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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의 이산책판 박물관(以山冊板 博物館)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 있는 이산책판 박물관은 책판(冊板 : 책을 박아 내는 판) 제작 과정의 연구, 복원, 전시, 교육을 위해 2014년 10월에 개관한 국내 유일의 책판전문 사립박물관이다. 전체 4층으로 1층은 판각교육관과 수장고, 2층은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관, 3층은 장정 복원실과 사무실, 4층은 학예실과 관장실로 구성되어 있다. 이산(以山) 안준영이 직접 복원한 세계 최초 목판 인쇄자료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 일명 팔만대장경), 한글 문화유산 등과 관련된 문화재급 책판 1,000여 점과 함께 고서의 표지를 장식하는 능화판(菱花板), 고판화(古版畵), 고서(古書), 민화(民畵), 시전지(詩箋紙 : 조선 시대에 글이나 편지를 쓰는 문양 있는 종이), 제작 도구 등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목판인쇄문화는 지식과 정보의 전달 매체로 소통을 전제로 한다. 이 소통의 중심에서 '책판(冊版)'은 그 총체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책판은 책을 간행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여러 번의 교정을 통해서 필요한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다. 함양 이산책판 박물관 이산책판 박물관은 현존하고 있는 수많은 기록문화유산을 통해 책판의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시작하여 점차 정보, 지식, 문학, 역사 등을 전달할 목적으로 새겨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산책판 박물관은 책판의 제작 과정인 판각, 인쇄, 장정(裝訂 : 책의 표장 중 어느 하나를 정하여 제책하는 장식. 꾸밈새.)의 복원작업을 하는 작업실이다. 또한' 책판'에 대해 많은 분이 관심을 가지고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문을 연 작은 박물관이다. 한 자 한 자 새겨 전해주려 했던 '책판'은 우리 선조들이 후대에 남긴 전달 매체의 선구자이며, 미래를 향한 정신문화의 비전(vision)이라고 생각한다. 책판 제작 과정에 관한 연구, 소실된 원형복원을 통해 목판인쇄문화의 우수성과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그래서 세계 속에 한국을 대표할만한 우리의 책판 원형을 복원하고,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서 건립한 박물관이다. 함양 이산책판 박물관 전시실 함양의 거연정(居然亭)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에 있는 건립한 누정(樓亭 : 누각과 정자을 통칭하는 말)으로 서하면 봉전마을 앞을 흐르는 남강천의 암반 위에 건립된 1동의 건물로, 2005년 10월 13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옛 안의(安義) 3동의 하나인 화림동 계곡으로서 농월정과 용유담, 그리고 거연정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고려 말의 충신이며 정선전씨(旌善全氏)의 파시조인 전오륜(全五倫)의 7대손 동지중추부사 전시서(全時敍)가 1640년(인조 18)경에 서산서원을 짓고, 현 위치에 억새로 만든 누각과 정자를 처음으로 지었으나, 1853년(철종 4) 화재로 서산서원이 불타서 이듬해 다시 복구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 자체가 훼철되자, 1872년 전시서의 7대손 전재학(全在學) 등이 억새로 된 정자를 철거하고, 훼철된 서산서원의 재목으로 재건립하였으며, 1901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지금까지 거연정은 정선전씨 문중에서 관리하나, 봉전마을의 주민들과 관광객들의 쉼터로 개방되었다. 우리 나무카페에서도 한 차례 탐방한 적이 있다. 함양 거연정 함양의 이두(一蠹) 정여창(鄭汝昌) 고택(古宅) 옛부터 '左 안동, 右 함양이라 말이 있다. 이는 낙동강을 기준으로 동쪽인 안동(安東)과 서쪽인 함양(咸陽)에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안동을 대표하는 대학자가 퇴계 이황이라면 함양을 대표하는 대학자로서 일두 정여창을 두고 일켰는 말이라고 하겠다. 일두 고택은 바로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인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 1450~1504)의 고택을 말한다.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되고, 지금의 건물은 대부분 정여창의 사후인 1570년대에 후손들이 중건하여 남도 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고택으로 솟을대문에 문패가 4개나 걸려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ㄱ’자형이고, 납도리 3량 가(지붕을 받치고 있는 도리의 수)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일두 고택이 있는 개평마을은 풍천 노씨 대종가, 오담 고택, 노 참판댁 고가 등 한옥들이 흙담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있으므로 한옥 박물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지은 지 100여 년이 넘는 크고 작은 한옥 60여 채가 전통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자리 잡은 마을이다. 함양 개평마을 일두 정여창 선생의 본관은 경남 하동으로,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 종실의 허물과 잘못을 규찰하는 일을 총괄하는) 정지의(鄭之義)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제사 때 쓰는 곡식과 제물을 관리하는 종 4품의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정복주(鄭復周 : 1367~?),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증(贈) 한성부좌윤 정육을(鄭六乙 : ?~1467)과 어머니는 경주최씨로,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 사이에서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1450년에 태어났다. 이는 증조부가 처가가 있는 함양에서 살기 시작했다. 18세 때 아버지 정육을이 이시애의 난에 출전하여 전사하자, 선생은 한 달간 전쟁터를 돌며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수습했다. 또, 김종직 선생이 함양군수로 재임할 때 김굉필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사림파 계열에 속하는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불리며, 문묘에 위패를 모신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학역재(學易齋) 정인지(鄭麟趾), 하성부원군 정현조(鄭顯祖 : 정인지의 둘째 아들로 세조의 부마), 하남군 정숭조(鄭崇祖 : 정인지의 셋째 아들), 선조임금의 생모 하동부대 부인 등은 그의 일족이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490년 참의 윤긍(尹兢)(1432~1493)에 의하여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었다. 성종 21년(1490)에 정여창은 당시 세자였던 연산군의 스승이 되었으나, 성격이 맞지 않아 서로 관계가 좋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었다. 1498년 친구인 김일손이 그의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넣은 것이 발단이 되어 무오사화(1498년)가 일어났다. 안음현감으로 재임하면서 김일손(金馹孫 : 1464~1498)과의 서찰을 자주 왕래와 관련하여 그 때문에 무오사화 때 조사를 받고,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연산군 10) 4월 1일 귀양지에서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제자들이 함경도 종성에서 경상남도 함양으로 시신을 운구하였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 즉위 후 복작추증(復爵追贈 : 나라에 공이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빼앗은 벼슬을 다시 돌려주고 품계를 올려 줌)되어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의 성리학 이론은 정몽주·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어서 1610년(광해군 2)에 문묘에 모셨고, 또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정여창의 호가 '일두(一蠹)'라 함은 '한 마리 좀 벌레'라는 뜻이며, 그의 호처럼 평생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삶을 살았다. 1498년(연산군 4년)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있을 때, 김일손(金馹孫 : 1464~1498)과의 서찰 왕래와 관련되어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鍾城)도호부로 유배되어도 그곳의 청년들과 학동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며, 지역유지들과 한성부와 시국 담론, 시문을 주고받으며, 변방 지역에도 학문과 문물을 전파에 힘써다 병사하였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복권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일두 정여창 선생 고택 함양의 남계서원(灆溪書院) 함양 남계서원은 1552년(명종 7)에 창건된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있는 서원으로, 조선 시대 동방 5현 및 동국 18현 가운데 한 사람인 일두(一蠹) 정여창(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후진 양성을 위하여 건립하였다. ‘남계(藍溪)’는 서원 근처에 흐르는 시내 이름이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603년(선조 36)에 나촌(또는 구라 촌)으로 옮겨 지었다가 1612년(광해군 4)에 옛터에 재건하였다. 문민공(文敏公) 주세붕(周世鵬 : 1495~1554)이 세운 소수서원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창건된 유서 깊은 사액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폐할 때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정여창 외에도 숙종 때 인물인 동계(桐溪) 정온(鄭蘊 : 1569~1641, 경남 거창 출신으로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어받아 절개와 충절이 높은 선비), 개암(介庵) 강익(姜翼 : 1523~1567, 함양 출신으로 조식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정여창을 추모하는 남계서원을 세운데 중추적 역할을 한 선비)을 추가로 제향하였다. 별도의 사당에는 임계(林溪) 유호인(兪好仁 : 1445~1494)과 송탄(松灘) 정홍서(鄭弘緖 : 1571~1648)를 모셨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전국에 걸쳐 서원 훼철이 진행되었지만, 함양 남계서원은 존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 5월 26일 사적 제499호로 승격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로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2019년에 소수서원(경북 영주. 1543년. 안향)을 비롯해 남계서원(경남 함양. 1552년. 정여창), 옥산서원(경북 경주. 1573년·이언적), 도산서원(경북 안동. 1574년·이황), 필암서원(전남 장성. 1590년·김인후), 도동서원(대구 달성. 1605년. 김굉필), 병산서원(경북 안동. 1613년. 류성룡), 무성서원(전북 정읍·. 1615년. 최치원, 신잠 등), 돈암서원(충남 논산. 1634년. 김장생)과 함께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매년 2월과 8월의 중정(中丁 : 음력으로 그달의 중순에 드는 정일丁日을 이르는 말)에 향사를 지내고 있는 남계서원은 앞쪽 낮은 곳에는 강학 공간을 두어 강습을 하도록 하였고, 뒤쪽의 높은 곳에는 사당을 두어 제향 공간을 이루는 전학후묘(前學後廟) 전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당에는 정여창을 주벽(主壁 : 사당이나 사원에 모신 여러 위패 가운데 주장되는 위패)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각각 모셔져 있다. 함양 남계서원 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한 남계서원의 건물 배치형식은 급한 경사지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일축선 배치를 하고 있다. 이는 한국서원 건축의 전형적인 배치 양식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이후 건립되는 서원의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누문(樓門)인 풍영루(風咏樓)를 들어서면 강학 공간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인 명성당(明誠堂)이 있다. 명성당은 1559년에 완성되었으며, 정면 4칸 규모의 건물이다. 명성당의 앞쪽 양옆으로는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양정재(養正齋 : 동재)와 보인재(補仁齋 : 서재) 있다. 양정재와 보인재의 1칸은 누마루 형식으로 만들어 각각 애련헌(愛蓮軒), 영매한(咏梅軒) 이라고 이름하였다. 이 누마루 아래 누각 문 쪽으로 연당(蓮塘 : 연못)이 하나씩 꾸며져 있다. 이처럼 연당이 두 개 조성된 서원은 드물다고 한다. 이 밖에 전사청, 고직사, 정여창·정온. 강익을 칭송하는 송덕비인 묘정비(廟庭碑 : 사당의 뜰에 세워져 있는 비)가 있는 비각 등이 있다.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다. 함양 남계서원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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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23. 5. 16 함양 탐방 예정지를 미리 조사해 올린 자료이오니, 틈나시먄 한 번 살펴보면 당일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세한 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일두 고택에는 제가 처음 본 흰꽃이 피는 백석류나무가 인상적이고, 남계서원은 우리나라 서원의 일반적인 건물 배치 형태인 전학후묘의 효시라고 합니다.
이 회장님! 저가 빠뜨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효시 부분은 즉시 보충하였습니다. 관심 있게 살펴주셔 고맙습니다.
잘보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유네스코 에등재 된 8개 서원 중 하나인 남계서원
고맙습니다. 탐사 자료는 충분히 확보했으나 너무 길면 싫증을 느낄까봐 줄려서 탑재하였으니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