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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돌아보면 작년 한 해는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크리스마스였다.
기쁜 성탄을 맞이하기 위해 예수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나름대로 준비를 하며
몸살 기운이 역력한 가운데 본당 김장행사와 대청소에 동참하며 아기 예수님 오시길 기다렸다.
주말부부라 본당을 떠나 남편이 있는 안성에 와서 새벽미사를 보게 되었는데
성탄이브를 앞둔 일요일이었다.
150년이나 된 성당은 기념관으로 초창기 작은 경당이 있고 새롭게 신축한 성전은
대도시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40대 초반의 사제는 미사가 시작되기 전 우렁찬 목소리로 10계명을 복창하도록 하며
미사집전중에는 기침과 콧바람 부는 교우들을 향해 윽박지르듯 야단을 쳤다.
“주눅 들어 어디 제대로 미사를 봉헌할 수나 있나. 다시는 이 성당에 오나보자”
감기 기운이 있었던 그는 애써 참아온 심사가 뒤틀렸는지 집으로 오는 내내 분통을 터트렸다.
“150년이나 된 성당에 그 사제가 있는 것은 주님께서 그 분을 필요로 해서 앉혀 놓았을 것이며
나중에 더 반죽해서 크게 쓰고자하는 의도가 있으심이니 우리 평신도가 이러쿵저러쿵
입초시에 오르내리게 하는 건 독성죄에 해당할 뿐이예요.”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했던 그는 하루 종일 짜증을 부렸다.
그러다 보니 사사로운 가정사 문제까지 불거져 옥신각신 다퉜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지만 속상한 마음은 엎치락 뒤치락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얼마 전 교우에게 선물받은
오래된 인삼주를 입에 댔다.
먹지도 못하는 술을 홀짝거리다 보니 순식간에 취기가 올라왔다.
그동안 참아왔던 불만들이 한꺼번에 솟구치면서 그에게 갖은 포악을 부렸던
난 완전 마귀 들린 모습이었을 것이다.
새벽녁에 간신히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난 나는 그를 볼 면목이 없었다.
회개기도를 했지만 내 마음은 지옥이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나를 외면하며 식당에서 주문한 매생이국을 보내주었다.
나는 사과를 하고 준비해 왔던 카드와 조그만 선물을 건네며 베티성지에 가서
성탄 미사를 드리자고 권유했다.
판공성사를 받지 않은 그와 함께 나 역시 고백성사를 받기 위함이었다.
안성에서 30분정도 소요되는 베티성지는 충북 진천에 위치해 있었다.
시간 여유가 있어 밥을 먹을 생각으로 식당을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 거의
한 시간을 찾아 헤맨 것 같았다.
약속했던 성사시간이 다가오자 식사를 포기하고 성전으로 들어섰다.
박해시대 교우들이 모여서 살았던 교우촌 이었으며 최양업신부님이 사목하시고
최초의 신학교가 세워졌던 곳인데
선종 150주년을 기념해서 지은 성당에는 다블뤼주교님과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어머니 이성례 마리아 순교자와
최양업신부님이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져 있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사제는 목숨을 바친, 순교하지 않은 이유로 아직까지
교황청 승인 불가로 시복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구유예물을 식사 값을 다 봉헌하고 2년 전에 감곡성당에서 옮겨오신
김웅렬 신부님의 성찬전례가 시작 되었다.
‘이 미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그들은 자기의 죄를 모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하느님께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
이미 연옥과 지옥을 이 지상에서 미리 맛보고 살고 있으며 우리가 발길을 이곳을 향하여
스스로 왔지만 우리 모두는 그분의 초대로 왔다는 것이라는, 사제의 강론처럼, 그랬었다.
그동안 고백성사를 의례적으로 해왔지만 이토록 세탁기에 옷을 새롭게 빨아 입은 것처럼 개운할 수가....
주님께서 비천한 나를 선택하여 주심에 감사드리며
내가 가톨릭 신자여서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은총의 이브 밤이였다.
교우들에게 이벤트로 보좌 신부님이 키타를 치며 캐롤송을 불렀고 주임신부님께서는
산타복장에 코트안속에 일일이 바느질 실로 꿰맨 꽃을 자매들에게 주었고
꽃마차에 예쁘게 포장한 사탕 봉지 선물을 한아름씩 안겨 주셨다.
미사가 끝나고 영성관에서 준비한 떡국으로 민생고까지 해결하고
밖을 나오니 함박눈이 소담하게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2012년이 넘어가는 년말이었다. 당진으로 귀향한 교우의 집에서 아홉명이 모이기로 했다.
시간 맟추어 도착해야 하니까 서두르라는 그의 말을 못들은 척했다.
전날 밤 그와 다툰 나머지 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70이 넘은 노부부가 사람 맞을 생각으로 요리를 분주하게 만들것 같아서
나이가 제일 어린 내가 몇가지 해갖고 가기로 했다.
그는 그쪽에서 떡국을 준비한다는데 공연히 내가 뭐해갖고 간다는 전화를 해서 부담을 준거라며 시비를 걸었다.
마음이 풀리지 않은 나는 우리의 문제를 소재로 이야기를 올려 보자고 말하며 길을 나섰다.
여자가 넷, 남자 형제들이 다섯명이 모여서 한해의 다사다난한 얘기가 오가며
우리의 전날 밤에 튀격태격한 요지를 꺼냈다.
남편이 하는 일은 환경산업인데 3D 직종이라서 외국인 근로자들을 데리고 일한다.
나는 서울을 오가며 고생하는 그들에게 가끔씩 간식도 해주기를 즐겨 하고 있다.
작년 한해 투병 생활을 했던 내 체력을 생각한 그는 이런 나를 때론 달가워 하지 않는다.
이해를 하지 못하는 그에게 나는 이것도 주님께 하는 기도의 봉헌이라고 말하며 우긴다.
결혼을 하기 전 예비 신자 때 독신으로 살면서 능력을 키워 하느님께 영광 드리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어느 날 못시 지쳤던 나는 종교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불교 집안에서 자란 나는 뭔가 제시 받기 위해서 수덕사를 갔다.
참선하는 모습이랑 보며 참 잘 왔다고 생각하는 찰라에 어느 젊은 여스님이 뛰어 오다시피
문지방을 들어섰다.
관광객이 이렇게 많은 돈을 경내를 구경시켜 드렸더니 주었다며 2~3만원됨직한
1000원짜리 돈을 침을 발라가며 세었다.
물론 산사의 스님도 속옷이 필요하다보면 돈이 필요하겠지만 뭔가 찾기 위해서 갔던 나로서는
그 모습은 저의기 실망스러웠다.
그 때 나는 생각했다.
모든 종교의 진리는 긍극점 지점에서 똑 같겠지만 굳이 돌고 돌아서 갈필요가 무에 있겠는가
결혼을 하여 평신도로서 모범된 내 삶을 살면 딱히 전도하지 않아도 비신자에게 역시 믿는 이는
다르구나라는 메시지를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싶어 결혼을 했지만
신앙의 뿌리도 깊이 내리기전에 16년동안 냉담을 해 버렸다.
그래서 결국 평신도 삶을 못 살았는데 이제 비로서 뜻한대로 살고 있으니
감사하다는 소회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각자의 스토리를 한마디씩 오고 가게 되었다.
그런데 처음 볼 때부터 눈길을 끄는 연세가 지긋한 자매가 마지막 말을 마무리 할 때였다.
계단을 부축해서 올라오는 뒤따르는 자매가 대녀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니나 다름이 없었다.
처음 인사를 나누기 전에 남편이 존경 한다는 수필가인 노부부가 그들 자매를 가리키며
살아있는 모범된 전설이라며 극구 칭찬을 했다.
그때만해도 그냥 건성으로 들었는데 문제는 훨씬 시간이 지나고서였다.
초등학교 교감으로 퇴직한 김선생은 환경운동에서부터 그밖에 봉사를 몸소 실천하며
살아 오셨다는 것을 옆에 앉아있는 대녀가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였다.
대학교수였던 남편은 종교에대한 거부감이 심했는데 김선생이 믿는 종교라면 괜찮을 것 같다 허락하여
2006년 교리를 받어서 베아트리체라는 영세명을 갖게 되었다.
친정엄마는 김선생을 따라가려면 가랑이 찢어지니 발바닥만 흉내를 내라고했다.
그렇게 시늉이라도 하다보니 초등학교에서 1~2학년을 담임했는데
그 반에 아이들은 로또 당첨 된 거라며 학부형들 사이에 시샘이 오고갔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우리들은 최소한도 신앙인이 대자에게 대녀에게 롤 모델이 되어
정신적인 유산을 물려 줄 수 있다면 하느님께 영광이요.
이 사회의 귀감이 되지 않겠느냐는 말로 입을 모았다.
노부부는 이제 주님이 데려가도 여한이 없으며 감사한 삶이였다고 고백을 했다.
그러면서 이 자리는 주님이 현존하시며 베아트리체 자매의 입술을 열어 역사하시는 거라며
어떻게 저렇게 글로 쓴 것처럼 말을 잘할 수 있는지 감동을 거듭했다.
나는 한해를 마무리 하는 시간에 영적으로 도전받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첫댓글 겸손의 덕을 지닌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뒤따르는데, 그는 아무리 짓눌려도 다시 일어설 힘이 생깁니다.
힘찬 한주간 되세요^^
아멘..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미사 끝나고 돌아오는 길 읽고 답글 달려니 급한 성격에.... 에이..... 이따 집에서 컴으로 다시 달아야지.....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올려져있네요. 삶의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울고 웃고 성장하고 아파하고 기뻐하고..돌아보고..그래서 귀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계 속에서 우리의 정체감이 형성되기에..귀하게 돌보아야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해요
교감으로 퇴직한 교우는 연세가 78살 인데 어찌나 열정이 많은지 몰라요.
복지관에서 일어를 퇴직한 선생들에게 가르치고 있고 본당에서도
존경받는 신앙의 어른으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요.
이런 만남의 축복이 참 감사 한거죠.
잠시전에 전화가 왔는데 시조 한수를 가슴에 품고 살라고 일러 주시네요.
남이 해할지라도 나는 아니 겨루리라./
참으면 덕이요/ 겨루면 같으리라.
남이 해할지라도 나는 아니 겨루리라./
굽으미 제게 있거니 겨룰줄이 있으랴./
말로하기보다 글로 써서 이야기하기가 더 힘든데, 그래도 쉽게 풀어 써 주셔서 나름 쉽게 다가옵니다. 배티 성지에서의 미사는 12월이니까 아마 성당에서 보셨겠지요. 스테인 글라스가 너무 멋지지 않으셨나요? 겨율이 아니라면 산상 미사를 경험하셨을 텐데.. 많은 은혜를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언제나 느끼지만 정말 성지에서의 미사는 은혜로워요. 산상미사는 겨울이라서 경험하지 못했지만 봄이되면 순례도 할수 있다니까 우리 독서모임 토요일 갔다가 1박하고 와도 좋을 듯 싶더군요.
네스님 댁으로 가면 모든 이야기들이 감동이 되는군요. 형제님과 이웃이 연말을 잘 보내셨네요.
툴툴거려도 잘 받아주는 형제님도 아름답습니다. 나는 언제 쯤 그래보나 하고...늘 부럽습니다.
눈물없는 개혁이란 없다잖아요. 이렇게 울 옆지기도 내주기까지....ㅎㅎ 충격요법도 써보고 주님께 투정부리고, 기도, 등,등 안해본게 없다니까요.
결국은 서로 이렇게 떨어뜨려놓고보니 하나 하나 교통 정리 되더군요. 모든게 다 주님의 오묘한 섭리고 은총이죠 뭐.
참으로 오랫만에 이곳에 오니 반가운 닉들이 보이네요...
나름, 힘겨웠던 모든시간들이
결코 우연이 아닌 "주님의 시간계획안에서의
은총의 섭리였음을 고백하라"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떠올려보게되는 날입니다.
먼길을 버겁게 돌아서 다시 삼,사년여만에 이곳에 왔네요
꿈꾸는네스님,물푸레님,수선화님,빈센트님,황아나타시오님!
정말 반갑습니다!!!
그리고 네스님의 정겹던 목소리도 감사했구요
작은 일상들이 풍요로운 삶이된다는 소중한 양식과같은
귀한말씀을 다시 나누고싶어져서 돌아오게되었어요
반겨주실꺼지요.....
어~머 너무 너무 반가워요. 그럼요 우연이란 없다잖아요 모는게 주님의 섭리에서 움직이고 있다는것을요! 우리 번개라도 해서 곧 만나요. 정말 반갑군요..
네스님 연말 잘보네셨네요 성지에서의 미사는 언제나 거룩하다는걸 늦겨요 네스님 아름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