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T-KT라는 거대 통신기업 자본들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자회사들을 통해 간접적인 투자, 제작 전략을 구사하던 통신사들이 최근엔 '직접'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막강 네트워크와 자본력을 쥔 통신사들은 충무로에서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영화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꿀지 모를 이들의 행보를 추적해봤다.
이를테면 이런 상상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코미디영화가 2010년 어느 날 개봉을 앞두고 있다 치자.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굳이 극장까지 갈 필요가 없다. 차비에 팝콘, 음료수 값, 밥 값 등 경비가 이만저만 드는 게 아니다. OO텔레콤 가입자인 당신에게 개봉일 문자메시지 한 통이 휘리릭 날아온다. ‘배꼽 빠지는 웃음의 핵폭탄!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개봉!’ 통화 버튼을 눌렀더니 인터넷 서비스 화면에 접속됐다. '영화를 관람하시겠습니까? 이용료 3000원.' OK. 결제를 마치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누인다. 아참, 고글을 잊을 뻔했다. 휴대전화에 고글을 연결하자 눈앞에 3차원 입체영상이 펼쳐진다. 자, 이제 시작이다. 짠짜라잔~
통신사와 충무로의 공생관계
영화산업에 진출한 통신기업들이 언제쯤 이런 미래를 현실화할지 알 수는 없다. 아니, 기술만의 문제라면 이미 현실이다. 다만 상용화되지 않았을 뿐. 현실에서 접할 수 있는 통신사 영화 콘텐츠 서비스는 훨씬 조악하다. 불과 몇 년 전과 비교하자면 휴대전화 모니터가 커지고 선명해졌지만 아직 영화를 끌어들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영화제작사 아이필름에서는 <바람피기 좋은 날>과 <눈부신 날에>의 '모바일 단독 개봉'을 시도한 적이 있다. KTF의 WCDMA 이동통신 서비스 ‘쇼’에서도 KTF가 쇼박스 펀드를 통해 50억 원을 투자한 <디 워>의 스페셜 페이지를 열고 제작기와 인터뷰 등 특별 영상을 실었다. 이밖에 통신기업들은 자사 플랫폼 서비스 활성화를 위해 개봉영화의 이벤트 프로모션이나 예고편, 배우와 감독 인터뷰 동영상 서비스, 주제곡 벨소리 서비스 등을 수시로 진행한다. 아이필름의 김성애 마케팅 팀장은 "지금은 인터넷이 영화 마케팅의 중심이기 때문에 이동통신 서비스에서의 효과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아이필름이 SKT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실험 차원에서 시도한 것"이라고 말한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이용자는 소수였고 광고효과도 크지 않았다. 부담도 큰 편이다. 필름영화를 모바일 환경에 맞추려면 화면크기며 상영시간, 사운드를 여러 단계에 거쳐 가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 본편을 가공하기 위해 모바일 콘텐츠 전문업체에 의뢰하다보면 데이터 유출의 위험도 커지기 마련. 위탁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통신사들의 끊임없는 러브콜을 거부할 영화사는 없다. 현재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차승재 회장이 대표로 있는 싸이더스FNH, 전지현, 송혜교, 전도연, 정우성, 임수정 등 한국 최고의 영화배우들이 속해 있는 싸이더스HQ는 2005년 각각 KT(KTF)와 SKT의 자회사가 됐다. 자금 위기에 몰린 영화사들이 탄탄한 자본력을 가진 통신기업들의 도움을 받는 대신, 그들의 플랫폼 서비스에 필요한 콘텐츠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순리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한쪽에선 먹이(자본)를 공급하고, 다른 쪽에서는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것(콘텐츠 공급)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SKT-KT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영화사에 투자하는 방식의 우회로가 아닌, 직접 투자, 배급을 진행할 팀을 본사에 꾸리거나(SKT), 최신 개봉작을 자회사를 통해 배급하는 것이 아니라 곧장 극장으로 디지털 전송하고(KT) 있다.
SKT, "영화로 한류 콘텐츠 확보, 중국까지 간다"
공격적인 영화산업 진출을 예고하고 있는 것은 SKT다. SKT는 위성 DMB 서비스를 대대적으로 실시하며 모바일 콘텐츠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TU 미디어'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인 미디어그룹으로의 변신을 시도해왔다. 영화 콘텐츠에 대한 접근 역시 적극적이다. 지난해 6월을 끝으로 폐지됐지만 젊은 세대를 겨냥한 브랜드 'TTL'을 통해 대대적인 영화 관람료 할인 서비스를 실시한 전력도 있다. 또한 자회사(싸이더스HQ)의 자회사인 청어람과 아이필름에 지분을 투자하는 등 간접적으로 영화 제작사업과 끈을 맺고 있었다.
SKT는 최근 본사에 영화사업을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하고 본격적으로 투자, 배급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첫 배급작품은 <가문의 위기> <가문의 부활>의 정용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시대 코미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코리아>(가제). 제작비 60억 원 가운데 약 20% 정도를 투자한 SKT는 내년 설 시즌에 맞춰 이 영화를 배급함으로써 본격적인 영화산업 진출을 선언했다.
SKT 영화사업팀 송광현 홍보매니저는 "네트워크 통신의 발달로 무선에서도 영화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가 얼마든지 가능해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화산업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여기에 SKT의 국제적인 행보와 연관지어 본다면 영화사업팀 신설의 의미는 더욱 확장된다. SKT가 지난 8월 중순, 자회사 싸이더스HQ와 함께 중국 현지에 합작법인을 설립했기 때문이다. '베이징싸이더스에이치큐'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총 220만 달러 규모의 이 회사는 SKT 차이나가 4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SKT는 또한 지난 8월 21일, 중국 2위의 이동통신업체 차이나유니콤의 2대 주주가 되면서 중국 이동통신업계에 본격 진출했다. 송광현 홍보매니저는 "베트남, 몽골 등 현재 SKT의 서비스가 진출한 나라와 서비스를 계획 중인 중국 등 아시아지역에서 한류 콘텐츠의 인기가 좋다는 점"을 영화사업팀을 꾸린 배경의 하나로 설명한다. "통신사가 해외에 진출하게 된다면 국내에서 제작되는 영화의 해외판권 계약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SKT 서비스를 이용해 한류 콘텐츠를 아시아지역에 제공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이들이 구상하는 청사진의 일부다. 한류를 대표하는 스타, 스타들이 출연하는 화제의 영화는 중국 이동통신시장에서 자리를 잡는 데 주요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계산인 것이다.
KT, 점진적 확장을 노린다
반면 KT의 행보는 점진적이다. KT는 300억 원 규모의 싸이더스 펀드에 40억 원을, KTF는 싸이더스 펀드에 20억 원, 총 205억 원 규모의 쇼박스 펀드에는 80억 원을 출자하는 방식으로 영화산업과 줄을 대고 있는 상황. 그러나 최근 KT의 자회사인 싸이더스FNH가 <용의주도 미스신>이나 <트럭> <킬미> 등 자사의 라인업 가운데 촬영이 먼저 끝나는 작품 한 편을 시작으로 배급사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혀 KT의 영화산업 진출이 보다 적극적으로 변모할 것이란 예측이 충무로 안팎에 떠돌고 있다. 싸이더스FNH는 KT가 35.7%, KTF가 15.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KT 인사 2명과 KTF 인사 1명이 차승재, 김미희 대표와 함께 이사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싸이더스FNH의 배급사업 진출이 KT의 새로운 콘텐츠사업 전략 중 하나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더불어 최근 굴지의 멀티플렉스 체인인 메가박스가 호주의 금융회사 '맥쿼리'에 매각되자, 메가박스를 최종 인수할 국내 기업으로 KT가 거론되는 등 갖은 소문이 떠돌았다.
KT 사업구조기획실 송재호 부장은 "무리할 생각은 없다"고 단언한다. "KT는 사업규모가 방대하기 때문에 어떤 사업을 시작하든 기획단계가 길고 사고도 보수적이다. KT의 정체성을 플랫폼 사업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화산업이 뭔가 될 것 같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뛰어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거다. 또한 "영화산업의 위험부담이 크다는 걸 KT도 알고 있다. KT에서 몇백억 원 정도 손해를 보는 게 큰 무리는 아닐지라도 사업팀 단위로 본다면 큰돈이고, 철저히 비즈니스 관점으로 본다면 콘텐츠사업 자체는 별 매력이 없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싸이더스FNH의 배급사업 진출에 대해서도 "KT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며 "순수한 싸이더스FNH의 열망으로 추진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메가박스 인수설에 대해서도 사실무근임을 강조했다. 송 부장은 "메가박스가 다른 통신기업에 매각을 제의한 적은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KT에는 제안조차 오지 않았다. KT는 앞으로도 대규모 투자금을 더 쏟아 부어야 할 IPTV 서비스인 메가 TV나 KT가 1대 주주인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 등 기존 플랫폼을 활성화시켜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플랫폼인 극장사업을 추진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KT 역시 콘텐츠 확보 경쟁은 피할 수 없다. KT가 최대 주주인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의 경우 지상파 3사와 제휴를 맺는 데만 4년의 시간이 걸렸다. 케이블 사업자들과 CJ미디어 등 콘텐츠사업의 중심에 선 업체들로부터 견제를 받았던 경험을 떠올린다면 KT로서도 어떻게 해서든 콘텐츠사업에서 입지를 굳힐 필요성이 있다. 송재호 부장은 "KT는 플랫폼이라는 시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장사를 할 콘텐츠 사업자들을 모집하려 했지만 그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 과도한 판권료를 요구하는 업체들도 많았고, 계열사들의 횡포로 플랫폼사업 자체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정도"라며 "공정거래가 가능한 환경이었다면 콘텐츠사업에 눈을 돌리지 않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다 보니 최소한의 방어라는 관점에서라도 (영화 및 콘텐츠)사업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KT는 올해 1,5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콘텐츠 부문에 투자할 생각이며 뉴미디어시장의 확대에 대해서도 고심 중이다. 송 부장은 "이미 정착된 영화산업의 구조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고사위기에 처한 부가판권시장을 뉴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되살려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극장 개봉-비디오, DVD 등 렌탈시장-케이블 TV-지상파 TV로 이동하는 영화 유통과정 가운데 1차 플랫폼인 극장을 타깃으로 삼는 게 아니라, 2차 이후의 부가판권 사업자의 대체제가 되겠다는 것. 송 부장은 "특히 영화의 경우 불법다운로드 때문에 피해를 많이 입고 있는데, 고화질의 VOD나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해 조금이라도 유료시장을 개척한다면, 영화계에도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그러나 최근 1차, 2차, 3차 시장으로 넘어가는 동안 일종의 수익보장기간을 유지하게 하는 '홀드백' 시스템이 붕괴돼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차 시장, 2차 시장 등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송 부장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먼 미래에는 집에서도 극장에서 보는 것처럼 똑같은 사운드와 화질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이 어떻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그림은 누구나 그려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충무로, 제3의 시대가 열린다
통신기업들의 충무로 진입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지난해 8월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영화산업 기업화 과정 분석'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연구를 진행한 박영은 연구원은 충무로에 진출한 대기업의 성격을 분류, 연구하고 한국 영화산업의 기업화 과정을 탐구했다.
박 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현재는 본격적으로 국내 영화산업의 틀이 갖춰진 적극적 개념의 '3차 기업화 과정'"이며 "방송, 통신 융합의 추세에 따라 종합 미디어 업체로 변신하기 위해 막강한 자본력을 가지고 영화시장에 진입한 SKT, KT그룹은 현재 한국 영화산업의 주체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제 기존의 통신업체에서 벗어나 '종합 미디어 기업'을 지향하는 이동통신업체로서는 매체 다양화의 시대, 방송/동신 융합의 시대에서 결국 승리의 관건이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확보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인식에 따라, 장기적인 전략의 일환으로 영화시장에 진출한 것"이라며 "그러므로 통신자본의 영화산업 진입은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이익을 내는 게 쉽지 않으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볼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이동통신업체들은 새로운 다음 단계로의 시장 진입을 위해 한국 영화시장에 오래도록 남아 새로운 세력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박 연구원은 또 "통신기업들의 최근 행보를 통해 영화산업 진출이 가속화된다면, 일정 부분 현재의 위기를 타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고 말했다. 또한 박 연구원은 "현재 영화의 극장매출 의존도가 85%이고 나머지 부가판권과 해외 매출이 15%에 불과한 기형적인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뉴미디어 플랫폼들이 작동해야 할 것"이라며 "어차피 DMB나 IPTV 등의 플랫폼 환경에 콘텐츠가 따라가게 될 것이라면, 그런 환경의 변화에 대해 충무로가 미리 적응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고 있다는 점도 분명히 플러스 요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진위는 통신사들의 진출이 또 다른 형태의 독과점이나 부율문제를 불러올 가능성에 대해서도 대비하고 있다. 박 연구원은 "수익구조와 관련한 민감한 문제들은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따라오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이를 위해 영진위는 9월 중순 즈음 영화산업에 관련된 통신기업들의 주요 인사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의견을 듣는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