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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ste Liebe Meines Lebens -
Monika Martin
(내 인생의 첫사랑 - 모니카 마틴)
Erste Liebe Meines Lebens - Monika Martin
Erste Liebe meines Lebens,
Du bist vergangen und schon so weit.
내 인생의 첫사랑
그 사랑은 지나가고 당신은 그렇게 멀리 있습니다.
Lange suchte ich vergebens
nach dieser schönen so schönen Zeit.
오랫동안 헛되이
나는 그 아름답고 아름다운 시간을 찾고 있었습니다.
In all den Jahren hab ich erfahren,
der Weg der Sehnsucht, er führt uns weit.
이 모든 시간들 속에서 나는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 그리움 여로가 우리들을 이끌어주고 있다는 것을.
Größte Liebe meines Lebens,
auch Du warst schmerzvoll und nicht bereit.
내 인생의 가장 큰 사랑이여,
당신은 아픔이었고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Der Weg ist weit, so endlos weit,
er führt uns fort zur Ewigkeit.
그리움의 길은 그렇게 끝없이 멀기만 하지만
그 길은 우리를 영원으로 이끌어 줍니다
Letzte Liebe meines Lebens,
fand Dich im Herzen für alle Zeit.
내 인생의 마지막 사랑이여,
당신은 항상 나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Der Weg ist weit, so endlos weit,
er führt uns fort zur Ewigkeit.
그리움의 길은 그렇게 끝없이 멀기만 하지만
그 길은 우리를 영원으로 이끌어 줍니다
Letzte Liebe meines Lebens,
fand Dich im Herzen für alle Zeit,
fand dich im Herzen, und Du, Du bleibst.
내 인생의 마지막 사랑이여,
당신은 항상 나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마음속에 있고,
그리고 바로 그 곳에 머물 것입니다
불후의 名曲 시대
한국을 울린 다섯 絶唱
일본, 만주,사할린까지 건너가
해외동포 위문공연…
妓生歌手 이화자와 쌍벽 이룬
‘은쟁반 옥구슬 목소리’(황금심)
“기적도 목이 메어 소리 높여 우는구나”…
대나무숲서 옹골차게 길러낸 唱法,
3옥타브 음역까지 넘나들어(남인수)
‘전설의 작곡가’ 박시춘도
첫눈에 매료된 音色…
“턱을 떠는 듯 탁탁 끊기는 절제미,
오히려 슬픔 더해줘”(현인)
‘훔치고 싶은 목소리’
요절하자 模唱歌手 난립…
“팝, 재즈 노래하던 그가 트로트 만나
‘한국음악의 不滅’ 됐다”(배호)
“의사는 내게
‘더 이상 노래를 부르면 죽는다’
경고했었다…
하나 난 부르지 않으면
되레 죽을 것 같았다”(김정호)
“조선시대도 아니고
왕이 뭔가. 오빠는 좋다.”
가수 조용필은 지난 4~5월 3부작으로 기획된 KBS 예능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에 특별출연, “(당신을 부를 때) 국민 모두가 가왕(歌王)이라는 호칭이 익숙하다”는 MC 신동엽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당시 그는 북한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평화 협력기원 공연 ‘봄이 온다’에 참가한 뒤 처음으로 TV에 나온 때였다. 조용필의 입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가왕은 부담스럽고 영원한 오빠이고 싶다’는 게 그의 겸손한 첫마디였다. 조용필은 “노래는 제가 불렀지만 대중의 마음에 파고들기 때문에 대중의 것”이라며 “저의 노래가 (청중에게) 작은 위로였으면 진정 행복하겠다”고 말했다. 50년 가요계를 주름잡던 명성에 기대지 않고, 오직 노래로 승부하는 ‘영원한 절창(絶唱)’다웠다.
‘조용필’이란 이름만으로 그의 수많은 명곡이 떠오르듯, 사람은 갈잎처럼 떠났어도 귓가에 맴도는 노래들이 있다. 잊지 못할 절창의 노래가 그것이다. 우리는 왜 반세기 세월을 건너온 ‘흘러간 옛노래’를 아직도 듣고 부르는가. 그 미성(美聲)에 심금(心琴)이 젖고, 사연 깊은 노랫말에 울고, 잦아드는 음률(音律)이 여운으로 남아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노래를 고우(故友)처럼 곁에 두고 ‘그때 그 시절’ 명가수를 떠올린다. 한스러운 곡조가 울려 퍼지면 눈물 어린 이야기가 가슴을 친다. 비감에 젖어 슬픔을 토하면 마음 한편이 따뜻해진다. 한국을 울린 ‘다섯 절창의 시대’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꾀꼬리의 女王’
황금심
황금심의 공연 장면과 앨범 표지. 황금심은 전통 민요 가락에 충실했던 이화자와 달리, 민요의 선율 위에 대중음악의 리듬을 얹어 세련미를 더했다. 사진=유튜브 캡처
1922년 경남 동래(지금의 부산)에서 태어난 황금심(黃琴心·본명 황금동)은 15세가 되던 해 오케레코드 전속가수 선발 모집에서 1등으로 데뷔했다. 2년 뒤 작사가 이부풍의 소개를 받아 빅타레코드로 이적, 히트곡 ‘알뜰한 당신’과 ‘한양은 천리원정’을 발표했다. 타고난 미성이 귓전을 울렸다. 청중은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청아한 목소리’라며 격찬했다. 황금심은 1970년대 한 라디오 방송에 나와 데뷔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 기분이라는 건 뭐 까딱하면 졸도할 정도로 그만 감개무량해서 말이죠, 너무. 아이고, 세상에 자신 없이 사실 왔는데 내가 이렇게… 거기서 또 그러시데요. ‘이렇게 많은 가운데서 천재적인 소질을 가졌다’고 말이죠. 회사 사장님께서 ‘아유, 어디서 이런 목소리를 가졌느냐’ 그러면서 당장 그냥 전속계약을 하자 그러시더군요.”
가수로 이름이 나자 대로한 부친에게 발각된 황금심은 머리를 깎이고 집에 연금됐다. 이팔청춘(二八靑春)의 꾀꼬리는 단식까지 감행하며 소신을 꺾지 않았다. 부친을 설득한 모친의 간청으로 다시 가수의 길에 나섰다. 황금심의 별칭은 ‘꾀꼬리의 여왕’이었다. 민요조의 구성진 가락에 고운 목소리가 뭇 남성 애간장을 녹였다. 당대의 맞수는 기생 출신 이화자(李花子)였다. 그녀 역시 16세에 데뷔, ‘어머님 전상서’로 ‘민요의 여왕’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청춘스타’ 반열에 있었다.
한때 이화자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던 황금심은 어느덧 사형(師兄)과 맞설 정도의 실력파 가수로 거듭났다. 황금심은 전통 민요 가락에 충실했던 이화자와 달리, 민요의 선율 위에 대중음악의 리듬을 얹어 세련미를 더했다. ‘울산 큰애기’ ‘꿈꾸는 시절’ ‘한 많은 추풍령’ 등 음반을 내는 족족 인기곡 반열에 올랐다. 이화자의 음색이 반상(飯床)을 젓가락으로 치던 즉흥반주와 어울렸다면, 황금심의 가락은 북과 장구로 얼큰한 맛을 살려 청중과 교감했다.
황금심은 ‘타향살이’로 유명한 신입가수 고복수와 10세 이상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결혼해 3남 2녀를 낳았다. ‘부부가수’는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악극단을 조직, 일본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노역을 하던 재일조선인 위문공연 무대에 올랐다. 만주와 사할린섬까지 건너가 위문공연을 열어 나라 잃은 동포들의 설움을 위로했다. 황금심은 1970년대까지 무려 4000여 곡을 발표하면서 명실상부한 한국 근대사 가요계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약관의 여가수에겐 호기(好機)만 있지 않았다. 남편 고복수가 한국전쟁 때 북한 인민군에 납치됐다가 탈출하는 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황금심은 남편이 천운으로 무사 귀환하자 7만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제주도 육군부대에서 전속악단으로 일했다. 1952년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의 ‘삼다도 소식’ 가락이 애절한 이유는 바로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북괴의 남진으로 나라가 존망의 기로에 선 시기에, 제주도의 풍광과 인심은 여전히 곱고 풍요로웠으니 그 선율에 ‘비극적 아름다움’의 깊이가 묻어났다. “삼다도라 제주에는 아가씨도 많은데 / 바닷물에 씻은 살결 옥같이 귀엽구나 / 미역을 따오리까 소라를 딸까 / 비바리 하소연에 물결 속에 꺼져가네 / 음~ 물결에 꺼져가네….”
‘알뜰한 당신’의 戀情
‘부부가수’ 고복수와 황금심. 황금심은 ‘타향살이’로 유명한 신입가수 고복수와 10세 이상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결혼해 3남 2녀를 낳았다. 사진=월간조선
평론가들은 황금심의 노래가 ‘민족정서를 그대로 이어온 한민족의 가락’이라고 평한다. 그의 음악은 외세의 핍박과 전쟁의 상처를 견뎌냄으로써 더욱 성숙된 감수성으로 청중에게 다가왔다. 황금심은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李蘭影)과 쌍벽을 이루는 해방 전후 한국 가요계의 대표 여가수로 자리매김했다. 젊은 시절 그를 친동생처럼 아꼈던 동료가수 고(故) 신카나리아씨는 과거 황금심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한 《중앙일보》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얼굴이 예쁘면서도 참 착하고 얌전했어요. 누구에게든 싹싹하고 조용하고… (해방 전) 이북을 포함해 전국 13도를 다 돌며 공연했어요. 여름에 떠나면 겨울옷을 소포로 부쳐달라 할 만큼 장기(長期)였어요. (황금심은) 더위나 추위를 가리지 않고 노래를 계속했지요.”
‘내조의 여왕’ 황금심은 아내로서도 당대의 귀감이었다. 인기 최고의 ‘부부가수’는 그 흔한 스캔들 한 번 없이 원앙처럼 살았다. 황금심은 앞서 인용한 라디오 방송에서 고복수와의 풋풋했던 연애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연정을 품은) 고 선생님 눈치를 제가 대강 알아챘죠. 그래서 어떻게 하다가 춘향전을 했어요. 고 선생님이 이도령이 되고 내가 춘향이가 되고. 지방공연, 저 북만주로 해서 안 간 데가 없었어요. 근 1년 가깝도록 다녔죠.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고 선생님이 옥중 장면에 이렇게 손 넣는 데가 있잖습니까? (이몽룡이) ‘춘향이 그동안 고생했다’ 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랬는데, 아 그 유난히 하루는 (고복수가) 손을 자꾸만 잡으려고 그러시질 않아요? 그 눈치를 알았기 때문에 원래는 손을 잡아야 (연극이) 되는데, 내가 이렇게 쏙 빼고 쏙 빼고 했어요. 한 번도 손을 못 만지셨죠. 그런 생각을 하면요, 참 옛날이 그립습니다.”
그는 남편 고복수가 은퇴 후 영화·사업에 실패하고 서적외판원 신세가 됐어도 현모양처로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인기가수라는 명성에 도취되지 않고 한 가정 안주인으로서의 본분을 지킨 것이었다. 고복수는 197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식도염과 신경성 고혈압으로 투병 생활을 했다. 황금심은 순하고 어진 남편의 통증을 조금이라도 덜어내 주고자 지극정성으로 병수발을 들었다. 남편의 병석을 떠나지 않고 극진히 돌봤던 ‘알뜰한 당신’ 그 자체였다.
황금심은 남편이 떠나자 넉넉지 못한 살림을 꾸려 홀로 5남매를 키웠다. 1990년 원로 연예인들의 모임인 ‘상록회’ 최고위원을 맡기도 했다. 2년 뒤엔 대중문화 발전에 헌신한 공로로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말년까지 가수활동과 개인사업을 병행했던 황금심은 1996년 파킨슨병에 걸려 2001년 79세로 타계하기까지 수년간 병마와 사투를 벌였다. 그는 와병 중이었을 때도 “몸이 나으면 무대에 다시 서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노래는 그의 천품(天稟)이었다.
2. ‘一千曲의 황제’
남인수
남인수의 앨범 표지. 그의 노래는 인생살이의 서글픔, 청춘남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고국을 잃고 떠도는 유랑의 비애가 주조(主潮)를 이뤘다. 사진=조선DB
1918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남인수(南仁樹·본명 강문수)는 어렸을 적 최씨 가문에서 자라 초명이 ‘최창수(崔昌洙)’였다고 한다. 모친 재혼 후 강문수(姜文秀)가 됐는데 예명 ‘남인수’는 데뷔 시절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줬다고 한다. 10대 중반까지 학력이나 기타 정보가 밝혀진 바 없다. 항간에는 그가 일본 공장에서 소년 노동자로 일했을 뿐 전문 음악교육을 받진 못했다고 전해진다. 중국어를 배우다 경성으로 올라왔다는 설도 있다. 소년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그러던 어느 날 17세 소년은 가락을 살리는 본인의 미성과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을 깨닫는다. 실제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 부르는 신동으로 마을에 이름이 났다. 남인수는 새벽마다 고향마을 뒷산에 펼쳐져 있는 대나무숲에서 목청을 틔워 발성을 익혔다. 기운찬 목소리가 메아리로 번져 남강 너머 바위산에 닿을 정도였다. 악기도 잘 다뤄 북·장구·하모니카로 마을 사람들에게 신기(神技)를 보였다. 남인수는 목포가요제에 참가한 후 상경, 음반사의 문을 용감하게 두드린다. 그때가 1935년 말, 그가 ‘시에론레코드사’의 가수로 선발된 해였다. 남인수는 이듬해 2월 ‘눈물의 해협’으로 데뷔한다.
1937년 ‘오케레코드사’로 이적, 박시춘 작곡의 ‘애수의 소야곡’으로 가요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 노래는 데뷔곡 ‘눈물의 해협’과 이명동곡(異名同曲)이었지만 애끓는 개사(改詞)로 청중의 가슴에 방망이질을 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마는 /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소속사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미성의 가수 탄생’이라는 그럴듯한 선전으로 남인수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남인수는 6년간 전속가수로 활동하며 ‘물방아 사랑’ ‘낙화유수’ ‘무정천리’ 등 130여 곡을 잇달아 발표했다. ‘가요계의 기린아(麒麟兒)’로 불렸다. 돈이 많아 ‘돈인수’ 여복이 많아 ‘여인수’라는 말도 따라다녔다. 일제강점기 말엽, 징병을 미화하는 영화 〈그대와 나〉의 동명 주제가를 불러 친일행적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악극단을 돌아다니며 스테이지 중심의 공연가수로 활동했다. 한국가수협회 간부도 맡았다.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정거장’ ‘추억의 소야곡’ 등 인기곡을 쏟아냈다. 노래는 인생살이의 서글픔, 청춘남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고국을 잃고 떠도는 유랑의 비애가 주조(主潮)를 이뤘다.
역사도 사랑도 ‘이별 정거장’
남인수와 이난영. 남인수는 10대 시절 목포가요제에서 만난 연상의 여인 이난영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사진=조선DB
한국전쟁 때는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 소속으로 위문공연에 나섰다. 전후(戰後) 대한레코드가수협회장, 1960년 전국공연단체연합회장, 그 이듬해 한국무대예술협의회 이사를 지냈다. 해방 전 800여 곡을 취입(吹入·음반이나 녹음기의 녹음판에 소리나 목소리를 녹음하는 행위)했고, 해방 후 1962년 폐결핵으로 타계할 때까지 200여 곡을 더해 도합 1000여 곡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남아일생’ ‘일가친척’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청춘 무성’ ‘고향의 그림자’ ‘산유화’ ‘울리는 경부선’ ‘무너진 사랑탑’ 등이다. 작고 후 그에겐 ‘가요 황제’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평론가들은 그가 음폭이 넓고 감정 표현도 섬세해 명가수의 자질을 타고났다고 평한다. 미성이지만 맥 빠진 소리가 아닌 옹골찬 기운이 붙었고, 발성과 음높이가 정확해 노래의 클라이맥스인 고음 부분도 거뜬히 소화했다. 고음과 저음, 3옥타브 음역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남인수는 그전까지 아직 민요조가 남아 있던 고전적 가요계를 끝내고, 전후 대중가요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남인수는 동료가수 이난영과 첫 연애를 하고 나중에 재혼까지 했다. 혈기왕성한 10대 시절, 그는 목포가요제에서 만난 연상의 여인 이난영에게 푹 빠졌다. 1936년 이난영이 김해송과 결혼하자 그도 동료가수 김은하와 결혼해 슬하에 두 자녀를 뒀다. 남인수는 한국전쟁 발발 후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월북하자 다시 그녀를 찾았다. 홀로 3남 4녀를 기르며 김해송의 악단을 운영하던 이난영을 도왔고, 1958년 김은하와 이혼 후 사랑을 다시 시작했다.
십수 년을 돌아 겨우 이룬 남인수의 애타는 사랑은 2년이 채 가지 못하고 한 줌 재로 스러졌다. 각혈하며 숨을 거둘 때까지 이난영의 정성 어린 간호를 받고 끝내 그 무릎에 누웠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생사지사(生死之事)는 해륙(海陸) 사이에 놓인 부산의 ‘이별 정거장’이나 다름없었다. 정전(停戰)은 가까스로 체결됐으나 끝내 분단의 상처는 ‘재회 못할 이별’이 됐으니 말이다. 노랫말처럼 역사와 사랑이 흘러간 시절이었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 /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 우네 / 이별의 부산 정거장….” 1961년 동명의 영화는 최무룡·김지미의 애절한 사랑과 작별의 슬픔을 그려내 관객의 눈시울을 적셨다.
남인수는 가족사도 순탄치 않았다. 월북한 형 최창도의 딸이자 조카 최삼숙은 북한에서 삼촌과 같은 명가수로 활약했다. 최삼숙은 북한의 인민배우이자 인기가수로, 선전장 같은 무대에 2600번 오를 만큼 유명했다. 남인수는 일생 그 소식 하나 제대로 듣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최삼숙의 딸은 2016년 5월 탈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3. ‘徐羅伐의 신사’
현인
현인의 공연 장면. 그는 한때 쏟아지는 앙코르 요청에 ‘신라의 달밤’을 9번 연속 재창(再唱)했다고 한다. 사진=조선DB
1919년 부산 영도에서 태어난 현인(玄仁·본명 현동주)은 비교적 풍족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영국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다닌 아버지, 일신여학교를 나온 ‘신여성’ 어머니의 슬하에서 경복고와 일본 도쿄예술대 성악과를 졸업했다. 5세 때 부친이 《마이니치신문》 도쿄지사 기자가 돼 떠나자 그를 따라 일본으로 갔다. 일본 체류 시절 현인은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러시아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랴핀’의 독창회를 보고 음악인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는다. 고등학생 때 영어·일어·음악에 소질을 보였고 학교의 대표 배구선수를 맡을 만큼 운동도 잘했다. 방과 후면 학교 밴드부에서 일본 가요를 부르거나 미국 포크송을 트럼펫으로 불기도 했다. 명문예대에 합격했으나 부친은 음대를 간 아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현인은 막노동으로 학비를 벌어 졸업했다.
대학 시절 ‘NHK’ 합창단 오디션에 합격해 단원으로 활동했고, 한때 일본 왕족 출신 여성과 교제하기도 했다. 본과 3학년 때 귀국, 소학교 교사였던 조창길과 첫 결혼을 했다. 대학 졸업 후 음악교사로 잠시 일하다 중국 상하이로 가서 악극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광복 후 귀국, 미군 위문공연 무대에서 탱고의 반주가 되는 팝송과 샹송을 불러 인기를 끌었다.
황금심과 남인수를 길러낸 전설의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로 대중가수의 길에 입문했다. 고민도 컸다. 당시 일본 대학에서 성악을 정통으로 전공한 사람은 드물었다. 현인은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가 유행가를 부를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중가수가 된 덕에 ‘근대 가요계 1세대’의 대표주자로 자라날 수 있었다.
1947년 최초의 나이트클럽인 ‘뉴스맨스 클럽’에서 ‘서울 야곡’을 불러 밤무대의 황제가 됐다. 특히 같은 해 공전의 히트곡 ‘신라의 달밤’을 취입하면서부터 성공가도를 달렸다. 충무로 입구 악기점에 몰려든 시민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배우느라 북적댔다. 현인은 당시 국립극장에서 영화 〈자유부인〉이 상영될 당시 이 곡을 열창했는데, 특유의 창법으로 관중의 박수갈채와 앙코르 요청을 받아 무려 9번이나 연속 재창(再唱)했다고 한다.
이 곡은 동양적 가사와 서양적 음색이 합쳐져 묘한 매력을 풍긴다. 달빛이 일렁이는 산사(山寺)에서 고도(古都) 경주 일대를 내려다보며, 천년사직의 정취를 회고하는 한 풍류객의 노랫말이 인상 깊다. 여기에 이국적 멜로디, 구성진 바이브레이션은 그윽한 여운을 가져다준다. “아~ 신라의 밤이여 /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에서 /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과거 현인의 장례식장에 들른 원로가수 안다성씨는 당시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해방 이전에는 고음과 미성을 구사하던 남인수·백년설·고복수씨 등이 가요계를 주도했는데, 해방 후 현인씨가 새로운 창법을 들고나와 가요계 판도를 바꿔놓았습니다.”
같은 인터뷰에서 원로가수 고(故) 신세영씨는 이렇게 말했다. “해방 직후 서울 국립극장에 특이한 창법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작곡가 박시춘 선생과 함께 그곳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박시춘 선생은 외국 사람처럼 코가 크게 생긴 데다 독특한 목소리를 가진 현인씨에게 단번에 매료돼 현씨의 데뷔곡인 ‘신라의 달밤’이 탄생하게 됐습니다.”
“해방 전 남인수, 해방 후 현인”
한국전쟁 당시 흥남 철수작전 모습. 1951년 1·4후퇴 직후 발표한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는 유명 전쟁가요가 됐다. 사진=조선DB
이어 나온 ‘비 내리는 고모령’은 일제강점기 실향의 슬픔을 가슴에 수놓았고, 1951년 1·4후퇴 직후 발표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전쟁가요의 명곡이 됐다. ‘흥남부두’ ‘1·4후퇴’ ‘국제시장’ ‘영도다리’ 등 흥남-부산 일대의 험준한 피란 정경과 타향으로 떠밀린 민초의 설움이 그대로 노랫말에 번지는 듯하다.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는 과거 한 칼럼에서 ‘굳세어라 금순아’에 대해 “잿더미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심어 삶에 대한 의지를 심어주기도 했던 노래”라며 “턱을 떠는 듯 탁탁 끊기는 창법, 그 절제미가 오히려 슬픔을 더해주는 기묘한 아이러니를 불러왔다”고 평했다. 그렇게 현인의 가락은 50~60년대 격동의 시대, 국민의 피로와 시름을 위무하고 한 포기 희망을 심어줬다.
그는 성악가답게 서양 노래에도 능했다. 팝송·샹송·탱고·맘보·칸초네까지 다양한 서구 음악 장르를 섭렵했다. 이를 정통 트로트가 대부분인 한국 가요계에도 소개했는데, ‘고엽’ ‘베사메무초’는 그의 인기 번안곡(飜案曲)이 됐다. 예술가로 명성을 쌓은 그는 해방 후 최초의 음악 영화인 〈푸른 언덕〉(1949)에 주인공으로 발탁되는 영예를 얻는다. 그는 50년대 부산에서 가수 남인수, 배우 최은희 등과 함께 가극(歌劇)에 출연한 바 있어 나름 연기력도 갖추고 있었다. 정전협정 체결 후 상경한 현인은 박시춘이 이끄는 ‘은방울쇼’ 악단에 합류해 활동했다. 현인의 인기는 그때 유행했던 ‘한국 최초의 월드뮤직 전령사’ ‘해방 전 남인수, 해방 후 현인’이라는 말로 증명됐다. 실제로 당시 장안의 최고 인기 무대는 ‘남인수 대 현인 - 가요 대합전 15회전’이었다고 한다.
드높았던 대외적 명망과 달리 개인사는 순탄치 못했다. 당대의 명창 박녹주의 조카딸인 박정혜와 두 번째 결혼에 성공했지만 1957년 끝내 헤어졌다. 2년 후에는 ‘봉봉쇼단’을 만든 지 반년 만에 파산했다. 그 후로도 예전만큼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1974년 뉴욕으로 떠났다. 4년 뒤 3대 미스코리아 출신 김미정과 결혼 후 클럽 ‘가스라이트’를 운영하는 등 개인사업에 몰두했지만 성과가 좋지 못했다. 1981년 귀국해 20여 년 가까이 〈가요무대〉 등 여러 음악 방송에 출연해 노익장을 과시했다. 1998년 남진·배삼룡과 함께 악극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에 참여해 또 한 번 관객들을 울리고 웃겼다.
단체장을 맡으며 후배가수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가수협회 제23대 회장, 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 연예협회 부이사장 등을 지냈다. 한국전쟁 종군연예인 공로패, 제6회 대한민국 연예대상 문화훈장, KBS 특별가요 대상 등을 받았다. 2002년 타계한 현인은 해방 이래 처음으로 정식 앨범을 발표해 데뷔한 ‘대한민국 제1호 가수’로 우리 곁에 남았다. 부산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현인공원을 조성했고, 2005년부터 ‘현인가요제’를 매년 송도해수욕장에서 개최하고 있다. 영도다리 입구에는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와 현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대구 망원공원에는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가, 경주 불국사 앞에도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있다.
4. ‘눈물 같은 사내’
배호
배호의 앨범들. 1967년 잇달아 발표된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누가 울어’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람’ 등은 트로트의 전성기를 알린 신호탄이었다. 사진=조선DB
1942년 중국 산둥성에서 태어난 배호(裵湖·본명 배신웅)는 광복군 출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해방 후 귀국해 인천 수용소에 잠시 머문 뒤, 이듬해 서울 창신동 적산가옥에서 살았다. 중학교 중퇴 후 지독한 가난을 겪었다. 유력 방송사 악단장을 지낸 외숙부 밑에서 드럼을 연주하며 음악에 입문했다. 어린 나이에 방송국 무대부터 미8군 위문공연 무대까지 다녔다. 12인조 밴드 ‘배호와 그 악단’을 결성, 서울 낙원동 프린스 카바레에서 가수로 활동했다. 1964년 ‘두메산골’을 발표, 솔로 가수로 변신했다. 그의 초기 장르는 재즈, 라틴음악이 조합된 스탠더드 팝에 속했다. ‘두메산골’을 제외한 ‘굿바이’ ‘차디찬 키스’가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어쩔 수 없는 트로트였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히트를 친 후 60년대 가요계는 트로트의 향연이었다. 1967년 잇달아 발표된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누가 울어’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람’ 등은 트로트의 전성기를 알린 신호탄이었다. 연이어 ‘안개 낀 장충단공원’도 히트작 반열에 올라 배호에게 30개의 가수상을 선사했다. 그가 신장염으로 병상 신세를 지고 있던 해였다. 특히 “삼각지 로터리에 / 궂은비는 오는데”로 시작하는 ‘돌아가는 삼각지’는 대중의 찬사를 더 많이 받았다. 특유의 저음에서 흘러나오는 애수(哀愁)는 소시민들의 무기력한 일상을 전율시키기에 충분했다. “잃어버린 그 사랑을 / 아쉬워하며 / 비에 젖어 한숨짓는 / 외로운 사나이가 / 서글피 찾아왔다 / 울고 가는 삼각지….”
여기서 청중 대부분이 ‘삼각지 로터리’라 하면 도로시설물을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을 기다렸던 삼각지 일각의 모처를 뜻한다. 이 노래는 삼각지 로터리가 설치되기 1년 전인 1966년 가을에 취입, 이듬해 2월에 발표된 곡이기 때문이다. 배호의 사촌 형 배상태가 지은 이 노래는 처음에는 남진에게 갔다. 창법이 맞지 않아 거절당한 후 남일해에게 갔으나 일정상 녹음이 어려웠다. 노래는 제목처럼 돌고 돌아 다시 주인을 찾아갔다. 을지로 카바레에서 드럼을 치던 약관의 배호였다. 신장염을 앓아 녹음이 쉽지 않았다. 대표적인 일화가 노랫말 초반인 ‘로터리에’ 부분에서 나왔다. 병중의 배호는 숨이 차서 ‘삼각지 로’에서 멈춘 다음, 한 박자 쉬었다가 ‘~터리에’라고 불렀던 것이다. 진행이 이래 녹음기사는 노래가 끝난 줄 알고 스위치를 끄기도 했다. 어렵게 탄생된 노래는 그를 불멸의 가객으로 만들었다. 작사가 이주엽은 작년 12월 30일 자 《조선일보》 토요판 ‘Why’ 칼럼에서 배호의 음악을 이렇게 평가했다.
“재즈 드러머 출신이었던 배호는 애초 프랭크 시나트라 스타일의 스탠더드 팝과 재즈를 노래하며 가수를 시작했다. 그런 그가 트로트를 만나 한국 대중음악의 불멸이 됐다. 전통적 선율을 스탠더드 팝 가수의 기품으로 노래하게 한 것은, 시대의 한 수였다. 트로트가 비로소 의젓해졌다. 그가 1971년 짧은 생을 마쳤을 때, 가짜 배호가 쏟아져 나왔다. 저작권 개념이 아예 없던 때라, 모창가수들이 버젓이 배호 이름을 달고 음반을 냈다.”
실제 그가 짧은 생을 마감하자, 모창가수들이 그의 음색을 모사(模寫)해 ‘가짜 배호’ 음반을 냈다. 과거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 중인 배호 LP 음반의 156곡을 분석한 결과, 8%가 모창 음원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가객의 목소리는 경쟁자들이 뺏고 싶을 만큼 걸출했다. 중후한 저음의 멋을 살린 바이브레이션, 절정에 이르렀을 때 터져 나오는 한 서린 고음이 돋보였다. 배호의 발성과 감성은 이후 ‘한국 남성 트로트 창법의 교본’으로 통했다.
“서양에는 베토벤, 동양에는 배호”
배호의 타계 40주기를 하루 앞둔 2011년 11월 6일, 그의 팬들이 서울 삼각지역 옆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를 찾은 모습. 사진=조선DB
1971년 29세의 나이로 절명한 배호는 김정호·유재하·김광석 등 뒤이어 등장한 ‘요절가수’의 상징으로 꼽혔다. 길지 않은 전성기는 오히려 강렬했다. 매년 쉬지 않고 신곡을 냈다. 몸만 조금 회복되면 TV·영화·라디오 등 대중 매체에 출연, 투혼을 발휘해 노래했다. 가수상을 쓸어 담았다. 동료가수 등에 업혀 나오고, 휠체어에 의지해서라도 기회만 있으면 마이크를 잡았다. 5년 동안 10여 곳 음반사에서 20여 장의 음반을 냈다. 총 200여 곡을 불렀다. 안개 어린 노래가 10곡에, 비 내리는 노래는 30곡이었다. 스산한 저물녘 잿빛 거리가 떠오른다. 서늘한 배경에 묵직한 음성이 되레 따스하다.
작사가 이주엽은 “배호는 그 자신이 하나의 장르다. 한 시대 가창의 표준을 만들었다”고 했다. 고음을 쏟는 대신 잡아끌어 슬픔의 밀도를 깊게 했다. 감정은 절제될수록 근사했다. 영면하던 해 그의 유작은 ‘마지막 잎새’ ‘영시의 이별’이었다. 어느 비 오던 가을날,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 출연 후 귀갓길에서 감기에 걸렸고, 신장염이 도졌다. 한 달가량 입원을 끝내고 서울 성북구 자택으로 오던 중 눈을 감았다. 그해 11월, 예총 회관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젊은 여인들이 소복을 입고 늘어서서 그의 북망산 가는 길을 배웅했다.
드라마 같았던 가객의 일생은 사후(死後) 평단과 대중의 호평으로 이어졌다. ‘서양에는 베토벤, 동양에는 배호’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1981년 실시된 MBC 특집 여론 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수’ 1위로 선정됐다. 2005년 6월 ‘광복 60년 기념 KBS 가요무대’ 여론조사에서는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은 가수 10인에 올랐다. 2003년 옥관문화훈장이 추서됐으며, 용산구청은 삼각지 로터리 이면도로를 ‘배호길’로 삼았다.
5. ‘조각구름 歌客’
김정호
왕년의 김정호가 통기타 한 대 메고 명동을 누빌 때 사람들은 “신동 작곡가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사진=뉴시스
1952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난 김정호(본명 조용호)의 음악적 재능은 외탁이다. 판소리 대가 박동실이 외할아버지였고 모친은 명창 박숙자, 외삼촌은 아쟁 명인 박종선이었다. 그는 외가가 있는 담양에서 한때를 보냈다. ‘남도(南道) 삼백리’ 판소리의 맥박을 품고 상경, 서울 성동고를 졸업했다. 그의 노래가 재즈·블루스 색채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국악 정서가 배어 나오는 이유다.
김정호는 노래가 좋았다. 노래와 사랑했다. 무명 시절 서울 명동 음악감상실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직접 노래를 불렀다. 출연료를 주지 않았는데도 꾸준히 찾아가 음악에 심취했다. 통기타 한 대 메고 명동을 누빌 때 사람들은 “신동 작곡가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포크 듀엣 ‘사월과 오월’ 3기 멤버로 활약했다. ‘작은 새’ ‘저 별과 달을’ ‘사랑의 진실’ 등 남성 듀오 ‘어니언스’의 여러 명곡을 작사·작곡했다.
1973년 솔로 데뷔 직후 발표한 앨범의 타이틀곡 ‘이름 모를 소녀’가 히트곡 반열에 올라 인기를 얻었다. 소속사가 “밤을 새워 앨범을 찍어내도 모자랄 정도”였다고 행복한 비명을 지를 때였다. 그러다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홍역을 앓았다. 1979년 해금 이후 활동을 재개했으나, 군 복무 말년에 걸린 감기가 폐결핵으로 번져 건강이 악화됐다. 1985년 33세 나이로 작고하기까지 총 4장의 앨범을 냈다. ‘하얀 나비’ ‘나그네’ ‘인생’ ‘날이 갈수록’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그리고 임종 직전 녹음한 ‘님’ 등이 대표곡이다.
유작 앨범 〈Life〉에 수록된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는 김정호가 인천 결핵요양원 입원 당시 송도 해변을 걷는 여인을 보고 지은 노래다. 선율에 담긴 탄식 어린 노랫말과 처연한 음색이 청중에게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국악과 대중가요를 접목시키기 위해 분투했다. ‘하얀 나비’는 멜로디의 경우 재즈풍이 짙었지만, 소리에 내재된 감수성은 전통적 한의 정서 그것이었다. 그를 일러 ‘가장 한국적인 목소리’라고 부르는 이유다. 실질적 유작이었던 ‘님’은 슬픔을 장쾌하게 뽑아내는 한오백년 가락을 떠올리게 한다. “간다 간다 정든 님이 떠나간다 / 간다 간다 나를 두고 정든 님이 떠나간다 / 님의 손목 꼭 붙들고 애원을 해도 / 님의 가슴 부여잡고 울어 / 울어도 뿌리치고 떠나가드라 속절없이….”
평론가들은 김정호의 창법이 블루스와 상여곡(喪輿哭)을 절묘하게 넘나들고 있다고 평한다. 절정부에서 노래 마디를 꺾고 가라앉히는 기교, 심장에서 정수리까지 관통해 올라오는 통성(판소리 창법의 일종으로 배에서 곧바로 뽑아내는 소리)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김정호는 노래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철학을 담았다. 70~80년대 치열했던 이념논쟁에서 비켜나 관념적 현실의 장에 얽매이지 않고, 매 순간 자유를 추구했다. 허울뿐인 정치적 저항정신이 아닌, 사려 깊은 철학적 인생탐구가 그의 노래를 명곡으로 탄생시켰다. “하늘엔 조각구름 / 무정한 세월이여 / 꽃잎이 떨어지니 / 젊음도 곧 가겠지 / 머물 수 없는 시절 / 우리들의 시절….”(‘날이 갈수록’)
吟遊詩人
김정호가 작곡한 50여 편의 곡에는 슬픔·고독·그리움의 정서가 아로새겨졌다. 사진=유튜브 캡처
단명한 김정호는 어린 시절부터 건강이 좋지 못했다. 광활한 정신세계에 탐닉했고 젊었을 때도 야망을 품기보다는 끝없이 번뇌했다. 하룻밤 사이 처절한 번민을 해학적 멜로디로 승화시켰다. 그가 작곡한 50여 편의 곡에는 슬픔·고독·그리움의 정서가 아로새겨졌다. ‘요절한 천재’ 조각구름의 적막한 몸부림이었다.
김정호가 활동했던 70~80년대 가요계는 눈부시게 발전하던 산업화를 반영하듯 세련된 도시적 감수성이 주를 이뤘다. 김정호의 노래는 도회적 성격보다 고전적 가락에 가까웠다. 대신 조용한 서정을 품고 있었다. 청중은 도시의 탄생을 열변하는 신곡보다 김정호가 불러온 전통으로 회귀했다. 덕분에 그는 당대 가수들 중에서 가장 폭넓은 팬층을 보유할 수 있었다. 그즈음 김정호는 음유시인(吟遊詩人)으로 불렸다. 음색은 물론 노랫말 한마디에도 문학적 감수성이 짙었다. 청중은 교감했고 아름답게 들렸다. “버들잎 따다가 연못 위에 띄워 놓고 / 쓸쓸히 바라보는 이름 모를 소녀 / 밤은 깊어가고 산새들은 잠들어 / 아무도 찾지 않는 조그만 연못 속에 / 달빛 젖은 금빛 물결 바람에 이누나….”(‘이름 모를 소녀’)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는 2006년 여름 《서울신문》 칼럼에서 김정호가 세상을 뜨기 1년 전 인터뷰했던 일화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그때까지 밝히지 못했다던 얘기들을 서슴없이 털어놓기도 했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얘기, 탈영해 군 영창에 갇혔던 얘기까지. 띄엄띄엄 노래를 불러 이은 그의 마지막 노래(‘님’)처럼 촬영도 그렇게 되었다. … 이따금씩, 그는 함께 동행했던 그의 후배에게 담배를 빼앗다시피 해 때론 냄새만 맡기도 하고, 직접 불을 붙여 입에 물기도 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의사는 내게 더 이상 노래를 부르면 죽는다고 경고했지, 하나 난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되레 죽을 것 같아.’〉
김정호는 염세적인 가사를 밀어내듯 목숨을 걸고 노래했다. 당시 그의 매니저였던 이상기씨는 과거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곡을 쓸 때면 수유리 그린파크 호텔이나 변두리 여관에 장기투숙했어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곡이 나올 때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매일 피워대던 줄담배로 그의 폐는 빠르게 썩어들어 갔죠.” 이씨는 “그의 노랫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에 대한 애틋함을 갖고 있던 가수”라고 말했다.
김정호는 스타덤에 올라 많은 수입을 거뒀어도 개인적으로 치부(致富)하지 않았다. 주머니 사정 어려운 후배가수들 용돈으로 쥐여줬고, 생계가 절박한 선배가수 집에 쌀을 부쳐줬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던 그는 어느 겨울날 ‘나 죽거든 앞이 탁 트인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눈을 감았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모인 동료가수들이 헌정앨범을 기획했다. 김범룡이 ‘이름 모를 소녀’, 김현식이 ‘님’, 윤시내가 ‘하얀 나비’, 송창식이 ‘잊으리라’, 서수남·하청일이 ‘사랑의 진실’을 불렀다. 부인은 홀로 쌍둥이 딸을 키웠고, 어엿하게 자란 장녀는 작곡가로 가업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