 현을 위한 6곡의 5중주, 2대의 오르간을 위한 6곡의 협주곡 등을 썼다. 또 음악 이론서도 남겼는데, 〈Llave de la Modulación〉(1762)은 당대인들이 자주 거론했던 책이다. 또한 미분음에 대한 실험을 위하여 아피나도르(afinador)라는 건반악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홀베르 [Holberg, Ludvig, 1684.12.3~1754.1.28] Friherre (Baron) Holberg라고도 함. 계몽주의 시대의 뛰어난 스칸디나비아의 문학가. 노르웨이와 덴마크가 서로 자국 문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베르겐에 있는 친척집에서 살았고, 1702년 대화재로 시가 파괴되었을 때 코펜하겐대학교로 보내졌다. 세상을 보고 싶은 열망으로 학위를 딴 후 네덜란드로 떠났으나(1704), 아헨에서 병이 났고 노르웨이로 돌아갔다.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일한 다음 1706년에 다시 런던으로 떠났고 옥스퍼드에서 2년 동안 공부했는데 이때 플루트와 바이올린 교습으로 학비를 벌었다. 그 시기에 〈지도적인 유럽 국가들의 역사 입문 Introduction til de fornemste Europœiske rigers historie〉을 썼으리라 추측되지만, 이 저술은 그가 덴마크에 돌아온 1711년에 출판되었다. 이 글로 공부와 여행을 할 수 있는 왕실의 하사금을 받게 되었다. 1714년 주로 걸어서 유럽의 큰 도시들을 여행했고, 1716년 덴마크로 돌아와서는 자연법과 자연권에 관한 저작 〈Introduction til naturensog folke-retten〉을 출판했다. 재정적인 어려움은 1717년 코펜하겐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을 때 마침내 해결되었고 1720년에는 범대학수사학회 회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문학적인 감정이 복받쳐' 한스 미켈센이라는 필명으로 전혀 새로운 계통의 해학문학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덴마크어로 씌어진 최초의 고전인 진지한 희극 서사시 〈페데르 포르스 Peder Paars〉는 1719년에 출판되었다. 1722년에는 덴마크어로 공연하는 최초의 극장이 코펜하겐에서 문을 열게 되었는데 홀베르는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끊임없이 희극들을 써내 '북유럽의 몰리에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 작품들은 매우 신선하여 아직까지도 다수가 공연되고 있다. 가장 알려진 작품으로는 〈정치사상가 Den politiske kandestøber〉·〈언덕의 예페 Jeppe påbjerget〉·〈이타카의 율리시스 Ulysses von Ithacia〉·〈에라스무스 몬타누스 Erasmus Montanus〉 등이 있다. 등장인물은 흔한 유형으로, 플라우투스의 밀레스 글로리오수스(허풍선이 병사)라든가 몰리에르의 오쟁이 진 남편 스가나렐에 바탕을 둔 인물들이지만 풍모가 덴마크식이며, 당대를 풍자 대상으로 하면서도 보편성을 띠고 있다. 그가 즐겨 풍자의 목표로 삼는 것은 식자(識者)들의 허세·은어·현학성이었다. 1727년 자금이 부족하여 극장이 마지막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이를 위해 〈덴마크 희극의 장례식 Funeral of Danish Comedy〉을 썼다. 1731년 공연된 희곡들에 희곡 5편을 더해 출판하는 것으로 극작가로서의 경력을 마감했다. 이후 방향을 바꾸어 다른 형식의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상상의 여행을 그린 〈니콜라이 클리미의 지하여행 Nicolai Klimii Iter Subterraneum〉(1741)이 유명하다. 1747년 홀베르 남작작위를 받았다. 볼테르를 예외로 한다면 홀베르는 당대 최초의 범유럽적인 작가였다. /브리태니커
1552 -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자 하비에르(Xavier, Saint Francis) 사망 하비에르(사비에르) [Xavier, Saint Francis, 1506.4.7~1552.12.3(12.2)] 성 프란시스 하비에르(Saint Francis Xavier; 스페인어: San Francisco Xavier) (1506년 4월 7일 ~ 1552년11월 2일)는 인디아와 일본에서 전도한 예수회 선교사이다. 활동 성 프란시스 하비에르는 1506년 나바라 왕국(현재 에스파냐 바스크)에서 고위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나바라 왕국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와 에스파냐간의 전쟁(1512년-1524년)에서 에스파냐가 승리하면서, 그의 집안은 몰락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하급 귀족이 되었고,형들도 몰락한 왕국의 군인출신이 되어, 어려운 생활을 했다. 하비에르는 9세때 미켈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프란체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미켈 신부로부터 헬라어,라틴어문학과 문법을 배운 하비에르 소년은 이들 언어로 된 기독교 문헌을 읽을 수 있었고, 그 결과 신앙이 깊은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파리대학교와 성 바르브대학교(1530년 입학)학생시절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알게 된 그는 예수회 창립일원이 되었다. 성직자로서의 교양을 갖추게 된 하비에르는 사제서품을 받아 '하느님(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었다.하비에르 신부는 1542년 5월 6일 인디아 고아 주에 도착하여 기독교 교리해설서와 성가를 현지말로 번역하는 등 활발한 전도활동을 했으며, 교회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 고아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포르투갈사람인 알파레스 선장을 통해 사츠마 번 태생의 일본인 부시(武士)야지로를 알게 된 하비에르는 야지로(바오로 디 산타후에), 야지로의 동생(요한네스), 야지로의 부하(안토니오)에게 기독교 교리를 가르쳐, 1548년 3월 성령강림주일에 세례를 받게 하였다.야지로가 포르투갈말을 잘하게 되자, 하비에르는 1549년 8월 15일 야지로를 포함한 7명의 일행(로마 가톨릭 사제, 수도사,중국인 봉사자 등)들과 일본 최남단 가고시마 현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1549년 9월 29일 하비에르 일행은 다이묘 시마츠의 초대로 그의 성에 갔는데, 다이묘는 전도를 허용하는 것은 물론 종교의 자유도 인정하였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하비에르 신부는 《예수의 길》이라는 기독교 책을 일본어로 발간했다. 당시 하비에르의 기록을 보면 그가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당시 일본문화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일본 사람들은 대단히 예의가 바른 사람들인데, 잘 사는 것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무기를 무척 중요하게 여겨서 남자는 14세가 되면 항상 칼을 옆에 차고 다닙니다. 사무라이는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무기를 항상 갖고 다니며, 다이묘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비에르 신부는 《공교요리》(公敎要理)라는 기독교 교리해설서를 쓰기도 했는데,이를 읽고 감명받은 베르나르도라는 무사가 하비에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하비에르 신부는 베르나르도를 일본 교회의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예수회에 가입시켰으며, 로마에 보내 신학공부도 하게 했다. 얼마후에는 미켈이라는 농부를 포함한 15명이 신자가 되었으며, 1년간의 전도로 1백명에서 1백 50명이 신자가 되었다. 하지만 불교 신자들의 반발로 시마츠 다이묘가 기독교에 대해 차가운 모습을 보이자, 야지로에게 교인들을 맡기고 교토로 가기로 했다. 1551년 하비에르 신부는 히라도와 야마구치 현을 거쳐 교토에 갔지만,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다시 야마구치에 되돌아갔다. 오우치 다이묘는 기독교가 서양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으로 판단, 대도사라는 빈 절을 교회로 내줄 정도로 하비에르의 전도활동을 도와주었다. 야마구치에서 5개월간 전도한 하비에르는 중국에서의 전도를 위해 1551년 중국에 갔지만 입국하지 못하고, 이듬해 11월 27일에 광둥성 앞의 섬에서 열병으로 별세하였다. 하비에르 기념교회 하비에르가 전도활동을 한 가고시마와 야마구치에는 하비에르 기념교회가 있다. 야마구치의 하비에르 기념교회는 1952년 전 세계 로마 가톨릭교도들의 건축헌금으로 세워진 교회로써,로마네스크 양식이다. 가고시마의 하비에르 상륙 기념교회는 1908년 세워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어 1949년 당시 교황 비오 12세의 기부금으로 재건되었다.건축양식은 고딕양식이다.1622년 3월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모든 선교사의 수호성인이다. 성 바오로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을 기독교에 입교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위키백과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