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사탕.
아침 일찍 일어나보니 비가 온다.
‘오늘도 틀렸구나!’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장마철이라 일도 없거니와 계속되는 비로 일을 하지 못한지 한 달이 넘었다. 장마는 잠시 주춤하는가 싶으면 이삼일을 넘기지 못하고 우중충하고 기분 나쁜 먹구름을 몰고 와서 사방에 얄미운 비를 뿌리고 있다.
이제는 멈추겠지. 멈출 거야. 다~ 끝났어. 이제는 일을 나갈 수 있어. 새벽마다 일어나 밖을 보며 나름대로 마음속에서 긍정을 끄집어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절망감이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쌀이 떨어졌어요.”
아내가 한숨을 쉬며 나직이 말했다.
‘흐으으읍······ 후우우우······’
나는 겉으로 내색도 하지 못하고 아내 몰래 숨을 깊게 들이마신 다음 내쉬었다. 가장인 내가 절망감이 섞인 한숨소리를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묽게 타서 끓인 원두커피를 마시며 거실의 창을 통해 밖을 보며 비오는 세상을 쳐다보았다. 울적하고 가슴이 답답하다.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는데······, 비참하다!’
나는 잠시 지난날을 회상했다.
나는 글을 쓰기 전에는 건설업에 종사했었다.
IMF가 터지기 전에 나는 꽤 괜찮은 수입을 올렸었다. 나는 건설현장에서 철근을 시공하는 철근기능공이었다. 남들보다 좀 더 배우고 실력도 있었기에 건설계통에서는 인정도 받고 수입도 짭짤한 편이었다. 적어도 다른 기능공들보다 노임을 더 받았으니까.
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사회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님의 품에서 자랐고, 삼형제 중에 장남이었다. 가난함에 제대로 공부도 할 수 없었기에 서울로 올라가 막노동 중에서 상노동인 콘크리트를 비벼 타설하는 일을 했었다. 지금이야 모든 것이 기계화가 되어 믹서(레미콘)를 단 차량이 실어다 주지만 예전에는 사람이 삽으로 비벼서 콘크리트를 타설하던 시절이었다. 질통이라 말해야 옳은지 모르겠지만, 나는 모래 통, 자갈 통을 지는 등짐 일부터 시작했다. 등짐을 하루 종일 지고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야간고등학교마저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중퇴했다. 내가 포기한 것이 아니라 노임을 받지 못해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십여 년 전에 팔십 만원은 큰돈이었다. 그때당시 기능공의 하루 노임이 만 오천 원밖에 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 돈을 지금까지도 받지 못했다. 내 나이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나는 십이 년의 세월을 건설업에 종사했다. 열심히 공부도 하고 몸으로 뛰며 기술을 배우고 익혀 나만의 노하우를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은 나만의 작은 긍지이기도 했다.
나는 기능공들을 지휘하는 소위 반장이었다. 백분이나 색연필을 가지고 다니면서 표식을 그려주어 철근을 시공할 수 있도록 지시하는 기능공들의 우두머리였었다. IMF가 일어나기 전에 나의 하루 노임이 십오 만원을 넘었으니까.
IMF가 일고 나는 고향에 일이 바닥나자, 인천의 지하철현장으로 갔고, 그곳에서도 반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노임은 점점 밑으로 떨어졌다. 이유는 인력은 남아도는데 일거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괴감이라고 해야 되나? 나는 내 직업에 대해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다. 경기불황을 가장 먼저 피부로 느끼는 아니, 불황의 직격탄을 맞는 곳이 바로 건설계통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나는 빈민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귀향해서 한동안 방구들을 차고 앉아 화투장을 떼어 운수를 보는 일로 하루하루를 소일했다. 아이가 커가는 것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다른 직업을 찾아야겠다고······.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어릴 적에 늘 꿈꾸어왔던 일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글과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그러나 나는 알지 못했다. 시련과 고통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비참해질 줄은 생각지 못했다. 십년 가까이 글과 그림을 그리며 가지고 있던 가산은 모두 탕진했고 긴 시간의 공백 덕에 건설계통에서의 나의 존재는 잊혀진지 오래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생활고에 쪼들려 서울의 아는 지기를 찾아가 한동안 건설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나보다 이십 년은 더 산 사람이 나를 일을 시키지 못했다. 이유는 이외로 간단했다. 내가 그 사람을 가르친 스승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많지만 내가 반장으로 일할 때 나는 그 사람을 가르쳤었다. 그런 이유로 그 사람은 반장이면서 나를 일을 시키지 못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을 어쩌지 못하고 씁쓸히 귀향해야만 했다.
나는 지금 인력회사에 다닌다. 하루 일당(노임) 육만 원, 그나마 소개료를 떼고 나면 오만 사천 원. 이것이 나의 하루 노임이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멋쩍게 웃는다. 우습기도하고 슬프기도 해서 말이다.
막내딸이 며칠 전부터 막대사탕을 사 달라 졸랐다. 아이는 딸기 맛이 나는 막대사탕을 유난히 좋아한다.
‘쮸쮸봉’이라는 작은 막대사탕이다. 가격은 이백 원이다.
나는 며칠째 이백 원짜리 사탕하나를 아이의 입에 물려주지 못했다. 이러고도 내가 가장의 자격이 있는 것일까?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해도 도무지 움츠려든 어깨가 펴지질 않는다.
밤낮없이 일하고 일했건만, 나는 아이에게 막대사탕하나를 물려주지 못하는 무능한 가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낮에는 노동판에서 막노동을 하고 밤에는 피곤함에 지쳐 벌게진 눈을 비비며 열심히 써왔건만 아무런 소득도 아무런 희망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오늘 점심은 무엇으로 먹지?
비가 참~ 많이도 온다. 이 비가 그치면 밝은 태양이 떠오를까?
꼬부라진 담배꽁초를 곧게 펴 불을 붙여 깊게 들이마신 다음 긴 한숨과 함께 밖으로 내보내본다.
검은 신사.
2006년 6월
첫댓글 일독하였습니다. 이제 곧 올해의 장마가 쫓아올텐데, 그럼 또 막대사탕을 못 살텐데.... 건필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올해는 만만의 준비를 해야겠지요. ^^*
진솔한 글 잘 읽고 갑니다. 고생 끝에 낙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황원갑 선생님의 블로그에서 선생님의 글을 읽고 느낀 것이 있습니다. 영혼이 맑고 순수할 것이라는... 그것은 문학을 하는 데나 인생살이에 큰 장점이 될 것 같습니다. 하긴 그러다 보면, 손해도 많이 보고 남에게 이용도 많이 당하겠지만... 공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똑똑하여(영악하여) 매일 매일 남는 사람은 크게 보면 밑지는 것이요, 사람이 어리석어 (순수하여) 매일 매일 손해 보는 사람은 크게 보면 남는 것이다라고. 열심히 노력하여 꼭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를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고견의 말씀 감사합니다. 언제나 희망을 꿈꾸지만 가끔은 절망을 체험하곤 한답니다. 가끔 아플 때에도 지난 날 쓰라렸던 기억을 더듬으며 버팀목으로 삼곤하지요. 아픔은 어쩌면 가장 행복하게 사는 인생의 전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처와 아픔을 겪지 못한 인생이야말로 불행한 인생이 아닐까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내가 살아온 인생을 소설로 쓰면 몇 권은 나온다고요. 저는 대답하지요. 진심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고 계신다고 말입니다. 누구나 쉽게 겪을 수없는 고난을 경험했다면 그 자체가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따뜻하고 배려 깊으신 평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__)
건필하세요..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전 멋있는 글을 쓰고 싶지만 마음이 다른곳에 가 있으니 필을 들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