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편에서 계속>
동방싸롱이 입주한 동방문화회관 건물은 1955년 완공된 것으로 당시로써는 최첨단 콘크리트 3층 건물로, 사업가 김동근이 희사한 것입니다. 1층은 간단한 술과 안주를 파는 싸롱, 2층은 집필실, 3층은 회의실로 다방이나 선술집을 전전하던 문인들에게 보금자리가 마련된 것이지요.
그런데 1957년 문인들에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던 김동근이 어린 아들과 밤섬에서 뱃놀이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면서 불행이 닥칩니다. 주인이 없어진 건물이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떠돌다 리모델링 공사를 하기 얼마 전까지 치킨집-호프-당구장이 입주한 건물인 채로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때 연극인 이해랑이 카페와 주점을 운영했다는 이 역사적인 건물 역시 이제 과거 모습을 찾을 길이 없게 됐으니 우리 역사는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박인환과 명동의 추억을 되새길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포엠이란 위스키시음장입니다. 박인환은 이봉구와 함께 ‘명동백작’으로 불렸는데 굉장한 멋쟁이였다지요. 얼굴 자체도 미남형인데다 초콜릿색 싱글 양복에 홍시빛 단색 넥타이를 매고 커피색 양말에 초콜릿색 구두, 검정 박쥐우산을 들었습니다. 그런 그가 포엠에서 즐긴 위스키는 계절마다 달랐다고 합니다.
봄에는 진피즈, 가을에는 하이볼, 겨울에는 조니워커를 마신 것입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이봉구는 ‘명동’이라는 글에서 “펜과 종이, 술병이 명동 행차의 필수품이었으며 명동이 있고, 문학이 있고 술이 있었기에 우리는 행복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곳은 은성이라는 막걸릿집입니다. 탤런트 최불암씨의 어머니 이명숙 여사(1986년 작고)가 운영하던 은성은 명동 파출소 맞은 편으로 지금은 신발판매장으로 바뀌었는데 앞에 작은 돌비석이 있습니다. 이명숙 여사가 은성을 차리게 된 데는 일찍이 청상(靑霜)이 된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최불암의 아버지가 인천에서 영화제작자로 활동하다 과로로 숨지자 외동아들과 생계를 잇기 위해 막걸릿집을 연 것입니다. 은성에는 당대의 인물들이 모여들었는데 박인환-김수영-변영로-전혜린-오상순-천상병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최씨의 회고로는 천상병씨는 항상 입구 쪽에서 서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 자리에 앉을 엄두를 못 낸 것인데 누군가 “이리와 한잔하라”고 부르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냉큼 달려가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명숙씨는 박인환 일행이 외상 갚을 생각도 없이 술을 요구하자 외상을 갚으라 합니다. 그러자 박인환이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펜을 들었지요.
동방싸롱이 입주한 동방문화회관 건물은 1955년 완공된 것으로 당시로써는 최첨단 콘크리트 3층 건물로, 사업가 김동근이 희사한 것입니다. 1층은 간단한 술과 안주를 파는 싸롱, 2층은 집필실, 3층은 회의실로 다방이나 선술집을 전전하던 문인들에게 보금자리가 마련된 것이지요.
그런데 1957년 문인들에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던 김동근이 어린 아들과 밤섬에서 뱃놀이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면서 불행이 닥칩니다. 주인이 없어진 건물이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떠돌다 리모델링 공사를 하기 얼마 전까지 치킨집-호프-당구장이 입주한 건물인 채로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때 연극인 이해랑이 카페와 주점을 운영했다는 이 역사적인 건물 역시 이제 과거 모습을 찾을 길이 없게 됐으니 우리 역사는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박인환과 명동의 추억을 되새길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포엠이란 위스키시음장입니다. 박인환은 이봉구와 함께 ‘명동백작’으로 불렸는데 굉장한 멋쟁이였다지요. 얼굴 자체도 미남형인데다 초콜릿색 싱글 양복에 홍시빛 단색 넥타이를 매고 커피색 양말에 초콜릿색 구두, 검정 박쥐우산을 들었습니다. 그런 그가 포엠에서 즐긴 위스키는 계절마다 달랐다고 합니다.
봄에는 진피즈, 가을에는 하이볼, 겨울에는 조니워커를 마신 것입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이봉구는 ‘명동’이라는 글에서 “펜과 종이, 술병이 명동 행차의 필수품이었으며 명동이 있고, 문학이 있고 술이 있었기에 우리는 행복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곳은 은성이라는 막걸릿집입니다. 탤런트 최불암씨의 어머니 이명숙 여사(1986년 작고)가 운영하던 은성은 명동 파출소 맞은 편으로 지금은 신발판매장으로 바뀌었는데 앞에 작은 돌비석이 있습니다. 이명숙 여사가 은성을 차리게 된 데는 일찍이 청상(靑霜)이 된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최불암의 아버지가 인천에서 영화제작자로 활동하다 과로로 숨지자 외동아들과 생계를 잇기 위해 막걸릿집을 연 것입니다. 은성에는 당대의 인물들이 모여들었는데 박인환-김수영-변영로-전혜린-오상순-천상병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최씨의 회고로는 천상병씨는 항상 입구 쪽에서 서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 자리에 앉을 엄두를 못 낸 것인데 누군가 “이리와 한잔하라”고 부르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냉큼 달려가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명숙씨는 박인환 일행이 외상 갚을 생각도 없이 술을 요구하자 외상을 갚으라 합니다. 그러자 박인환이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펜을 들었지요.
- 명동 한복판에 있는 옛 은성주점 터. 작은 기념비가 서있다.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1970년대 낭랑한 목소리로 심금을 울린 통기타 가수 박인희의 노래로도 유명한 ‘세월이 가면’을 즉석에서 써내려간 것입니다. 시가 완성되자 박인환은 옆에 있던 작곡가 이진섭에게 넘겨 곡이 완성되자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가수 현인을 불러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야 맙니다. 서슬 푸르게 외상값을 요구했던 은성 주인이 펑펑 눈물을 쏟으며 밀린 외상값은 안 갚아도 좋으니 제발 그 노래만은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인환이 쓴 시는 은성 주인의 슬프게 끝난 과거 연애(戀愛)를 시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이 일화는 이봉구의 단편소설 ‘명동’에 나옵니다.
- 박인환 문학관에 재현된 막걸리집 은성.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곳이다.
“진사댁 지하를 은성처럼 꾸며 주막처럼 잔 막걸리를 팔 생각도 해봤는데 최불암씨가 전체를 쓰고 싶어했어요. 그러면 주방을 옮겨야 해서 고민 중입니다.”
- 배우 최불암이 자필로 쓴 은성의 단골손님 명단. 그는 어느 시인이 어느 자리에 주로 앉았었는지까지 표시했다.
첫댓글 유명한 일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