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과 우리나라 기계 공업의 발전사 08
고속 도로의 건설
우리 나라는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라 부르는 도로망을 건설하였으나, 이는
주로 식민지 통치를 위한 것이었고, 화물과 승객의 수송은 주로 철도에
의존하여 왔다. 이런 수송 체계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고,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 중에도 철도 건설이 우선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12월 서독을 방문하였을 때, 1930 년대에 히틀러가
건설한 서독의 고속 도로 Autobahn 을 보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도
본에서 쾰른까지 뻗은 아우토반을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고속 도로의
효용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 중에는
우리 나라의 모든 여건이 불비하여, 고속 도로의 건설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64년5월에 울산 정유 공장이 준공되면서, 도로 포장재료인
아스팔트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동양, 쌍용, 현대 시멘트 공장 등이
증설 또는 신설되었으므로, 시멘트의 공급도 원활할 수 있게 되었다.
때 마침 IBRD 조사단은 한국의 수송 문제를 다루면서, 철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육로 수송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특히, 세계
은행의 조사 보고서에서는 국도의 포장 뿐 아니라 고속 도로의 필요성도
추천하고 있었으므로, 박정희 대통령은 고속 도로의 건설로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하여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정부는 IBRD 교통 조사단으로부터 교통 조사 용역 보고서를 접수한 뒤에
1966년8월에 "장래 교통망 구성을 위한 조사 연구 위원회" 를 구성하고,
동년 12월에 "장래 교통망 구성 방안" 이라는 연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는 1980 년도의 수송 구조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였는데, 기간
고속 도로의 건설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다음과 같이 우리나라의 국토를
종횡으로 관통하여 고속 도로를 건설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훌륭한
조사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1) 국토 종횡간 고속 도로 ( 1,740 km )
서울-부산간 ( 440 km )
서울-목포간 ( 380 km )
서울-묵호간 ( 300 km )
서울-장항간 ( 250 km )
서울-인천간 ( 20 km )
광주-마산, 부산간 ( 240 km )
서울 우회선 ( 80 km )
부산 우회선 ( 30 km )
(2) 산업 간선 고속 도로 ( 210 km)
부산-울산간 ( 40 km )
강릉-삼척간 ( 45 km )
전주-군산-비인간 ( 90 km )
순천-여수간 ( 35 km )
경부 고속 도로의 제1단계 구간인 서울-오산간 개통식
경부 고속 도로의 건설
"장래 교통망 구성 방안" 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권장하였던 고속 도로의
건설은 제2차 경제 개발 계획 기간부터 착수되었다. 그 중에서 서울-부산간,
서울-묵호간, 서울-인천간 및 광주-부산간은 조기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울-목포간과 서울-장항간은 여러 해 지난 뒤에야 서해안 고속 도로로써
건설되었고, 서울 우회선 ( 외곽 순환선 ) 과 부산 우회선은 건설이
늦어지는 바람에 도시 주변에 아파트 촌들이 들어섰고, 그 뒤에 이 길들을
건설하려고 보니까 아파트 촌들을 피하여 가느라고 무리하게 터널을 뚫게
되는 등 많은 국고의 낭비를 초래하였고, 도시 주변의 발달의 시기가
전반적으로 늦어지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가장 먼저 착공된 것이 경인 고속 도로인데, 경인 고속 도로는 비록 30 km
도 채 안 되는 짧은 도로이지만, 1900년7월8일에 일본 자본에 의한 경인선
철도의 완공 이후 우리의 의지로 건설한 첫 현대적 도로라는데 의의가 있다.
경인 고속 도로 착공은 1967년5월에 삼안산업 ( 三安産業 ) 에 의하여 토목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공사 진척이 부진하였다. 이에, 1968년2월28일 청와대
지시 각서 제4호에 의거하여 규모를 당초의 6 차선에서 4 차선으로
축소하고, 민자를 유치하여 공기를 1 년 앞당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현대
건설, 대림 산업, 삼부 토건의 3사가 공동 출자한 경인 고속 도로 (주) 가
1280 백만원을 출자하여, 그 해 12월21일 영등포구 양평동을 기점으로 하고
인천시 도화동을 종점으로 하는 23.5 km 를 우선 개통시켰다. 도화동으로부터
인천 항까지의 나머지 6 km 는 연약 지반이어서, 자연 침하 ( 自然 沈下 )
를 기다려 한국 도로공사가 완성하여 1969년7월21일 전장 29.5 km 의 경인
고속 도로가 4 차선 도로로 개통되었다.
경부 고속 도로 건설 계획은 1967년4월29일에 발표한 박정희 대통령의 선거
공약과 그 해 5월2일 가진 기자 회견에서 그 윤곽이 드러났다. 경부 고속
도로는 그 권역에서 전체 인구의 63 %, GNP 의 66 %, 공업 생산액의 81 % 를
차지하며, 연간 총 수출입 화물의 약 40 % 를 담당하는 부산과 20 % 를
담당하는 인천을 연결하여 수송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11월 초에 건설부, 재무부, 서울 시, 경제 기획원,
육군 공병감실 등 유관 기관과 현대 건설에 경부 고속 도로 건설비 산출과
건설 계획 안을 제출토록 하였으며, 11월23일에는 청와대 파견단을 편성하여
각 안을 비교 검토하였다. 1967년12월13일에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 기간 도로 건설 추진 위원회" 를 만들어 청와대 파견단을 흡수하고,
그 산하에 계획 조사 업무를 전담할 건설 계획 조사단을 편성하였다.
경부 고속 도로 건설에 있어 특기할 사항은 현대 건설 특히 정주영 회장의
역할이었다. 현대 건설은 경부 고속 도로 제1 공구인 서울-수원 간을
자원하여 착공하였으며, 전 구간의 건설비를 산출하는 등 박정희 대통령의
고속 도로 건설에 솔선하여 협력하였다. 아마도 이런 인연이 바탕이 되어
현대 자동차의 설립이 가능하였던 것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하여 본다.
1968년2월1일에 현대 건설이 담당한 제1공구 ( 서울-수원 ) 가
착공되었으며, 동년 12월30일에는 서울-오산 구간이 개통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오산 구간 개통식에 참석하여 고속 도로 위에 소주를
뿌렸다. 소주를 뿌리는 것은 보통은 제사를 지낼 때나 하는 제식의 일부인데,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 도로 위에 소주를 뿌리면서 기원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그렇게 거센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경부 고속 도로가
앞으로 완전 개통되려면 어떤 희생이 따를 것을 미리 예상하고, 그들의 희생에
대한 경건한 제식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실제로, 경부 고속 도로의 가장 난공사
구역이었던 대전-김천 구간에서는 많은 근로자와 기술자들의 희생이 따랐다.
모두 77 명의 산업 전사가 희생되었는데, 지금도 금강 휴게소에는 그들을 위한
위령비가 서 있어, 대한민국의 대동맥을 건설하기 위해 희생한 그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경부 고속 도로 건설에는 현대 건설 이외에도 국내 유수의 건설 업체가 모두
참여하였으며, 육군 공병 건설단 3개 대대도 참여한 거국적 건설 공사였다.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7월7일 소백산맥을 관통하는 난공사 구간인 대전-대구
구간이 개통됨으로써, 총 연장 428 km 의 전 구간이 준공 개통되었다. 경부
고속 도로의 건설은 2년 5개월 여의 단기간에 완공됨으로써, 졸속과 하자가
많이 발생하였으나, 1970 년대의 경제 발전을 이루는 데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한국의 수송 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킨 근대화의 이정표가
되었다.
경부 고속 도로의 노폭은 처음에 왕복 4 차선으로 건설되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접도 구역을 모두 수용하여 왕복 10 차선이 가능한
노폭으로 하였다. 지금은 8 차선으로 확장된 구간이 많으며 ( 100.6 km )
노견도 교통 혼잡 시간대에는 통행을 허용함으로써 일시적으로 10 차선이
되고 있어, 경부 고속 도로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고속 도로에 대한 꿈이
깃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기타 고속 도로의 건설
호남 고속 도로는 1970년4월15일에 대전을 기점으로 하여 착공되었다. 호남
고속도로가 일제에 의한 철도 부설과 같은 길을 걸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계획 안에서 서울-목포를 생각하였을 때에는
공주 경유를 검토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1970 년대의 호남 지방의 경제
발달은 철도와 밀착되고 있었다. 결국 고속 도로는 전주까지 79.5 km 를 동년
12월30일에 개통하고, 나머지 구간은 광주를 거쳐 순천으로 이어지는 길을
택함으로써, 기존의 철도로 부터 조금 비껴 가기는 하였지만 광주의 발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19 세기 말의 개항 때부터 호남의 거읍 ( 巨邑 )
이었던 목포는 고속 도로가 비껴 감으로써 호남 지역의 경제가 광주로
집중되는 것을 보고만 있게 되었으니, 고속 도로가 도시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일깨워 주는 역사적 증거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영동 고속 도로는 경부 고속 도로의 신갈을 기점으로 하여 1971년3월24일에
착공되었다. 태백산맥을 넘는 이 구간은 난공사가 계속되어, 1971년11월30일에
우선 새말까지의 104 km 가 개통되었고, 나머지 구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영동 고속 도로의 개통으로 철도가 없던 강원도의 오지가 크게
개발되었으니, 고소 도로의 건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다. 고속 도로의 건설은 계속 추진되어, 정권이 바뀌면서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으나, 고속 도로가 지나지 않는 지역은 경제적 오지로 남아 낙후됨을 피할
수 없었다.
한국의 기계 공업 발전사를 기술하면서 고속 도로 건설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나, 현대의 공업 발전에는 수송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므로, 특히 고속 도로 건설에 따른 자동차 수송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충분하지 않다. 또한, 고속 도로를 건설함으로써 우리
나라는 고속 도로를 이용한 자동차 교통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고속 도로의 건설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경부 고속
도로를 건설할 당시에 야당은 건설 현장에 드러눕는 시위까지 하면서 저항하였다.
우선 재원이 문제였다. 정부는 유류세를 대폭 인상함으로써 재원을 마련하였는데,
여기에는 당시 야당의 집요한 반대가 있었다.
아래의 표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 중의 기간 고속 도로의 건설
개황을 보여준다.
기간 고속 도로 건설 개황
고속 도로 명 |
구간 |
착공 일자 |
준공 일자 |
경인고속도로 | 서울-인천 | 1967.3.24 | 1968.12.21 |
경부고속도로 | 서울-부산 | 1968.2.1 | 1970.7.7 |
| 서울-오산 | 1968.2.1 | 1968.12.30 |
| 오산-대전 | 1968.4.3 | 1969.12.10 |
| 대전-대구 | 1969.1.14 | 1970.7.7 |
| 대구-부산 | 1968.9.11 | 1969.12.29 |
호남고속도로 | 대전-전주 | 1970.4.15 | 1970.12.30 |
| 전주-순천 | 1972.1.10 | 1973.11.14 |
남해고속도로 | 순천-부산 | 1972.1.10 | 1973.11.14 |
영동고속도로 | 신갈-새말 | 1971.3.24 | 1971.11.30 |
고속 도로의 건설은 공로 수송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수송 기계 특히 자동차의
발전을 가져왔다. 특히 고속 버스에 의한 여객 수송은 큰 붐을 이루었는데,
정부는 폭주하는 고속 버스 여객을 소화시키기 위해 외국으로부터의 차관도
허용하면서 고속 버스군을 형성하였다. 아래의 표에서는 당시의 고속 도로
버스 업체 면허 상황을 보여준다.
고속 도로 버스 업체 면허 상황 ( 1970년12월31일 현재 )
노선 명 |
업체 명 |
운행 차종 |
보유 대수 |
경인 고속 | 한진관광 | ISUZU | 20 |
| 삼화운수 | HINO | 20 |
| 풍전고속 | NISSAN | 10 |
경부 고속 | 한진관광 | FUSO | 70 |
| 동양고속 | FUSO | 70 |
| 천일여객 | BENZ | 40 |
| 광주여객 | BENZ | 40 |
| 한일여객 | BENZ | 40 |
| 한남여객 | BENZ | 40 |
| 코리아 | | |
| 그레이하운드 | GMC | 40 |
| 유신상운 | FUSO | 30 |
| 속리산관광 | FUSO | 15 |
호남 고속 | 한진관광 | 미정 | 40 |
| 동양고속 | 미정 | 40 |
| 광주여객 | 미정 | 40 |
| 천일여객 | 미정 | 40 |
| 코리아 | | |
| 그레이하운드 | 미정 | 40 |
| 중앙고속 | 미정 | 30 |
| 삼진고속 | 미정 | 20 |
| 호남고속 | 미정 | 20 |
|