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1542
2월7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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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승려과 술꾼>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스님이 술집에 들어가면 그 술집이 절간이 되고, 술꾼이 절간에 들어가면 그 절간이 술집이 된다."
생각할수록 재미있고, 의미심장한 말인 듯 합니다.
우리가 매순간 내쉬는 "숨"과 연결시키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이해됩니다. 숨이라고 해서 다 같은 숨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아래 사는 한 맑은 영혼이 들이마시는 숨은 그 자체로 영혼의 양식이 되며, 내뱉는 숨결은 그 자체로 감미로운 기도가 됩니다.
이런 숨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은 생명의 숨을 쉬는 사람이며, 매 순간 성령을 들이마시는 사람이기에 고통 가운데서도 평화와 기쁨을 누립니다.
반대로 성령을 거슬러 살아가는 한 영혼이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은 그저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호흡일 따름입니다. 거기에 과도한 권력욕이나 극단적인 이기심이 더해지면 그 숨결은 그야말로 죽음의 숨결이 되고 맙니다.
참으로 숨을 쉬는 사람은 내면적으로 끊임없는 자기 버림, 자기 봉헌의 과정을 되풀이 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숨을 통해 우리 육체 안에서는 매 순간 생명의 축제가 벌어집니다.
이렇게 진정한 숨은 기도입니다. 진정한 숨은 하느님께 대한 지속적인 봉헌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숨에 대한 의식과 통제는 우리를 기도하는 사람,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므로 보다 자주 자신의 숨결을 의식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매순간의 호흡을 기도화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내쉬는 날숨은 나를 비우고 죽이는 숨입니다. 들이키는 숨은 하느님의 영과 생명을 수용하는 숨입니다. 이런 들숨과 날숨의 반복을 통해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나날이 성령 안에서 성장해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를 버리면 버릴수록 하느님의 숨, 성령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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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르코 7,14-23)
<왕직>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영국의 비운의 왕세자비 다이에나가 글을 쓴 것 중에 하나의 내용을 간추려봅니다. 그녀는 임종을 앞둔 환자들을 가끔 찾아보고 껴안아주곤 하였습니다. 한 번은 1991년 미국 전대통령의 부인 부시 여사와 함께 에이즈 환자 수용소를 방문하였습니다.
한 남자 환자 침대에 앉았는데 너무도 병들어 보이는 그 남자는 다이에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이에나의 마음이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다이에나, 뭘 망설이는 거야? 어서 이 사람을 껴안아.’
에이즈에 걸렸고 다른 병까지 걸린 그 사람을 껴안는 것은 누구나 꺼려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의 소리를 따랐습니다.그래서 그 남자를 꼭 껴안았습니다.
그는 왕세자비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이 다이에나의 웃을 흠뻑 적셨습니다. 그리고 다이에나의 마음도 그와 함께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침대 옆에는 한 젊은 에이즈 환자가 누워 있었고 그의 친구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환자는 왕세자비에게 눈시울을 적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번 크리스마스 무렵쯤에 죽게 될 거예요.”
그의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으면 좋겠어요.”
왕세자비는 이들에게 자신의 지금까지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나는 많은 병원에서 임종을 앞둔 수많은 환자들을 보아왔어요. 어떤 이들은 힘겨워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잘 받아들였고 그들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어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고, 친구 분도 이분의 임종을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예요.”
이 둘도 왕세자비의 손을 잡고 “정말 그럴까요?” 하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다이에나는 이 병원에 있는 것이 매우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그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내가 궁으로 돌아와 가든파티나 세계 정상급 회담이 열리는 디너파티에 참석하면 나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된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 어느 날보다 내가 말기 환자들의 병원을 방문하고 돌아온 날은, 나는 밤에 자려고 불을 끄면서 내 자신이 오늘 하루 최선을 다했음을 안다.’ [참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나는 최선을 다했다.]
저녁 때 방에 들어와서 하루 일을 뒤돌아보다보면 말과 행동을 실수하여 후회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어제도 어떤 분에게 약간은 예의 없게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하고는 마음이 평화롭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작은 일에도 마음의 평화가 깨질 수 있는 낮은 저의 영성수준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무언가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은 그것보다 내 자신을 낮은 수준에 두었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힐 수 있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더렵혀진다는 것은 영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속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흐르는 물의 아래를 더럽힌다고 윗물이 오염되지 않습니다.
항상 윗 수준이 아래 수준에게 영향을 미치고 오염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마음은 육체나 세상보다 윗 수준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외적인 것 때문에 내적인 평화가 깨진다면 스스로 외적인 것을 더 높여 놓아 자신의 마음까지 영향을 받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내 마음의 평화를 깨는 것들을 우리는 ‘우상’이라 부릅니다. 만약 돈 때문에 내 마음이 상하고 미움이 들어오고 평화가 깨졌다면 돈이 나의 마음보다 위에 수준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나를 안 좋게 볼 거라는 걱정 때문에 마음이 불안해졌다면 나의 마음은 세상의 명예보다 낮은 수준에 있는 것입니다.
다이에나는 왕세자비입니다. 그럼에도 궁궐보다는 죽어가는 이들 곁에 있을 때 마음이 편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어가는 이들에게만 자신이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에게만 왕세자비였던 것이고, 궁궐에 들어가면 그녀의 말대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살아주어야 하는’, 어찌 보면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주어야 하는 종의 처지가 되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의 기대가 나를 좌지우지할 때 나는 자유롭지도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가장 윗물인 ‘마음’이 자기 자신이나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서 안 좋은 것들이 나온다면 우상들의 종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나의 마음의 평화를 깨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악이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면, 반대로 온갖 좋은 것이 마음으로부터 나와서 나와 세상을 이롭게도 할 수 있는 것이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드높이 올려 하느님과 접하여 어떤 것도 그 평화를 깨지 않게 하고 우리 자신을 오염시키는 안 좋은 것들이 마음에까지 흘러들어오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때서야만 내가 이 세상의 종이 아닌 참다운 하느님의 자녀, 왕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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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14-23 :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예수님은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15절)고 하시며 금기 식품은 없다고 하신다.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란 음식을 말하는데, 어떠한 음식을 어떻게 먹든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그 사람을 죄로 더럽힌다는 것이다. 즉 자연의 음식물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결단이 사람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시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배 속으로 들어가서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라고 하셨다(마태 15,11.17 참조)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19절)고 밝히셨다. 율법에 얽매인 자들이 부정하다고 선언한 것들을 먹는다고 해서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입술이 앞뒤 가리지 않고 지껄이고 끼어들면서 우리가 더러워질 수 있다.
그런데 레위 11장에 보면 부정한 음식물의 종류가 나오고 있다. 그것은 유다인들의 전통에서 신앙처럼 지켜오는 먹지 말아야 할 음식 중에 대표적인 것이 돼지고기가 있다. 2마카 6장에서는 안티오쿠스 에페파네스는 유대교를 근절시키려고 유다인들로 하여금 돼지고기를 먹게 하였고, 그것을 안 먹는 유다인들은 왕명을 거스른 죄로 수백 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역사적인 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런 유다인들에게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그들에게는 깜짝 놀랄 말이었다. 즉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사람이 부정하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내왔고 죽어가면서도 지켜온 그들의 율법을 무시하는 듯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본뜻은 무엇이었는가? 물건, 음식이란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입장에서 볼 때 “부정한 것이다” “깨끗한 것이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데 믿음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이라는 창고 안에 무엇을 쌓아 놓고 있으며, 그 안에서 무엇을 내어놓으며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악한 생각들이란 마귀가 나에게 불어넣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의 나쁜 생각에 힘을 보태고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러한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며 이러한 생각이 일어날 때, 마귀가 그것을 정당화시키고 그렇게 행하도록 부추기는 거시다.
즉 어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느냐에 믿음의 근본 의미가 있는 것이며,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물건이나 음식이 아니라 사람 자신에서 나오는 생각과 행위라는 것이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기울이고 살아가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이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여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은총을 주님께 구하면서 기도하고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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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정 마음에 품어야 하는 것들>
예수님께서는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십니다(7,15).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7,20) 하십니다. 곧 어떤 음식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사람이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음식이나 의식이 아니라 사람의 속마음과 생각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음식규정(레위 11장, 신명 14,3-21)에 따라 깨끗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엄격히 구별하였던 유다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음식을 가려먹으면서도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깨끗한 음식을 먹은 그들의 마음은 더럽혀져 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고, 깨끗하게 지음받은 우리입니다. 그런데 내 안의 무엇이 우리를 더럽힌단 말입니까? 그 시발점은 마음입니다. 성서적 사고에서 마음은 사람의 생명의 중심이며, 인간의 활동과 정서의 자리이고 선과 악의 전쟁터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지각 능력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그분께로 향합니다. 그런데 나쁜 생각은 마음을 어둡게 하여 나쁜 감정을 일으키고 나쁜 지향을 부추기며, 스스로를 더럽힙니다. 더럽혀진 영혼에서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흘러나옵니다. 폭언과 험담과 모진 한 마디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요.
중요한 것은 외부 환경이나 물질 또는 예배의식이 아니라 속마음입니다. 영이 거처하는 자리이며 선악의 뿌리요 의지의 결정적 중심인 마음이 하느님의 영으로 물들어야 하지요. 하느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에게서 그분의 얼이 담긴 말과 생각과 행동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순수 자체이신 하느님께 되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빛이신 주님께 마음의 어둠을 비춰주시라 청하며, 지속적인 의식성찰을 통해 나쁜 생각의 실체와 뿌리를 알아차림으로써, 영혼의 순수함을 회복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더럽혀진 마음을 비우고, 그 마음자리에 하느님의 순수한 시선을 모시며, 사랑을 키워가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느님께 불충실한 우리 마음에 거룩한 모든 덕들을 쏟아부어주시면 충실한 이가 되겠지요(성 프란치스코, 동정녀 인사 6).
우리는 "신성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 순수한 마음과 정신을 지니고,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녀야 합니다."(1신자 1,10; 2신자 19)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생애와 가르침과 거룩한 복음을 마음에 간직하고"(비인준칙 22,41), "그분의 권고를 정신을 다하여 이행해야 합니다."(형제회편 6-7) "온갖 장애를 멀리하고 모든 근심걱정을 물리쳐, 깨끗한 마음과 순수한 정신으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공경하고 흠숭하는"(비인준칙 22,26) 것이 바로 참 행복의 길입니다.
재벌들의 '돈 사료'를 먹느라 정신없는 법조인과 정치인, 권력가들의 '부당한 힘의 사료'를 즐기는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는 무관심한 채 자기 몫을 채기는데 여념이 없는 종교인들의 영혼은 죽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늘 생각하고 갈망하며, 모든 지향을 그분께 두고, 모든 것에서 주님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주님을 사랑해야겠습니다."(주님의 기도 묵상 5) 저 깊은 마음자리를 살피며 외형과 허례허식을 버리고, 돈과 세상 헛된 것 대신 하느님의 사랑을 품어 사랑이 되고, 선 안에 머물러 착한 행실로 세상을 비출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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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오늘 복음 말씀은 당시 유다인에게는 가히 혁명적인 내용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엄격히 구분하였기 때문입니다(레위 11장 참조). 레위기의 가르침에 따라 당시 유다인들은 돼지고기를 부정하다고 여겨 절대로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시리아 임금 안티오코스는 유다교를 없애려고, 유다인들에게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합니다. 이에 수많은 유다인들은 율법이 금한 돼지고기를 먹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지요.
그만큼 유다인들은 정결과 부정에 관한 율법을 지키며, 부정한 것은 극단적으로 피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먹는 모든 음식에는 부정한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모두가 하느님의 창조물이 아닙니까? 다 귀한 존재들이지요. 오히려 사람의 마음이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에서 온갖 나쁜 생각이나 악한 행동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늘 자신의 내면 상태를 들여다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악의 기운이 혹시나 들어 있지는 않은가. 그런 악한 기운이 나 자신도 모르게 악한 행위로 연결되지는 않는가…….’ 수시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양심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럴 때 우리 마음은 더욱 정화되어 가며, 하느님께서 들어오시기에 매우 흡족한 성령의 성전이 되어 갈 것입니다.(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사무처장/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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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밤송이 김기현 요한 신부님]
<마음 안에 부정적인 것들을 몰아냅시다.>
작년에 동기 신부 중 한 명이 저한테 저녁을 같이 먹자는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해 보니, 원래는 부모님 축일이라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시간이 안 돼서, 동기 몇몇이랑 레스토랑에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시간도 많고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 친구와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그 친구가 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전망이 좋기로 손꼽히는 레스토랑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가보니 정말 좋았습니다.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에, 라이브 가수가 잔잔히 노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는 행복해 보이는 부부들과 가족들이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런 곳도 있구나~’라는 감탄을 하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주문을 하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는데, 마음속에서 부정적인 생각들이 불쑥불쑥 올라왔습니다.
‘주문 받는 분이 우리 옷차림을 보고 촌놈 셋이 왔다고, 무시하는 건 아닐까? ... 양도 적은데 가격은 되게 비싸네...돈 있는 사람들은 좋은 데서 좋은 걸 먹으며 잘 살겠구만... 조명은 왜 이리 음침할까, 남자 셋이 왔는데... 밥 한 끼 먹으러 목동까지 왜 왔을까...’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해도, 마음속에서 부정적인 것들이 흘러나올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입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마음 안에서 흘러나오는 나쁜 생각들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도 흘러나오고, 걸을 때도 흘러나오고, 수업을 들을 때나 일을 할 때도 흘러나오고, 좋은 사람들과 있을 때도 흘러나옵니다. 그런 생각들이 윤리적으로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생각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죠.
또 내 안에 그런 무서운 생각, 부정적인 생각, 나쁜 생각들이 있다는 것이 영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다음에 몇가지 방법이 부정적인 생각들을 몰아내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단순한 기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묵주기도를 한다든지,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는 기도를 반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반복되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주님께 집중할 수 있을 겁니다.
두 번째는 마음 안에 부정적인 생각들이 들어올 수 없게 성심의 사랑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성심의 사랑만이 가득한 그 안에...’라는 성가가 있죠. 그 성가 대로 내 마음 안에 주님의 사랑을 가득 채워서 다른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올 수 없게 하는 겁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악한 영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생각들을 몰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부정적이고 악한 생각들이 떠오를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악한 영에게서 나온 생각들은 물러가라.’라고 간단한 구마를 할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지나가게 두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생각들이 산란하고 복잡한 우리 마음 때문에, 수면 위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기다리면 지저분한 것들이 차분히 가라앉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평온하고 맑은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의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부정적인 생각들을 마음에서 몰아낼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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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마르 7,14-19)
예수님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어떤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탓이다.”입니다. (남 탓도 하지 말고, 음식이나 어떤 물건 탓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는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선악과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하느님 명령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유혹했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지은 것은 아담과 하와 자신입니다. (물론 죄를 짓게 만드는 유혹도 죄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고, 하와 탓이라고 책임을 하와에게 떠넘겼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이 말에는 그 여자를 주신 하느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담의 말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선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즉 하느님 잘못이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하와도 자기가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고 사탄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창세 3,13)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의 변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각자의 죄를 물으셨습니다.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은 원래 악하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든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면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더러워집니다.) 산상 설교의 ‘참 행복’ 선언을 보면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하느님을 볼 것이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묵시 22,3-4)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 마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로마 7,18-25)
이 말은,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대단히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자신의 의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나는 비참한 인간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이고, 예수님께 기도드리는 이유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마음이 깨끗한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없이, 또 기도하지 않으면서, 자기 혼자 힘으로 수행을 한다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는 ‘어느 정도 수준’이 아니라, 하느님(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낙타와 바늘귀에 관한 말씀을 하신 뒤에,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은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도 적용됩니다. 하느님(예수님)께 의지해야 하고, 하느님(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3-14)
자신의 힘만으로 마음이 깨끗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버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힘을 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첫 번째 방법은 ‘기도’이고, 두 번째 방법은 ‘사랑 실천’입니다(루카 11,41). (두 가지를 동시에 함께 실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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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결국 사람이다>
마르코 7,14-23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결국 사람이다>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것도
선을 악으로 바꾸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불의를 정의로 바꾸는 것도
정의를 불의로 바꾸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것도
기쁨을 슬픔으로 바꾸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도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증오를 사랑으로 바꾸는 것도
사랑을 증오로 바꾸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냉기를 온기로 바꾸는 것도
온기를 냉기로 바꾸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것도
진실을 거짓으로 바꾸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억압을 해방으로 바꾸는 것도
해방을 억압으로 바꾸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굴종을 자유로 바꾸는 것도
자유를 굴종으로 바꾸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죽임을 살림으로 바꾸는 것도
살림을 죽임으로 바꾸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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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식당에 가면.. 제일 먼저 물수건이나 물 티슈를 주면서 주문을 받습니다. 손을 깨끗하게 씻으면서 음식을 기다리라는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손만 씻는 것이 아니라, 세수까지 하는 사람도 있지만요. 그런데 유다인의 조상들의 전통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여겼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어째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들어가는 것"이 더럽힐 수는 없다는 말씀! 과연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에 핵심은 "사람들을 측은하게 여겨보시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는 것" 에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은 제자들에게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야단을 치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제자들을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기시는 자비로운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배고픔(굶주림)의 아픔을 먼저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이 자비요, 측은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바로 거기에서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라는 것은..."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악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악한 마음"을... 다른 사람들을 측은하게 여기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비난(악한)이 있는 자리"에 있다면, "축복의 자리"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손을 안 씻고 먹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면 먼저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물을 떠다 주는 마음입니다.. 아니면 물수건이나 물티슈를 준비해주거나 가져다주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로마서 12장2절에서...사도 바오로가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이제 중요한 것은 겉이 아니라, 속 마음의 문제입니다. 항상 누군가를, 또 무엇인가를 비난하고 험담하여 판단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자리잡아야 합니다. 즉, 먼저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고 세워주는 마음입니다. 약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하느님의 뜻에 살아가는 십자가의 길이요, 순교자의 삶을 사는 거룩한 마음입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오늘 누구를 만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위하여"...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위하여' 살아가는 거룩하고 복된 은총의 날이 되시기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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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부산본원 김종오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의말씀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마르코.7.15)
먹지 말아야 할 음식에 관한 종교적 규정으로 음식이 통제되었던 예수님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은 먹는 것마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부유하고 지배계급에 속하는 정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음식에 관한 규정이 필요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억압적 규정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하던 음식에 관한 종교적 규정을 비판하시는 예수님은 지배 계급에게 부족한 내면적 가치를 요구하십니다. 배부른 사람보다 배고픈 사람의 입장에 선 새로운 패러다임의 규정을 선포하셨습니다.
배고픈 시절에 우리도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절대적인 빈곤보다 상대적 빈곤을 더 많이 느낍니다. 외적인 경제보다 내면적 가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힙니다. 절대적인 가난을 벗어났지만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우리 ‘안에서’ 나와 자신과 사람들을 더럽힙니다.
많이 가지고 있지만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 어쩔 줄 모르는 ‘어리석음’도 악이지만,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은 우리를 더욱 더럽힙니다. 음식은 풍부하지만 영적인 빈곤에 빠져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는 가난했던 과거와 빈손이었던 자신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얻은 풍부함을 우리가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만족을 모르면 ‘사람들을 더럽히는 것이’ 나오지만, 빈손을 기억하는 만큼 우리 안에서 사랑이 흘러나옵니다. 우리 안에서 흘러 나와 넘쳐야 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랑의 향기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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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머니의 집을 옮기면서 전세 얻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먼저 살던 집을 전세로 놓고, 살 집을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전세를 얻을 비용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을 쉽게 알고 있었지만 저는 간단한 이치를 몰랐습니다. 먼저 살 집을 계약하였고, 지금 사는 집이 쉽게 나가지 않아서 애를 먹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맛집들은 나름대로 비결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색다른 재료를 찾기도 하였고, 특별한 양념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주인들은 특별한 맛을 찾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무엇보다 손님들의 입장에서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맛집을 찾으면 기다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사순시기를 준비하면서 본당에서는 ‘사순특강’을 마련합니다. 부족한 저에게도 사순특강을 맡겨주시는 본당이 있습니다. 올해는 ‘신당동, 반포동, 잠원동, 묵동, 연희동, 신림성모, 자양동’에서 사순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적인 깊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영성적으로 내세울 것도 별로 없기에 걱정이 많이 됩니다. 그럼에도 저를 믿고 부탁하시는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저 나름대로 찾았던 강의의 요령이 있습니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서 묵상할 것들을 찾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주변을 보면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따뜻한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식당 주인의 친절한 미소, 지하철역에 있는 고운 시, 살면서 경험했던 실수와 실패도 좋은 이야깃거리가 됩니다. 제가 잘 아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잘 모르는 내용을 이야기하면 저도 힘들지만 듣는 분들도 분명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쉬운 이야기를 합니다. 일단 시작하면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 시간만큼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들은 주님께서 채워주시리라 믿는 것입니다.
올해 사순특강의 주제는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로 정했습니다. 시작하면서 좋아하는 성가 ‘구원자 예수’를 함께 부릅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시는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단식 기도하셨고 사탄의 유혹을 받았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악의 세력들은 우리들을 새로운 방법으로 유혹하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다, 베드로, 가야파, 군중, 십자가 위의 다른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 베로니카, 십자가 위의 또 다른 죄인’입니다. 저는 제 주변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과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과연 예수님께 아픔을 드리고 있는지, 예수님께 위로를 드리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를 들려주면서 강의를 마무리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로도 아브라함이 한 일보다 더 큰일을 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살면서 우리들 각자의 고유한 맛과 향기로 이웃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들은 내 안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잘 다스릴 줄 알면 우리는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악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욕심, 시기, 질투, 탐욕, 인색, 게으름은 모두 내 안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 용서, 인내, 나눔, 성실함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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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이 답이다>
-순수純粹, 지혜智慧, 겸손謙遜-
하늘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수십년간 매일 강론을 써오며 깨닫는 진리입니다. 강론 제목도 무수히 반복되며 내용 또한 알게 모르게 반복됩니다. 미사중 독서와 복음도 3년 주기로 계속 반복됩니다. 중요한 것은 똑같은 반복이 아니라 늘 새로운 반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사랑이 답이다-순수純粹, 지혜智慧, 겸손謙遜-’입니다. ‘사랑이 답이다’라는 강론 제목도 여러 차례 사용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항구히 간절히 하느님을 사랑할 때 선사되는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 순수, 지혜, 겸손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참행복 선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할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소극적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보다는 적극적으로 사랑할 때 깨끗해 지는 마음입니다. 순수와 지혜와 겸손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순수가 곧 지혜요 겸손입니다. 하느님을 항구히 간절히 사랑할 때 선사되는 순수와 지혜, 겸손의 선물입니다.
사랑할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말도 글도 행동도 마음의 표현입니다. 마음이 좋고 깨끗해야 말도 글도 행동도 좋고 깨끗합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힙니다.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사람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바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을 더럽힙니다. 결국 문제도 답도 내안에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 마음 깨끗하지 못할 때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온갖 더러운 것들입니다. 안에서 밖으로 나와 우리를 더럽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입니다. 흡사 오물 창고 같은 마음입니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힙니다. 정도의 차이일뿐 사람 누구나 지닌 부정적 어둔 모습들입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사랑을 통한 정화와 성화뿐입니다. 이래서 죽을 때까지 평생 한결같은 수행입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공동으로 바치는 사랑의 찬미와 감사의 시편과 미사의 전례기도 수행이 우리 마음을 순수하게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우리의 모든 수행이요 수행을 통한 마음의 순수요 자유로움입니다.
광야인생에 세 인간 유형이, 즉 성인, 폐인, 괴물이 있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요즘 여성들 사이에서 요원의 불길같이 전개되는 ‘미투me too’운동이 있습니다. ‘나도 역시 당했다’라는 성추행을 겪은 피해 여성들의 용감한 증언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참으로 남성들이 수행생활에 소홀하여 본능적 욕구가 그대로 표출할 때 누구나 이런 괴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내용입니다. 마음의 순수와 더불어 이런 지혜 또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미 우리는 얼마전의 독서에서 솔로몬이 하느님께로부터 지혜와 더불어 영화까지 선물 받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지혜를 지켜 본 스바 여왕의 고백입니다.
“내가 임금님의 업적과 지혜에 관하여 내 나라에서 들은 소문은 과연 사실이군요.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는데, 이제 직접보니, 내가 들은 것 이야기는 사실의 절반도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의 지혜와 영화는 내가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 납니다. 임금님의 부하들이야 말로 행복합니다.”
이런 지혜도 보고 배울수 있는 임금의 부하들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무지의 병’의 치유에 ‘지혜의 선물’이 특효약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지혜의 빛’뿐입니다. 갈림길입니다. 이런 지혜를 하느님 은총의 선물로 깨달아 알 때는 겸손과 감사가 뒤따르겠지만, 자기 것으로 착각할 때는 교만과 무지의 어둠에 휩싸일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이런 순수와 지혜가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을 때 저절로 겸손해질 것입니다. 사랑의 순수, 사랑의 지혜, 사랑의 겸손, 바로 사랑이 답임을 입증합니다. 공자의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 생각납니다.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삼십이립三十而立;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었고
칠십이종심소욕불유거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위의 말을 정리하자면 15살은 지학, 30살은 이립, 40살은 불혹, 50살은 지천명, 60살은 이순, 70살은 종심 이라 표현합니다. 오늘은 제가 감사하게도 칠순 생일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1988년 40 불혹不惑의 나이에 요셉수도원에 부임했고, 만 30년이 지난 2018년 올해 종심從心의 70 나이가 된 것입니다.
공자님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거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합니다. 즉 우리 식으로 말하면 무엇을 하든 사랑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인데 참 자유로운 경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끝으로 칠순을 앞두고 작년 12월에 써놨던 좌우명 자작시를 나눕니다.
-세월 흘러/나이들어 늙어도/언제나 거기 그 자리
하늘향한/향기롭고 기품있는/나무들이 좋다
초겨울/동안거冬安居에/들어간 겨울나무들이 좋다
욕망慾望과 허영虛榮, 환상幻想의/나뭇잎들
다 떠나 보내고/나뭇가지들 /본질本質로
깨어 침묵중에 기도하는 겨울나무들이 좋다
내 나이 얼마인가/초겨울 인생이 아닌가
얼마 지나 새해 되면/나는 칠순七旬이다
구체적 귀가歸家준비/주님 뵈올 기쁨에, 부활의 봄을 맞이할 기쁨에
벌써 서서히 마음 설레는 구나
이제 몸과 마음 추슬러/흔들림 없이 본질로 살 때이다/하나 둘 모두 비워내고 텅 빈 충만充滿으로/있는 듯 없는 듯 보일듯 말듯 사는 거다
아, 이제부터 /본격적 내 인생 조각彫刻 마무리에
심혈心血의 정성을 쏟을 거다
하루하루/아름다운 주님 닮은 내 모습 조각하여
주님 만나는 날 봉헌奉獻할 거다
내 사랑 주님이시여/일편단심一片丹心
당신을 애모愛慕하며 살아 온 저를 축복하소서-2017.12.16.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마음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에게 순수와 지혜, 겸손을 선사하십니다. 오늘 화답송 다음 시편이 지혜로운 의인이 되는 비결을 알려 줍니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자아내고, 그의 혀는 올바른 것을 말한다. 하느님의 가르침 그 마음에 있으니, 걸음걸음 하나도 흔들리지 않는다.”(시편37,30-31)
하느님의 가르침이, 말씀이, 사랑이 늘 우리 마음에 있을 때 순수하고 지혜롭고 겸손한 의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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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저는 주식회사 ‘빠다킹’의 창업주이자 대표이사입니다. 이 회사 안에는 많은 직원이 있습니다. ‘조명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직원, 사제로 생활하는 직원, 이곳저곳 바쁘게 강의를 하는 직원, 글을 쓰는 직원, 책 읽는 직원, 여행을 다니고 쉼의 시간을 갖는 직원, 인터넷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직원, 운동하는 직원 등등... 몇 명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로 많은 직원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제일 소중한 직원을 뽑으라고 한다면, 즉 저의 오른팔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직원은 누구일 것 같습니까? 바로 사제로 생활하는 직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회사의 존재이유이기도 하지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고 또 엄청난 재미를 제게 주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은 아니지만 보람을 느끼면서 배 굶지 않으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행복을 나눠주면서 저 역시 큰 행복을 간직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저희 회사를 망칠 직원도 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려고 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아픔을 주기도 하는 직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회사를 망칠 직원을 그냥 데리고 살아야 할까요? 아무리 능력이 많다 해도 어쩔 수가 없지 않습니까? 과감하게 퇴사를 시켜야 회사가 망하지 않을 테니까요.
여러분 역시 스스로를 하나의 회사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직원을 채용하고 어떤 직원을 자르겠습니까? 회사를 망칠 직원은 일찍부터 과감하게 잘라야 합니다. 인정에 사로잡혀서 그냥 데리고 있으면 나중에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며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쫄딱 망하라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직원들을 데리고 살아야 할까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복의 길로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직원을 데리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습니다. 특별히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을 보면 정결하고 부정한 음식에 대한 규정들이 나옵니다. 이 규정들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부정한 것은 극단적으로 피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마르 7,19)라고 규정하십니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물을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이나 악한 행동이 문제라고 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편협된 생각들이 어쩌면 나를 망칠 못된 직원이 아닐까요? 하느님을 기쁘게 할 직원이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못된 직원은 과감하게 퇴사시키십시오. 형식적인 틀만을 강조해야 성공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귀하는 형편없는 삶을 살았기에 ‘주식회사’ 빠다킹에서 퇴사함을 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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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명연 마태오’ 라는 이름을 보면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로,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빠다킹으로, 강의를 하는 강사의 모습으로, 글을 쓰는 작가의 모습으로, 갑곶성지를 지키는 성지전담 신부로, 사람들에게 코칭을 하는 코치의 모습으로,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 등이 제 이름을 보고서 떠올려지는 이미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이미지는 누가 만든 것일까요? 바로 제가 만들었습니다. 제가 했던 많은 선택들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이고, 제 이름에 내용을 담게 한 것이지요. 살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냥 이름 석 자만 달랑 남았겠지만 그 동안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서 내용을 담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내용을 많이 담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을까요? 내 이름이 주어지는 순간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고, 따라서 아무 의미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이름에 내용을 더해가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에 어떤 내용을 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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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시작된 ‘정결예법’에 대한 결론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의 끝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사람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폐기하고 있음을 ‘코르반’을 통해 설명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군중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4)
또 그 뜻을 묻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마르 7,15)
이는 군중들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호소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무디어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도, 물 위를 걸으신 기적에서도, 부활예고를 하실 때에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촉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깨달음의 호소는 어제 <복음>에서 논증된 바처럼,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버리는 어리석음으로부터 깨어나 올바른 신앙을 촉구하는 호소입니다.
결국, 사람 밖에 있는 어떤 물질도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기에, 겉이 아니라 속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는 유대인들이 철저히 지키던 ‘정결예식’을 모조리 부인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부정한 음식이나 물건이나 짐승에 의해 사람이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지키는 정결예식은 소용없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것이 마치 밖에 있는 양, 겉의 정결예법에만 치중하면서 막상 속은 은폐하는 위선적인 정결예법을 부정하십니다.
이는 동시에,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마르 7,15)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들이 깨끗한 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베드로의 요빠에서 이방인 코르넬리오를 방문했을 때의 환시체험에서도 말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0,15)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럽습니다.”(로마 14,14-16)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를 깨닫기를 호소합니다. 내면의 자기 변혁, 곧 전 인격적인 회개를 촉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정결이란 가시적인 겉을 깨끗이 닦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 곧 그 사람의 내면과 인격 전체에 걸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존자 베다는 말합니다.
“마귀라 할지라도 우리의 나쁜 생각들에 힘을 보태어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1-15장>이 명하는 부정과 정결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곧 그 영적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참으로 부정한 것은 물로 씻을 수 없는 근본 원인이 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더럽히는 것들은 밖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칼을 의사가 사용하면 활인검이 되고, 살인자가 사용하면 살인검이 되듯이 말입니다.
이를 깊이 통찰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로마 7,15-24)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악이 차 있으면 악취가 되어 터져 나오고, 선이 차 있으면 향기가 되어 뿜어져 나옵니다. 참으로 우리 안에는 악도 있고 선도 있으니, 우리는 분명 사람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전선하시니, 박해하는 이에게도 상처 입히는 이에게도 오로지 선을 베푸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안에는 사랑이 가득 찼기에 항상 사랑이 흘러나오고, 우리들 마음에는 미움이나 화가 있기에 그것들이 흘러나올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타인을 탓하거나 처지나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안의 어둠과 악을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빛과 선이 차오르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빛이신 말씀을 채우고, 말씀을 비추시는 성령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내 말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갈라 5,16)
오늘, 저희 마음이 예수님 마음으로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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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신부의 복음 묵상
<마음에 담은 것이 밖으로 표출된다>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그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보시니 좋더라.”, “보시니 참 좋더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더럽히고, 안 더럽히는 것은 사람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실 좋고 나쁨은 사람들이 서로 비교하여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더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좋게 창조된 것이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쓰려고 하면 더러움을 만들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 안에 품은 육의 욕망들은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을 밖으로 표출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자주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정작 문제는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내적인데, 외적인 것에 연연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내면을 깨끗이 하십시오.
우리는 ‘얼짱’ ‘몸짱’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외면을 중시하는 말입니다. 어떤이는 성형수술을 하고 겉모양을 가꾸는데 온갖 노력을 다 쏟아 붓습니다. 반면, 속을 가꾸는 데에는 소홀히 해서 내면을 황폐하게 버려둡니다. 심지어 ‘감정에 충실하자.’ ‘솔직한 것이 좋지 않으냐?’하면서 자신의 악한 생각을 합리화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 많이 무뎌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16,7). 그러니 내면을 더 깨끗하게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나오는 글입니다.
“당신의 행동에 있어서는 활달하며 당신의 대화에 있어서는 조리를 지키며 당신의 사상에 있어서는 방황하지 말고 당신의 영혼에 있어서는 내적인 분란과 외적인 혼란을 없애고 실생활에 있어서는 여가가 없을 정도로 분주한 생활을 하지 말아라.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고 당신을 갈기갈기 찢고 당신을 저주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고 이러한 것들이 순결하고 현명하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머물려고 하는 당신의 영혼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투명하고 맑은 샘물가에서 샘물을 저주한다 하더라도 샘물은 결코 식수를 제공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진흙이나 오물을 집어넣었다 하더라도 샘물은 이것들을 흘려보내고 씻어내어 전혀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평범한 우물이 아니라 영원한 마음의 샘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것은 만족과 단순과 겸손으로 결합된 자유를 스스로 끊임없이 누리면 된다”(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진정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 숨, 당신의 영, 얼을 불어넣어주셨으니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잘 지키고 가꾸며 하느님의 좋은 작품인 만물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안에 담겨져 있던 것입니다. 평상시에 좋은 것을 잘 담아 놓아야 하겠습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입니까? 아니면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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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아름다운 마음>
스승 예수님, 당신의 말씀은 천만 번 지당합니다. 정말 세상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것과 사람을 더럽히는 것들은 모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아름답게 가꿀 생각은 하지 않고 겉꾸밈으로 자신을 가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겉꾸밈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예뻐지거나 날씬해지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컬어 명품이라는 물건으로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서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는 일도 합니다.
돈과 권력, 지위와 명예로 자신을 겉꾸미기 위해서 권모술수, 사기, 수뢰, 협박, 공갈, 부정, 야합, 살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토록 처절하게 겉꾸밈 한 결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겉으로 화려하고 아름답고 거창합니다. 그러나 속은 썩을 대로 썩어서 온갖 악취가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마치 쓰레기더미나 똥 덩어리를 金으로 포장한 것과 같은 꼴입니다. 쓰레기나 똥 덩어리를 금으로 포장한다고 쓰레기나 똥이 금덩이가 될 리는 없지요. 어리석은 저희들을 굽어 살피소서.
예수님, 저는 가끔 부질없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는 안경이나 투시경이 있다면 이 세상은 천국으로 바뀔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 환히 드러나는 속마음을 가꾸려고 너나 할 것 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예쁜 얼굴보다 아름다운 마음, 날씬한 몸매보다 따듯한 마음, 고급 화장품과 갖가지 장신구로 치장한 외모보다 맑고 밝은 마음, 고급 상표의 명품을 걸치기보다 청정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겠지요.
대통령을 뽑을 때도, 국회의원을 뽑을 때도 누가 더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는지 보고 뽑게 되겠지요.
사제나 수도자들도 모두 맑고 밝은 마음 가꾸기에 여념이 없겠지요.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마음을 품고 함께 어울려 산다면, 거기가 천국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5,3-12)
오늘도 아름다운 마음 가꾸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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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곽용승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의 상황을 살펴보면,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날카로운 감시와 적의를 품은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예수님께 몰려왔던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몇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질타의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입 밖에서 들어오는 부정한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옳은 답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가 그렇게 강하게 주장했던 조상의 전통 곧 정결례 본래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하면서 형식과 예식에만 머물러 있는 죽은 규범을 몰아내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에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곧 그들의 전통에 따라 부정을 타는 것에 노출되어 있는 손을 음식을 들기 전에 씻음으로써 부정에서 정화되어야 하는 정결례를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는 중요한 것을 놓쳤습니다. 정결례의 본 정신입니다.
정결례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깨끗하게 만드셨으니 깨끗하게 살다가 깨끗한 상태로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내적이고 종교적인 정결이념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본 정신은 잃은 채 형식과 절차로서만 하느님 앞에 부정하다는 판단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이런 행태는 더 나아가 정결에 거스르는 것들을 세분하여 정하게 되었고 이것들을 깨끗하게 하는 우스꽝스런 절차를 정하고 종교예식으로 규정하여 순수 외적인 정결 개념으로만 전락시켜 버립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만을 깨끗이 닦아 놓고는 마음속에는 약탈과 탐욕으로 가득 차있다.”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라고 말씀하시며 사람의 깨끗함의 척도는 마음에 있음을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느님 앞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와 같은 태도를 벗어던지고 나의 마음을 정화하는데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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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효준 레오 신부님]
<중독>
외적인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술을 즐기고, 도박을 즐기고, 게임을 즐깁니다. 그것이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고,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무참히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감각’을 통해 외부로부터 느낄 수 있는 즐거움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중독’이라는 무거운 짐만이 남을 뿐입니다.
즐거움은 ‘감각’을 통해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내 안에 심어주신 신앙의 눈으로 찾아야 합니다. 그러니 열악한 환경에서도 순수한 기쁨을 누릴 수 있고, 풍족한 환경에서도 고통에 몸부림칠 수 있습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그를 더럽힌다.”
내 안에 좋은 것이 들어 있으면 좋은 것이 보입니다. 외부의 환경이 아무리 나를 힘들고 지치게 만들지라도 내 눈에 좋게 보이니 그것마저도 좋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반대로 내 안에 부정적이고 나쁜 것이 들어 있으면 환경이 아무리 풍족하고 사랑스럽더라도, 나쁜 것만 보입니다.
외적인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영원한 것을 찾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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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 20)
사람을 살리는 것
사람 마음을 깨끗이
하는 시작은
기도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참으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언제나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보다
더 위험한 존재 또한
없을 것입니다.
절망과 부패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의 마음이 다시
예수님을 통해
정화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더럽고
나쁜 생각과
마음 때문에
울부짖는 이웃들이
생겨납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가장 영악하고
끔찍한 것들이 아닌
선한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선한 마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더러움의 근원은
무절제한 욕심이고
정화의 근원은
더러운 우리
마음을 위해
기도하는 기도입니다.
제 마음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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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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